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멍하게 있을 때면 제외하면 읽고 쓰거나 듣고 말하지 않을 때에도 대개 속으로 무언가 문장을 떠올리고 있는 편인데, 오늘은 설거지를 하며 ‘그릇을 씻을 땐 겉부터 헹군다, 비눗물이 안쪽 면에 묻을 수도 있으니까’라는 생각을 했다.
설거지 세제를 푼 물을 비눗물이라고 하는 것이, ‘설거지용 비누’ 같은 말이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비누의 어원이 궁금해졌다. 딱히 유럽에서 온 말처럼 생기지는 않았는데 ‘양잿물’ 같은 말을 생각해 보면 오래 전부터 한국어에서 쓰이던 말도 아닌 것 같고, 까지 생각한 후 사전을 뒤졌다.
국립국어원의 표준한국어대사전이 제공하는 어원정보는 【<비노<박언>】이다.1 “비노”라는 단어가 쓰였다는 “박언”이라는 책은 1677년에 12인의 역관이 함께 저술한, 한국어 주가 붙은 중국어 학습 교재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다.2
이 책의 306쪽(三○六면)에는 “行者ㅣ 듯고 여 나와 大王을 블러 비노 잇냐 날을 주어 머리 게 라”(행자가 듣고 뛰어 나와 대왕을 불러 [말하기를] ‘비노 있느냐, 나에게 주어 머리를 감[는 데에 쓰]게 하라’)라는 말이 있다.3 무려 1677년에 이미 비누에 해당하는 한국어 표현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전의 어형은 밝혀진 것이 없는 듯하다. 날 비飛 자에 더러울 누陋 자를 쓰던 것이라 여긴 이도 있었던 모양인데, 정작 『박통사언해』에 실린 저 한국어 문장의 중국어 표현에 쓰인 것은 肥棗다.4 『조선시대 의궤용어사전』에 따르면, 오히려 飛陋가 한국어의 비노를 차자표기한 것이라고 한다.5
그래서 이제 비누가 꽤 오래 묵은 한국어인 것은 알겠는데, 그럼 왜 양비누가 아니라 양잿물이란 말이 쓰인 것인가 하는 크나큰 의문이 남았다. 『조선시대 의궤용어사전』에 따르면 (의궤에 쓰인 표기로) 飛陋는 “직물의 세탁에 쓰이는 곡물 가루”를 뜻했다고 하며, 당시에는 “대체로 면, 마직물의 세탁에는 잿물을 쓰고, 명주와 같은 귀중한 직물을 빨 때는 콩·팥·녹두 등을 갈아 빨래에 비벼서 썼”다고 하니 조선시대에 쓰인 세제로는 (적어도) 잿물과 비누 두 가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수산화나트륨, 혹은 그것의 수용액이 곡물가루보다는 잿물을 먼저 떠올리게 했나보다. 이제 이어지는 궁금증은, 그럼 왜 곡물세제를 가리키던 비누라는 말은 그대로 잊혀지지 않고 되돌아와 양잿물을 대체했는가 하는 것인데… (양잿물은 말 그대로 물이므로, 이 말로써 고체비누를 가리키려 했다면 양재였어야 했을 것이라는 점이 뒤늦게 떠올랐다. 양석감, 같은 것도 가능했을까.)
1921년에 발행된 신문에도 화학식 고체비누(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말로 “비누”가 사용되고 있다. (이와 함께 석감石鹼이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글자 그대로는 돌(처럼 굳힌)잿물을 가리키는 이 말은 원래는 “쑥이나 여뀌 등의 풀을 태운 재에서 추출한 잿물에 밀가루 등을 섞어서 가공하여 만든 고형물”을 뜻했으며 그것은 약재로도 쓰이고 양치, 기름떼 제거 등에도 쓰인 모양이다.6) 역시 비누라는 말을 쓰면서 석감이라고 부연한 1934년 기사에는 “예전 같으면 [세수에 쓸] 비누라고 하면 팟[=팥]비누밖에는 없엇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예전”이라는 게 필자가 어렸을 때 정도쯤이니까 저런 말을 썼으려니 싶으면서도 한국전쟁 휴전 후에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가 늙어서는 젊은이들에게 전쟁도 안 겪어봐서 운운하는 꼴을 생각하니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7
이 정도 정보를 갖고서야, 고체비누엔 석감이란 단어를 빌어 쓰고 비누라는 단어는 서서히 잊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으므로, 나는 여전히 크나큰 궁금증을 품은 상태.
- http://stdweb2.korean.go.kr/search/View.jsp?idx=156723. ↩
- 고려말부터 읽힌 『박통사』에서 1765년 간행된 『박통사신석언해朴通事新釋諺解』에 이르는 역사에 대해서는 http://kostma.korea.ac.kr/dir/viewIf?uci=RIKS+CRMA+KSM-WO.1765.0000-20150331.OGURA_186 을 참조. ↩
- 원문은 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1-AAA-2101&callType=dir&dirRsh=&dataID=06_300@AKS-2011-AAA-2101_DES. 생략한 부분에 당승唐僧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저 행자는 길 가던 사람이 아니라 불교의 수행자일 듯하긴 한데, 저 부분만 잘라 읽은 것이라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대왕은 진짜 왕인가? ↩
- 사실 잘 안 보여서 모르겠지만 찍었다. 살찔 비, 대추 조인데 대추 조는 하인 조皂와 발음이 유사하다(당시엔 같았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다). 살찔 비, 하인 조를 쓰는 肥皂는 무환자無患子 나무 열매의 육질 부분을 뜻하던 단어로, 중국에서는 이것을 갈아 빨래에 썼던 모양이다. 肥皂는 현대 중국어에서도 비누를 뜻하며, 『박통사신석언해』 54 번째 페이지(http://waks.aks.ac.kr/rsh/dir/rview.aspx?rshID=AKS-2011-AAA-2101&callType=dir&dirRsh=&dataID=12_289@AKS-2011-AAA-2101_DES)에 있는 같은 예문에는 이 단어가 쓰였다. 또한 두 책 모두 정확히는 肥 자와는 한 획이 다른 글자를 썼다. 사전의 이체자 목록에서 찾지는 못했지만 같은 글자이려니… ↩
- http://waks.aks.ac.kr/dir/achieveView.aspx?dataID=FND_DIC_UIG_UGYS_0685@AKS-2007-HZ-2003_DIC. ↩
- http://www.koreantk.com/ktkp2014/dictionary/dictionary-detail-view.view?dicCd=K0013584 및 http://www.koreantk.com/ktkp2014/medicine/medicine-view.view?medCd=M0001925 참조. ↩
- 읽은 기사들의 출전을 정확히 밝히지 않은 것은 비누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어서이기도 하지만 저 글들이 호명하는 독자가 “부인”과 “여학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고 그런 내용들이다. ↩
타이완 교육부에서 제공하는 이체자 사전을 열어 『박통사언해』와 『박통사신석언해』에 쓰인 살찔 비와 비슷하게 생긴 글자가 살찔 비의 이체자가 맞음을 확인.
http://dict.variants.moe.edu.tw/variants/rbt/word_attribute.rbt?quote_code=QTAzMjk5&fbclid=IwAR15e6ricQhKMa1-kTGkiSo3JC4ixzjOuZrlPg-Hs0JXNp9Z4xz82lnhcg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