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Ayham al-Sahli, “The Long War on UNRWA and Palestinian Right of Return,” Al-Akhbar, 2025.01.29.

한때 아랍권에서는 팔레스타인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제일 많다고들 했다. 그랬으니, 망명 초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은 그 재앙과 씨름하면서도 일을 찾는 한편으로 자녀 교육에도 열심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값진 자산이었다. 팔레스타인연구소Institute for Palestine Studies에서 만든 《팔레스타인 문제 인터랙티브 백과사전Interactive Encyclopedia of the Palestinian Question》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최초의 학교들을 설립한 것은 유엔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들 자신이었다.” 그들은 난민촌에 임시 학교를 지어 수업을 열고 팔레스타인에서 교직에 있었던 난민들에게 자녀 교육을 맡겼다.
그들은 책도 연필도 책걸상도 없이 수업을 하기 위한 교수법을 개발했다. 교실은 대개 천막이었고 밖에서 수업을 하기도 했으며 실내에서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몇 년 전에 베이루트 “알 자나Al JANA” 센터에서 고告 제이나브 사칼라Zeinab Saqallah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1930년 자파Jaffa 생인 그녀는 예루살렘 다르 알-무알리마트Dar al-Muallimat 대학을 졸업했고 나크바 때 가자에서 쫓겨났다. 망명 초기 몇 년 동안은 어느 국제 기구에서 난민들을 가르쳤다. 이후 UNRWA가 가동되면서 그곳의 직원이 되었다. UNRWA가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가자에서는 미국퀘이커교도회의 미국친우봉사회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AFSC)가, 다른 지역에서는 국제적십자연맹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도왔다.
1949년에 설립되어 1950년 5월에 활동을 시작한 UNRWA는 이름에[1][역주] 국제연합 근동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사업 기구United Nations Relief and Works Agency for Palestine Refugees in the Near East (UNRWAPRNE; UNRWA). 한국에서는 대개 … (계속) 그 임무가 분명히 선언되어 있다. 바로 “구호와 사업”이다. 보건, 구호, 비상 사태, 기반시설, 교육 등을 관장한다. 특히 중요한 교육의 경우에는 초등 교육과 [초중등 교육과정 사이의] 중간 교육을 책임지며 레바논에서는 중등 교육까지 제공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팔레스타인인들을 그들의 땅에서 뿌리 뽑으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이름에도 활동 영역에도 반영되지 않았다. 이것이 얼마나 깊은 박탈감을 주었을지는,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서안, 가자에 걸쳐 그들이 몇 년이나 천막에서 살았던 데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요르단은 동요르단과 ― 동예루살렘을 포함하는 ― 서안으로 두 동강 났다. 그곳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루 속히 집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기다림은 길어졌다. 천막은 점차 난민촌의 임시 주택으로 바뀌었다. 몇 세대가 이어졌고, 귀환은 하루하루 가망 없는 일이 되어 갔다.
UNRWA를 비롯한 갖가지 기구들의 존재는 난민들이 귀환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팔레스타인인들을 영원히 난민 지위에 묶어 두려는 각국의 실험에 힘을 보탰다. 지금 와서 보면, 나크바에 공모한 나라들이 표명한 귀환권 “지지”에는 실체가 없음이 자명해졌고, 이는 특히 1948년 12월 11일에 [유엔 총회] 결의안 194호에 찬성표를 던진 데에서 정점에 달했다. 해당 정부들이 [팔레스타인인의 귀환권을 천명한 결의안에 찬성하는] 동시에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수용국에 “통합”하려는 시도를 벌였던 것이다. 이런 이중성은 “송환이나 재정착을 통한 재통합”을 지지한 1952년 1월 26일 유엔 총회 결의안 513호에서 더없이 극명히 드러난다. 수용국 정부들에 이 프로그램의 도입을 촉구하는 데 더해 UNRWA와의 조율을 통해 재통합 및 구호 활동의 책임을 조속이 이양 받기를 요구한 결의였다.
머기McGhee 플랜 (1949), 시리아 자지라Syrian Jazira 프로젝트 (1952), 시나이Project (1951-1953), 존스턴Johnston 플랜 (1953), 존 포스터 덜러스John Foster Dulles 플랜 (1955) 등 [주로 합중국의 경제 원조를 통해 팔레스타인 난민을 수용국에 정착시키려 했던] 다른 여러 국제 구상과 마찬가지로, 당시 난민들은 이 결의의 의미를 잘 알았고 단호히 거부했다. 수용국에서의 여건은 혹독했고 일부 지역은 적대적이기까지 했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고용 기획이나 재정적 유인책에 흔들리지 않았다. 나크바는 특수한 집단적 정치 의식을 형성했고, 그들은 이런 기획들이 진짜로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를, 실은 귀환권을 대가로 치르고 영원히 재정착하게 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 강제 추방 최초부터 그들이 중시해 왔던 ― 자녀 교육에 집중했다.
그 결과, 1950년에 총원 35,000명 규모 93개교였던 UNRWA 학교는 1958년에는 386개교로 늘었다. 현재 UNRWA는 난민 학생 545,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 711곳, 서안과 요르단에서 과학대학 두 곳, 5개 지역을 합쳐 학생 8,000명을 대상으로 직업훈련소 여덟 곳을 운영한다. 또한 교육 부문 고용 규모는 19,877명에 이른다.
1960년 이후로 교육은 더는 천막에서 행해지지 않았다. UNRWA에서 자체 학교를 건설하면서 교육은 재정과 인력을 갖춘 독자 프로그램이 되었다. UNRWA 정규 지출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비율은 196년대에는 1/3이었으나 1980년대 중반에는 절반에 이르게 된다.
그 기간 내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격에는 UNRWA에 대한 중상모략이 수반되었다. 교안이 반이스라엘적이라며 비난하곤 했다. 하지만 UNRWA에서는 수용국의 교안을 준용하며, 이것이 현지 중고등교육을 받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동시에, UNRWA 학교에서는 난민 아동들의 정체성을 강화할 고국의 역사와 지리에 대한 교육을 하지 않는다. 학생들은 승인된 교안 내에서 기본적이고 관습적인 수업을 받는다.
팔레스타인 교사들은 이를 거부하고 해당 내용을 포함하기를 요구했다. 1960년에 말에는 UNRWA에서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 관련 교육 자료를 보강할 교육 자원 위원을 위촉하게 하는 큰 성과를 내기도 했다. 초등, 중간 교육 수준을 위한 팔레스타인 역사 교안이 개발되었고, 레바논에서 1970년대 초에 수업이 시작되었다. 원래는 이를 다른 지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으나 그렇게는 되지 못했다. 1980년대 말 경 이 기획이 무산되었고, 해당 교안은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 UNRWA는 기부자들로부터 큰 공격을 받고 있다. UNRWA를 해체하려 드는 이들이다. 2018년 트럼프 정권 때 삭감된 합중국 재정 지원이 바이든 정권 때 복구되기는 했지만, 이를 위해 UNRWA에서는 백악관과의 합의문에 서명하고 활동 내용을 바꾸어야 했다. 트럼프가 돌아오면서 재정 지원은 다시 한 번 삭감되었고, 다른 나라들 역시 직원 중립성을 문제 삼는 이스라엘의 혐의 제기를 언급하면서 지원을 삭감했다. 이는 UNRWA와의 전쟁에 불을 지폈다. 정작 진짜로 싸워야 할 상태는 UNRWA를 ― 78년 가까이 미결 상태로 남아 있는 난민 문제를 종결 처리 해버리기 위한 ―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이들인데 말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해결되지 않을 복잡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UNRWA 직원들 중에 부끄러운 짓을 하는 이들이 있음을 덮어두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
팔레스타인 투쟁을 보다 균형 있게 대하는 국가들이 나서 재정 격차를 해소하지 않는 한 이 수단은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쓰일 것이다. 팔레스타인 난민 사회를 무너뜨리고 핵심 권리들에서 주의를 돌리는 일이 계속될 것이다. 이런 시도들이 계속해서 성공하고 있기에, UNRWA는 줄곧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주
| ↑1 | [역주] 국제연합 근동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사업 기구United Nations Relief and Works Agency for Palestine Refugees in the Near East (UNRWAPRNE; UNRWA). 한국에서는 대개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로 약칭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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