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Ahmad Abu Shawish, “Trapped between two different worlds,” The Electronic Intifada, 2026.01.22.

가자 시간으로 밤 아홉 시다. 이곳은 가자 중부의 누세이라트. 깨져서 나일론 천으로 막아둔 창에 빗줄기가 세차게 부딪는다. 틈이 조금만 있어도 바람이 밀고 들어온다. 나는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들고 아버지를 생각한다.
2023년 전까지는 밤마다 커피를 들고 한참을 걸으며 긴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밤은 산책은 하지 않고, 왓츠앱 영상 통화로 이야기를 나눈다.
아버지가 전화를 걸자 빗소리가 두 겹이 된다. 창밖에서 한 번,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탈리아에 있는 아버지의 전화기에서 되울려 또 한 번 들린다. 한 폭풍이, 서로 다른 두 세계에 몰아친다.
내 아버지 모함마드 아부샤위시 박사는 어머니와 다섯 남매, 우리 여섯 명을 남겨두고 2025년 9월에 이탈리아로 갔다.
오늘 밤, 화면 너머 우리는 함께 했던 산책과 늦은 밤의 대화가 주었던 위안을 되살려 보려 애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르다.
유럽 아파트의 따뜻하고 안정적인 빛이 아버지의 얼굴을 비춘다. 내 얼굴에는 배터리로 켠 엷은 노란 빛이 내려 앉는다.
산책을 하며 했을 만한 질문 몇 개를 던진다. “최근엔 뭐 했어요? 요즘은 어떤 거 하세요?”
아버지는 상담사지만 반복적인 일상은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다.
전쟁 전에는 늘 여기저기 다니고 학회에 참석하고 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밤늦게까지 논문을 쓰곤 했다. 생산적으로 사는 것을 좋아했다.
요즘은 축 처진 목소리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어. 일이든 연구든 진척은커녕 집중도 안 돼. 오로지 어떻게 해야 너희가 안전해질까 하는 생각 뿐이야.”
둘 다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유는 다르지만 나도 같은 기분이라고 답했다.
오로지 현금만 통한다
아버지가 떠난 후,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이 쌓여가며 하루하루를 잠식했다.
나는 오남매 중 장남이고 바로 밑의 동생은 열여섯 살, 막내는 세 살이다. 공부를 하거나 다른 목표를 이루기는커녕 나 자신을 돌보기조차 힘에 부친다.
가자 이슬람대학교에 등록하긴 했지만 요즘 학교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으니 그저 절망에 빠져 있다. 화면 속 아버지에게는 이런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타우지히tawjihi ― 고등학교 졸업 시험 ― 성적을 받고는 2025년 8, 9월을 세계 곳곳에 대학 ― 수백 곳 ― 에 지원 마감을 연장을 애원하는 메일을 보냈다. 내가 늦거나 부주의했던 게 아니다. 성적 증명서를 제때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교육 체계가 완전히 무너져 수천 명이 나처럼 불확실한 상태로 애를 태웠었다.
그가 거리가 멀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나는 상황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다.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자 아버지가 이야기를 돌렸다. “가자에 조리용 가스가 들어 왔다는 소식은 있니? 가스통은 좀 채웠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직도 장작을 사요. 잘게 쪼개서 불을 피우고요.”
그는 한숨을 쉬고는 다음 걱정거리로 넘어갔다.
“창문은 어때? 비랑 바람 안 들이치게 새 천 덧댔어?”
가자에 진짜 창문이 남아 있는 집은 거의 없다. 찢어진 비닐이든 망가진 액자든, 한기를 막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주워다 걸쳐 놓을 뿐이다.
“아직이요. 일단은 박스 종이로 막아 놨어요. 카드 받아주는 나일론 파는 데를 찾아보고 있어요. 현금은 진짜 급한 데 쓰게 아껴둬야 하니까요.”
가자에서 통하는 돈은 현금뿐이다. 카드는 선택권이 없다.
통화를 하다 어느 순간, 우리 사이가 멀게 느껴졌다.
물리적 거리가 아니라, 각자가 홀로 지고 있는 무게가 만든 거리감이었다.
마지막 탈출 기회
아버지도 나도 조용한 성격이다. 좀처럼 불평을 하지 않고, 두려운 게 있어도 잘 말하지 않는다.
2023년 9월, 아버지는 밀라노-비코카 대학 박사후 과정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그해 10월에 출국해야 하는 일정이었다.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여러 번 전화를 걸어 대피를 재촉했지만 공부를 몇 번이나 미뤘다. 파괴와 피란이 채운 그 기간 내내 우리와 남기를 택했다.
그는 인종학살이 곧 끝나고 다 같이 이탈리아로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차 희망이 사라져 갔다. 700일이 넘게 지나고, 우리는 이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아픈 확신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우리 모두를 피신시켜 주기를 바라며 2025년 9월에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달 말께 금요일 아침, 대사관의 담당자가 전화로 전한 말은 이랬다. “대피 일정이 월요일로 잡혔습니다.”
가족에 대해 물을 새도 없이 담당자가 덧붙였다. “안타깝지만, 혼자서요.”
다음 말은 이랬다. “지금 단계에서는 가족 분들은 대피 명단에 올릴 수 없습니다, 혼자 가셔야 해요. 생각해 보실 시간은 두 시간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단호히 거절했지만 우리를 불러 생각을 물었다. 기나긴 두 시간 동안 우리는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가야 한다고 떠밀었고, 다 똑같이 단호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와 동생들도 동의했다.
나는 그것이 우리 가족에게 큰 힘이 되리라고,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평생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단 아버지부터 가고 나면 우리가 다시 같이 살기도 더 쉬울 거라고 확신했다.
우리는 감정보다 이성을 택했고, 아버지도 가는 데에 동의했다.
병원에서 보낸 밤
아버지의 출국 전날 밤, 가족이 다 같이 모여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못할 일을 했다. 밤 아홉 시, 데이르 알-발라에 있는 알-아크사 순교자 병원에서 새벽 두 시로 예정된 출발을 다섯 시간 남겨 두고 작별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동생 오마르, 친구 하산과 함께 병원까지 가는 길에 동행했다. 밤 열 시 반에 도착해 딱딱하고 불편한 병원 의자에 앉아 밤을 보냈다.
아버지와 동생을 꾸벅거렸고 하산과 나는 깨어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현실감이 없네”, 하산이 말했다. “너희 아버지는 불길을 벗어나시는데, 우리는 계속 그 속에서 살아야 하잖아.”
버스는 네 시쯤 출발했다. 문 앞에서 아버지와 포옹을 하고, 시동 걸린 버스 곁에 서서 차창 너머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하산과 동생, 나는 아침이 밝아 택시가 다닐 때까지 병원에서 밤을 샜다.
이탈리아어를 공부할 것인가 말 것인가
아버지는 이탈리아어 공부는 시작했느냐고 물었다.
그날 처음 한 말은 아니었다. 밀라노에 도착하고부터 줄곧 이탈리아어를 배우라며 “여기 올 준비를 해야지” 하는 말을 반복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이다. 내가 갈 수 있을 거라 믿어지지가 않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샬라” 하고 말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웃으며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가자 이슬람대학교 공학 수업만으로도 하루가 다 가는데 집안일도 해야 하고 식료품을 사거나 물을 받으러 줄도 서야 한다.
아버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 물었다. “뭘 기다리는 거니?”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그런가봐요. 올 일도 없는 미래를 준비해서 뭐 해요?”
그는 그런 “비관적인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했다.
“다시 같이 살려면 이탈리아어를 배워야지.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
나는 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말해야 솔직한 답일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픽셀이 뭉개지는 아버지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인샬라.” 그게 약속이 아니라 이 이야기에 완전히 종지부를 찍지는 않으려고 하는 말이란 건 피차 알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