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나 하고 있는 이야기지만, 비장애인의 몸을 중심으로 한 비유는 마뜩지 않다. 그런데 그게, 제일 곤란한 경우는 장애인이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때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있으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도 마뜩잖아 하면서 별 수 없이 사용하고 있을 사람이 말이다.
장애인 집회에 가면 늘 나오는 노래들에 "노동으로 일어 설 기회마저 빼앗긴 동지여"(장애인차별철폐투쟁가), "굴종의 사슬을 끊고 다시 일어서라 동지여"(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같은 가사가 나올 때도 같은 마음이다. 집회에 오는 장애인 대다수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인데, 그들이 원하는 인간으로서의, 혹은 인간다운 삶, 아니면 투쟁하는 삶을 나타낼** 말이 ‘일어서다’밖에 없어서이지, 그 말이 정말로 좋아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무대에 오른 사람들 역시 참지 말고 함께 일어서자는 식의 말을 종종 사용하곤 한다. 객석의 반응 역시 뜨겁다. 나의 신경에, 별다른 불편함이 감지되지는 않는다. 비유의 의미로 사용된 ‘일어서다’라는 말의 비장애인 몸 이미지는 이미 충분히 희석된 걸까, 생각해 보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마음은 또 불편하다.
그제 420장애인차별철폐 투쟁 결의 대회에 갔을 땐 어느 휠체어 이용 장애인이 경찰을 향해 "이 병신 새끼야"하고 외치는 것을 들었다. 그 말을 하면서 그가 뜨끔 했을지, 혹은 아차, 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그랬고, 아마 또 누군가가 그랬을 것이다. 비판보다는 슬픔이 앞선다. 언제나 나쁜 의미만 부여된 삶을 사는 이들에겐, 다른 나쁜 것을 이야기할 언어가 주어져 있지 않음에.
병신, 이라고 하지 않았더라도 뻔하다.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누구나가 의도를 이해하면서 발화자의 격한감정까지도 담을 수 있는 말, 그러니까 ‘욕’은 흔치 않다. 미친 놈, 이라고 했어도, 바보, 라고 했어도, 개새끼나 씨발 놈이라고 했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정신장애인연대에서 온 사람도, 발달장애인도, 여성, 혹은 여성주의자도 있었다. 그 자리가 아니라도, 그런 사람은 있다.
당사자에게 무어라 말은 붙일 용기는 나지 않는다. 그래서다, 황망한 것은. 단지 쓸만한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쓸 수 있는 말이 없는 현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않아서.
* ‘장애인 투쟁’은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지금에까지 왔다. 그러니까, 휠체어나 목발을 이용하는 이들의 싸움부터 시작되었다. 그간 발달장애, 정신장애 등 다른 장애를 가진 이들의 싸움 역시 벌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메인’이라 할 만한 것은 이동권 투쟁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활동보조 이슈를 이동권의 연장에 두어도 좋다면.) 발달 장애인,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등 다양한 장애인들이 함께 모이지만 아직 그만큼의 세를 이루지는 못한 것 같다. 최근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한 정신 장애인의 경우, 이 날 무대에 오른 이의 말대로, 당사자들은 여전히 나서지 못하고 있다.
**나타내다, 앞, 과 같은 표현들에도 시각의 이미지가 들어있다. 아, 이미지라는 말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