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Ra Page, “Refaat Alareer and the online culture war,” The Electronic Intifada, 2025.12.06.

가자에 와서 맞는 첫날이었다. 스물일곱까지 이곳에 살았던 아내는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는 내가 조금 불안한 모양이었다. 내가 산책가라는 것, 새로운 곳의 거리를 걸어다니며 “발로” 알아가는 일을 무엇보다도 좋아한다는 것은 그녀도 알았다. 하지만 아랍어는 전혀 못하다시피 하는 서양에서 온 백인인 내가 눈에 띌 것은 뻔했다.
한 달쯤 머물 예정이었다. 다섯 해를 미룬 여행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여러 육촌 형제들, 이복 삼촌들을 비롯한 다른 식구들은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조차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한동안 여기서 지내기로 했으니 내겐 보호자가 필요할 터였다.
그렇다 보니, 가자에서 맞은 첫날에 몇 년간 알고 지낸 한 작가에게서 장모님 댁 앞이라며 시간 있느냐는 메시지가 오자 아내는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여기서 보내는 첫 주에는 가족 말고는 만날 사람이 없을 줄 알았던 내게 갑자기 약속이 생겼으니 말이다.
전형적인 대학 강사의 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지투성이 기아 피칸토. 아버지가 몰았던, 싸고 작은 (실은 웃길 만큼 작은), 실내는 정리가 안 되어 있고 시동을 걸면 자동으로 영어 오디오북이 재생되던 차가 떠올랐다. 하지만 운전석 창문 너머로 내게 인사를 건네는 미소는 백만불짜리였다. 미소가 이렇게 말했다. “타세요, 갑시다.”
가자의 지식인
시인이자 작가, 편집자이자 교육자였던 리파트의 명성은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10년 전에 엮은 『가자가 맞쓴다Gaza Writes Back』라는 선집에 필자로 참여한 젊은 작가이자 라파트의 제자인 라완 야기Rawan Yaghi의 글이 실린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와 직접 알게 된 것은 한 해가 더 지나서였다. 가자에 융단 폭격이 가해지고 셰이크 자라에서는 주민들이 쫓겨나는 중이던 2021년 5월, 《뉴욕 타임스》 기고를 도왔다. 공습 속에서 여덟 살 난 딸을 달래는 이야기를 담은 글이었다.
리파트의 글은 많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다. 배우 올리비아 와일드는 트위터에 올리기까지 했다 (당시 그녀의 파트너가 만든 코미디 시리즈 《테드 라소》의 엄청난 팬이었던 그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순진하게도 그를 만나면 이런 좋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는 나를 여러 식당에 데려갔는데, 그 중 처음 간 곳 ― 팔레스타인 광장에 있는 팔라펠 카페 ― 에 앉자마자 모든 게 엉망이었다는 것을 그의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그 글이 실린 후 《뉴욕 타임스》 예루살렘 통신원 패트릭 킹슬리가 그에게 연락을 해 왔다. 교육자로서의 그를 소개하는 별도의 기사를 쓸 거라고 했다. 킹슬리의 기사는 리파트를 냉철하고 진보적인 지식인, 가자 이슬람대학교에서 열정적으로 셰익스피어와 번역 시를 가르치는 인물로 제시했다. 킹슬리가 들은 한 강의에서는 학생들의 시야를 넓히기 위해 이스라엘 시인 예후다 아미차이Yehuda Amichai의 시를 가르치면서 처음에는 시인의 이름과 국적을 숨겼다고 한다.
킹슬리의 호의적인 기사는 당연히 솔직한보도HonestReporting 같은 시온주의 언론 로비스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자에 지식인이라니? 위대한 시를 사랑하고 직접 쓰는 사람, 그러면서도 독실한 무슬림이자 팔레스타인 저항에 몸바치는 사람, 《뉴욕 타임즈》 지면이 그런 사람을 추켜세우다니? 그들은 분개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수준의 반발이었다.
그 기사에 응수해 솔직한보도에서는 리파트가 “히틀러는 여느 이스라엘 지도자만큼 평화적이었다”고 쓴 (엄밀히 말하자면 둘 다 평화적이지 않다는 것 외에는 아무 비교도 담지 않은) 트윗을 두고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몰아갔다.
소개 기사가 실리고 약 한 달이 지난 무렵, 아마도 엄청난 압력을 받은 탓에, 《뉴욕 타임스》에서는 온라인판 기사 상단에 장문의 편집자 주를 덧붙였다. 사실상 그 기사를 깎아내린 것이다. 편집자 주에는 리파트가 그 시가 “끔찍”하고 “위험”하다고, 다른 이스라엘 작가의 시에 대해서는 “이런 시는 민족 청소와 팔레스타인 파괴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고 적혔다.
하지만 식민주의의 맥락에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서의 영시를 다룬 그 강의에서 리파트는 학생들에게 작가의 정체성을 근거로 어떤 시가 “좋다” 혹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뉴욕 타임스》 편집자들이 시에 대한 평가라고 오해한 “세뇌”라는 말은 실은 식민 문학에서 정착자 인구의 공모를 숨기는 비유들을 비판하며 쓴 말이었다. “위험하다”라는 말도 시 자체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시온주의자들이 옹호하는 허위적 동치를 비판하는 데에만 썼다.
《뉴욕 타임스》에서 사실상 소개 기사를 철회한 그 즈음, 악플러 떼거리가 조직적이다 싶을 정도로 끔찍한 인신공격을 해댔다고, 특히 2014년에 세상을 떠난 그의 동생 모함메드를 조롱하며 그에게도 똑같은 꼴을 당하라고 해댔다고 털어 놓았다.
리파트의 맞은 편에 앉아 처음 먹는 가자 팔라펠을 즐기며 《뉴욕 타임스》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셈이다. 그는 그들이 동생의 죽음을 즐기고 신나 하는 모습이 “포르노적”이었다고 했다.
경솔하게도 소셜미디어가 원래 그런 거라는, “머저리들, 나쁜 놈들 집합소”라는 말로 그를 달래려 들었다. 봇이 아닌 계정들은 이스라엘 국가의 혹은 그 동맹인 힘 있는 기관들의 지침에 따라 조직됐거나 거기에 따라 붙은 계정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리파트에게 그 트윗들을 두고 어떤 감정을 느끼라고 말한단 말인가. 그는 동생을 사랑했다.
그는 그 두 가지 공격(동생에 대한 공격과 그의 교육에 대한 공격)이 조직된 것이라고 느꼈고, 《뉴욕 타임스》에서 무슨 사감이 있어 그를 벼랑 끝으로 내몬 것인지 아닌지는 개의치 않았다. “반론권”을 주겠다는 신문사의 연락에는 답하지 않았다. 결국 편집부에서는 균형 있는 신문이라는 모양새를 위해 그가 오프더레코드로 한 답변들을 이리저리 꿰어 맞췄다.
“망할 《뉴욕 타임즈》 따위”. 우리 둘 다 같은 결론이었지만, 악플들은… 악플들은 그를 힘들게 했다.
“그저 시일 뿐”
다른 강의에서는 파드와 투칸Fadwa Tuqan의 시를 읽는 것은 적의 특공대 스무 명을 마주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이스라엘 장군 모셰 다얀이 한 말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시가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는 양 구는 우리를 꾸짖었다. 팔레스타인 시와 같은 행성에서 쓰여졌다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전이transference의 원리에 따라, 마찬가지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저 시를 썼다는 이유로 체포와 고문 당할 수 있다는, 많은 이들이 그렇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곤 한다. 리파트는 다린 타투르Dareen Tatour를 언급하며 “이스라엘이 왜 [그녀를] 체포하겠어 … 그저 시를 썼을 뿐인데!”라고 말하는 우리를 비웃는다. 하지만 “그저 시” 같은 것은 없다. 모셰 다얀이 보기에 ― 그가 정말로 저 말을 했다면 말이지만 ― 그런 것은 없다.
팔라펠을 사이에 두고 리파트를 만난 다음날, 가자시에 사흘 간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가자 친구들이 이런 일을 겪게 되어 미안하다는 문제를 보내왔다. (영국인인 나에게 사과하다니!) 식구들은 내가 8년 전에 출판한 전쟁 수기들에서 읽고 잘 배워둔 “전쟁 습괄”을 실행했다. 폭발의 압력에 깨지지 않도록 창문은 모두 열어두기, 유리 파편을 피할 수 있도록 창문에서 제일 먼 방 한가운데에 매트리스 깔고 자기 등등.
이스라엘에 공습 당하는 삶에 관해 오랜 시간 읽다 보면, 이상하게도 몸에 익는다. 하지만 하늘을 가르며 표적을 향해 날아가며 폭탄의 소리를 처음 듣는 데에는 아무런 대비도 되지 않는다. 그 순간에, 그 소리를 들으면, 그제야 진정으로 새로 배우게 된다 ― 당신의 목숨이 당신 것이 아님을.
폭격이 멎는 순간에 가자는 실의에 찬 채 삶을 향해 터덜터덜 되돌아 오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사방에서 낭독회, 콘서트, 답케dabke 모임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남은 기간 동안은 가족끼리 다 아는 가까운 친구인 작가 탈랄 아부 샤위시Talal Abu Shawish가 (원래 아내가 하려고 했던) 내 보호자 역할을 맡아 하루에 두세 군데씩 문학 행사장에 데려다 주었다. 쓰는 이들의 세계 ― 일부는 파타 계열, 일부는 대학 중심, 또 일부는 구호aid 중심인 평행 영역들의 세계 ― 가 내 앞에 펼쳐졌다. 리파트는 그런 행사들에서 끊임 없이 소환되었다.
한번은 리파트가 공동설립자로 함께했던 우리는숫자가아니다We Are Not Numbers라는 (《슬레이트Slate》에 실린 아테프 아부 사이프Atef Abu Saif의 일기에서 이름을 따 온) 문예창작 단체에 가서 단편 이야기 구조에 관한 강연을 했다. 폭격에 겁에 질린 두 살배기 아들이 내 곁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아서 아이를 안은 채 강의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뒤에서 리파트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우리 부자의 듀엣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리파트의 제자들도 있었다. 교육자이자 창작 멘토로 몇 세대에 걸쳐 학생들을 만나 왔으면서도 리파트는 새로 들어오는 젊은 작가들의 한결 같은 친구이기도 했다 ― 한평생 그들의 편이 되어 주었다.
가자에 가기 전부터 그런 이들 여럿을 알았다. 2021 학살 당시 라시다 틀라이브Rashida Tlaib가 합중국 의회에서 낭독한 트위터 게시물을 쓴 에만 바셰르Eman Basher, 《일렉트로닉 인티파다》에 이스라엘의 공격 속에서 워즈워스를 가르치는 일에 관한, 팔레스타인 지식인의 저항을 보여주는 글을 실은 아흐메드 네하드Ahmed Nehad 같은 작가들 말이다. 직접 만나보니 모두들 여전히 리파트를 우러러보았고, 리파트를 향한 사랑이 여실히 느껴졌다.
리파트의 매력은 전복성에 있었다. 그의 유머 감각은 천진하면서도 도발적이었다. 보드게임 말장난Pun Intended(이나 후속작 말장난두Pun Intended, Too!)을 하는 것도 말콤 X나 흑표 운동의 방법론,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똑같이 잘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잘못에 관대했고, 한사코 내가 돈을 내지 못하게 했고, 가자에 머무는 동안 완벽한 개인 가이드가 되어 주었다. 멀리 해외에서 저력을 증명하고 있는 신인 “프리랜서”들이 많이 오는 옥상 카페에도, 나무가 늘어선 이슬람대학교의 정원에도, 새로 문을 연 서점에도 데려다 주었다. 수십 년의 전쟁과 고립, 수감에도 굴하지 않는 가자 사람들이 얼마나 유쾌한지를, 또한 가자가 얼마나 용감한지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그저 훌륭한 동료였다. 라파 검문소에서 (우리가 출국 허가를 받을 수는 있을지를 알아보느라) 한참을 대기했던 고된 날을 하루 앞둔 가자에서의 마지막 날 밤, 우리는 아름다운 어느 해변 카페에서 리파트를 만났다 (그곳은 2025년 6월에 끔찍한 폭격을 당했다). 그는 뒤늦게 도착한 아내와 나를 기다리고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를 읽고 있었다. 운을 맞춘 시구와 현지의 관용구 같은 팔레스타인 농담으로 가득한 즐거운 밤을 보냈다. 리파트와 아내가 나를 위해 언어적 아크로바틱이라고 해도 될 만한 통역을 해주었다. 그러는 내내 우리 뒤로 펼쳐진, 전함들이 수평선 가까이서 반짝거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바다에서 지중해의 파도가 부서졌다.
한 단어 당 1.6명
맨체스터로 돌아와서도 리파트와 계속 연락했다. 될 성 싶지 않은, 오랫동안 생각만 해 왔던 선집 발간을 제안했다. 한 편이라도 좋으니 그의 글을 받아 우리가 내는 책 표지에 그의 이름을 싣는 은혜를 입고 싶었다.
하지만 한 해 가량 지나 인종학살이 시작되면서, 나는 모든 것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도 잘 알게 한 도시가 된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역사에서 지워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감당이 안 됐다. 집들이 가루가 되었을 뿐 아니라 주위의 차도며 인도며 할 것 없이 체계적으로 완전히 갈아엎어져 사라졌다. 오로지 “석기 시대로” 되돌려보내진 이들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무언가 생각할 틈도 없이, 9년 전 아테프 아부 사이프의 전쟁 일기를 실시간으로 편집해 출간했던 때 몸에 밴 기억에 빠져 들었다. 리파트와는 매우 다른 작가다. 글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어떻게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아테프와는 달리, 내가 개인적으로 가깝고 너무도 돕고 싶었던 이들 — 특히 탈랄과 리파트 — 은 가족들의 목숨을 부지하느라, 그리고 리파트의 경우에는 서구 언론의 서사와 싸우느라 여유가 없었다.
몇몇 언론사의 원고 청탁 제안을 리파트에게 전해, 《선데이 미러Sunday Mirror》에 이스라엘의 미사일에 라파트의 아파트가 무너지고 그와 아내, 아이들이 유엔에서 운영하는 학교로 피신해야 했던 일에 관한 기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전설적인 어느 축구 선수가 새상을 떠나면서 《미러》 일요일 지면에 글을 싣기로 했었던 리파트의 인터뷰는 여덟 쪽짜리 부고에 밀려 캐비닛에 묻히고 말았다.
이어진 몇 주 동안도 리파트와 계속 연락하려고 애를 썼지만 아내 가족의 상황이 좋지 않아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유튜브로 리파트의 인터뷰 몇 건을 보았다. 《일렉트로닉 인티파다 생방송》에서 그가 눈물 짓는 모습을 보느라 괴로웠고, 《지금 민주주의!Democracy Now!》에서도 하나를 보았다. 그가 명성을 얻는 ― 가자 사람들에게 널리 공유된 소셜미디어 추천 팔로 목록 최상단에 이름이 오르는 ― 모습을 두고 문자로 농담을 주고 받았다.
언젠가 우리 둘 다 들어가 있던 왓츠앱 대화방에서 그와 친구의 대화를 훔쳐본 적이 있다. 리파트와 긴밀히 협업한 적이 있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 라일라 엘-핫다드Laila El-Haddad와의 대화였다. 라일라는 그에게 무언가를 설득하려 애쓰고 있었다. 나도 애써봤지만 허사였던, 트위터 악플러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녀가 “리파트, 그런 것들한테 대꾸하지 마”라고 쓰자 리파트는 늘 하는 식으로 답했다. “알겠어요, 엄마.”
그러고 나서야 온라인에서 리파트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전투 직후에 BBC와 인터뷰를 했고 점령당한 사람들의 무장투쟁 권리를 옹호했다. 그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예로 들었다 ― 이 말에 영국유대인대표위원회에서 곧장 항의했고 BBC에서는 불쾌감을 준 데에 사과하고 다시는 리파트를 초빙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 논쟁을 둘러싼 보도는 리파트가 한 말을 정확히 전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그가 “그날의 살해는 바르뱌바 게토 봉기와 똑같은 것이었다”고 주장한 《아이 페이퍼》 기사가 그랬다. 리파트는 점령 당한 이들의 저항 행위는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했을 뿐이다.
리파트는 2014년에 남동생은 물론 자기 쪽 집안의 먼 친척 네 명, 아내 누사이바Nusayba의 가까운 친적 여러 명을 살해한 살인적인 체제에 두려움 없이 맞섰다. 매서운 조롱도 그 방법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세계 주류 언론들이 “야만인들이 ‘아기들의 목을 베었다’” (《선》 10월 11일자 1면 헤드라인) 같은 이스라엘의 잔혹행위 프로파간다성 10월 7일 관련 근거 없는 거짓말들을 무비판적으로 퍼뜨릴 때, 더 말도 안 되게는 오븐에 아기를 구웠다는 유나이티드 핫찰라United Hatzalah 설립자 일라이 비어의 거짓말을 퍼뜨릴 때, 리파트는 거짓말이 빠르기도 하다swift고 (그리고 [조너선] 스위프트적이라고) 비웃었다. “베이킹 파우더는 썼대?” 하는 트윗을 게시했다.
영국 우익 타블로이드지 《데일리 메일》에서는 BBC 인터뷰 후로 《뉴욕 타임스》라는 기득권/중도/자유주의 언론의 수호자와의 거짓투성이 보여주기식 “전쟁”에 무기로 삼으려고 군침을 흘리며 리파트를 물고 늘어졌다. 숙원을 풀기라도 한 듯 헤드라인을 걸었다. “하마스가 아기를 오븐에 구웠다는 주장에, 《뉴욕 타임스》에 글을 실었던 팔레스타인 교수가 역겨운 농담을 하다.”
한편, 《데일리 메일》의 헤드라인을 본 뉴욕의 악플러들, 악플 기자들은 《뉴욕 타임스》를 더 거세게 공격을 기회를 잡아 쾌재를 불렀다.
전직 《뉴욕 타임스》 논설 편집자였던 바리 와이스는 전 고용주의 자기만의 전쟁을 벌이는 듯했다. 리파트가 이스라엘 전쟁 기계의 레이더에 걸리게 된 것은 그의 농담을 맥락 없이 떼어다 쓴 그녀의 트윗 때문이었다.
《빅뱅 이론》 주연 마임 바이알릭까지도 리파트와 《뉴욕 타임스》를 공격하는 떼거리에 가세했다. 2023년 11월 11일에 게시한 영상에서 바이알릭은 리파트를 “《뉴욕 타임스》 필자”로 칭(해 그가 정규 필진이라는 거짓 인상을 전달)하며 오븐에 아기를 구웠다는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아기를 오븐에 구웠단 걸 알게 된 […] 그는 뭘 써서 구웠느냐는 농담을 했다. 그게 해도 되는 짓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런 일을 두고 농담을 했다”라고 말했다.
상황 파악을 했을 즈음 리파트는 라일라의 간곡한 말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악플러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그의 가족에 대한 강간 위협을 비롯한) 포르노적인 위협들을 캡처해 “내가 이스라엘의 폭탄에 죽거나 가족들이 다치게 된다면 바리 와이스와 그 부류들 탓이다”이라는 말과 함께 트위터에 올렸다.
다른 때 같으면 호들갑이나 피해망상으로 치부될 법도 한 일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안보통”을 인용한 이스라엘 언론인 리처드 실버스타인에 따르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리파트는 여동생 아스마, 그녀의 세 아이, 남동생 살라, 살라의 아들 모함메드, 그리고 이웃 한 명과 함께 살해 당했다 ― 그 농담 때문에.
실버스타인의 취재가 정확했다면, 다섯 단어짜리 트윗의 대가로 여덟 명의 목숨을 치른 셈이다. 한 단어 당 1.6명이다. 리파트가 정말로 트윗 하나 때문에 살해 당한 것이라면, 그가 시온주의 프로파간다를 조롱하며 한 “날 선” 농담과 그의 암살을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이어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전투기가 가자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트위터 계정에 알고리즘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서야 말이다.
어떤 작가가 자신이 쓴 글 때문에 ― 러시아에서 안나 폴릿콥스카야Anna Politkovskaya, [터키에 있는] 사우디 대사관에서 자말 카쇼기Jamal Khashoggi가, 몰타에서 다프네 갈리지아Daphne Caruana Galizia가 ― 다른 정부에 살해 당했다면 서구 언론에서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리파트의 즉결 처형에 주류 언론은 거의 완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리파트에게 원고를 청탁했던 《데일리 메일》은 그의 죽음을 언급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다. 리파트에게 세 편을 청탁해 그의 생전에 한 편을 발행했던 잡지 《프로스펙트》에서는 기발행 원고를 삭제하고 나머지 두 편을 싣지 않았다 (이 글들은 나중에 《일렉트로닉 인티파다》에 실렸다). BBC마저도 헤드라인에서 그를 “논란이 있는 작가”로 칭하며 ― 최근에 트럼프가 카쇼기를 두고 마지 그가 잔혹한 죽음을 자초하기라도 했다는 듯 “아주 논란이 많은” 이라고 칭한 것과 다를 바 없이 ― 그의 죽음에 단서를 달았다 (이후 비판이 일자 수정했다).
그의 친구가 유럽·지중해인권감시Euro-Med Human Rights Monitor에 전한 바에 따르면, 살해 당하기 며칠 전 가족과 함께 유엔 학교에 피신해 있었던 리파트는 이스라엘 당국자를 자처하는 이로부터 협박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리파트는 가족과 따로 있기로 하고 친구 아셈 알나비Asem Alnabih와 함께 가자시 여기저기를 걸어다니면서 시간을 보내며 인터넷 신호를 찾거나 야무크 경기장Yarmouk Stadium 일대로 피란한 이들의 회복력에 감탄하거나 하다 마찬가지로 집에서 쫓겨난 여동생 가족을 만나 그들과 함께 머물렀다.
이튿날 저녁에야 소식을 접했다. 맨체스터의 한 서점에서 출판 관련 행사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전화기가 울려서 보니 이미 부재 중 전화가 여러 통 남아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택시를 잡아 집을 향했다. 현관에 들어서자 아내가 쓸 데가 있다며 전화기를 가져 갔다. 나에게는 아이들에게 잠자리 이야기책을 읽어주라고 했다. “투타 투타, 칼라사트 알-하두타. 힐와 왈라 말투타Toota toota, khalasat al-hadoota. Hilwa walla maltouta?” 팔레스타인에서는 잠자리 이야기가 끝나면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가 끝났어. 좋았니, 별로였니?”) 내 아내의 제안으로 리파트가 2021년에 《뉴욕 타임스》에 실은 글에 이 말을 쓰기도 했다. 마침내 아이들이 잠들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아내가 내게 소식을 전하며 무너져 내렸다.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전화기에서 찾은 유일한 사진, 뒤에서 파도가 부서지는 알-바카에서 리파트와 내 아내를 찍은 그 사진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이름은 쓰지 않고 사진을 게시했는데 밤새 욕설 트윗 수백 개를 받았다. 봇들, 트윗으로 돈을 버는 미니언들일 거라며 자위했다. 이어진 며칠 사이 리파트가 2011년에 쓴 시 「내가 죽어야 한다면」[1]역주 ― 리파트 알아리르, 「내가 죽어야 한다면」, 리파트 알아리르 외 지금, 김한나 외 옮김, 『팔레스타인 시선집』, 접촉면, 2025, 7쪽. 영어본은 … (계속)가 전 세계에 퍼져 저항의 외침이 되었다. 사람들이 시위에서 [저 시의 제목을 구호로 적은] 연 사진을 찍어 보내주었다. 내가 리파트와 아는 사이란 건 모르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친구가 하룻밤새 전 세계적인 유명인이 된 것보다도, 친구를, 출판 업계 동료를, 휴가를 떠난 나를 맞아준 이를, 내 나라 정부와 공모하는 한 정부에서 고의로 암살했다는 것이 훨씬 더 이상한 일이었다.
넉 달 후, 이 이야기는 더더욱 견딜 수 없는 일로 이어졌다. 리파트의 소중한 딸 시마아Shymaa, 남편 무함마드Muhammad, 그리고 석 달 난 아들 압드 알-라만Abd al-Rahman이 이스라엘의 공습에 살해 당했다. 리파트의 죽음이라는 비극이, 끔찍하고 아찔한, 곤혹스러운 결말을 맞은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더해주지 않는, 기차에서 전화기가 울려서 봤다가 구토를 하고 말게 만드는 결말이었다.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영영 못할 것이다. 지난 두 해 동안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영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도덕을 능률과 맞바꾸면 민주주의는 두 가지 선택지가 적힌 투표 용지를 내민다 ― 인종학살 찬성 대 인종학살 반대. 이 어찌나 고마운 자유인지!
그래서, 힐와 왈라 말투타? 이런 가짜 가치들 위에 지어진 사회의 결말이 좋을까? 아니리라. (일각에서 추산하기로) 십만이 넘는 삶을 가늠하기에 나는 역부족이다. 당신이 내 아내 쪽 식구들의 피살을 헤아릴 수 있기를 바라기는 무리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팔레스타인인 한 사람의 이야기라면 어떤가? 리파트의 이야기라면 어떤가?
주
| ↑1 | 역주 ― 리파트 알아리르, 「내가 죽어야 한다면」, 리파트 알아리르 외 지금, 김한나 외 옮김, 『팔레스타인 시선집』, 접촉면, 2025, 7쪽. 영어본은 https://x.com/itranslate123/status/171970131299083093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