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일 벽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난다. 적어도 — 잠에서 깬 — 점심께부터는 줄곧. 옆집과 맞닿은 벽이지만 옆집에서 나는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업소용 환풍기를 돌리는 게 아니라면 이만한 소리가 나기는 힘들다. 처음엔 냉장고가 유독 큰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벽 속을 지나는 수도관 — 혹은 다른 관 — 에서 나는 소리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종일 소리가 난 적이 있지도, 이런 소리가 — 물이 새는 소리가 아니라 관 속을 흐르는 소리가, 그리고 중간중간에 수도를 연 듯한 소리가 섞여 — 종일 날 만한 일이 떠오르지도 않지만. 혹시나 싶어 보일러를 끄거나 켜 보고 수도도 틀었다 잠갔다 해 보았지만 소리에는 변화가 없다.
늦은 저녁무렵부터 주방 온수가 나오기 시작했다. 별 기대없이 틀어보았는데 조금씩 물이 흘렀다. 온수 온도를 올리고 몇 분간 물을 틀어 놓았더니 평소 유량이 돌아왔다. 화장실 온수 수도가 녹은 것은 그보다 두어 시간 전이다. 당연히 아직 얼어 있을 거라 생각하고, 수도꼭지 바로 앞까지도 얼어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수도 꼭지를 뽑았다가 잠시 난리를 겪었다. 예상치 못하게 물이 콸콸 나왔기 때문이다. 집으로 들어오는 수도를 전부 잠가 버리면 되지만 밸브가 어디 있는지 아직 정확히 모른다. 위층쪽에 하나, 아래층쪽에 하나가 있고 어느쪽도 딱 이거다 싶은 위치는 아니다. 결국 뿜어져 나오는 물과 싸우며 겨우 수도 꼭지를 다시 달았다.
그런 후에는 장을 보고 왔다. 30분쯤 온 집을 뒤지며 지갑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그러다 주머니에서 카드를 발견했다. 채소 서너 가지와 마라훠궈 소스를 샀다. 아이스크림도 하나 사서 오는 길에 먹었다. 왕복 사십 분쯤, 장을 본 시간을 포함해도 한 시간이 좀 못 되게 걸었는데 살짝이지만 땀이 배어 나왔다. 실내에 들어서니 피부가 따끔거렸다. 밥을 안치고 설거지를 하고 재료를 썰고 볶고 끓였다. 이때까지는 주방에 온수가 나오지 않았으므로 모두 찬물로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잠시 빈둥대다 책을 몇 쪽 읽었다. 두어 해 전에 친구 R이 짐을 정리한다길래 얻어 온 책이다. 요 며칠, 하루에 한 장 정도씩 읽고 있다. 그 사이에는 역시 두어 해 전에 샀지만 펼쳐 본 적 없는 책 한 권을 가볍게 훑었다.
며칠을 책을 읽다가 티비를 보다가 누웠다가 집안일을 하다가를 반복하고 있다. 자연히 시간 감각이 흐트러진 상태다. 온수가 나오는 게 며칠 만일까. 며칠 전에 한 번 녹았던 수도는 이틀날이 되자 맥없이 다시 얼어버렸다. 보온재를 덮은 건 효과가 없었다. 워낙 부실하기도 했지만 수도관이 노출된 구간이 생각보다 — 정확힌 멋대로 왜곡해 기억했던 것보다 — 꽤 길기도 했다. 손난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불량인가 싶을 정도로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서너 개가 모두 불량일 가능성은 높지 않으니, 그저 너무 추워서였을 것이다. 결국 단열재를 사 왔고, 녹으면 감으려다가 하루이틀을 기다려도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냥 감았다. 아마 어제나 그제의 일일 것이다.
단열재를 사러 가면서는 마스크를 깜빡했다. 그걸 이십 분쯤 걸어서 잡화점 앞에 도착하고서야 깨달았다.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지만 다행히 쫓겨 나지는 않았다. 우선 마스크를 집어다 쓰고 나가면서 같이 계산하라고 했다. 고무장갑을 샀다. 고무장갑은 순전히 손이 시려서. 안에 천이 덧대어져 있는 걸 사는 게 좋았겠지만 관리가 성가실 것 같아 평범한 걸 샀다. 지난 해에 이 매 장에서 산, 솔을 바꿔 쓰는 손잡이 달린 수세미의 교체용 솔도 사려고 했는데 없었다. 이 매장에만 안 들어오는 걸지 단종된 걸지 모르겠다. 손잡이는 이렇게 쓰레기가 되는 걸까. 같이 산 쇠수세미가 마침 두 개들이라 하나를 얼기설기라도 달아 볼 생각이다.
고무장갑을 껴도 손은 꽤 시렸다. 손이 떨어질 것 같은 정도는 피하게 되었지만 딱히 보호 받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서울 살 땐 물이 아무리 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도 한창 추운 — 작년 이맘 때보다도 더 추운 — 지금을 빼면 이 정도는 아니다. 덜 추워지면 찬물로 설거지를 할 때도 아마 장갑은 쓰지 않을 것이다. 손이 덜 시린 건 좋지만 촉감으로 그릇 상태를 확인할 수 없어 영 답답하고 찝찝하다.
다시 책을 펼까. 책을 덮은 건 순전히 벽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 커서다. 책상은 벽에 맞닿아 있다. 같은 이유로 오후에는 잠시 카페에 앉아 잡무를 하다 들어왔다. 침실은 조용하지만 바닥에 앉아서 읽는 것도 눕거나 엎드려서 읽는 것도 몸이 잘 못 견딘다.
자려고 눕고 보니 방에서도 꽤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