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Nour Abdel Latif, “‘I have lived my life with only half a heart’”, 2024.10.07.
여성이라는 것은 종종 삶을 고달프게 만든다. 그런데 이 여성이 점령 당한 나라, 18년째 봉쇄되어 있는 ― 가자 같은 ― 곳에 산다면 어떨까?
여느 워킹맘과 다를 것 없이, 내 삶의 중심에는 네 살부터 열 살까지 세 아이를 돌보고 수백 명의 어린이를 가르치는 두 역할 사이에서의 균형 잡기가 있었다. 감당 안 되게 어려운 일인지라 밤이면 완전히 진이 빠져서 꿈도 안 꾸고 잠에 빠졌다. 우리 삶의 여러 면을 치고 들어온 “이스라엘의” 점령은 삶을 더더욱 고달프게 만들었다. 예컨대 매일 아무 때나 전기를 쓸 수 있는 게 아닌 탓에 오락가락하는 전기 사용 가능 시간을 기준으로 일과를 짜야 한다. 이런 불편마저도 꿈도 못 꾸게 될 줄은 몰랐다. 진짜 최악의 상황은 아직이었다.
인종학살이 시작되다
평범한 어느 아침, 아들 야멘의 유치원 가방을 싸고 있는데 갑자기 가자의 하늘에 미사일이 떼로 솟아올랐다. 전쟁임을 직감했지만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진 알 수 없었다. 티브이에서,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일이 벌어지는 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모든 팔레스타인인을 해방하고 너무도 오랫동안 부정 당해왔던 우리 땅을 되찾는 꿈에 눈물이 흘렀다. 몇 시간 후 내가 사는 도시에 폭격이 시작되었다. 찰나의 자유에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를 깨달았다.
인종학살의 나날이 시작된 것이었다. 우리 눈 앞에서 온 동네가 불탔다.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공포로부터 지켜주려 했지만 될 일이 아니었다. “이번엔 새 미사일이야, 엄마.” 아홉 살 난 딸 주마나가 말했다. “떨어질 때 뱀 같은 소리가 나!”
집중 폭격이 내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닷새 밤이 지나자 알-카라마Al-Karamah 주민들이 대피했다. 다음은 우리 차례였다. 엿새 째 되던 날, 필수품을 챙겨 보다 안전한 곳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평생 그렇게 어려운 일은 처음이었다 ― 내 온 생을 어떻게 가방 하나에 다 담을 수 있으랴.
반쪽 심장의 여자
전기는 완전히 끊어졌고, 소식을 들을 길이라곤 지역 라디오 방송밖에 없었다. 그날 저녁에는 여동생이 사는 곳 근처가 폭격 당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동생도 동생의 남편도 받지 않았다. 걱정에 휩싸였다. 저녁 여섯 시부터 발 열 시까지, 애타게 소식을 기다렸다. 마침내 친척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동생이 있기를 바라며 알-시파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시신의 일부만 겨우 수습되어 있었다. 사방을 압도적인 죽음에 둘러싸여, 작별인사를 하지도 장례를 치르지도 않았다. 그날 밤은 그저 슬픔에 사로잡힌 채 보냈다. 그 후로, 나는 반쪽짜리 심장으로 생을 살아간다.
피란은 슬픔
10월 13일, 점령군이 뿌린 전단지가 가자시의 하늘을 뒤덮었다. 이곳을 떠나 가자 지구 남부의 이른바 “안전 지대”로 가라는 전단이었다. 휴대전화로 대피령도 받았다. 이미 가족과 함께 알-샤티Al-Shati 난민촌으로 피란해 지내던 때였다. 충격과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골목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국제 기구들에서 사람들을 가자 지구 남부로 대피시키기 시작할 거라고 발표했다. 공포가 물밀 듯 퍼졌다.
가자시의 거리거리가 쓰레기로, 죽음의 냄새로, 피할 데 없는 두려움으로 가득 찬 유령 도시로 변했다. 시온주의자들이 난민촌 습격을 준비하며 쉬지도 않고 하늘, 땅, 바다를 폭격해 대는 와중에,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순전한 공포로 밤을 보냈다. 라디오로만 뉴스를 들으며 침례교 (알-아흘리Al-Ahli) 병원 학살 보도에 겁에 질렸다. 어린아이들의 시신 사이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들으며 목놓아 울었다. 겁에 질린 우리 아이들이 열이 나기 시작했고 위험이 임박해 왔따. 가족들은 집을 떠나지 않겠다며 남기로 했고, 나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가족들과 작별했다.
라파로 갔다. 친구들, 친척들이 두 팔 벌려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하지만 가자시를 떠났다는 쓰라림은 가시지 않았다. 폭격은 거기에서도 이어져서, 도착했을 때부터도 “안전 지대” 같은 것은 없었다. 가자시에서는 계속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다. 알-샤티 난민촌은 정말로 습격 당했고 가족들은 포위 당해 연락이 두절 되었다. 내 곁에는 나를 안심시켜 줄 여동생도, 안아줄 어머니도 없었다. 잠으로 도피하며 주위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그것만이 슬픔을 헤쳐나갈 수 있게 했다.
내가 피신한 집으로 피란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었다. 한 건물에 서른 가구쯤이 모였다. 포위가 강화되었다. 빵집이 문을 닫았고 우리 여자들이 얼마 안 되는 배급으로 빵과 먹을 것을 만들어야 했다. 식수마저도 배급을 받아야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할머니 때처럼 손빨래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다가 아니어서, 조리용 가스도 끊어져 장작불로 빵을 굽고 요리를 해야 했다. 냉장고가 없으니 음식이나 남은 빵을 보관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곰팡이를 긁어 내고 빵을 먹는 것밖엔, 달리 수가 없었다. 설탕, 이스트, 채소, 과일 등의 공급이 줄어들면서 식재료라고는 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뭐라도 좋으니 신선한 음식을 먹고 싶어했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통조림이 다였다.
피란에는 사생활도 없었다. 한 집에서 다섯 식구가 거의 커튼만으로 공간을 나누어 생활했다. 특히 여자들은 화장실이나 샤워실을 마음대로 쓰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물탱크도 비어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물을 받아 와서는 온종일 조금씩 나누어 써야 했다.
교사에서 멀티플레이어로
점차 나는 어린 학생 수백 명의 교사에서 피란 생활에 전념하는 엄마로 변해갔다. 아침마다 빵을 만들고 물을 받아오고 장작불을 피워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폭격음이나 괴로운 뉴스가 들려올 때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을 달래다가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그러면서도 시종 매일매일 가자시가 파괴되고 있다는 뉴스를 챙겨 들었다. 가족들은 소식이 없었다. 터전을 잃은 이들이 모인 집에서 TV로 가자가 남김 없이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잠들 수 있도록 동화를 들려주었다.
겨울이 오자 상황이 더 나빠졌다. 얼음장 같은 물로 빨래를 하느라 손이 갈라졌다. 샤워할 물은 데워서 썼다. 이웃집이 폭격 당할 때 깨져버려 창에 유리도 없는 방에서 지냈다. 차가운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겨울밤을 보내면서 꼬맹이들을 끌어안았다. 그저 이 공포의 한가운데에서 조금이라도 온기를,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서 그랬다. 천막이나 임시거처로 내몰리지는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서 일은 더 복잡해졌다. 병이 옮을까 두려워 인근 진료소에는 가지 않았고, 대신 내가 의사이자 간호사가 되었다. 인종학살이 길어지면서는 원래 직업인 교사로 돌아가 내 아이들, 그리고 다른 피란민 아이들에게 학교에 못 가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내게 남은 것
가자가 랜드마크들을 잃는 동안, 나를 비롯해 많은 여성들은 자아감각을 잃었다. 우리가 겪은 공포는 우리 몸에, 건강에, 정신적 안녕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여동생이 죽은 날 밤에는 새카맸던 머리가 거의 하룻밤만에 새어 은발이 되더니 점차 빠지기 시작했다. 북부에 사는 친구들은 물이 부족해 긴 머리를 잘라야 했다. 이와 싸우기 위한 마지막 발악이었다.
식사는 부실하고 하루하루가 고되기만 해서 탈진할 지경인데, 피란해 머물렀던 집에 걸린 깨진 거울을 볼 시간조차 없다시피 했다. 더 이상 내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 옷을 입고 몸에 익지 않은 삶을 살았다. 스스로를 돌보는 사치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허리가 아팠고 생리 주기는 불규칙했고 줄곧 불면증에 시달렸고 나나 가족들이 목숨을 잃는 갖가지 상황을 떠올리며 겁에 질렸던 이야기를 시시콜콜 하지는 않으련다. 저녁이 되어 울 수 있기를 기다리곤 했다. 혼자만 이렇게 슬프다는 생각이 들 때면 옆방에서 숨죽여 우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궁금했다. 여동생이 순교한 나의 슬픔을 온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비길 수 있을까. 남편을 잃은 아내의 슬픔과 순교자의 딸의 슬픔은 어떨까. 확실히 순교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것이 더 고통스러울까, 아니면 사랑하는 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을 견디는 것이 더 힘들까.
아침이 오면 눈물을 닦고 가혹한 생존의 현실로 돌아갔다.
텐트야말로
몇 달 동안이나 예상했던 대로, 라파 침공이 시작되었다. 어찌저찌 점령의 삼각형 ― 천막, 감옥, 무덤 ― 바깥에 머무는 것도 그때까지였다. 더는 피할 수 없었다.
부득불 텐트를 샀다. 공짜여야 했지만 결국 700 달러 쯤을 치렀다. 광고에서는 노르웨이 텐트라고 했다. 하지만 치고 보니 독일의 원조를 받아 노르웨이 정부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딱 그렇게, 내가 불을 피울 때마다, 좌절감에 울 때마다, 삶이 갈수록 힘들어 질 때마다, 텐트 위에 걸린 독일국기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여름의 텐트는 지옥의 축소판이었다. 낮의 열기는 견딜 수가 없었다. 소금물밖에 없어서 모든 것이 망가졌다 ― 소금물로 씻느라 피부가 벗겨졌고 그릇도 옷가지도 소금기로 뒤덮였다. 온갖 데서 짠맛이 났다. 깨끗한 옷마저도 낡아 보였다.
가스가 희귀하니 어쩔 수 없이 불을 피워 요리를 하고 물을 데워야 했다. 여름날 오후에 바닷가에서 불을 피워본 사람이라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밥을 지으려고 그걸 매일 했다. 매일 열기에 손끝을 데었고 나무 타는 냄새에 숨이 막혔고 연기에 눈물이 났다. 그을음이 앉은 접시는 쓰기도 설거지하기도 힘들었다. 음식에 모래가 들어가는 게 당연한 일이 됐고, 매일의 억압을 삼키듯 모래를 씹어 삼켰다.
밤이면 텐트는 혹한 지옥이 되었다. 찬 공기를 막아주지 않아 아이들이 자주 아팠다. 아침에는 내리쬐는 볕에 땀에 젖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제도 내일도 똑같이 매일 반복되었다. 그 다음엔? 협상 타결 가능성, 머나먼 꿈에 대한 뉴스를 들었고 온전히 믿지도 완전히 내려놓지도 않았다. 내게는 침대 맡을 날아다니는 파리들과의 휴전 만큼 중요한 휴전도, 아침마다 깨끗한 물로 물탱크가 가득 채우는 것만큼 중대한 협상도 없었다.
어슴프레한 등불 아래에서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왜 세상은 아직도 인종학살을 멈추지 않고 머뭇대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 세상은 팔다리와 생살이 떨어져 나가는 걸 보고서도 가자의 아이들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아픈 아이들이 병원에서 허기와 두려움에 죽도록 방치되는 걸 다 보았으면서. 미숙아가 힘 센 성인 남자라도 되는 양 포위당하는 걸 보고서도. 엄마 뱃속의 태아마저도 무자비하게 살해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은?
한동안은 천막 생활에 무너질 뻔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채소를 사러 시장에 갔다. 사람들을 견딜 수가 없고 주위가 죄 회색에 암울해 보이기만 하던 차에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천막에서 피란 생활을 하고 있는지 볕에 탄 얼굴을 한, 나 같은 여자. 재스민 묘목을 사랑하는 아이라도 되는 듯 품에 안고 있었다. 천막에 가져가 문간에 심으려는 모양이었다. 가슴에 희망이 차올랐다. 외로움이 밀려났다. 돌연 가혹한 천막 생활에 맞서리라는 다짐이 섰다.
아침마다 신선하고 깨끗한 빵을 반죽하기 시작했다 ― 파리가 들끓어도! 깨끗함에 자부심을 갖고서 옷을 빨아 볕에 널었다. 가슴 속은 씁쓸했지만 식사는 사랑을 담아 요리했다.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생활 기술을 가르치고 물어보는 것이 있으면 빠짐없이 답해주었다. 장작불로 인스턴트 커피 한 잔을 끓여 해변가 천막 앞에서 마셨다. 세상 다른 모든 여자들처럼. 걱정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언젠가는 지나갈 것임을, 가자는 남아 있을 것임을, 우리는 남아 있을 것임을, 나는 남아 있을 것임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