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06. (금) 갱서가 혹은 장서가

새삼스런 소리지만 장서가藏書家 ― 책을 많이 간직하여 둔 사람 ― 는 독서가讀書家 ― 책을 많이 읽는 사람 ― 와는 다르다. 애서가愛書家 ―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 와도. 물론 겹칠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 않다. 애초에 누가 보든 장서가랄 만큼 책이 많았던 적은 없지만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살림의 규모를 생각하면 꽤 많이 갖고는 있었다. 할인하길래 사거나 누가 버리길래 주워오거나 등등의 경로로. 책에 절대 밑줄을 긋지 않고 읽지 않는 책도 버리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애서가일 수도 있지만 전혀 보살피지는 않는다.

최근에는 많이 줄였다. 두 해 정도에 걸쳐 조금씩 없앴고 지난 두어 달에는 꽤 급하게도 없앴다. 조금씩, 은 시립도서관 책 나눔 코너에 갖다 두는 걸 비롯해 누구든 읽을 만한 이에게 넘겼다는 뜻이다. 급하게, 는 정말로 쓰레기통에 ― 정확히는 폐지 분리 배출함에 ― 버렸다는 뜻이다. 주로 반 세기 가까이 묵은, 영어나 독일어로 쓰인 철학책이었다. 그렇게 큰 책꽂이 두 개를 비웠다. 책꽂이는 중고 거래 앱에 올려 낯모르는 이들에게 주었다. (길게는 반 세기 가량 묵은, 영어나 독일어로 쓰인 철학책을 포함해) 누군가 읽기는 할 텐데 그 누구를 아직 찾지 못한 책 여남은 권이 여전히 방바닥에 놓여 있다. 나는 읽지 않을 테고 달리 읽힐 사람도 없지만 예뻐서 책꽂이에 남겨 둔 책도 여전히 많다.

한국어에도 있나 ― 몇 년 전에도 한 번 생각만 하고 찾지 못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건 ‘출판계의 빛과 소금’ 같은 것들 뿐이다. 한국어에도, 라고 한 것은 영어에는 있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흔히 쓰이는 말은 아니니 영어에 있다기보다는 영어권의 일부 화자들이 쓴다고 해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사전에는 실려 있다. 내가 영어를 통해 알았을 뿐이니 영어에 있다는 말로는 부족하겠지만 아무튼 그리스어와 프랑스어를 거쳐 언젠가 영어에 들어온 bibliotaph라는 단어가 있다.

그리스어에서 책을 뜻하는 biblion과 무덤, 매장을 뜻하는 taphos가 합성된 말이다. 문헌 기록상 17세기부터는 책이 파묻혀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쓰였고 19세기부터는 책을 파묻어 두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물론 비유적으로다. 자신이 읽지도 타인에게 읽히지도 않을 책을 마구 모아두는 곳/사람을 가리킨다. 번역하자면 갱서가坑書家/阬書家 혹은 장서가葬書家 쯤 되겠다. 분서갱유의 갱(들)과 매장의 장이다. (중국어나 한문은 모르는데, 葬 자 뒤에 목적어를 붙인 구성의 어휘는 찾지 못했다.)

시대에 맞지 않게 RSS 리더로 여러 블로그를 모아서 보는데 문득 이런 구독마저도 갱서가스럽게 하고 있단 걸 깨달아서 한 생각이다. 예순아홉 개의 사이트를 등록해 두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이제 폐쇄되었지만 지우지 않았다. 이따금 올라오는 글 중 관심이 가는 것을 “즐겨찾기”에 등록하곤 하는 사이트가 몇 있다. 즐겨찾기는 나중에 읽을 글을 표시해 두는 데에만 쓰는데 늘 등록만 하고 읽지 않아 해제는 못한다. 매일 글이 올라오는데도 결코 읽지 않는, 그러면서도 또 빼지 않고 꼬박꼬박 “읽음으로 표시” 버튼을 누르는 사이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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