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Tariq Kenny-Shawa, “Can Revolution Survive in the 21st Century?” The Nation, 20205.09.23.
기술과 감시국가는 대중 봉기 진압을 너무도 쉬운 일로 만들어 버렸다. 우리의 운동들은 어떻게 될까?

한때는, 디지털 시대가 사회적, 정치적 진보의, 어쩌면 심지어는 혁명의 새 막을 열어 줄 것 같았었다.
요즘 그런 말을 했다간 고개도 못 들고 다닐 정도로 비웃음을 사리라.
대중이 손가락만 올려도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면 권력이 민주화되리라는 예상을, 훨씬 디스토피아적인 현실이 짓뭉개버렸다. 아랍의 봄의 분쇄가 스마트폰에서부터 소셜미디어에 이르는 ― 많은 이들이 민중에게 힘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었던 ― 디지털시대의 도구들이 어떻게 민중에 대한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 이미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이렇다 할 반향조차 없이 인종학살을 온 세상이 다 보도록 생중계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집단적으로 현실에 안주하도록 어르는 것이, 가짜 정보로 방해하고 감시로써 무력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다시는 없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럼 혁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여기서 혁명이라 함은 군사 쿠데타, 잠깐의 봉기, 개별적인 정책 개혁 같은 것 이야기가 아니다. 대중운동이 기존의 질서를 엎고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대안을 확립하는 흔치 않으면서도 대대적인 파열 ― 바스티유 습격부터 프랑스의 지배에 맞선 알제리의 오랜 투쟁까지 ― 을 말하는 것이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자유주의적, 민주적 사회들은 대중 정치의 변혁적, 혁명적 약속을 믿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파열의 순간들에 ― 자본주의의 모순이 결국은 민중을 한계점까지 몰아붙일 때 혹은 억압적 체제가 제풀에 체할 때 ― 모종의 혁명이 가능해지리라고 여겨 왔다. 하지만 오늘날, 초개인주의, 엘리트의 언론 통제, 갈수록 정교해지는 억압 기술들·전술들이 조직적, 집단적 행동을 이어갈 힘을 약화시키면서 우리의 혁명 역량은 급격히 깎여나가고 있다.
혁명이 죽었다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는 도처에서 벌어지는 혁명 운동을 ― 성장세인 이스라엘 인종학살, 점령,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부터 네팔에서 정부를 전복하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봉기까지 ― 목도하고 있다. 진짜 문제는 이런 운동들의 에너지가 현 상태를 뒤집는 데에 필요한 지속적인 조직화, 회복력, 권력으로 번역될 수 있는가 ― 급변하는 세상에서 전통적인 혁명 개념이 여전히 가능할 수 있는가 ― 하는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과제는 아니다. 사회 운동은 언제나 억압적인 위협과 시대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더 무시무시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히 자리잡은 과제를 극복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또한 우리 앞에 있는 ― 전 지구적 불평등의 확대부터 악화일로인 기후 위기, 줄기차게 이어지는 점령과 인종학살까지 ― 위협들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 어느 때보다도 일신이 중요하고 시급하다.
디지털 시대의 행동과 조직화
십오 년 이십 년 전에는 많은 이들이 인터넷에 인류의 혁명 역량을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구 곳곳의 수백만 명이 오래도록 손 닿지 않는 데 있었던 정보 ― 대안적인 미래를 상상하는 데에 필요한 정치적 의식을 길러줄 수 있을 정보 ― 를 얻을 수 있게 되어가던 때였다. 그리고 소셜미디어가 일상이 되면서 대중 정치의 조직화 방식이 뒤집어졌다. 아랍의 봄 봉기들이나 이스탄불 게지 공원 보존을 위한 시위들이 트위터, 페이스북, 왓츠앱 등의 촉매 역할 없이 그만큼 전개된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소셜미디어 플랫폼들, 디지털 도구들은 의식을 과도하리만치 고양시키고 운동이 하룻밤새 폭발적으로 번져나갈 수 있게 해주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효과적인 조직화, 실질적인 행동에의 참여, 변혁적 추진력의 유지에 있어서는 오히려 우리의 능력을 약화시켰다.
디지털 도구들이 진짜 권력의 촉매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네팔 Z세대 조직가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디스코드 서버들을 이용해 며칠 만에 총리와 정부를 실각시키는 대중 시위를 조직했다. 디지털 도구들이 이 같은 파열의 계기를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할 수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런 빠른 운집mobilization이 단단한 기구, 조직으로 이어지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바이럴이 아니라 운동들이 순간적인 운집을 휙휙 바뀌는 언론의 관심과 억압적인 반동에 지지 않는 단단한 기반으로 번역해 낼 수 있는가, 디지털 시대의 도구들이 그 과정에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술이 운동으로 하여금 규모를 확대할 수 있게, 조직 구조 확립, 리더십 발굴, 운동의 요구 사항을 구체화하고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억압에 맞서 지속적으로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줄 전략 개발 같은 필수적인 과정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고 있다. 소셜미디어의 “인기 경쟁” 역학과 위계적 리더십에 대한 전반적인 반대의 영향 속에서 많은 운동이 포용성과 직접소통식peer-to-peer 참여를 우선시하는 수평적 전략을 채택했다. 이는 운동의 접근성과 민주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종종 그 대가로 분명한 리더십이나 내적인 결집력을 포기하는 일이었고, 운동들이 집단적으로 위협에 대응하거나 동력을 유지할 수 있는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술적 교착tactical freeze” ― 운동들이 통일된 진로를 합의하지 못하는 경우 ― 이 반복되게 되었다.
또한 장기적인 운동에의 헌신을 배태하고 희생의 문화를 장려하기보다는 바이럴 게시물, 해시태그 트렌딩, 미학화된 시위 같은 잠깐의 보여주기식performative 활동을 조장하는 모습을 보아 왔다. 게다가 디지털 시대가 낳는 소외는 많은 이들을 전에 없이 고립되게 만들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행동activism”이라는 개념은 대규모 저지 투쟁에의 참여보다는 개인적인 가시성에 관한 것이 되어간다. 무도한 경우에는 의식awareness과 행동action, 연대와 자기홍보의 경계가 흐려지다 못해 무너지기까지 한다.
디지털적 열성과 진짜 정치적 귀결 사이의 이 같은 불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코니 2012가 있다.
2012년 초반 몇 달 간은, 적어도 당시의 나를 비롯해 순진하고 포기할 줄 모르는 고등학생들에게는, 우간다 반군 지도자 조지프 코니Joseph Kony 체포를 촉구하는 한 영상이 바이럴을 탄 덕에 전 세계가 집단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것 같아 보였다. 코니 2012 캠페인은 단순하면서도 구미가 당기는 전제를 깔았다. 의식을 충분히 고취해 “코니를 유명하게 만들” 수 있다면, 정부들이 그를 잡을 수밖에 없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코니 2012는 브랜딩의 귀재였다. 눈길을 사로잡는 포스터에서부터 흥겨운 음악까지, 하나하나가 사람들에게 힘이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그리고 유튜브와 페이스북의 도움으로 정말로, 거의 하룻밤새에, 코니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캠페인이 이룬 일은 그 정도까지였다. 장기적인 전략이나 분명한 리더십 구조가 없어 운동이 나아갈 수 있는 곳이 없다시피했고, 금새 와해되고 말았다.
코니 2012의 중심에는 보다 큰 선을 위한 집단적 희생을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자기본위적인 개별 행위자들로 구성된 모임이 있었다. 캠페인 자체가 상품화된 탓에, 대의의 지지는 ― 그리고 폭넓은 정치적 변화를 위한 싸움은 ― 굿즈 구매, 영상 공유, 페이스북 상태 업데이트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바꾸어 말하자면, 코니 2012는 이름만 활동가인 이들의 대부대를 만들었다.
코니 2012의 사례는 “의식”이 그 자체만으로도 힘이 있다는 생각을 영원히 사라지게 할 만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처에서 그 유산이 보인다. 2020년 “블랙아웃 화요일Blackout Tuesday”에는 인종 정의 시위에 연대하는 검은 사각형 수백만 개가 게시되었다 ― 눈에 보이는 강력한 행위였지만, 긴요한 조직적 소통을 덮어버리는 것 외에 딱히 성과는 없다. 이와 비슷하게, 2024년에는 AI로 생성한 “모두가 라파를 주시한다All Eyes on Rafah”라는 이미지가 소셜미디어를 뒤덮었지만 이스라엘의 라파 초토화를 멈추는 데에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힘을 쏟은 일이라고는 사진 공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실패한 운동들을 하나로 연결되는 것은 그저 소셜 미디어가 진짜 조직화를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보여주기식 행동을 독려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 훨씬 깊은 무언가가 있다. 바로 고립화라는 ― 불화를 상품화하고 혁명적 정치에 불가결한 조건들을 좀먹는 ―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다.
초개인주의와 흐릿해지는 불화
장기적 조직화에 전략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들에서 주의를 돌리는 것으로 모자라, 디지털 시대의 호사는 우리의 자아 감각 자체를 변형시켜, 집단적 행동 능력을 약화시키는 고립이라는 역병에 기름을 붓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한다.
인간의 진보는 언제나 공동체를 건설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연대, 협력, 상호 책임은 삶을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고 우리가 위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런 것들 없이는, 결코 대중 운동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부의는 우리의 일상은 물론 정신 자체에 경쟁, 소비, 위험의 개인화, 자기 최우선주의를 새겨넣음으로써 우리의 집단주의적 본능을 갉아먹는다. 정치, 경제에서부터 정체성 감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 초개인주의가 만연한다. 이것은 어려 면에서 자본주의의 가장 지극한 승리 중 하나다. 부의 집중이나 공적 영역의 사유화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집단이든 개인이든 인간의 본성 자체를 새로 빚어낸 승리다. 이 원자화는 소셜미디어가 흥하는 토대이자 소셜미디어가 영속화시키는 대상이기도 하다.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Z세대는 유사 이래 가장 외로운 세대로, 시민 사회에의 참여는 줄어들고 불안과 소외가 심화되는 특징이 있다. 서로를 믿고 기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국인은 34%에 불과하며 지역 공동체에 강한 애정을 품고 있다는 사람은 고작 16%다. 2023년, 당시 공중위생국장이었던 비벡 머시는 외로움을 “역병”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대중 정치란 바로 자본주의가 꺾으려 드는 본능들을 중심으로 건설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공동 투쟁을 하는 상호의존적 행위자가 아니라 사회적 시장의 고립된 경쟁자들로 바라보도록 훈련 받는다. 우리의 새로운 현실은 집단주의의 자리에 사욕 추구와 소비를 통한 안정이라는 환장을 주입한다. 우리는 심지어 체제의 모순과 자본주의가 배태하는 위기들을 더 잘 알게 되어 가면서도 현 상태의 대안을 구상할 능력은 갈수록 잃어간다. 마크 피셔의 유명한 말대로,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그저 우리가 물질적 안락함을 잃을까 두려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의 질서를 불가피한 것으로 심지어는 영원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졌다는 뜻이다.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다. 하지만 붙들 만한 고무적인 전망이 없다면 무엇이 원자화된 개인들에게 갈수록 억압을 강화하는 체제에 맞서는 데에 필요한 수가 모여 행동에 나서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희생을 감수할 동기를 줄 수 있겠는가?
동의 형성하기에서 엘리트가 주도하는 화평으로
초개인주의가 우리의 집단적 사고, 행동 능력을 좀먹은 만큼이나, 미디어 ― 소셜 미디어든 전통적 미디어든 ― 가 갈수록 엘리트의 관리 하에 놓이게 된 것 또한 우리를 억압하는 구조들을 감지하기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에 도전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는 인터넷이 널리 쓰이기 전부터도 정보에 대한 통제권은 점차 극소수 엘리트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 몇몇 힘 있는 기업이 대중 상당수가 무엇을 보고 듣고 읽을지를 결정했다. 한때 낙관적인 이들은 디지털 플래폼이 정보와 공적 담론에의 접근성을 빠르게 민주화하리라 믿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실제로 그런 듯해 보였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실시간 정보와 풀뿌리 운집을 가능케 해주었고, [이집트] 타리르 광장Tahrir Square에서부터 게지 공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봉기를 증폭시켰다. 하지만 잠시였다. 정부들과 미디어 기업들 모두 금세 새로운 통제 형식들을 ― 노골적인 것도 있고 알고리즘적인 것도 있다 ― 개발했고, 이제 그것들이 디지털 광장의 한계를 설정한다.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플랫폼들을 누가 지배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 X는 일론 머스크 소유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스레드는 마크 주커버그가 통제한다. 이런 플랫폼들은 중요한 공적 기능을 하기는 하지만 민주적이지도 공적이지도 않다. 가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달리 기댈 데가 없는 운동들은 대체로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며 갈수록 반동적이어지는 두 억만장자에게 휘둘린다.
대중 문화 속 디스토피아적 예언들은 오래 전부터 총체적인, 참담한 검열을 ―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빅브라더에 대한 비참한 공포 속에 살아가는 사회들, 너무 금기시되어서 건드릴 수조차 없는 말과 주제들 ― 그려 왔다. 하지만 오늘날 디지털 시대 대중 검열의 현실은 그와는 매우 달라 보인다. 물론 “전통적인” 검열은 여전히 남아 있다.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 지지 게시물은 반유대주이에 맞선다는 빌미로 일상적으로 금지된다. 메타는 이스라엘 정부 측 검열 요구의 94%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찰리 커크가 암살 당한 후 며칠 사이 고위 공직자들, 그에 가세한 유명인들은 징벌적 발언 단속을 요구하고 커크를 비판하거나 조롱한 이들을 해고하라며 고용주들을 위협했다. 국가 권력과 사적 영향력이 소셜 미디어를 활용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반대 의견을 꺾어버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사회 통제라는 더 큰 목적의 달성을 위해 보다 미묘하게 ― 아마도 더 효과적으로 ― 작동하는 것이 따로 있다. 바로 알고리즘적 게이트키핑, 작금의 디지털 풍경을 규정하는 주의를 흩뜨리는 온갖 것들distraction의 무한 스크롤이다.
오늘날에는 그저 이용자들을 정치적 의식이 야기하는 불편을 등지게 하고 현혹적인 스펙터클의 위안으로 이끄는 것만으로도 서사 통제를 해낼 수 있다. 참여와 이윤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된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을 타고 고양이, 유행하는 춤, 일상 생활 팁이 제일 위에 뜨는 동안 힘든 뉴스들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이렇게 알고리즘이 만드는 평화는 제이넵 투펙치Zeynep Tufekci가 주목 경제의 “덫”이라고 부르는, 운동들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규칙들 하에서 일말의 주목을 받기 위해 주의를 흩뜨리는 것들의 시장바닥에서 경쟁을 벌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촉발한다.
대중이 불편하고 복잡한 것은 대놓고 피하도록 길들여지면, 그 결과는 자연히 무심함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에서 펼치는 정보 전쟁 전략은 이런 역동이 큰 틀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땅과 신체들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서구의 지지를 유지하려면 서사 또한 통제해야만 한다는 점을 일찌감치 알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이스라엘의 홍보 활동은 좀 부족하다. 끝없는 잔혹행위의 물결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검열 ― 팔레스타인 지지 게시물을 삭제하도록 소셜 미디어 회사들을 압박하는 것에서부터 파레스타인 반체제 인사나 언론인을 구금하고 살해하는 것까지 ― 의 몽둥이를 계속 휘두르는데도, 알고리즘을 뚫고 나가는 이스라엘의 폭격에 팔다리를 잃거나 이스라엘의 봉쇄로 굶주리는 팔레스타인 아동들의 사진을 막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다른 전술을 도입했다 ― 바로 거짓말과 반쪽짜리 진실의 폭포, 이른바 “허위정보 쏟아내기firehose of falsehood”다.
병원을 폭격할 때 이스라엘은 그저 하마스가 지하에 지휘 본부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우기기만 하면 된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폭격에 갈기갈기 찢긴 아기들의 사진을 공유하면, 실은 진짜 아기가 아니라 인형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이 따라 나온다. 이스라엘에서 좀처럼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독립적으로 검증가능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 혹은 추가 조사 결과 이스라엘에서 제시한 증거가 완전히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곤 한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다. 폭격 당한 모든 병원이, 학살 당한 모든 아기가, 팔레스타인의 모든 말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전운에 뒤덮여 사라진다. 사람들이 가자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그들이 개입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부단한 풀뿌리 조직화와 더없이 그로테스크한 이스라엘 잔혹행위 이미지들이 필터를 뚫고 들어와 대다수의 예상을 뒤엎고 여론을 움직였다. 그러나, 마음으로는 이기고 있지만 정책은 여전하다. 물론 친이스라엘 로비의 힘을 업고 단단히 박힌 정치적, 재정적 이해관계들이 진보의 주된 장애물이기는 하지만, 운동이 이 올가미를 끊는 데에 필요한 지지의 임계질량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잠잠한 것은 설득에 실패한 탓이 아니라 보다 넓은 차원에서 우리를 정치적으로 마비시키는 그 힘들 ― 개인주의, 알고리즘의 주의를 흩뜨리기, 엘리트의 언론 장악 ― 때문이다. 반인종학살 운동이 이런 구조적 제약들에 맞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울 필요가 없었더라면 가능했을 일들을 상상해 보라.
이스라엘에 책임을 묻기 위해 행동에 나서는 이들이 많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이들 ― 주류 대중들 — 은 계속해서 시선을 돌린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미국인 53%가 이스라엘에 가자에서 인종학살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과반수 중 자신들이 내는 세금이 이스라엘에 넘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언가 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명백한 무관심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것은 희생하기를 꺼리고 거짓 정보에 넘어가 마비되고 ― 고용주나 국가, 심지어는 사교 생활 상대들의 ― 처벌을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되는, 타성이다. 무엇이든 간에, 이것은 한 세대가 마취에 빠져 있음을 ― 인종학살을 생중계하면서 즉시 그 경악스런 일을 넘기고 다음 화면을 띄울 수 있는 세대임을 ― 보여준다. 이 등식을 확장해 적용해보면, 더 폭넓은 현상의 윤곽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로, 대중의 무력화incapacitation다.
사람들이 무언가가 심각하게 망가졌음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진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데 따르는 효과를 경악스런 일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여흥을 즐기고 소비하는 삶이 주인 위안을 누리고픈 유혹이 한데 결합되면, 그 결과는 혁명의 마비다. 가자는 가장 혹독한 사례이긴 해도, 그 패러다임 자체는 특별하지 않다.
억압적 기술과 커져 가는 권력 비대칭
이런 체제들의 빈틈을 파고 들어 현상태에 실질적인 저항을 해낼 때조차도, 운동의 앞에는 최종 방어선이 하나 더 놓여 있다. 바로 점점 더 억압적이게 되어가는 기술들, 국가의 전술들이다. 당국에서 우리를 탄압하는 일은 갈수록 쉬워져만 간다.
우리가 점점 더 파편화되고 주의를 잃고 전략적으로 길을 잃어가는 동안, 정부들, 억압적 체제들은 그저 갈수록 더 통합되고 조직화되고 기술적으로 진보하기만 했다. 그 결과 대중과 그들이 맞서고자 하는 힘들 사이의 권력 비대칭이 가히 역사적인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 잔혹한 억압 도구들만이 아니라 진보된 감시 역량, 스파이웨어, 우리가 한때 해방의 도구가 되어주리라는 희망을 품었던 바로 그 디지털 플랫폼들을 파고하는 초국가적 치안을 통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판옵티콘” ― 단 한 명의 경비원이 중앙의 감시실에서 원형으로 배치된 수감실의 모든 수인을 그들 모르게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된 감옥 ― 을 구상했다. 이 같은 부단한 감시는 수인들로 하여금 언제든 누가 보고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끊임 없이 자신의 행동을 단속하게 만들어 수인들 사이에 영구적인 불확실성의 환경을 조성한다. 그 결과, 질서 유지가 죄수 스스로에게 외주된다.
거의 두 세기가 지난 1975년,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벤담이 구상한 판온티콘은 현대 사회 전체의 권력 역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시를 통해, 통제 체제들이 노골적인, 종종 물리적인 위협과 강제에서 비가시적이고 편재적인 조작으로 초점을 옮길 수 있었다고 보았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더없이 선지적이었던 푸코의 경고조차 넘어섰다. 디지털 기술 ― CCTV와 안면인식부터 정교한 스파이웨어와 알고리즘적 모니터링까지 ― 은 우리를 전에 없이 밀착적인 자기단속 규범으로 몰아 넣을 뿐 아니라 권력자들에게 우리를 진압할 역량을 주는 현대의 감시 판옵티콘을 구축했다.
오늘날 상용되는 가장 진보한 스파이웨어 기술은 아마 이스라엘의 페가수스일 것이다.[1]역주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페가수스: 시민의 핸드폰을 감시하는 정부와 기업〉 참고. NSO 그룹에서 개발한 페가수스는 사용자가 무언가 하지 않아도 ― 메시지, 이메일, 사진, 위치 정보에 전부 접근할 수 있도록 ― 스마트폰을 몰래 감염시키며 심지어는 원격으로 마이크나 카메라를 켤 수도 있다.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Jamal Khashoggi가 2018년에 살해 당하기[2]역주 ―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언론인. 2018년 10월에 튀르키예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을 방문했다가 사우디 정부 요원에게 암살 당했다. … (계속) 전에 그의 아내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전화기에서 페가수스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멕시코에서 국가 부패와 카르텔 범죄를 조사하던 언론인, 활동가, 인권 옹호가들에게도 사용되었다. 팔레스타인 활동가들, NGO 직원들의 기기에서도 반복적으로 발견된다.
그게 다가 아니다. 지난 몇 년은 국가 당국과 팔란티어 같은 사기업의 파트너십이 이끄는 AI 기반 사업 사업entrepreneurship의 도가니였다. 안면 인식과 생체 정보 추적은 물리적인 공공 장소들을 국가 감시 지대로 바꾸어버렸다. 홍콩에서는 시위 현장에서 안면 인식 기술을 이용해 대규모 체포를 할 수 있었고, 이는 거리의 활기를 약화시키고 조직가들을 지하로 숨게 만들어 사기를 꺾었다. 합중국에서는 경찰과 사조직 모두 이스라엘 가자 인종학살 반대 시위를 벌이는 활동가들을 식별하고 체포하는 데에 안면 인식을 활용하며, 이는 팔레스타인 권리 지지 및 이스라엘 비판을 범죄화하려는 시도와 결합되어 사람들이 시위 활동 참여를 포기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기술적 진보들은 그저 저항만 분쇄하는 것이 아니다 ― 운동이 태어나는 토양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역사적으로, 당국에서 평화적으로 저항할 공간을 폐쇄하면 운동은 싸움의 레퍼토리를 청원과 시위에서 무장 투쟁으로 바꾼다. 하지만 평화로운 집회의 잠재력을 묶어버리는 바로 그 구조는 저항 운동이 국가에 맞서는 비밀스러운 길과 직접적인 길 역시 모두 제약한다. 알제리 독립 전쟁에서부터 베트남이 합중국에 승리한 것까지, 오늘날의 저항 운동에도 여전히 영감을 주고 있는 반식민 투쟁들은 게릴라 전술 ― 숨고 흩어지며 점령군에 맞서 비대칭전을 벌이는 ― 에 의지했다. 하지만 먼 곳을 정밀타격할 수 있는 드론, AI를 활용한 타격점 설정, 자율 무기 계통 등을 갖춘 오늘날의 군가 시술은 전통적인 게릴라전을 벌일 수 있는 공간을 대대적으로 축소시켰다. 그 결과로, 전체 운동의 여러 전술 중 하나로서든 주된 방식으로서든 무장 투쟁의 비용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고, 억압적인 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공간은 더더욱 줄어든다.
오늘날 저항 운동을 벌이고자 하는 이라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권력 비대칭의 심화를 제대로 인식하고 평가해야만 한다. 수십 년 전 언젠가는 저항 투사들이 장기 게릴라전과 대중 결집에 의지해 더 힘 있는 식민 병력이나 국가 병력의 의지를 서서히 침식시킬 수 있었지만, 패러다임이 달라졌다. 아마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억압 기술의 진보 하나하나가 이 같은 기존 권력 비대칭을 심화하고 강화한다. 이 새로운, 부단히 변화하는 위협적인 환경을 인식하지 못하면 오늘날의 저항 운동은 초토화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 혁명의 미래 건져 올리기
우리와 우리의 저항 역량을 막고 늘어서 있는 위협들의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을 직면하고 우리의 전술전략을 재고해야 한다는 말이다. 혁명의 가능성을 되찾으려면 구석구석 혁명을 차단하도록 설계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투쟁이 불가능해 보이는 때가 올 것이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어마어마한 적 앞에 홀로, 불안에 떨져, 작아지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
반란의 전선은 어디에나 있음을, 아무리 작은 봉기라도 전선을 밀어붙인다는 것을 잊지 말라. 또한 제국이 그렇게나 통제를 원하는 것은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임을 잊지 말라. 독재는 부단한 노력을 요한다. 고장나고 샌다. 권위는 허약하다.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억압하는 것이다.
잊지 말고 명심하라. 이 모든 전투와 전쟁이, 이 모든 반항의 순간들이 제국의 방파제를 넘는 날이 올 것이다. 딱 한 방울만 넘치면, 그 한 방울이 저들의 아성을 무너뜨릴 것이다.
잊지 말라 ― 시도해야 한다.
이것은 실제 혁명 투사나 저항 투사가 한 말이 아니다. 좀도둑에서 반란군 스파이가 된 카시안 안도르가 은하 제국에 맞서 반란 연합에 들어가는 이야기를 담은 《스타워즈》 스핀오프 시리즈 《안도르》의 등장인물 카리스 네믹이 쓴 말이다. 그런 점에서 네믹의 선언은 지구상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독점 기업 중 하나인 디즈니에서 재미를 위해 만든 기업 상품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혁명의 이상이 혁명이 맞서는 상대에 의해 미학화되고 재포장되고 상품화되는 또 하나의 사례다.
하지만 《안도르》가 억앞 앞에서의 중립이라는 거짓 약속 ― 군사 점령 하에서 고개를 낮추고 평범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일의 허망함 ― 에 대한 강렬한 고찰을 제시한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이 시리즈는 저항이 불가피하며, 종종 난데 없이, 분명하게 터져나올 수 있다는 점까지도 다루었다. 기업에서 나온 말인 것이라고는 해도, 네믹의 말은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현실 세계의 수많은 혁명가들이 목숨 바쳐 싸운 이유와 공명할 뿐 아니라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고 있는 중대한 기로에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억압 체제들 ― 하이에나 같은 자본주의에서부터 점점 더 옥죄기만 하는 이스라엘 점령의 손아귀,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것 ― 을 상대하면서 우리가 너무도 초라해지는, “투쟁이 불가능해 보이는” 국면에 처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네믹은 이렇게 쓴다. “제국이 그렇게나 통제를 원하는 것은 그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항은 언제나 불가피하며 늘 예측불가능하다. 우리가 언제쯤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이를지 혹은 마침내 끓어오르면 어떤 형국이 될지를 잘 예측했던 적은 없다. 역사가 알려주듯 파열이 일어나는 혁명의 순간들은 예기치 않게 터져나오는 법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런 순간들이 새로운 세상에서 펼쳐지고 있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먹히지 않는 기분이 든다.
혁명이 살아남으려면, 혁명에 무어라도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가 그저 과거를 복제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혁명들이 1962년의 알제리나 1994년의 남아프리카 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이 지난 20년 간의 실패한 대중 운동 같은 모습이 되게 두어서도 안 된다. 우리를 억압하는 이들은 새로운 세상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전에는 우리가 조용히 속삭이며 모의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들이 전화기와 컴퓨터에 침입해 우리의 메시지를 읽는다. 전에는 녹슨 소총 몇 정이면 매복 작전으로 중무장한 군인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지금 그들은 안전한 기지에서 무인 드론을 조종해 저 위에서 저항군을 살해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억압자들은 우리를 집단 행동에 넌더리를 내는, 사익을 주된 동력으로 삼는, 해방을 욕망하기보다는 손해를 두려워하는 원자화된 존재들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의 기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 자체도 파고들어와, 해방을 구상하는 역량을 주의를 흩뜨리는 알고리즘으로 대체하고 집단적 투쟁을 보여주기식 가식과 뭉뚱그렸다.
학자들, 조직가들은 이미 감시와 파편화를 이겨내기 위한 더 강력한 지역 연대 네트워크를 만드는 온오프라인을 아우르는 조직화를 강조하며 대안을 찾고 있다. 현상태 너머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대안 제도를 구축하는 “선취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의[3]역주 ― ‘예시預示적 정치’라는 역어가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가치를 중시하는 활동가들이 늘고 있다. 완전히 수평적인 구조는 의사결정을 방해한다는 인식이, 그에 따라 투명한 지도 구조에 대한 옹호가 커지고 있기도 하다. BDS 같은 전 지구적 운동들을 예로 삼을 수 있을 초국가적 연대 네트워크는 잘 조직화된 전 지구적 행동이 어떻게 억압에 저항하고 그 효과를 키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처해 있으며, 전술적 창의성보다 훨씬 많은 것이 요구된다. 디지털 시대의 변화는 ―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 되돌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점, 상상력, 대안적인 미래를 그리는 역량은 언제든 되찾을 수 있다. 현대적 권력의 진짜 특별한 점은 무지막지한 폭력적 지배가 아니라 우리를 스스로 현상태를 집행하는 이들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는 데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최우선적으로 싸우고 무찔러야 하는 점이다. 완벽한 순간이 올 때까지 천운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네믹의 말대로, “시도해야 한다.” 무감함은 억압자들보다 우리를 먼저 무너뜨릴 것이므로, 시도해야 한다.
파열이 일어나는 혁명적 순간들은 언제나 갑작스러워 보일 테지만 무無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닥쳐올 때에는 해일 같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무수한, 켜켜이 쌓인 흐름들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 켜켜이 쌓인 흐름들 속의 불화, 저항, 조직화는, 아무리 작은 행동이라 해도, 무엇이 가능한 일로 여겨질 수 있는가 하는 구도를 바꿀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가자로 돌아간다 ― 가자는 우리의 미래를 위한 실험실이, 혹은 기준선이 될 것인가? 많은 이들에게 저 멀리 있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좁다란 척박한 땅 같아 보일 그곳에서 이스라엘과 서구의 후원자들이 벌이고 있는 일은 인종학살 이상이기에 하는 말이다. 타신 엘라이얀이 최근에 《뉴욕》지에 말한 대로, “세계 제 민족은 오늘날의 문제가 그저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에 관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인간의 가치를 지키고 세계를 해방하려 애쓰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자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통로가, 모든 양식의 현대적 권력과 통제가 모여들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그로테스크한 실험의 장이 되었다. 가자는 미래에 쓰일 AI 기반 무기의 실험실이자 우리로 하여금 한 민족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것과 같은 악랄한 행위를 새로운 표준으로 받아들이고 내면화하게 만드는 알고리즘적 최면과 정보 전쟁의 인큐베이터이다. 우리를 가자 인종학살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나면, 그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어려움 없이 파기하고 세상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남김 없이 분쇄할 청사진을 완성할 것이다.
파열의 순간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도, 억압적 체제가 본질적으로 지속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억압적 체제들은 강압과 강제를 통해 많은 이들이 예상한 것보다 오래 내적인 모순들을 이겨 왔다. 그리고 이제는, 엘리트가 관리하는 디지털 알고리즘들, 초개인주의, 진보된 억압 기술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견고해지고 있다. 혁명의 미래는 우리가 이런 토양에 맞게 혁명을 다시 정의할 수 있을지, 필연적으로 그에 따라올 희생을 집단적으로 마주할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
주
| ↑1 | 역주 ―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페가수스: 시민의 핸드폰을 감시하는 정부와 기업〉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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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역주 ―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언론인. 2018년 10월에 튀르키예 이스탄불 주재 사우디 영사관을 방문했다가 사우디 정부 요원에게 암살 당했다. 정의길·이본영, 〈“사우디, 카쇼기 살해 은폐하려 대역까지 동원”〉, 《한겨레》, 2018.10.22. 카쇼기는 미국식 발음이다. |
| ↑3 | 역주 ― ‘예시預示적 정치’라는 역어가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