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 실린 작품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맞서는예술인들Artists Against Apartheid과 유토픽스Utopix의 협업의 일환으로 세계 각지의 문화 노동자들이 만든 것이다.
카엘 아베요Kael Abello(베네수엘라), 〈저항의 상징들Símbolos de resistencia〉, 2024. 유토픽스 제공.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 그대는 반드시 살아서 내 이야기를 전하고 내 가진 것을 팔아 천 한 조각과 끈 몇 가닥을 사주게 (긴 꼬리가 달린 흰 연을 만들어) 가자 어디에선가 한 아이가 제 살붙이에게도 제 자신에게도 그 뉘에게도 작별 인사 못하고 불길 속에 떠난 아비를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보는 그 아이가 높이 나는 연을, 그대가 만든 연을 보며 잠시나마 저기 천사가 있구나 다시 사랑을 가져오는구나 할 수 있도록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 그것이 희망을 가져오게 해주게 그것이 이야기가 되게 해주게
― 리파트 알라리르Refaat Alareer,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2023)[1]역주 ― 리파트 알아리르 외, 김한나 외 옮김, 『팔레스타인 시선집』, 접촉면, 2025에 실려 있다. 지금 책이 내게 없어서 직접 번역했다.
2023년 10월 14일,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인종학살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난 시점에, 팔레스타인의 작가이자 교육가인 리파트 알아리르는 소셜미디어에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If I Must Die」이라는 시를 게시했다.[2]Alareer, ‘If I Must Die’. 겨우 한 달이 조금 지나, 알아리르는 가자시 동부, 시자이에야 있는 누이의 집에서 남동생, 여동생, 여동생의 네 아이와 함께 이스라엘의 공습에 살해 당했다. 친구들, 동료들이 가자를 떠나야 한다고 그를 설득했었지만 그는 남기로 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행한 수무드(صُمُود) ― 굴하지 않고 그 땅에 남기로 하는 결단을 가리키는 팔레스타인말 ― 였다.
“내가 지금의 내가 된 것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들 덕이다.” 알아리르는 2015년 어느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야기는 팔레스타이인인으로서의, 점령 하에서 살아가는 이로서의, 이 땅의 원주민으로서의 우리 삶에도 중요하다. … 우리를 지금과 같은 우리로 빚어내[고]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과거와 이어주고 현재와 이어주며 미래[에] 대비시켜주기 때문이다.”[3]Alareer, ‘Stories Make Us’. 알아리르는 글을 쓰는 한편 여러 팔레스타인 작가의 책을 편집, 출간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가자의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팔레스타인의 역사, 정체성, 저항의 삭제에 맞설 수 있도록 해외에 있는 멘토를 연결해주는 ― 계속되는 점령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문화 저항의 놀라운 사례인 ― 우리는숫자가아니다We Are Not Numbers를 설립했다.
알 아크사 홍수 작전 (2023년 10월 7일에 하마스에서 이스라엘에 가한 무장 공격) 이후로 가자에서 인종학살은 전 세계가 보는 가운데 생중계되고 있다. 2025년 10월 현재, 67,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이 살해 당했고 피란한 이는 730,000명이 넘으며, 무수히 많은 이들이 불구가 되고 부상을 입고 굶주리고 있다 ― 이 모든 일이 합중국의 든든한 지원 하에 벌어지고 있다.[4]UNRWA, ‘UNRWA Situation Report’. 첫 세 달의 폭격으로만 팔레스타인인의 기대 수명이 11.5년 줄어서, 2022년에 76.7세였던 것이 2023년에는 65.2년이 되었다.[5]Prashad, ‘Life Expectancy Falls in Gaza’. 2025년 4월 현재, UN에서는 주거용 건물의 92%나 손상을 입거나 무너져 5천만 톤의 잔해가 나왔고 치우는 데에 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추산했다.[6]UN Web TV, ‘Searching Gaza’s Missing’. 상상도 못 할 수준의 죽음, 파괴, 고의적 기근이 덮쳐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제2의 나크바’ ― ‘가자 나크바’라고 부르고 있다. 1948년의 첫 번째 나크바(대재앙)은 팔레스타인 땅의 78%를 장악해 5,000개 이상의 시내와 마을을 파괴하고 인구의 절반 이상 ― 약 80만 명 ― 을 쫓아낸 후 이스라엘 국가를 만든 민족청소였다.[7]Prashad, ‘The Palestinian People Are Already Free’. 1948년 나크바에서 오늘의 격화된 인종학살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국가가 수립되고 유지된 근저에는 시온주의 기획과 서구 제국구의의 결합이 있다.
하지만 제국주의의 지원이 그 자체로 동의와 면책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 여기에는 다른 수단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정착자 식민 기획으로서의 시온주의는 이 같은 폭력과 야만의 기획을 수행할 정당성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근 60년 전에, 소설가이자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PFLP) 소속이었던 가산 카나파니는 바로 이 문제에 답하고자 했다. 그는 『시온주의 문학에 대하여On Zionist Literature』(1967)에서 ‘직접적으로든 아니든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식민화 운동에 복무하기 위해 쓰여진 모든 것’을 검토했다.[8]Kanafani, On Zionist Literature, 1. 카나파니가 보기에 ‘적을 알’려면 그 문화 생산물을 검토해야 한다. 이 책에서 그는 시온주의 허구가 서구 독자들에게 어떻게 거짓 역사를 설파했는데, 어째서 ― 노벨 위원회를 비롯한 ― 문화 기관들이 1966년의 슈무엘 요세프 아그논Shmuel Yosef Agnon 같은 반동적 작가에들에게 상을 주었는지, 어쩌다 서구의 논평이 시온주의 서사를 답습하게 되었는지, 서구의 1967년 전쟁 보도가 기나긴 문화적 허위 정보 작전의 당연한 결과는 아니었는지를 살펴 본다.[9]Kanafani, On Zionist Literature, 4.
카나파니에게 정치적 시온주의 ―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정착자-식민 국가를 만들려는 운동 ― 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 그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문화 전선을 요하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의 설계자 테오도르 헤르츨이 소설가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책 『오래 된 새 땅The Old New Land』(1902)에서 ‘시온주의 문학 캐릭터가 시온주의 정치 강령에 발 맞추어 [행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카나파니의 설명이다.[10]Kanafani, On Zionist Literature, 53. 실제로, 시온주의 문화 장치의 중점적 임무는 추방을 정당화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민족을 비인간화하는 것이었다.[11]Kanafani, On Zionist Literature, 83. 카나파니는 특히 시온주의 소설이 아랍인을 후진적이고 야만적인, 그 땅과 이어지지 않은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어떻게 그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기록했다.[12]Kanafani, On Zionist Literature, 69. 시온주의 문학이 어떻게 오늘날까지도 되풀이되는 서사들을 날조하고 고착시켰는지에 관해 썼다. 아랍인의 ‘정신적, 문명적 후진성이라는 불치병’, ‘아랍인은 나라를 가질 자격이 없다’거나 아랍 아동의 생명은 ‘유대인 아동의 사기와 달리 무가치하다’는[즉 유대인 아동은 생명 뿐만 아니라 그 심리 상태 또한 중요하지만 아랍 아동은 생명조차도 무가치하다는] 관점, 정치적·감정적으로 나치의 범죄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떠넘기는 ‘어처구니 없는 결부’ 같은 것들 말이다.[13]Kanafani, On Zionist Literature, 69, 83, 84, 90, 99. 시온주의 이데올로기 및 문화생산물은 이렇게 시온주의 기획에 이른바 팔레스타인 아랍인의 ‘야만성’에 맞서 ‘문명화하는 역할’을 부여한다.[14]Kanafani, On Zionist Literature, 69, 91.
이후로 수십 년 간, 이스라엘 국가는 똑같은 비인간화 서사를 몇 번이고 재활용하며 우려먹었고 주류 서구 언론은 그것을 그대로 주워섬겼다. 10월 7일 이후의 몇 달 동안 팔레스타인을위한법률가모임Law for Palestine에서는 500건이 넘는 이스라엘의 인종학살 선동 사례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15]Law for Palestine and Al-Haq Investigates. 2023년 10월 9일에는 이스라엘 방위부 장관 요아브 갈란트가 ‘우리는 인간 동물들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그에 맞게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고 이는 이 인종학살을 정의하는 말이 되었다. 나흘 후에는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헤르초그가 ‘저기 저 민족 전체의 탓이다’라고 말했다.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의원 갈리트 디스텔 아트바르얀은 ‘지상에서 가자’를 ‘제거’하고 ‘가자의 괴물들’을 죽여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스라엘 농촌개발부 장관 아비 디히터는 ‘우리는 2023 가자 나크바를 행하고 있다’는 맞는 말로 민족청소를 옹호했다. 메툴라 시장 다비드 아줄라이는 ‘아우슈비츠에서 했던 것처럼 가자지구 전체를 비워야 한다. 초토화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홀로코스트의 재현을 들먹였다.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몇 번이나 팔레스타인인들을 ‘괴물’이라 챙했다. 이 끝도 없는 민족청소 선동 목록은 10월 7일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팔레스타인인 비인간화는 아무런 도덕적, 정치적, 군사적 책임을 지지 않고 그들의 절멸을 정당화하는 데에 한 세기가 넘도록 쓰여 온 역사-문화적 서사다.[16]Law for Palestine.
시온주의 기획은 또한 체계적인 문화적 삭제에도 기반하고 있다. 첫 번째 나크바가 벌어진 동안에는 회화, 사진, 영화, 음원, 악기, 여타 문화 관련물 약탈이 널리 행해졌다.[17]Adam Raz, Loot 참고. 어림 잡아 70,000 권의 서적이 도단 당했으며, 그 상당수는 현재 이스라엘국립도서관을 비롯한 이스라엘 서고들에 보관되어 있다.[18]Hatuqa, ‘Israel’s “Great Book Robbery” Unravelled’. 절도와 파괴는 지난 80년간 이어졌다. 10월 7일 이후로 이스라엘은 문화 기관 및 노동자들을 한 층 더 겨냥하고 있다 ― 문화 인종학살의 필수 요소다. 많은 팔레스타인 화가, 시인, 작가, 조각가가 살해 당했고, 문화의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이라는 미완의 열망에 보다 시급한 문제가 되었다.[19]Sheehan, ‘These Are the Poets and Writers’.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의 문화적 전선을 형성해 시온주의 정착자-식민 문화 기획에 저항할 수 있을까? 인종학살의 시대에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문화 생산이 한 민족을 인간화할 수, 그들의 역사를 구원할 수, 그들의 투쟁을 진전시킬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살펴보고 팔레스타인의 풍성한 해방 문화와 그 역사적 뿌리를 밝히기 위해 삼대륙: 사회연구원Tricontinental: Institute for Social Research에서는 현재 팔레스타인 안팎에서 활동 중인 예술가들, 문화노동자들을 인터뷰했다. 이 글은 팔레스타인 예술 전반에 대한 조사는 아니다. 팔레스타인 해방에서 문화 저항의 위치를 묻는 대화를 시작하는 글이다. 예술과 문화가 팔레스타인의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증언하고 미래 ― 팔레스타인 민족이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이 귀향하는 미래 ― 를 상상함으로써 어떻게 문화적 시온주의와 비인간화에 저항하는 데에 쓰여 왔는지를 검토하는 글이다. 인종학살 속에서 성년이 된 가자의 열여덟 살 작가 이브라힘 모하나Ibraheem Mohana가 단언한 대로, ‘그들은 우리의 희망을 죽이기 위해 전쟁을 시작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20]Chak, ‘War to Kill Our Hopes’.
아우데 아부 나스르Aude Abou Nasr(레바논), 〈가자Gaza〉, 2023. 아파르헤이트에맞서는예술인들 제공.
저항 문화와 민족 해방
여러 반식민, 민족해방 투쟁에서 문화는 사상이나 감정의 싸움에 핵심적인 무기로 여겨져 왔다. 아밀카르 카브랄에서 마오쩌둥에 이르는 혁명가들은 그저 군사 전략가나 정당 지도자만이 아니라 또한 시인이나 문화 이론가로서 투쟁에 참여했다. 민족 해방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연장선 상에서 마오와 카브랄은 ― 따로 그러나 비슷하게 ― 민족 해방 투쟁의 주요하고 불가결한 전선으로서 정교한 문화 이론을 전개했다.[21]Tricontinental, Dawn: Marxism and National Liberation. 그들에게 문화란 해방의 성패를 가르는 영토였다.
기니비사우·카보베르데아프리카독립당African Party for the Independence of Guinea-Bissau and Cape Verde(PAIGC)을 이끌었던 카브랄에게 ‘민족 해방이란 필연적으로 문화가 하는 일’이었다.[22]Cabral, ‘National Liberation and Culture’, 6. 논리는 명쾌했다. ‘제국주의의 지배는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지배가 다가 아니기에 ‘근본적으로 문화적 억압을 요한다.’ 피식민 집단의 역사적, 문화적 발전을 멈추게 하려 한다. 따라서 제국주의 지배에의 저항은 반드시 문화적 행동이어야 ― 또한 개인적 행동이 아니라 집단적 행동이어야 ― 한다. 그는 해방 운동은 곧 ‘투쟁하는 이들의 문화에 대한 조직화된 정치적 표현’이라고 주장했다.[23]Cabral, ‘National Liberation and Culture’, 6.
카브랄과 마오 모두에게, 문화 저항은 무장 투쟁 만큼이나 중요했다. 마오는 1842년 옌안 문예좌담회(중국의 주요 작가, 미술가, 지식인, 군인, 당 간부가 모인 3주짜리 대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중국 인민의 해방을 위한 우리의 투쟁에는 여러 전선이 있다. 그 중에는 펜의 전선도 총의 전선도, 문화 전선도 군사 전선도 있다.’[24]Mao, ‘Talks at the Yan’an Forum’. 이와 비슷하게, PAIGC 당원들을 대상으로 열린 1969년 ‘여러 가지 저항 형태에 대한 분석’ 연속 강연에서 카브랄은 ‘문화 저항’을 정치적, 경제적, 무장 저항과 함께 네 가지 핵심 투쟁 전선의 하나로 강조했다. 카브랄과 마오 모두에게 문화는 주요하면서도 결정적인 전장이었고, 문화의 군대는 인민의 군대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민족 해방을 위한 문화의 이론과 실천은, 카나파니에게는 특히나, 팔레스타인 투쟁의 핵심이었다. 이스라엘 점령 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첫 번째 나크바 후의 스무 해 동안 생산한 문학 작품들을 분석해 토대를 다진 『점령 당한 팔레스타인의 1948-1968년간 저항 문학Resistance Literature in Occupied Palestine 1948–1968』에서 카나파니는 ‘문화 저항은 핵심적이며 무장 저항 자체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무장 투쟁이 성공할 수 있는 ‘비옥한 토대’를 만드는 일이라고 쓴다.[25]Kanafani, Resistance Literature, 9–10. 같은 해에 《아프로-아시아 문학Afro-Asian Writings》에 실은 〈점령 당한 팔레스타인의 저항 문학Resistance Literature in Occupied Palestine〉에서는 팔레스타인 저항 문학의 특징을 개관하면서 이를 ‘전투의 문학’이자 점령 당한 팔레스타인의 문학이라고 칭했다. 그는 첫 번째 나크바가 지나고 팔레스타인인들이 ‘가족과 친구 뿐 아니라 나라 또한 잃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다섯 해 가량이 걸렸다고 지적했다.[26]Kanafani, Resistance Literature, 69. 잃어버린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장 전선과 문화 전선 양자에서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고국에서나 세계 각지에서나, 여러 세대에 걸친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이 이 기치를 이어 받았다.
저명한 팔레스타인계 합중국 미술가이자 학자인 사미아 A. 할라비Samia A. Halaby는 『팔레스타인 해방 미술Liberation Art of Palestine』(2001)에서 점령, 추방, 저항의 맥락에서 전개된 팔레스타인 특유의 예술적 정체성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그녀는 이 ‘해방 미술’이 순교나 귀환할 권리 같은 주제는 물론 선인장, 말 등 수무드의 상징을 포함하는 독특한 도상학과 함께 본질적으로 팔레스타인 자결self-determination 투쟁과 이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그녀에게 모든 ‘좋은 예술’은 ‘정치적 예술’이며 해방 미술은 ‘선명하면서 포스터, 리플렛, 깃발로 쓸 수 있어야 하는 실천적 예술’이다.[27]Halaby, Liberation Art, 45. 그녀는 예술과 해방의 불가분적 관계를 이렇게 논한다.
팔레스타인의 예술은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에 기반한다. 그 토대가 없으면 팔레스타인 작가들은 국제적으로 유행하는 양식을 모방하는 원자화된 집단이 되어버릴 것이며 실제로 그런 이들이 많이 있다. 팔레스타인 해방 예술가들은 자신들에게 대의가 있는 것이 행운임을 잘 알고 있으며, 그에 복무하는 의무를 다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예술은 특별한 성격을 가진 유파로서 역사적 중요성을 획득한다.[28]Halaby, Liberation Art, 54.
팔레스타인 저항·해방 문화의 역사에서는 수 차례의 정치적 파열이 분기점이 되어 왔다. 그 파열들 ― 역사가 라시드 칼리디Rashid Khalidi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백 년 전쟁The Hundred Years’ War on Palestine』(2020)에서 팔레스타인 민족에 대한 여섯 번의 ‘전쟁 선언’이라 칭한 ― 은 아래와 같다.
1917년 밸푸어 선언.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의 고향’을 수립하는 데 대한 영국의 지원을 약속해 영국의 위임통치와 시온주의 식민화의 길을 닦았다.
1947년 UN 총회 결의안 181호. 첫 번째 나크바로 이어졌다.
1967년 6일 전쟁 ― 팔레스타인에서는 나크사(후퇴)라 불린다.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 가자 지구, 서안, 동예루살렘, 골란 고원을 점령했다.
이스라엘의 1982년 레바논 침공. 팔레스타인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sation(PLO)를 베이루트에서 내쫓았다.
제1차 인티파다(1987-1993). 이스라엘의 점령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대규모 봉기.
제2차 인티파다. 2000년에 시작되었으며 가자에서 계속되고 있는 인종학살의 장을 열었다.
매번의 파열마다 팔레스타인의 작가들, 문화노동자들은 자신의 재주와 작업으로 대응했다. 할라비가 보기에 해방 예술의 역사는 ‘봉기와 함께 일어서고 봉기가 후퇴할 때 위축되었다.’ 아래에서는 이 여섯 번의 파열에서 팔레스타인의 문화 저항이 드러난 바를 일부 살펴 볼 것이다.[29]Halaby, Liberation Art, 32.
올페르 레오나르도Olfer Leonardo(페루) 〈사브라와 샤틸라Sabra y Shatila〉, 2021. 유토픽스 제공.
기억하기
내 뿌리가 뻗은 것은 시간이 태어나기 전 역사가 시작되기 전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보다도 먼저 풀이 싹트기도 전
40년에 걸쳐 쉰 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하고 네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걸출한 배우이자 영화감독인 모함마드 바크리Mohammad Bakri는 어린 시절에 고향 알-비네에서 영화를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가 기억하기로 마을에는 ‘전기가 없었다 ― 하지만 영화는 있었다’.[31]Bakri, interview. 바크리는 이스라엘에 사는 팔레스타인인으로, 1948년 나크바 당시 추방 당하지 않은 팔레스타인인 15만 9천 명의 이백만 후손 중 하나다. 그는 자신이 정치화 되고 창작에 몸 담은 ‘다섯 계절’ ― 칼리디의 시기 구분과 비슷하다 ― 을 첫 번째 나크바에서부터, 그 근본적인 사건과 이후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가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의식을 형성했는지에서부터 설명한다. 그가 말하기로, ‘픽션이나 다큐멘터리로 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내가 싸우는 방식이다. 내 문화, 내 정체성, 내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의 방식이다. 그게 전부다.’
『팔레스타인 미술의 기원The Origins of Palestinian Art』(2013)에서 바시르 마쿨Bashir Makhoul과 고든 혼Gordon Hon은 첫 번째 나크바를 하나의 역사적 순간이 아니라 계속 되는 추방, 죽음, 상실의 사건으로 ― ‘역사 속 사건들이 여전히 벌어지는 영원한 현재형’으로 ― 묘사한다.[32]Makhoul and Hon, The Origins of Palestinian Art, 10–11. 바크리나 다른 여러 팔레스타인 문화노동자들에게 있어 팔레스타인 문화 저항의 ‘기원’을 첫 번째 나크바에 둔다는 것은 그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매우 정치적인 행위 ― 시온주의의 문화적, 역사적 삭제 정책은 물론 ‘약속된 땅’ 주장을 거부하는 한 방식 ― 이다.
이스라엘 역사가 일란 파페Ilan Pappé는 『팔레스타인 민족청소The Ethnic Cleansing of Palestine』(2006)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심리적 지평에서 첫 번째 나크바를 체계적으로 지우는 일을 가리켜 ‘기억학살memoricide’이라는 용어를 쓴다. 문화는 범죄를 부정하고 피해자의 역사를 가해자의 역사로 덮어버림으로써 민족청소라는 물리적 행위를 고착화하는 무기가 된다. 국가 지원을 받는 단체들, 특히 유대민족기금Jewish National Fund이 이런 ― 마을들, 거리들, 명소들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바꾸고 ‘고대 이스라엘’의 지도를 덧씌우는 데서부터 나무를 심어 파괴당한 팔레스타인 마을들의 폐허를 감추는 데까지 ― 기획을 수행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33]Pappé, Ethnic Cleansing, 226–229. ‘아무 민족도 없는 땅, 아무 땅도 없는 민족’이라는, 시온주의의 토대가 되는 신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하는 일이다.
기억학살이라는 배경 앞에서 팔레스타인의 예술과 문화사를 보존하는 일은 저항의 한 형태다. 근원은 지리적으로 파편화되고 흩어진 ― 아랍어로는 샤타트shatat라고 한다 ― 민족이 팔레스타인의 탈식민 이론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일관성coherence’이라 칭한 것을 형성하는 데에 핵심적이다. 사이드에 따르면 이러한 문화적 일관성이 가능한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주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 겪은 추방과 배타적 억압 경험으로부터 구체화해낸) 팔레스타인의 이념 덕분에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했기’ 때문이다.[34]Said, The Question of Palestine, x, 42.
카나파니는 『저항 문학』에서 수 세대에 걸친 팔레스타인인들을 아랍의 유산과 민족 정체성에서 끊는 역할을 한 이스라엘의 ‘고의적 무지’ 정책을 강조한다.[35]Kanafani, Resistance Literature, 19. 이 문화적 소외 기획은 팔레스타인인이 받을 수 있는 교육의 질을 ― 아랍인 학생들이 쓸 수 있는 자원을 제약하는 데서부터 자격이 없는 이나 ‘부역자’를 아랍인 교사로 채용하기에 이르는 방식으로 ― 떨어뜨리고 ‘잡종적이고 조악한 문화’를 조장함으로써 완수되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이주하거나 동화되거나.[36]Kanafani, Resistance Literature, 22-25
나크바 몇 년 후 이스라엘 국가에서 태어나 텔아비브대학교에서 연극연기와 아랍 문학을 공부한 바크리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세계의 문화 산업계에서 길을 헤매야 했으며 심각한 정치적, 법적 탄압을 겪었다. 제2차 인티파다 당시 이스라엘이 제닌 난민촌에 가한 대규모 공격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제닌, 제닌Jenin, Jenin》(2002)을 개봉한 후로는 법정 다툼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그 영화는 이스라엘에서 금지 당했다. 나는 내 영화에 ― 3.5초 동안 ― 나온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 병사에게 다달이 천 달러씩을 내고 있다. 앞으로도 몇 년 간 계속 그래야 한다 … 책을 불태웠던 중세 시대 같다’고 말한다.[37]Bakri, interview. 바크리는 탄압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여러 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이주 아니면 동화라는 강제적 양자 택일에 맞서고 팔레스타인 민족의 계속되는 저항과 해방에의 열망을 끈질기게 기록하고 증언하고 있다.
파블로 칼라카Pablo Kalaka(칠레·베네수엘라),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Under the Olive Tree〉, 2023. 유토픽스·아파르헤이트에맞서는예술인들 제공.
증언하기
우리의 시에는 색도, 맛도, 목소리도 없으리 집집마다 횃불을 전하지 않는다면
― 마흐무드 다르위시가 시의 기능에 관하여 쓴 말[38]Kanafani, Resistance Literature, 74.
바크리는 ‘[내 정치화의] 두 번째 계절은 1967년이었다’고 회상한다.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 사이의 6일 전쟁, 이스라엘이 가자, 서안,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때였다.’ 열네 살 소년이었던 그는 아버지가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이 ‘아랍 세계와 팔레스타인 민족의 두 번째 재앙’에 대한, ‘1948년에 생겨난 1세대 난민과 1967년에 생겨난 2세대 난민’에 대한 눈물이었음은 나중에야 알았다.[39]Bakri, interview.
유명한 정치 만평가 나지 알-알리Naji al-Ali는 첫 번째 나크바 때 알-샤자라al-Shajara 마을에서 쫓겨난 1세대 난민이었다. 카나파니는 1961년에 처음으로 알-알리의 작품을 아랍 민족주의 운동 잡지 《알-후리야 Al-Hurriya』(자유라는 뜻이다)에 실었다. 카나파니가 편집자로 일했던 곳이다. 몇 년 후, 알-알리는 쿠웨이트의 신문사에서 일하면서 한달라Handala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캐릭터는 후일 그의 이력을 대표하게 된다.[40]Totry and Medzini, ‘The Use of Cartoons’, 25. 영원히 열 살 ― 알-알리가 망명에 내몰린 나이다 ― 인 소년, 맨발에 누더기 차림인 한달라는 늘 독자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다. 두 손은 등 뒤로 모은 채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일들을, 또한 멈추지 않는 저항, 귀환의 약속, 자유 팔레스타인을 지켜보고 증언한다. 사막에 깊이 뿌리를 내리를 강인한 식물에서 이름을 따온 한달라는 수무드를 상징한다. 알-알리가 평생에 걸쳐 그린 4만 편 넘는 만평은 그러한 불굴의 자세를 보여준다.
1967년의 사건들은, 그리고 범 아랍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시온주의의 확장주의에 맞서지 못한 것은 대규모 문화 저항의 물결과 팔레스타인 문화의 부흥을 불러왔다. 라시드 칼리디가 말하기로,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든 팔레스타인에 사는 이든 작가들, 시인들 ― 가산 카나파니, 마흐무드 다르위시, 에밀 하비비Emile Habibi, 파드와 투칸Fadwa Touqan, 타우피크 자야드Tawfiq Zayyad를 비롯한 재능 있고 사회참여적인 예술가, 지식인들 ― 은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이 르네상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41]Khalidi, The Hundred Years’ War on Palestine, 107. 점령은 문화를 투쟁의 핵심 전선으로 만들었고, 투쟁적인militant 연극의 새 시대를 열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이후 팔레스타인국립극장Palestinian National Theatre으로 불리게 된)[42]역주 ―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국립 극장, 즉 정부에서 설립했거나 운영하는 극장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민족의 극장, 혹은 (팔레스타인 민족이 … (계속) 엘-하카와티El-Hakawati의 공동설립자이자 극장장인 아메르 칼릴Amer Khalil은 ‘팔레스타인의 연극은 대체로 새롭다’고 말한다. 삼대륙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1920년대, 30년대, 40년대에는 사람들이 사회사업과 관련된 연극을 만들곤 했다. 하지만 67년 전쟁 이후, 지식인, 예술가, 교육자, 대학생 등이 한데 뭉친 운동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연극 운동을 시작했다 … 그 연극 운동적 정말로 호전적이게 되었다’고 설명한 바 있다.[43]Khalil, interview. 또한 팔레스타인 연극은 1960년대 말부터 전문화되고 연출가와 배우를 교육할 수 있는 역량을 구축했다. 1967년에 한 연극 비평가가 ‘감옥에 있는 단원 한두 명 없이 공연을 한 극단은 없다’고 썼을[44]Snir, ‘Palestinian Professional Theatre’, 11. 정도의 극단적인 억압 속에서도 말이다.
‘민족적’(즉 팔레스타인적)이다 싶은 것은 무엇이든 없애려 드는 점령 당국의 검열과 방해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연극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팔레스타인 극작가들은 다층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영리하게 활용해 ‘연극과 … 관객 사이에서 예술적 부호로 작동해 국가 건설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특수한 언어’를 개발했다.[45]Snir, ‘Palestinian Professional Theatre’, 7. 칼릴은 인터뷰에서 ‘문화는 언제나 표적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연극 공간은 공격 당하고 예술가들은 위협 받았다. 문화가 왜 그렇게나 위험한가? 말이 사람들을 바꾸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하면 ― 자신들이 어떻게 사는가, 왜 그렇게 사는가,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다. 문화가 위험한 것은 바로 그래서, 사람들을 움직여서다.’[46]Khalil, interview.
아랍어로 ‘이야기꾼’을 뜻하는 엘-하카와티 극단은 1977년에 바로 그것을 위해 ― 이야기를 하고 사람들을 움직이고 현실을 바꾸기 위해 ― 만들어졌다. 팔레스타인 민족을 파편화하는 시온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1948년에 점령 당한 영토 내의 팔레스타인 학생들과 점령 당한 동예루살렘 출신의 예술가들, 지식인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오늘날까지도 쓰고 있는 한 버려진 영화관에 터를 잡은 1983년까지 처음 여섯 해 동안은 학교, 영화관, 마을 광장, 난민촌 등을 돌아다니며 극장을 사람들에게 가져갔다. 팔레스타인의 삶과 저항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 오고 있으며, 팔레스타인 극단 최초로 해외 공연을 하기도 했다.[47]‘Founders of El-Hakawati Theatre’.
1980년대를 열고 닫은 것은 두 개의 중요한 파열, 바로 이스라엘의 1982년 레바논 침공과 제1차 인티파다(1987-1993)이다. 이 파열들은, 해방을 향한 제1경로로서의 무장 투쟁에 대한 지지가 줄어든 것과 맞물려, 문화 저항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런 상황 속에서, 유대인 이스라엘 활동가 아르나 메르-카미스Arna Mer-Khamis는 1987년에 제닌 난민촌에 돌멩이극장Stone Theatre을 설립했다. 제1차 인티파다 동안 어린이들이 돌멩이를 던진 데서 착안한 이름이다. 돌멩이극장은 제2차 인티파다가 정점에 이르렀던 2002년에 이스라엘의 대규모 공습에 파괴되었다. 그 폐허 속에서 아르나의 아들 줄리아노가 설립한 자유극장Freedom Theatre이 세워졌다. 연극을 이용해 트라우마를 다스리고 정체성을 확립하고 저항에 참여하는 돌멩이극장의 방법론을 계승한 극장이었다. 현재는 어린 시절에 돌멩이극장에 함께 했던 무스타파 셰타Mustafa Sheta가 운영하고 있다. 이스라엘 감옥에 15개월간 구금되어 있다 풀려난 직후였던 2025년 7월에 한 삼대륙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예술은 민족운동과 별개가 아니다. 우리의 작업은 ― 존엄, 이야기하기, 저항에 뿌리 내리고 있는 ― 운동의 연장이다’라고 설명했다. 자유극장은 공동체 조직가이기도 한 배우들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자임한다고 했다. ‘우리 졸업생들은 그저 공연자가 아니가 ― 변화의 주체들이다’.[48]Sheta, interview.
2011년 4월 4일, 줄리아노는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범인의 총에 다섯 발을 맞았다. 이에 극단에서는 자유와 국가지위에 대한 열망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담아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3)를 개작한 〈기다리면서While Waiting〉(2011)로 응답했다.[49]Mee, ‘The Cultural Intifada’, 174–175. 살해 당하기 얼마 전 줄리아노는 ‘문화 인티파다’를 촉구했고, 자유극장은 이를 이어 받았다. ‘우리는 제3차 인티파다, 도래할 인티파타는 시, 음악, 연극, 카메라, 잡지로 하는 문화 인티파다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50]Mee, ‘The Cultural Intifada’, 168.
팅스 착Tings Chak(중국), 〈팔레스타인은 자유로워지리라Palestine Will Be Free〉, 2024. 유토픽스·아파르트헤이트에맞서는예술인들 제공.
상상하기
‘약속된 땅’에 자리가 없는 우리는 밤낮 할 것 없이 살인자 곁을 떠나지 않는 유령이, 그를 불안과 실의에 빠뜨리는 사이지대가 되었다. 잠 못 이루는 이들이 소리를 지른다. 그것들 아직도 안 죽은 거야? 물론이다. 젖을 떼고, 성년이 되고, 저항하고, 귀환할 때까지 나이를 먹는 유령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전투기들이 유령을 쫓는다. 땅에서 전차들이 유령을 쫓는다. 바다에서 잠수함들이 유령을 쫓는다. 유령은 자라나 살인자의 의식을 점령한다.
팔레스타인 문화 노동의 성격은 1990년대 들어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달라졌다.[52]오슬로 협정은 1990년대 중반에 이스라엘과 PLO 간에 조인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lestinian Authority를 수립하고 서안과 가자지구 일부 지역에 대한 … (계속) 아메르 칼릴이 설명하기로 오슬로 협정이 제시한 이른바 정치적 해법으로 인해 연극계는 ― 다른 문화 영역과 마찬가지로 ― 초기의 특징이었던 투쟁성과 멀어지기 시작했다. 시인이자 문학자, 팔레스타인청년운동Palestinian Youth Movement 조직가인 칼림 하와Kaleem Hawa는 삼대륙 인터뷰에서 ‘오슬로 협정 이후 팔레스타인의 여러 사회, 문화 기관이 시온주의에 물들고 팔레스타인 부르주아지의 부역으로 인해 빈껍데기가 되면서 더 이상 그 목적에 맞지 않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맥락에서 하와는 세대를 잇는 ‘가장 중요한 끈’으로서의 혁명적 문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청년층은 소셜미디에서의 영상 제작이나 사적인 일기에 의지해 소외와 불굴을 비롯한 자신들의 집단적 사회 경험을 서술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장자층은 우리네 아랍 정부들까지도 가세해 그들이 아는 것과 배운 것을 모두 잊으라고 몰아붙이는 데에 맞써 싸워야만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53]Hawa, interview.
팔레스타인 예술가들, 문화 노동자들에게 오슬로 협정 이후의 시기는 저항 문화라는 개념 자체의 위기를 불러온 시기였다. 전 지구적 인정이 커지면서 ― 제도화를 헤쳐나아가야 했고 문화 생산물을 해외 기부자들이 자의적으로 전용하거나 문화 생산이 해외 기부자들에게 의존하게 되는 문제, 팔레스타인 예술·문화가 민족의 구체적인 현실과 괴리되는 문제, ‘평화 절차’의 허상 같은 ― 새로운 난관들이 생겼나. 포스트 오슬로 시기는 또한 전통적인 정치적 지도부에 대한 깊은 환멸을 자아냈고, 이는 당대 팔레스타인 예술가들, 문화 집단들을 비판적, 독립적인 위치로 밀어내 민족 기획의 파편화를 심화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풍자와 유머가 저항의 도구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밴드 다르벳 샴스Darbet Shams(일사병)의 작곡가이자 우드oud 연주자인 사메르 아사클레Samer Asakleh는 삼대륙에 ‘정치적인 주제 ― 평화 협약이나 역내 정상화 거래 같은 ― 는 너무 민감할 때가 있다. 풍자는 즉각적인 검열이나 억압을 피하면서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이 된다’고 설명했다. 아사클레는 10월 7일의 여파 속에서 쓴 곡 〈당신은 하마스를 규탄하는가Do You Condemn Hamas?〉를[54]역주 ― 이스라엘 지지자들이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을 공격하는 데에 주로 쓰이는 질문이다. 언급하며 ‘비꼬는 가사다 ― [이 수사적 질문]은 하마스를 규탄해야만 당신이 감정이 있는 존재인지를 묻는다. 청중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이내 생각에 빠졌다. 어떤 이들은 나중에 내게 와서 “우리는 자조했다. 그러다 이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고 했다.[55]Asakleh, interview.
같은 세대의 다른 여러 문화 집단들과 마찬가지로 이 밴드는 앞 시대의 음악 집단들이 마주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정치적 국면을 반영한다. 리드 보컬 하난 와킴Hanan Wakeem은 ‘팔레스타인 정당들에 소속 밴드가 있던 때가 있었다. 60년대, 70년대에는 파타Fatah 같은 집단에, 종종 운동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가수, 무용수 등을 다 갖춘 문화 부문이 있었다. 이제는 거의 없어졌다.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정당과 연계하는 예술가들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예전 같지 않다 ― 정치 운동이 만드는 강력한 문화적 기반은 더 이상 없다’고 덧붙였다.[56]Wakeem, interview.
국제주의라는 해독제
탈정치화, 상품화, 파편화라는 맥락 속에서 예술가들은 갈수록 해외 기구의 재정 지원에 의지하게 되었고, 정치적 포섭의 위험이 커졌다. 이런 전 지구적 경향의 해독제는 국제화와 혁명적 상상력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 가자에서 계속되는 인종학살에 대한 문화적 응답들만큼 국제주의가 분명히 요구되는 곳은 없다.
5만 명이 넘는 전 세계 예술가들의 네트워크인 아파르트헤이트에맞서는예술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결집을 긴요하게 여긴 예술가, 문화노동자들이 2023년 10월에 설립했다. 이 네트워크 소속인 한나 크레이그Hannah Craig와 타히아 이슬람Tahia Islam은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들의 작업을 남아프리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선 투쟁에 썼던 혁명적 예술가들에게 고무되어 이 네트워크를 설립했다. 예술가로서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와 예술 작업을 써서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고 팔레스타인 민족의 정당한 대의와 점령과 억압에 맞선 그들의 저항을 널리 알릴 고유한 책무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57]Craig and Islam, interview. 아파르트헤이트에맞서는예술가들에서 제작한 포스터는 다음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s://againstapartheid.art/downloads.
이와 비슷하게, 주로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연안에 기반한 국제주의 디자인·커뮤니케이션 집단인 유토픽스는 20개국 80명 이상의 예술가들을 모아 지난 한 해 동안 백 장이 넘는 팔레스타인 관련 포스터를 제작해 어디에서나 무료로 다운로드하거나 볼 수 있도록 했다.[58]포스터는 다음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https://utopix.cc/bitacora/eyes-on-palestine/. 칠레-팔레스타인계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유토픽스 멤버인 데이비드 제이콥 카르모나David Jacob Carmona(‘라산 아부 아파라Rasan Abu Apara’)는 팔레스타인 해방이 ‘서구 식민민주의 하의 아프리카나 칠레의 [원주민 마푸체 족의 거주지] 왈마푸Walmapu 등 세계 제 민족의 투쟁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반드시 침묵을 깨고 진실을 교육해야 한다 … 예술은 투쟁의 참호이자 무기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술은 반드시 현실 세계를 바꾸자고 말하고 바꾸고자 나서야 한다’.[59]Carmona, interview, our translation.
혁명적 예술, 문화는 침묵을 깨거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잔혹 행위를 증언하는 것 이상을 행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책임이 ― 그리고 역량이 ― 있다. 전시회는 이 같은 국제주의적 상상력을 기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PLO 합동정보국 조형예술분과에서는 1978년에 베이루트아랍대학교에서 《팔레스타인을 위한 국제 미술전International Art Exhibition for Palestine》을 열었다. 크리스틴 쿠리Kristine Khouri와 라샤 살티Rasha Salti가 『지난 동요Past Disquiet』(2018)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이 야심찬 기획은 PLO에서 ‘포스터, 미술, 영화, 연극, 무용, 음악, 출판 생산을 의뢰, 지원, 장려하고 민간 전승과 문화적 전통을 조직, 보존, 전시하며 팔레스타인 투쟁에 대한 예술·문화계의 국제적 지지를 도모하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60]Khouri and Salti, Past Disquiet, 28.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감각을 형성하고 국제 연대를 모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쿠리와 살티가 쓰기로, ‘가옥을 빼앗겨도 집이 있었다는 기록은 시와 노래에 살아 남을 것이었다. 땅을 빼앗겨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 가게 되어도, 그 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수많은 형식으로 여전히 볼 수 있을 것이었다.’[61]Khouri and Salti, Past Disquiet, 30
이런 정신으로, 전 세계에 전시작 기증을 요청했다. 미래 팔레스타인국의 미래 미술관, 연대작들을 주춧돌 삼아 지은 미술관을 상상한다는 기획이었다. 이스라엘 탱크들이 남레바논에서 약 2만5천 병력을 동원한 작전을 펼쳤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1978년 3월 21일에 전시회가 열렸고 개회식에 클로드 라자르Claude Lazar(프랑스), 공트랑 과나이스 네투Gontran Guanaes Netto(브라질), 브루노 카루소Bruno Caruso, 파올로 가나Paolo Ganna(이탈리아) 등이 참석했다.[62]Khouri and Salti, Past Disquiet, 31. 이 전시회의 기록 ― 미술관 건립을 위한 문서화 계획안을 포함한 ― 은 1982년 6월에 이스라엘이 PLO를 몰아내기 위해 레바논을 전면적으로 침공하기 시작하면서 말소되고 말았다.[63]Khouri and Salti, Past Disquiet, 34.
PLO의 이 전시에 참여한 칠레의 저명한 예술가 로베르토 마타Roberto Matta는 몇 년 앞서 칠레에서 열린 비슷한 기획에도 기증한 적이 있었다. 세계 예술가들에게 ‘비아 칠레나 알 소시알리스모vía chilena al socialismo’(칠레 사회주의의 길)에 대한 지지로 작품 기증을 요청한 무세오데라솔리다리다드Museo de la Solidaridad(연대의 미술관)이라는 기획으로,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가 ― 합중국이 모의한 쿠데타에 정권을 빼앗기기 ― 1972년에 추진한 것이었다. 674점의 작품 중 많은 수가 망명에 내몰렸고, 일부는 좌파 예술가, 지식인, 투사들과 함께 쿠바로 피신했다. 이 기획은 1975년에 라틴 아메리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분산된 네트워크 형식의 무세오인테르나시오날데라레시스텐시아살바도르아옌데Museo Internacional de la Resistencia Salvador Allend(살바도르아옌데 국제 저항미술관)으로 재가동 되었고, 1991년에는 무세오데라솔리다리다드살바도르아옌데Museo de la Solidaridad Salvador Allende(살바도르아옌데연대미술관)으로 칠레에 귀환했다.[64]Khouri and Salti, Past Disquiet, 46.
팔레스타인에서부터 칠레까지, 이런 미술관들 외에도 사회주의적, 혁명적 투쟁을 옹호하고 국가 지위를 부정 당하는 민족들의 미래 국가를 상상하면서 문화적 저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수많은 국제주의적 노력이 있다. 자유 팔레스타인을 위한 투쟁은 팔레스타인만의 투쟁이 아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맞선 전 세계 투쟁의 일부다. 카나파니가 『1936-1939년 팔레스타인 혁명The Revolution of 1936–1939 in Palestine』에 쓴 대로, ‘제국주의는 전 세계에 걸쳐 제 몸을 누인다. 머리는 동아시아에, 가슴은 중동에. 동맥은 아프리카에서 라틴 아메리카까지 걸쳐 있다. 어디를 때리든 제국주의를 공격하는 것, 세계 혁명에 기여하는 것이다.’[65]Kanafani, quoted in The Revolution 1936–39 in Palestine, xiv.
모함마드 바크리는 가자에서 지금 이어지고 있는 인종학살을 제 정치화의 다섯 번째 계절로 생각한다. 휴대전화와 컴퓨터 화면으로 전 세계에 방송되고 있지만 바크리는 ‘그건 영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에게 ‘영화란 질문하게, 생각하게, 이해하게, 결론을 내리게 만들어야 한다’. 그는 《제닌, 제닌》에서 어느 난민촌 주민이 자신에게 했던 ‘온 세상이 나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데 당신의 카메라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되새긴다. 오늘날을 생각하면, ‘가자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카메라가 굶주리는 이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내 카메라가 그들에게 빵을 줄 수는 없다.’[66]Bakri, interview. 그런 끔찍한 일들 앞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모든 예술가, 문화 노동자에게 닥쳐 오는 질문이다.
다르벳 샴스의 와킴은 인종학살이 팔레스타인 예술가들에게 가한 타격을 이야기한다. ‘처음 몇 달은 충격의 도가니였다. 많은 이들이 노래하지도, 움직이지도, 창작을 하지도 못했다.’ 억압이 심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음악을 만들어도 되기는 하는 것인가? 전쟁에 관한 노래가 아니라도 발표해도 되는 걸까?’ 같은, ‘인종학살이 벌어지는 시기에 예술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67]Wakeem, interview. 그런 상황에서 예술가의 책무는 무엇일까? 예술과 문화의 한계선은 어디이며 문화적 저항이란 어떤 것일까?
이 같은 다섯 번째 정치화의 계절에, 바크리의 냉철한 말들은 우리로 하여금 문화란 해방을 위한 강력하고 필수적인 무기이자 삶 자체의 저항적인 표현임을 상기케 한다. 우리에게 팔레스타인 해방기를 높이 들기를, 온갖 노래, 온갖 그림, 온갖 영화, 온갖 춤, 온갖 시, 온갖 소설, 쓸 수 있는 모든 문화적 무기로 팔레스타인 민족을 인간화하기를 ―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 멈추지 말라고 말한다.
문화는 삶이다. 문화는 뿌리요 역사다. 문화는 인간성이다. 문화를 잃으면 정체성도 잃는다. 우리 삶을 잃는다. 문화가 없으면 모두 무의미하다. 사랑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문화는 사랑이다. 그들이 내게서 사랑을 앗아가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내 문화를 앗아가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문화가 내 심장이다. 내 민족이다. 내 기억이다. 전기도 물도 없이 마냥 걸었던 내 어린 시절이다. 내가 들었던 노래들, 먹었던 음식들이다. 내가 냄새 맡았던 공기요 내가 올랐던 산이며 내가 헤엄쳤던 바다다. 이것이 나의 문화, 나의 존재다. 누구도 내게서 그것을 앗아갈 수 없다. 그러니 나는 계속 영화를 만들 것이다.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68]Bakri, interview.
셴비 지shenby g, 〈세상이 팔레스타인과 함께한다!The World Stands with Palestine!〉, 2023. 유토픽스·아파르트헤이트에맞서는예술인들 제공.
오슬로 협정은 1990년대 중반에 이스라엘과 PLO 간에 조인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lestinian Authority를 수립하고 서안과 가자지구 일부 지역에 대한 제한적인 자치권을 부여한 일련의 협약이다. 이스라엘은 국경, 영공, 대외 무역, 이동, 안보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과 서안의 60% 이상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유지했다. [오슬로 협정의 일환으로 1994년에 이스라엘과 PLO 간에 체결된 경제 협력 의정서인] 파리 의정서와 함께, 이 틀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이스라엘의 관세·재정 체제에 통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