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결을 기다리며
나날이 못 견디게 무거웠다. 산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얼마 안 남았다는 휴전 협상에 관해 서로 말이 안 맞는 기사들을 쉬지 않고 거르며 매 분 매 초를 보냈다. 혹독한 천막 생활이 끝날지 어떨지가 거기에 달려 있었다. 이 피란의 도돌이표가 마침내 끝날까? 2025년 1월은 끝없이 늘어졌고, 나는 절망과 찰나의 희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마침내 결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1월 15일 수요일 저녁, 기다리고 기다렸던 휴전 합의가 공표되었다. 우리는 모두 천막으로 달려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우리 존엄의 ― 죽음과 파괴의 혼돈 속에서 잃어버렸던 ― 일부를 되찾기라도 했다는 듯이. 하지만 이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미완의 행복이었다. 물 밀 듯 몰려오는 고통스런 기억들과 상실을 어찌 할 수가 없었고,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이 터졌다. 여동생을 잃은 고통에 울었고 끝나지 않는 피란의 참상에 울었고 두려움에 떨었던 긴긴 밤들에 울었다. 그 순간의 눈물에는 깊은 슬픔과 갈망이 ― 나의 땅 가자에 대한, 오로지 기억으로만 남은 삶에 대한, 인종학살이 앗아간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 섞여 있었다. 나날이 커진 향수가 이제 내 존재의 모든 순간을 뒤덮어버린 것 같았다.
마지막 숨까지 거두는 인종학살
하지만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았다. 점령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 삶의 구석구석을 고통으로 얼룩지게 하는 나쁜 버릇이 있는 탓이다. 휴전 지연은 계속되고 있는 인종학살의 연장, 집을 무너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휴전이 발표되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순교자를 거두어 간 그 인종학살의 연장이나 다름 없었다. 휴전 전야였던 토요일 밤,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무서운 생각에 잠긴 채 아이들을 꼭 끌어 안았다.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마지막 공포의 밤에 아이들을 잃을까 두려웠다. 끊이지 않는 폭격 소리가 우리가 피신해 있던 곳 근처의 건물들을 무너뜨리며 하늘을 채웠다. 우리는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초조하게 아침 여덟 시 반을 기다렸다. 일요일, 이스라엘에게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휴전을 몇 시간이나 미루며 우리의 즐거움을 계속 빼앗으려 들었다. 전쟁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를 지연된 희망의 쓰라림으로 내몰았다.
그 즈음에는 협상의 세부 사항 ― 특히 피란민 귀환 일정과 방법 ― 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들려오는 정보는 서로 안 맞고 불분명했다. 불확실성이 신경을 갉아 먹었다. 한참을 오락가락한 끝에야 확정되었다. 귀환은 1월 26일 일요일, 정확히 휴전 일주일 차에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귀환을 앞두고
한 주가 못 견디게 길었다. 혼란과 기대가 뒤엉켜 속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 근처의 대피소에 지원을 나갔다. 일을 하니 시간이 빨리 갔다. 맡은 일이 끝나면 바닷가에 앉아 맴도는 생각을 떨치려 애썼다, 무슨 일이 생겨서 협상이 취소되면 어쩌지. 남은 생을 천막에서 보내게 되는 걸까. 돌아가는 날이 정말로 오기는 하는 걸까. 가자의 거리를 다시 걸어볼 수 있을까. 이 피란의 악몽이 언젠가는 끝날까. 이 불안도 진정될까, 아니면 1948년 나크바 후로 우리 조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헛된 희망에 사로잡힌 채 살게 될까. 속에서 이런 질문들이 소용돌이쳤다. 답은 없었다.
천막은 가자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 누웨이리Nuweiri 언덕 옆 알-누세이라트Al-Nuseirat 난민촌의 바닷가에 ― 쳤다. 휴전일이 다가오면서 원래 살던 집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을 찾아 모여든 피란민들이 임시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다. 추위가 살을 에고 생필품은 부족했지만 귀환이 머지 않았다는 희망을 붙들고 모두가 고된 기다림을 기꺼이 견뎠다. 밤에는 많은 이들이 불을 지펴 몸을 데웠다. 곁에서는 젊은이들이 민족 전통의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띄우고 끝이 안 보이는 시간을 채웠다.
우리는 소지품이 많았고 집으로 가는 길이 아이들에게 힘들 것도 걱정이었다. 그래서 우리 작은 가족은 차로 돌아가기로 했다. 차를 타면 걸어가는 것보다 먼 길로 가야 해서 슬펐다. 걸어가는 사람은 서쪽 해안을 따라 알-라시드Al-Rashid 도로로 가지만 차량은 그와 평행해 동쪽에 있는 살라 알-딘Salah al-Din 도로를 타고 돌아가야 했다. 알-라시드 도로로 가고 싶었다 ― 그것이 가자에 있는 내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마침내 토요일 밤이 ― 피란 생활에 종지부를 찍어 주었어야 했던 밤이 ― 왔다. 하지만 점령의 아집은 또 한 번의 지연을 강제했다. 하루가 통째로 더 밀렸다. 백만 명이 넘는 피란민들이 정말로 귀환이 허락될지를 궁금해 하며 공포와 불안으로 그날 남을 보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딱 하루로 끝났다. 1월 27일 월요일에 귀환이 시작되리라는 발표가 나왔다. 마지막 날은 짐을 싸며 보냈다.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전부 담았다. 그러고는 바닷가에 앉았다. 이것이 마지막 피란이었다. 희망과 불안이 뒤섞였다.

귀환의 장관
마침내 1월 27일 월요일 ― 우리가 오래도록 고대했던 귀환의 날 ― 의 해가 밝았다. 그날 아침에 잠에서 깬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갈망과 기대감이 가라앉지 않아 밤새 한 잠도 못 잤다. 다들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돌아갈 집이 없어 천막을 등에 지고 가는 이도 있었다. 인종학살 내내 견뎌야 했던 고통의 기억을 불사르기라도 하는 듯 천막을 날려버리는 이도 있었다. 사방에서 피란민이 몰려 들어 해안 도로를 향했다. 일가족들, 아이들, 노인들 ― 모두가 굳은 결의로 가자를 향해 출발했다.
지팡이에 의지해 느릿느릿 걷는 나이든 여성이 보였다. 그런 그녀도 돌아가는 길이었다! 팔레스타인 전통 복장 차림이었다. 1948년 나크바를 살아남은 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래 살던 마을이 아니라 어느 난민촌으로 돌아간다. 갓난아기를 ― 전쟁통에 태어난, 처음으로 집에 가는 작은 영혼을 ― 품에 안은 엄마들도 보였다. 가자를 향해 길을 서두르는, 전쟁으로 팔다리를 잃은 젊은 남자들도 보였다. 목발을 짚은 이도 있었고 치료 중인 팔다리에 쇠막대가 박혀 있는 이도 있었다. 통증에도 개의치 않고 걸어서 돌아가기로 한 이들이었다. 걷지 못하는 이는 가족들이 들것에 실어 옮기거나 휠체어를 밀었다. 남겨두지 않았다. 칸 유니스Khan Younis나 데이르 알-발라Deir Al-Balah 같은 먼 피란지에서 온 이들이 많았다. 차로는 갈 수 없어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 사이에서 걸었다. 그런 이들은 가다 지치면 짐을 줄이고 다시 길을 나섰을 것이다.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걸어서 귀환하는 이들의 행렬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오, 소망의 관을 쓴 귀환의 길이여”
우리는 차를 타고 살아 알-딘 도로를 향했다. 며칠 전부터 차들이 모여 귀환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으로 칸 유니스에서부터 북으로 알-누세이라트까지 길게 이어진 광경에 숨이 막혔다. 우리는 교통 체증을 피해 몇 시간은 아낄 수 있는 비포장 도로를 타기로 했다. 점령군이 깎아 둔 구불구불한 길이었다. 목적 없이 꿈틀대는 뱀처럼 구불거리는 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피란민들에게 고통을 주려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굽이가 많을 이유가 없었다. 길은 이제는 완전히 초토화 되어 끝없는 잔해들의 사막 같은 모습이 되어버린 무흐라카Mughraqa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주민 몇몇이 힘든 생활에 도움이 될까 무어라도 건질 수 있기를 바라며 폐허가 된 제 집을 살펴보고 있었다. 길 동쪽에는 접근 금지 표지판이 있었다. 점령군이 아직 있었기 때문이다. 지평선을 따라 탱크들이 서 있었고 이따음 경고 포격음이 울려 퍼졌다.
길은 붐볐고 필수적인 것들을 전혀 구할 수 없었다. 연료가 떨어지거나 배터리가 다 되어 ― 잔해로 가득한 황폐한 구역을 지나며 겪은 많은 어려움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멈춰선 차를 여러 번 지나쳤다. 몇 시간을 달려, 협상안에 따라 이집트-카타르에서 나온 이집트인들이 관리하는 차량 검문소에 도착했다. 뒤에서는 완전무장한 미 해군이 검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와 아이들은 차에서 내렸고 남편은 차를 몰아 스캐너를 통과했다. 합중국 군인 한 명이 멀찌감치서 활짝 웃으며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 그런 험악한 상황에선 이상하고도 낯선 광경이었다. 이집트인 담당자가 따스한 말씨로 인사를 건네는데 거리감과 슬픔이 뒤섞여 밀려들었다. 괴로운 마음에 아이들의 손을 꼭 쥐고 길 건너편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재회
가자까지 몇 분 안 남았다. 서 있는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끝이 안 보이는 잔해가 펼쳐져 있었다. 거리들이, 골목들이, 동네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15분이 넘도록 사람 한 명 못 만나다가 마침내 한 무리의 청년들을 발견했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가자시 남쪽의 8번 도로라고 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 주변이 전부 무너져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시야를 막는 것이 전혀 없었다.
가슴 속 기쁨이 얼어붙었다. 모든 것이 재가 되었다 ― 삶도 희망도 남기지 않고. 우리가 알던 거리들, 건물들의 위치를 짐작하며 낯선 길들을 지났다. 점차 삶의 기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대체 무언가. 사방에 쓰레기가 흩어져 있고 구석구석 오수가 넘쳐 흐르는 파괴된 거리들. 도무지 살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집에도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여건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붙들고서, 살고 있었다. 동사凍死의 세상에서 온기를 찾는 손들이 피운 모닥불이 곳곳에서 피어 올랐다.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신 집을 찾아 거리거리를 헤맸다. 아버지 ― 1948년 나크바를 겪은 단단한 참나무 ― 는 평생 망명살이를 하다 가자에 터를 잡았다. 완고하게도 가자시는 고사하고 집조차 떠나지 않겠다고 했었다. 우리가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었고 팔레스타인 역사 내내 그랬듯 무슨 짓을 해도 가자 사람들을 내쫓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어머니 ― 내 인생의 향기로운 꽃송이 ― 는 가차 없이 몰아치는 절멸, 포위, 기아에 굴하지 않고 집을 따뜻하고 깨끗하게 가꾸며 이 모든 파괴에 맞섰다. 폭격이 방들을, 창문들을, 문들을 차례차례 집어 삼켜도 그녀는 견뎠다.
문 열린 집에 다가가자 오래된 재스민 나무 향기가 나를 맞았다. 포격과 백린에 시들어버린 가지로도 여전히 마법을 부린다. 발보다 가슴이 먼저 움직여 부모님 품에 뛰어들었다. 멀리 떨어져 궁핍과 눈물로 몇 달을 보낸 끝에 마침내 이렇게 재회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따스한 집에서, 지붕이 있는 곳에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니 ― 적어도 일단은, 더는 천막에서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 믿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대규모 지상 공격의 영향권에 들었던 우리 집을 확인하러 갔다. 처음에는 거리도 동네도 알아볼 수 없었다. 기적적으로 아파트가 무너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가자에서 해피엔딩은 결코 오래 가는 법이 없다. 건물을 점검한 기술자들은 상하수도와 전기 설비가 완전히 망가졌고 기초도 걷어내고 새로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집에는 포탄과 총알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고 불에 탄 곳도 있었으며 남은 것은 죄 도둑들이 털어간 뒤였다.

불사조 가자
며칠이 지나서야 내가 정말로 가자에 돌아왔다는 게 믿어졌다. 매일 같이 폐허 사이를 걸어 거리를 돌아다니며 완전히 달라져 버린 익숙한 지형지물을 찾았다. 요즘은 파괴된 곳을 지나가면서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려 애쓴다. 전에는 가자를 손바닥 들여야 보듯 했음에도 대부분 실패한다. 같은 거리를 매일 보면서도 아직도 충격을 받는다. 이 파괴의 면면이 매일 새로 드러난다.
멍한 눈으로 걷는다. 내가 사랑했던 옛 가자를 찾아보지만 온데간데 없다. 순교자들의 피가 섞인 흙을 밟는 걸음 걸음이 슬픔으로 무겁다. 전에는 아이들의 웃음과 생활의 소리로 가득했던 골목을 지난다. 이제는 그저 고요하기만 하다. 집들은 무덤이 되어, 지금까지도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세간을 품고 있다. 지난 즐거움의 소리가 여전히 들린다고 상상하며 계속 걷는다. 눈물은 가슴에 고일 뿐 흐르지는 않는다. 울 줄 모르게 되어버린 것만 같다.
하지만 이 불사조 도시는 늘 죽었다가도 살아난다. 살 길을 뚫는다. 엄혹한 폐허에서 한 송이 꽃을 피운다. 저 모든 고통과 계속되는 봉쇄에도 불구하고 가자 사람들은 공들여 집에 남은 것들을 되살리고 한때 활기 넘치는 집이 서 있었던 땅에 새 천막을 친다. 세상이 재건 약속을 지키지 못할 때 가자의 용감한 젊은이들은 가슴에 희망을 품고 결연히 폐허에 깔린 삶을 되찾는다. 인종학살의 마수에서 살아남은 가자는 가자에서 산 적이 있거나 가자를 아는 이들의 가슴 속에 언제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죽음을 거부하는, 희망과 저항의 도시로. 기만과 배신으로 가득한 세상에 단 하나, 온 마음을 다하는 도시로.
온 세상이 우리에게 등을 돌려도 우리는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가자는 계속해서 저항할 것이다. 되살아 날 것이다. 역사 내내 그래 온 것처럼.
내가 늘 말하듯이,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1]역주 ― 아래 편집자주에서 언급되는 앞 글에서는 조금 다르게 번역했다. ― 끝까지.
누르 압델 라티프는 북가자 출신의 어머니이자 작가다. 이 글은 《뉴욕 전쟁범죄》 16호에 실렸다. 2024년 10월 7일에 발행된 이전 호에 실린 그녀의 글 ― 피란과 슬픔의 일기 ― 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번역] 「내가 굶어야만 한다면」 外 (누르 압델 라티프, 2025) - memoranda
[…] 휴전이 타결되었던 지난 1월에, 누르는 두 번째 증언을 송고했다.[2]역주 ― 「우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 끝까지」 이번에는 가족과 함께 가자시로 돌아간 이야기였다. 길었던 몇 달의 공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