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우뮤지움 《모던 패밀리》전(20.09.21-, 온라인 상설전시. 참여작가 장지아, 김용관, 흑표범, 도로시 M. 윤, 김허앵, 류준화) 토크 프로그램 발제문. 어린이를 위한 페미니즘을 화두로 한 전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교육자, 양육자 등의 독자와 성교육, 성적 감수성 등의 키워드를 염두에 두었다.
안팎
성적인 영역에서 손해감소를 고민하는 이유는 성적 행동 자체를 금기시, 범죄시 함으로써 손해를 막으려 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고, 발생하는 손해에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건강을 비롯해 손해를 가중시키고, 사회화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타리, 「성관계에서의 위험(RISK)과 손해(HARM)를 정의하고 대처하기」
여성 청소년이 성에 무지해야 한다는 사회의 편견은 그들이 안전한 공간에서 성에 대해 발화할 수 없게 만들었다. […] 성을 욕망하는 여성 청소년에게는 익명성을 빌려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만이, 그러니까 ‘일탈’만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위티, 「왜 누구에게는 ‘N번방’이었고 누구에게는 ‘일탈계’였나」1
1a.
성적인 행위에 도사리고 있는 갖가지 위험, 그로부터 종종 입게 되는 해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알려져 있다. 성매개감염이나 뜻하지 않은 임신, 성폭력, 혹은 감정적인 투여와 소진, 나아가 그 이후 사회관계에서 받게 되는 영향들까지가 두루 이야기된다. 감염과 임신을 막을 수 있는 여러 수단,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막거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에 필요한 기술들―호신술부터 대화술, 사후피임약, 문제제기 방법 등―역시 적지 않게 이야기된다. 이 위험과 해가 결코 작지 않으며 심지어 특정한 신체조건이나 사회적 지위에 있는 이들에게 불균형하게 몰리곤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 중요하며 필요한 일, 또한 여전히 부족한 일일 것이다.
(인간의 다른 모든 행위와 마찬가지로) 성적인 행위는―자위조차도―행위자 홀로 있는 진공 상태에서 행해지지는 않으므로, 따라서 스스로의 통제 바깥에서 오는 ‘손해’를 온전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이야기는 종종 위험한 상황을 미리 피하는 방법에 초점을 두게 된다. 그리고 손해를 온전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로, 위험한 상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행위들은 쉽게 금지되곤 한다. 청소년의/잘 알지 못하는 이와의/불특정 다수와의/동성간의 관계, 충분히 주의하지 않은 관계 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위험이 있는 곳에 접근하는 일까지도 그렇다.
필연적으로 위험에 연루될 어떤 욕망 자체를 제거―금지―하기 위하여 그에 대한 앎까지를 차단할 때 오히려 위험이 가중된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위험을 아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위험을 알면서도 행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덜 위험하기 때문이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든 혹은 위험 자체를 통해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든 말이다. 위험을 피하는 것이 지상명제가 될 때, 그리하여 위험을 충분히 알면서도 굳이 혹은 위험을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 섣불리 행하는 것이 그 지상명제에 대한 위반으로서 비난 받게 될 때 역시 위험은 가중된다. 위험의 절대적인 제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는 말은 그저 비현실적인 데 그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자체로 위험한 말이 된다.
1b.
그러므로 (결코 절대적일 수 없는) 안전을 누리는 것만이 아니라 (절대적이지 않게 될 수 있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 역시가 권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권리가 된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한 행위을 통해 입은 해가 온전히 그 개인의 책임이 되지 않는 것, 그 개인을 비난할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위험을 피하거나 통제할 수 있을 ‘충분한’ 지식과 능력, 즉 자격을 상정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실재하지 않는) 전적으로 안전한 상황을 지어내고 누군가를 그 속에 가두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볼 때 교육이 제공해야 할 것은 충분한 것으로 상정되는 지식과 그에 입각한 지침, 그 모든 것을 충분히 익혔다는 수료증 같은 것 아니라 언제까지나 불충분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지식과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는 데에 필요한 조력일 것이다.2 당연한 모자람과 한계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위험이란 특정한 사람이 굳이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모두가 언제나 감수하고 있는 것임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성적 권리(를 비롯해, 사실상 모든 권리)는 불가능해진다. 위험이 도 아니면 모로 상상되면 안전 역시 도 아니면 모가 되어버리므로, 안전조차도 불가능해지고 만다.
모자람과 한계가 특정한 이들에게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면, 위험의 감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조건이자 양식이다. 그것이 권리로 인정된다는 것은 그에 따른 손해의 감소와 회복이 그저 당사자의 책임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책임이 된다는 것이다. 세계는 충분한 지식과 능력을 갖춘 이들이 안전을 구축하고 그로써 능력이 모자란 이들을 보호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 누구도 온전한 능력을 갖출 수 없는 가운데 서로에게 위험과 해를 가하고 서로의 위험과 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공간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최대한의 자유와 최대한의 안전―새로운 위험을 감수하고 그 다음의 자유를 찾기 위한 조건으로서의―을 일구는 공간으로 상상되어야 한다.
2.
아마도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다를 어떤 위험을 생각해 보면, 그러나 아마도 위와 같은 관점을 토대로, 위험의 감수는 권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의무이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관계 내의 위험에 한정해 이야기한다면, 어떤 위험은, 권력이 적은 이가 가하는, 자신의 권력에 대한 위협은, 쉽게 제거할 수 있다. 바로 권력을 통해서다. 그러나 권력을 통해 상대를 통제하고 그로써 위험을 제거한다는 것은 관계가, 삶이 본질적으로 위험을 내포하며 그 위험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대화와 교섭, 상호작용의 상대가 아니라 통제의 대상을 찾는 것은 관계와 행위를 차단함으로써 위험을 제거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험을 감수할 의무란 곧 단순히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평등한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된다. 권력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사소할 위험들이다. 거부 당할 위험, 상처 입을 위험, 권력을 휘두르고 통제하지 못할 위험. 위계나 협박 등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누릴 장을 만드는 것은 그저 상대를 존중하거나 보호하지 않는 일이 아니라 자신만은 결코 사소한 위험에조차 노출시키지 않는 일이다. 상대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평등한 관계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상대가 언제나 위험 속에 있다면, 나 역시 위험 속에 들어 갈 때 평등의 가능성이 생길 것이다.
위험을 감수할 의무가 있다는 것은 물론 그런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말이지만, 동시에 교육이나 조력을 제공하는 이들에게 역시 필요한 말이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교육도 조력도―피교육자, 피조력자를 통제하지 않는 한―뜻대로 이루어질 수만은 없다. 받는 이들의 부족함이 아니라 주는 이의 부족함이 우선적인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 이들에게, 교육과 조력이 유의미한 효과를 내지 못하는 듯 보이는 이들에게, 어떤 사정과 어떤 욕망이 있는지를 우리―교육과 조력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상상되는―는 여전히 모른다는 전제, 배워야 할 것은 어쩌면 우리라는 전제.
- 각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이슈페이퍼(2020.01.31.),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논평(2020.05.01.). 아래 쓴 내용의 대부분은 이 두 글에 대한 나의 독해이다. ↩
- 현재 교육은 전자에서 후자로 변해 가고 있거나 변해야 한다는 주장을 마주 하고 있는 시점일 것이다. 또한 적어도 지금 이 대화에 관심을 갖는 이라면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운 태도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 자신을 포함해, 그런 이들조차 여전히 상상가능한 후자의 극단보다는 후자의 초입에 훨씬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동·청소년, 장애인, 성노동자, 약물사용자, HIV감염인 등 흔히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것으로 상상되는 이들에 관해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