원문: Victoria Ann Lewis, “The Dramaturgy of Disability,” Michigan Quarterly Review Volume XXXVII, Issue 3: Disability, Art, and Culture (Part Two), Summer 1998.
낙인 찍힌 오이디푸스와 리처드 3세에서부터 세상에 무구함과 선함을 보여주는 특별한 아이 타이니 팀Tiny Tim에 이르기까지, 구태의 교훈적이고 감상적인 재현 모델이 빚어낸 장애 캐릭터들이 대대로 무대를 채워 왔다. 이런 묘사들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새 세대의 장애 극작가들이 그에 얼마나 저항하는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 같은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애쓰고 있는 이들 말이다. 이런 새로운 목소리의 등장은 1970년대 후반의 장애 민권 운동이 가져온 문화적 의식에 있어서의 급진적인 변화를 빼 놓고는 논할 수 없다. 스물다섯 해가 지난 지금, 오합지졸 코미디 모임들rag-tag comedy troupes, 스탠드업 (정확히는 싯다운) 코미디들, 선전선동 콜렉티브들, 그리고 미국 장애인의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킨 정치 활동가들, 입법자들의 지지자이기도 할 수밖에 없었던 소란스러운 퍼포먼스 아티스트들은 새 세대의 예술가들로 진화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훌륭하고 빼어난” 이들에 견줄 만한 자격과 이력을 갖고 있는 그들은 용감하게 장애 서사들을 주제로 삼고, 기교와 상상력을 갖추고서 정체성이라는 문제를 고쳐 쓰고 있다. 이 글은 이런 새로운 연극들의 주요한 드라마투르기적 전략들 몇 가지와 대중적 차원, 전문가적 차원의 수용에 있어서의 문제를,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가능한 방향들을 확인할 것이다.
이 새로운 목소리들은 줄곧, 지배적인 장애 서사, 연극에 있어서 《작은 신의 아이들Children of a Lesser God》 같은 몇몇 독특한 예외를 제하고는 과거에 머물러 있는 서사와 씨름해야 한다. 비장애 연극계는 장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으며 계몽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극문학에서 장애의 묘사는 과잉재현된다. 그 결과 비장애 연극인들은 종종 이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 장애 예술가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느낀다 ― 지하철을 타는 시각장애인을 돕겠답시고 제멋대로 지팡이를 잡아끄는 뜻은 좋은 행인의 드라마투르기 버전이다. 로즈마리 갤런드 톰슨은 비장애 세계가 “일탈적인defiant” 신체를 정의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것을 이렇게 서술한다.
지배적인 기대를 벗어나는 신체가 해석이나 처벌을 당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문화적 이분법은 이 몸은 우월하고 저 몸은 열등하다, 이 몸은 아름답거나 완벽하고 저 몸은 그로테스크하거나 추하다는 식의 가치평가를 내린다.[1]Rosemarie Garland Thomson, Extraordinary Bodies: Figuring Physical Disability in American Culture and Litera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8.
톰슨이 말하는 “문화적 이분법”이 지금까지도 무대에 성행하고 있으며 물러나지 않으며 버티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낡은 도덕적, 의학적 장애 모델은 여전히 연극적 묘사를 지배하고 있다. 비정상성에 대한 모종의 기준에 맞서 스스로를 “정상”으로 정의하려는 깊은 인간적 욕구를 채워주어서만이 아니라 연극 실천에 있어서는 드라마투르기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으로 구성된 장애 하에서 신체적 차이는 대개 악, 죄에 대한 처벌을 함의하거나 역으로 지복至福, 신의 축복을 가리킨다. 갈고리나 의족, 아니면 안대 같은 걸로 선악 구도를 나타내는 것이 얼마나 간편한지를 생각해 보라. 극작 입문 수업은 실제로 신출내기 작가들에게 악역은 다리를 절거나 팔다리 하나쯤 잘려나간 것으로 하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뒤틀린 몸, 뒤틀린 정신” 방식의 인물 구성법은 우리에게 선사한 것이 리처드 3세,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에 나오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 머천트-아이보리에서 제작한 미니시리즈 《왕관의 보석The Jewel in the Crown》에 나오는 로널드 머릭 같은 불후의 악역들이다. 타이니 팀이나 포레스트 검프 같은 성인聖人도 있다.
역사적으로 도덕적 모델의 계승자인 의학적 모델은 장애를 병illness으로 간주한다. 장애인은 자애롭게 사회에서 제거되어야, 즉 시설에 들어가든 치유되든 하거나, 적어도 치유된 것으로 “패싱되어야” 한다. 의학적 모델은 사회적 선입견과 차별의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관습적인 극적 구조를 만들 때, 오롯한 의지력으로 성취되는 신체적 변화에 방점을 찍는 의학적 모델의 매혹적인 전개 방향들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대중문화에서 이제는 기형이나 괴물성에 관한 이야기들의 수를 넘어선 장애 극복 이야기의 길을 닦은 것은 1958년에 쓰여진, 마비를 이겨내기 위한 프랭클린 루브벨트의 노력을 바탕으로 한 도어 셰리Dore Schary의 극 《캄포벨로의 일출Sunrise at Campobello》이다. 폴 K. 롱모어Paul K. Longmore가 지적하는 대로, 의학적 모델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신화 중 하나 ― 자기 힘으로 해내는 강인한 개인이라는 신화 ― 를 한층 더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2]Paul K. Longmore, “Screening Stereotypes: Images of Disabled People,” in Social Policy 16 (Summer 1985), 31-38.
브라이언 클라크Brian Clark의 1978년 연극 《내 인생은 나의 것Whose Life is It Anyway?》은 장애 묘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 작품은 움트고 있던 장애 운동에 파동을 일으켰고 투쟁적인 민권 활동가들이 전국 각지의 영화관에서 시위를 벌였다. 자동차 사고로 사지가 마비된 채 병원에서 6개월을 보낸 주인공 켄 해리슨은 자살을 원한다. 재판에서는 이렇게 단언한다. “저는 이미 죽었습니다 … 그 어떤 의미에서도 이런 상태를 삶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3]Brian Clark, Whose Life Is It Anyway? (New York: Dodd, Mead & Company, 1978), 111. 장애를 죽음과, 성애나 유의미한 일을 전부 빼앗겨 버린 삶과 동치하는 이 등식은 현대 활동가, 사상가들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반대다. 하지만 《내 인생은 나의 것》은 이후 이어진 장애 드라마투르기의 주요 주제 중 하나를 예고한다. 바로 장애인의 자율성을 앗아가는 의학적 모델의 실패와 위험 말이다. 거만한 의사 에머슨의 죄목은 해리슨의 선택권을 빼앗는 “자의적인 권력”과 “잔인함”이다. 새 세대 장애 작가들은 (어떤 경우든 연극 말미에 안전하게 가미되는) 이 같은 의학적 모델에 대한 기소장에 장애의 비극을 개인이 아니라 건축적, 태도적 장벽으로 인해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에 두는 장애의 구성을 덧붙일 것이다. 자기의식적인 주장이나 공동체 형성을 비롯한 이러한 장애의 사회적 구성은 이 글에서 다룰 작품들의 자양분이 되고 새로운 드라마투르기 전략들을 창출한다. 그렇게 해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은 자유주의적인 광채를 잃고, 스스로를 제거함으로써 사회의 집단적인 죄책감을 덜어줄 품위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리한 찬양이라는 정체를 드러낸다.[4]오늘날 장애 극작에서 가장 널리 다루어지는 주제이자 항상 부정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지는 주제가 바로 “죽을 권리”이다.
사회적 장애 모델이라는 새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편견과 차별에 직접 맞서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재현에 성공한 선례가 몇 있다. 버나드 포머런스Bernard Pomerance의 1979년작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은 사이드쇼 공연을 했던 프릭 조셉 메릭의 이야기를 다시 펼치면서 신체적으로 다른 이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착취의 폐단을 묘사했다.[5]이 연극은 영화 《마스크Mask》[(1985)]와 마찬가지로 장애라는 문제를 장애인 외부에 위치시킨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지만 폴 K. 롱모어는 두 작품의 … (계속) 1992년부터 1994년까지 마크테이프포럼Mark Taper Forum의 다른 목소리들 OTHER VOICES 프로젝트에서 협업 개발한 《P.H.*릭스: 장애인들의 숨겨진 역사P.H.*reaks: the Hidden History of Disabled Persons》는[6]Doris Baizley and Victoria Lewis, adpt., “P.H.*reaks: the Hidden History of People with Disabilities,” in Kenny Fries, ed., Staring Back (New York: Dutton, 1997). 제목에서 … (계속)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1977년의 보건교육복지부 샌프란시스코 사무실 점거 이후까지 이어지는 민권 운동 역사에 대한 설명을 담음으로써 저 새 패러다임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런 식의 스토리텔링이 갖는 문제는 모든 “시민 극단people’s theater”에 적용된다. 어떻게 집단적 주인공을 창조할 것인가? 브레히트의 말로 하자면, 어떻게 기름에 관한 다섯 막까지 연극을 만들 것인가? 《P.H. *릭스》는 슬라이드, 텔레비전 보도, 구술사 같은 다큐멘터리 자료를 풍자적 촌극이나 자연주의적 애정신과 함께 엮었다. 집단의 이야기에는 개인의 이야기로, 정치적 이야기에는 사적인 이야기로 균형을 맞추었다.
또 한 가지 새로 나타난 전략은 캐릭터든 플롯이든, 장애, 젠더, 인종의 병렬적 구성이다. 뉴욕주립대학교 티시예술대학에서 극작을 전공한 젊은 극작가 존 벨루소John Belluso는 의식적으로 “이중, 삼중 정체성”을 활용한다. 젠더, 인종, 장애를 섞어 관객이 이야기를 ― 비극을 이겨내는 ― 지배적인 장애 서사로 축소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7]Interview, October 6, 1997. 벨루소의 작품 《그레티 굿 타임Gretty Good Time》에서 소아마비가 있는 그레티는 1950년대의 요양원에 살면서 자살을 꾀한다. 그러다 텔레비전 방송 《이것은 당신의 삶이다This is Your Life》에서 히로시마의 젊은 여성 히데코를 보게 된다. 히데코는 “망할 몸”을 벗어나는 그레티의 여정을 함께 할 상상의 친구가 된다.
흥미롭게도 그 히로시마 여성들은 시카고에서 활동한 배우이자 극작가인 수잔 누스바움Susan Nussbaum을 통해 희곡으로 남겨졌다. 그녀의 작품 《더없이 심술궂은No One as Nasty》은 주인공인 사지마비 여성과 미국 최초 원자폭탄의 민간인 피해자를 병치한다.
… 그리고 히로시마 여자들은 화상을 입고 추형disfigured이 되었다, 그런 말이 있다, “추형”. 어쩌다 그렇게 되었느냐고? 왜냐면 ― 히로시마에 있었기 때문이다. 불길을 피하기에는 너무 가까이, 완전히 타버리기에는 너무 멀리. 내가 5초만 더 빨랐거나 늦었다면 그 차에 치이지 않았을 테고 나는 다른 시간을 살았을 테지, 그것은 사고였다, 내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그 중간쯤 되는지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 없다, 우리는 질서 잡힌 세상에 사는 게 아니다.[8]Susan Nussbaum, No One As Nasty, unpublished, 1996.
두 작가 모두에게 히로시마의 여성들에게서 도덕적, 의학적으로 구성되는 장애에 맞설 힘 있는 인물상을 찾았다. 원자폭탄이라는 외적 사건의 공포 앞에서 장애에 대한 책임을 장애인 개인에게 묶어두려는 모든 해석은 가당찮은 것이 된다.
다른 장애 작가들도 인종이 신체적 차이와 결합되는 비슷한 풍경을 만들어 냈다. 장애를 탈신화화하려는 시도였다. 마이크 어빈Mike Ervin의 희극 《볼링의 역사The History of Bowling》에 나오는 불만투성이 장애 대학생 척은 척 스스로가 장애를 초래한 것이라고 강변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거리 설교사에와 대거리를 한다. 척은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하죠.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세요, 그러지 않으면 걷게 해주지 않으십니다.” 지가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그래서 이렇게 받아쳤죠, “예수님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세요, 그러지 않으면 백인이 되게 해주지 않으실 테니!”
수잔 누스바움의 《더없이 심술궂은》의 중심 갈등은 백인 장애 여성 재닛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활동지원사 로이스 사이에서 벌어진다. 로이스는 재닛을 씻기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로이스: 적어도 당신은 유명한 스타가 갑자기 함께 운동하게 될 수도 있는 소수자잖아요. 크리스토퍼 리브가 말에서 떨어져 흑인이 될 일은 없죠.
재닛: 실낱 같은 희망이죠. 저는 크리스가 분명 자신이 선택할 수 있길 바랄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혐오 당할지 연민 받을지 말이에요.
로이스: 당신은 뭘 택하고 싶은데요?
재닛: 혐오요.
로이스: 다 안다는 듯이 말하네요.
재닛: 네, 제가 알기론 그래요.
두 극작가 모두 장애와 인종을 열결 지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이 장애 경험을 생각할 때의 근본적 전제에, 인종 문제를 생각할 때 하듯이, 질문을 던지게 한다.
가장 흔히 쓰이는 구조적 개혁 전략 중 하나는 두 명 이상의 장애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유일한 장애 인물은 필연적으로 은유적 지위를 갖게 되며 대개 그 은유는 낡은 패러다임을 강화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상 당한 전사”는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Philoctetes》에서부터 《7월 4일생Born on the Fourth of July》의 장애 참전군인 론 코빅에 이르기까지 극에서 부상 당한 혹은 “아픈” 사회를 보여주는 기능을 할 수 있다. 《7월 4일생》에서 코빅의 무력함은 “여성적인” 동방을 상대로 부당한 전쟁을 벌인 국가의 무력함이 된다. 장애인이 성인, 사회에 있는 모든 선의 상징이 되는 반대의 가치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최근의 몇몇 장애 작품도 이런 덫에 빠지는데, 특히 “이봐, 나도 인간이야!”라는 사실을 찬미하는 데 초점을 맞춘 서사들이 그렇다. 그런 경우 장애 작가는 그 의도야 어떻든 낡은 패러다임은 굳건히 남겨두고 그저 한 개인을 드높이는 결과에 이른다. 장애 인물의 개인적 정체성은 재활되지만 시민사회나 집단의 책임보다 개인의 책임을 중시하는 보다 큰 틀의 문화적 신화에 복무하게 되는 것이다.
고정관념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많은 신예 장애 극작가가 복수의 장애 캐릭터가 등장하는 연극적 세계를 만든다. 1970년대에 캐나다의 장애 작가 데이비드 프리먼David Freeman이 쓴 강렬한 작품 《크립스Creeps》는[9]David Freeman, Creeps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72). 그런 접근법의 장점을 보여준다. 뇌성 마비 남성들을 위한 보호작업장을 배경으로 하는 《크립스》에는 다양한 성격 유형의 장애 캐릭터 일곱 명이 등장한다. 이런 다중성은 무대에서 묘사되는 장애 인격들에 표준적인 용기 혹은 사악함의 가면을 씌우기 어렵게 만든다. 이와 비슷하게 퍼포먼스 작가 셰릴 마리 웨이드Cheryl Marie Wade의 첫 장편이자 다인극인 《절름발이 달Gimp Moon》에는 장애인 주연 셋과 조연 여럿이 등장한다.
의식적인 장애 드라마가 시작된 이래로, 신체적으로 다른 몸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념을 공격하는 데 가장 흔히 쓰인 전략은 유머다. 장애인 당사자이기도 한 미하일 바흐친은 희극의 의미를 되살린rebailitaion of comedy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 문화Rabelais and His World》레서 웃음과 자유의 본질적 관계를 상기시킨다. 그가 말하기로 웃음은 우리를 “외부에서의 검열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거대한 내적 검열에서, 수천 년 동안 인간 속에서 자라온 두려움, 성스러운 것, 금제, 과거, 힘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켜줄 “언제든 쓸 수 있는free 무기”다.[10]Mikhail Bakhtin, Rabelais and his World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4), 89. 웃음이라는 이 “언제든 쓸 수 있는 무기”를 휘두르는 장애 예술가는 상업적 예술가부터 급진적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그 적은 하나다. 바로 “내적, 외적 검열”이다. 지난 1970년대에 누스바움은 드라마스쿨 학생이었고 한편으로는 거리 희극단 고속이동Rapid Transit에서 연기를 했다. 쟁점 중심의 “치고 빠지는 퍼포먼스”에 특화된 극단이었다. 척수손상으로 사지가 마비된 후 누스바움은 “영감을 주는 극”에서 장애 배역으로 선발되었고, 이는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게 했다.
그 덕에 질질 짜는 건 틀린 방향이고 사람들 면전에 우리 차이를 디밀고 유머를 쓰는 게 옳은 방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제 회복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장애 공동체의 유머 말이에요.[11]Interview, October 14, 1997.
누스바움은 시카고의 유명한 즉흥 희극 모임 두번째도시Second City로부터 장애에 관한 짧은 풍자극 제작에 대한 지원을 약속 받았다. 그 결과물인, 장애, 비장애 배우들을 함께 활용한 코미디 풍자극 《뒤돌아 보기Staring Back》는 누스바움의 기대를 넘어섰다. “반응에 깜짝 놀랐어요. 매일 밤 사람들이 기립해 환호했죠.” 《뒤돌아 보기》가 성공한 후 누스바움은 동료 장애 작가 마이크 어빈과 함께 역시 코미디 풍자극인 《당차고 당돌한 쇼The Plucky Spunky Show》를 썼고 다음으로는 일인극 《미슈가니스모Mishuganismo》를 썼다.
누스바움이 촌극 작업을 전개하던 즈음, 몇몇 희극 작가가 로스엔젤레스의 마크테이퍼포럼에서 열린 다른목소리들 워크숍에 참여했다. 첫째로, 빈정거리는 듯하면서도 음악적인 목소리로 다른목소리들의 텔레비전 특집 《그들에게 난 인어라고 전해Tell Them I’m aMermaid》와 《누가 그런 데다 주차를 해?Who Parks in Those Spaces?》의 성공에 큰 역할을 한 낸시 베커 케네디Nancy Becker Kennedy. 다음으로 다른목소리들의 협업작인 《P.H.*릭스: 장애인들의 숨겨진 역사》에 코믹 촌극을 보탠 유머 작가 폴 라이언Paul Ryan, 빌 트레차크Bill Trzeciak, 빈센트 핀토Vincent Pinto.
흥미롭게도 라이언은 《P.H.*릭스: 장애인들의 숨겨진 역사》에서, 누스바움은 《당차고 당돌한 쇼》에서, 동일한 희극적 상황을 전제한 장면을 만든다. 한 사지마비 장애인이 먹을 것을 사서는 혼자서 먹어 보려 애쓰고 이 “용감한” 행동에 언론이 열광하는 것이다. 라이언의 경우에는 소시지 한 개, 누스바움의 경우에는 요거트 한 통이지만 둘 다 같은 ― 스스로의 “정상성normalcy”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장애자”에 세심하다며 제 등을 토닥거리는 자화자찬 사회가 스스로 챙겨 먹기 같은 일상적인 활동을 찬양할 수 있을 정도로 장애인이 무능력하게 여겨진다는 ― 지점을 공격한다.
휴 갤러거Hugh Gallagher의 책 『FDR의 놀라운 속임수』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어떻게 자신의 장애를 숨겼는지를 읽은 후 빈센트 핀토는 아래와 같이 《P.H.*릭스》의 매력적인 일부를 만들었다. “FDR” 장면에서는 두 비밀 요원이 FDR의 대역인 실물 크기 인형을 산책시킨다. 나이가 더 많은 요원은 신입에게 자신들의 일은 대중이 루즈벨트가 걸을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도만큼만 무력”하기 때문이다. 신입은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선임: 대통령이 폴리오 걸렸던 거 알잖아.
신입: 알죠, 그래서요?
선임: 진짜로 걸렸거든.
신입: 그게 어쨌는데요? 굴하지 않았잖아요.
선임: 글쎄,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훨씬 크게 당했어. 꽤나 불구로 만들었지crippled up.
신입: 지금 대통령님이 불구자라는 거예요?
선임: 불구자라는 게 아니라, 그냥 몸에 영향이 좀 있었다는 거야.[12]Baizley and Lewis, 315-7
지금까지 살펴 본 드라마투르기 전략의 대부분은 장애 정체성이 “구성되어 있음”을 폭로해 그것을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컨대 소시지 하나 먹는 일로 사람을 찬양하는 사회는 미친 것으로 묘사된다. “지독한 병신들bitter cripples”에 관한 이야기는 “게으른 흑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오해된다. 두 번째로 다소 논쟁적인 방향 ― 장애 경험의 차이, 장애 공동체에서 “장애 문화” 혹은 “장애의 멋짐disability cool”이라 불리는 것을 고집하고 예찬하는 방향 ― 을 이 작가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로즈마리 갤런드 톰슨은 페미니즘 이론에 기대어 이 두 경향을 낙인을 지우고 차이를 최소화하며 위계를 공격하는 “전략적 구성주의strategic constructionism”와 차이와 개인적 경험을 강조하고 차이를 내세우는 것을 토대로 하는 공동체를 요청하는 “전략적 본질주의”로 구분한 바 있다.[13]Thomson, 23. 이 두 가지 전술은 장애를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재앙의 신세에서 해방한다는 목표를 공유한다.
장애 문화와 주되게 동일시하는 작가들에게서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 등장하고 있다. 셰릴 마리 웨이드가 그 중 하나다. 여러 장애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웨이드는 늦은 나이에 연극을 시작했다. 비범한 재능을 가진 퍼포머인 그녀는 금세 두각을 나타냈고 장애 예술가 최초로 국립예술기금의 개인 지원금을 받았다. 웨이드는 장애 권리 운동 속에서 나고 자란 순수 장애인이자 “구부러진gnarled” 뼛속까지 노동계급이다. 웨이드의 주술적인 시적 산문 퍼포먼스를 들으면 한참을 잊을 수 없다. 최근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투어가 거의 불가능해진 탓에 관습적인 드라마투르기로 돌아서 그녀의 독특한 목소리가 다인극으로 옮겨갈 수 있을지를 실험하고 있다. 진행 중인 작업 《절름발이 달》에서 그녀는 죽을 권리 운동에 내재하는 위험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한 방책으로 장애아를 납치하는 장애 활동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웨이드는 자신의 공연을 “장애가 있는 삶의 질감”으로 채우고 싶다고, “나는 무대에 불구화된crippled 세계, 규범이 장애인 세계를 만들고 있다”고,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세계이지만 관객 대다수와는 다른 세계”라고 역설한다.[14]Interview, October 7, 1997.
수잔 누스바움은 짙은 본질주의의 자취를 내어보이며 모든 작품에 오직 장애 관객만 다가갈 수 있는 농담 하나, 대화 하나씩을 넣는다는 점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녀의 작업은 장애 공동체의 일각에서는 애정을 담아 “병신crip” 유머라 칭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다음은 《미슈가니스모》에서 가져온 예다.
… 병신 세계cripdom에도 서열이 있어. 저기도 휠체어 사용자, 저기도 휠체어 사용자야. 사지마비인 사람 대부분이 생각하기로는 말야, 두 팔 두 손을 온전히 쓸 수 있는 병신은 전부 사실상 그냥 병신인척 하는 거야.
“사람들 면전에 우리 차이를 디민다”는 자신의 금언대로 누스바움의 모든 작품에서는 장애인의 생활양식, 목욕이나 붕대 감기, 배변 같은 개인 위생의 세세한 내용 등이 언급된다. 실제로 그녀가 잔여극장Remains Theater에서 협업한 작품에는 《일상 생활의 활동들Activities of Daily
Living》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연방의 장애인 지원을 관장하는 사회보장 제도에서 따 온 용어다.
누스바움은 물론 장애 정체성, 장애 공동체의 편에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복잡하다. 쿠바의 장애 참전군인과 대화할 때든 마르크스주의 연구 모임에서 언쟁을 벌일 때든 허구적으로 꾸민 알곤퀸 원탁에서 마티니를 마실 때든 똑같이 편안한 그녀는 장애, 비장애 관객과 복잡다단한 대화를 끌어내 쉽사리 고정관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정체성을 창조한다. 로즈마리 갤런드 톰슨의 말대로 “장애인은 간청하는 이이자 음유시인이라, 비장애 대다수와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가치 있는 재현을 창조하기 위해 분투한다.”[15]Thomson, 13. 혹은 낸시 베커 케네디가 《그들에게 난 인어라고 전해》에서 한 말로 하자면 이렇다. “전 낸시 패뷸러스 쇼Nancy Fabulous Show를 했었어요. 저를 그렇게나 불쌍해 하지 않도록 그들을 계속 웃겨댄 거죠.”
하지만 수잔 누스바움은 퍼포머로서나 극작가로서나 시카고 언론의 예외적인 호평을 받고 있지만 지역 비영리 극장들의 심사팀이 세운 장벽은 아직 넘지 못했다. 이 의심쩍은 구분은 역시 장애 여성 극작가이자 “블랙 코미디” 경향의 작품을 쓰는 주디스 울프Judith Wolffe에게도 적용된다.
주디스 울프의 로맨틱 소극 《피난처Shelter》를 끌고 가는 “고비”는 어긋난 연애 편지나 서방질 당한 남편의 갑작스런 귀환이 아니라 폴리오로 사지마비 장애인이 된 서니의 연인이 쉬는 날 밤에 그녀를 만나러 오고 싶다고 하면서 떠오르는 복잡한 문제들이다. 서니의 활동지원사는 딱 15분만 쓸 수 있다. 리프트로 서니를 침대에 옮기기에는 충분하지만 밤에 사랑을 나누려면 꼭 해야 하는 목욕과 머리감기에는 모자란 시간이다. 이에 서니는 같은 층 안쪽 집에 사는 노년 여성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다. 서니가 사는 곳은 저소득층 노년을 위한 낡은 단지로, 그녀는 공공주택법에 규정된 “장애자handicapped” 할당분을 채우고 있다.
웨이드와 마찬가지로 울프는 장애인의 삶의 구체적인 속사정을 물고 늘어진다. 교통 수단을 이용할 때의 난리법석, 수준 이하의 주거, 구직난, 오락가락하는 활동지원. 그리고는 이 세계를 코믹한 캐릭터들로 채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음직한 것은 서니의 블루칼라 좌파 투덜이 남자친구, 호들갑스레 절망하며 “이 별을 한 바퀴 돌 만큼 늘어선 배식 대기줄”을 상상하는 에밋이다. 서니의 인내에 바치는 헌사로 에밋은 그녀를 순교한 성 세실리아에 빗댄다. 눈을 뒤집혀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이 그녀[성 세실리아]의 머리를 베었어, 알고 있었어? 베어버렸다니까. 그런데도 사흘이 지나고서야 죽었지.”[16]Judith Wolffe, Shelter, unpublished, 1993 《피난처》의 후반부는 에밋의 자살 욕망, 서니와 함께 죽고 싶다는 소망, 그리고 서니의 어림도 없다는 거절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서니: 진지하게 생각해봐, 에밋. 죽은 친구가 몇 명이나 돼?
에밋: 기계 공장은 위험한 곳이야.
서니: 병원이 두 배는 더 위험할 걸.
에밋: 노동자는 매일 죽어. 뜨거운 물에 빠지고, 찌부러지고, 중독되고.
서니: 네 친구 중에 죽은 사람이 몇이나 되냐고. (에밋은 대답이 없다.) 있잖아, 내 친구는 많이 죽었어.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죽음 같은 소리하네, 뒤에다 박아버릴까 보다.
누스바움과 마찬가지로 울프에게 희극이란 삶과 죽음의 문제다. 이 두 중증 장애 여성 작가의 말들은 가난하거나 늙었거나 장애가 있는 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 속 자신들의 취약한 위치에 대한 의식에서 나온다. 분노로 날선 이들은 웃음을 무기로 생존을 주장한다.
남캘리포니아 어느 극장의 심사팀은 울프가 장애 경험을 “변질시키고denature 사소한 것으로 치부”했다는 한 독자의 판단을 토대로 《피난처》를 반려했다. 이런 기각은 정당한 미적 판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논한 작가 중 몇몇도 투고 과정에서 비슷한 반응을 받았다. 장애 공동체에서 새로 나오는 작품들이 오독되고 있는 것일까? 셰릴 마리 웨이드는 극장 관계자 대부분이 “여전히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제대로 된valid 장애 연극으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울프의 독자는 실은 “비극에서 승리로 가는” 서사를 찾다가 어쩌면 장애를 “변질시키는” 것이 울프가 의도한 효과임을 놓친 것일 수도 있을까?
수잔 누스바움의 《더없이 심술궂은》은 동부 연안 지역의 어느 극작가 모임에서 반려 당했다. 이 작품이 “재치와 상상력”은 있지만 자신들의 의도에는 “너무 의제중심적”이라는 것이었다. 열정적인 정치적 참여는 그 어떤 것이라도 무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는 비영리 극장들의 결벽증을 감안한다 해도, 1990년대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는 폭넓은 드라마투르기적 응답을 기대해 봄직하다. 여러 편의 “의제중심적” 연극 ― 조지 울프George Wolffe의 《유색 박물관Colored Museum》, 토니 커시너Tony Kushner의 《미국의 천사들Angels in America》, 리사 루머Lisa Loomer의 《대기실The Waiting Room》, 로버트 솅켄Robert Schenkken의 《켄터키 사이클The Kentucky Cycle》, 프랭크 갈라티Frank Galati가 각색한 존 스타인벡 작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 등 ― 이 토니상, 퓰리처상 등을 수상하고, 흥행 기록을 세우고, 문화 엘리트들의 상상 만큼 대중이 비위가 약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호평을 받았다.
존 벨루소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겠죠. 이렇게나 도전적인 주제에 관해 쓰지 않았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 장애를 개인의 서사로, 따라서 억제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데 젖어 있는 사람들에겐 아예 다른 언어 같아 보일 만도 하죠. 하지만 제게 쓸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벨루소는 《여행용 피부Traveling Skin》에서 탬이라는 캐릭터가 기는crawl 게, 그의 말로 하자면 “스르르 미끄러지는slither” 낫다며 휠체어를 버리게 한 것으로 비판을 받았다. 비판가에게 벨루소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관객에게 그녀의 움직임이 매우 느리고 고통스러워 보이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엄청난 시간이 걸리고 불안을 자아내는 일로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다는, 그들의 장애 독해를 방해하고 혹은 “소외시키고” 싶다는 벨루소의 욕망에서 우리는 브레히트 이론의 영향 뿐 아니라 아마도 장애 운동의 반향 또한 볼 수 있다. 1990년에 미국장애인법 제정을 위해 워싱턴에서 벌어진 한 시위에서, 장애 권리 운동에서 가장 급진적인 쪽에 속하는 ADAPT 회원 수십 명은 휠체어를 버리고 의사당 계단을 천천히 기어 올랐다. 이 행동은 장애계 안팎에서 상당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단체로 기어간 후 대대적인 보도가 이어졌다는 점에서 ADAPT는 미국장애인법 통과에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었다고 주장한다.
내가 생생히 기억하는 어떤 퍼포먼스 하나가 장애 드라마투르기에 대한 이 논의의 결론이자 이 분야의 향방에 대한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다. 저항하는 투사들이 기어가기를 되찾아 고귀하고 아름다운 몸짓으로 만들었듯, 1995년 봄에 미시건대학교에서 진행한 짦은 퍼포먼스 하나는 내게 장애인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전통 전체에 있어서 새로운 장애 신체 재현은 간명하고 가능함을 상기하게 했다. 장애와 예술에 대한 학제적 학술대회 디스/어빌리티This/Ability에서였다. 리빙시어터Living Theater 단원이자 이십수 년을 장애가 있는 몸으로 산 베테랑 배우 브래드 로스바르트Brad Rothbart가 미시건 대학교 미술·건축 대학 복도를 걸었다. 나체였고, 뇌병변 장애가 두드러졌으며, 작은 물 한 동이를 들고 있었다. 우리는 이 비대칭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 오월의 햇살이 눈부시던 정원으로 나갔다. 로스바르트는 물통을 내려두더니 스폰지를 적셔 자신의 작은, 빼곡히도 상한 몸을 닦기 시작했다. 스폰지로 제 형상의 윤곽을 훑으면서 말로는 굉장히 다른 몸을 묘사했다. “… 내 훌륭한 허벅지에 비누를 짜네. 근육이 불거진 이 다리. 애인은 언젠가 ‘천둥 같은 허벅지’라고 했지 … 균형을 잡아주고 지켜 준다네.”[17]Deborah Abbott, “This Body I Love,” in Susan E. Browne, Debra Connors, and Nanci Stern, eds., With the Power of Each Breath: A Disabled Women’s Anthology (San Francisco: Cleis … (계속) 드보라 애벗Deborah Abbot의 서정수필 「내가 사랑하는 이 몸This Body I Love」에서 가져온 것인데, 이 글에서는 폴리오에 걸린 화자가 체육관에서 샤워를 하면서 자신의 몸을 예찬한다. 로스바르트는 이렇게 이어 간다. “이제 다른 쪽. 가녀린 이 다리를 쓰다듬지. 피부를 가르고 찢었던 때, 부러진 뼈를 다시 맞추었던 때의 흔적, 지워지지 않는 엷은 봉합선을 따라. 나는 이 다리에겐 상냥해. 작은 쪽? 약한 쪽?” 그는, 자기 피부에 저 장애 여성의 형상을 그리기라도 하는 듯이, 스펀지를 반복해 적셔 가며 자신의 소년 같은 팔다리를 씻었다.
로스바르트의 의식, 그 고요함, 그 쏟아붓는 몸짓과 목소리의 간결함이 순응치 않는 몸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과 처벌을 차단했다. 처음에는 전통적으로 아름다운 여성의 누드에만 쓰이는 방식으로 “일탈적인” 몸을 보여줌으로써, 이윽고 장애여성의 자기성애적 서사를 전유해 욕망의 주체와 대상을 한 데 녹임으로써, 마지막으로는, 저 여성 “일탈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개인적인 것 너머 공동적인 것으로 확대되고 관객을 포용할 수 있는 확장된 연극적 신체를 만들어 냄으로써. 일탈을 무찌르고 우리의 집단적 시야를 정화하는, 주술에 가까운 순간이었다. 이게 다가 아닐 것이다.
주
↑1 | Rosemarie Garland Thomson, Extraordinary Bodies: Figuring Physical Disability in American Culture and Literatur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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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Paul K. Longmore, “Screening Stereotypes: Images of Disabled People,” in Social Policy 16 (Summer 1985), 31-38. |
↑3 | Brian Clark, Whose Life Is It Anyway? (New York: Dodd, Mead & Company, 1978), 111. |
↑4 | 오늘날 장애 극작에서 가장 널리 다루어지는 주제이자 항상 부정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지는 주제가 바로 “죽을 권리”이다. |
↑5 | 이 연극은 영화 《마스크Mask》[(1985)]와 마찬가지로 장애라는 문제를 장애인 외부에 위치시킨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지만 폴 K. 롱모어는 두 작품의 묘사가 모두 유익하지 않다고 여긴다. 이 인물들이 이전의 괴물들에 비해서는 다면적으로 표현되기는fully characterized 하지만 사회에서 통합된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숙명은 죽음이다. |
↑6 | Doris Baizley and Victoria Lewis, adpt., “P.H.*reaks: the Hidden History of People with Disabilities,” in Kenny Fries, ed., Staring Back (New York: Dutton, 1997). 제목에서 프릭freak의 철자를 독특하게 쓴 것은 공공근로국Works Project Administration(WPA)에서 장애인이 신청서를 내면 신체 장애자physically handicapped를 뜻하는 “P.H.”를 날인하고 근로 신청을 전부 반려한 차별적 조치를 지시한다. 장애 활동가 모임인 신체장애인연맹League of the Physically Handicapped이 이 정책에 항의해 미국에서 최초로 알려진 장애 민권 시위를 전개했다. 우리가 《P.H.*릭스》를 작업하는 동안 자신의 연구를 공유해 준 폴 K. 롱모어에게 사의를 표한다. 그에 더해 우리는 장애의 사회적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 로버트 보그단Robert Bogdan의 《프릭쇼: 여흥과 이윤을 위해 이상한 인간을 전시하다Freak Show:Presenting Human Oddities for Amusement and Profit》(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8)를 함께 읽었다. |
↑7 | Interview, October 6, 1997. |
↑8 | Susan Nussbaum, No One As Nasty, unpublished, 1996. |
↑9 | David Freeman, Creeps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72). |
↑10 | Mikhail Bakhtin, Rabelais and his World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84), 89. |
↑11 | Interview, October 14, 1997. |
↑12 | Baizley and Lewis, 315-7 |
↑13 | Thomson, 23. |
↑14 | Interview, October 7, 1997. |
↑15 | Thomson, 13. |
↑16 | Judith Wolffe, Shelter, unpublished, 1993 |
↑17 | Deborah Abbott, “This Body I Love,” in Susan E. Browne, Debra Connors, and Nanci Stern, eds., With the Power of Each Breath: A Disabled Women’s Anthology (San Francisco: Cleis Press, 1985), 2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