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Samah Zaher Zaqout, “ The road to Khan Younis,” We are Not Numbers, 2025.12.11.
칸 유니스에 세 번째로 가는데,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졌다 ― 낯설고 숨막히고 무겁게.

가자 중부, 데이르 알-발라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이 글을 쓴다. 우리 집을 잃고 갈 데가 없어진 후에 할아버지의 집으로 몸을 피했다가 이리로 왔다.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몇 달이나 망설이고, 두려워 하고,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옳은 결정인지 어떤지 모르는 채로 길을 나섰다.
이제 천막에 산다. 인종학살이 거의 두 해를 이어졌고, 결국은 천막으로 밀려났다 ― 우리는 면했다고 생각한 운명이었는데. 북쪽에서 데이르 알-발라까지 온 여정에 대해서도, 떠나기 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보낸 몇날 밤에 대해서도 지금은 쓰고 싶지 않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저 잊고 싶은 일을 계속 떠올리고 싶지 않다. 더 남쪽, 칸 유니스를 향한 여정에 대해 쓰려 한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지만, 세 번째 방문이었다.
처음 간 것은 몇 년 전이었다. 사촌의 결혼식이 있었다. 두 번째로는 동료들과 함께, 막 움라Umrah(메카 순례)를 마치고 돌아 온 친구를 만나러 갔다. 늘 탁 트여 보이는 도시였다 ― 가자시보다 거리도 넓고 바다도 가까웠으며 들판도 더 푸르렀다. 하지만 이번 세 번째 방문 때는 모든 것이 달랐다. 모든 것이 낯설고 숨막히고 무겁게 느껴졌다.
남은 것을 향해
아버지와 나는 걸어서 길을 나섰다. 남쪽으로 태워 줄 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걸었지만 차는커녕 기름이 거의 사라진 후로 가자의 주된 교통 수단이 된 동물 수레조차 다니지 않았다. 휘발유나 경유는 구할 수도 없거니와 있더라도 너무 비싸다. 수많은 운전자들이 엔진이 상할 것을 알면서도 차에 식용유를 넣는다.
마침내 중간지점쯤까지 태워다 둘 수레 한 대가 나타났다. 아버지와 함께 가장자리에 걸터 앉아 흙먼지 날리는 길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요즘 가자에서 차나 수레를 탈 때면 슬프고 끝나지 않는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관객이자 등장인물이다. 지나치는 사람들 ― 구호식당에서 받아온 제 몸보다 무거워 보이는 솥을 들고 가는 아이들을 ― 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가는 동안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 남자아이는 몇 학년일까. 저 자그만 여자아이는 올해 학교에 다녔을까. 이 아이들이, 이제는 아무나 살 수 없는 사치품이 되어 버린 닭고기 맛을 알까. 이 아이들이 뭘 했다고 공원도, 안전도, 휴식도 없이 살아야 할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제 나라를 등지고 가자를 떠난 이들이 옳았던 걸까.
길을 따라 사방에 천막이 빽빽하게 들어선 피란촌이 있었다. 사람들은 빈 땅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천막을 쳤다. 세를 치르고 천막을 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그럴 여력이 없다.
“운이 좋은” 이들은 천막 앞에 작은 부엌이나 임시 욕실을 만들 공간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런 필수적인 공간조차 갖지 못한다. 바짝 붙어 서로를 짓누르는 천막들, 겹겹의 열기에 숨이 막힌다. 천막 귀퉁이마다 옷가지가 걸려 있고 연기, 먼지, 오물 냄새가 진동한다.
작은 언덕들 ― 위험하고 바람 부는,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 위에 천막을 친 수많은 가족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다. 그 언덕들은 공짜고 아래쪽 땅에 세를 낼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테니까.

물론 원래 이렇지는 않았다, 천막에 사는 저 많은 이들에게도 자기 집이 있었다. 우리에게 전쟁이 벌어지기 전, 가자 사람들은 삶을 사랑했다 ― 그럴싸한 직업이나 학위 없이도 일을 하고 존엄하게 살기에 모자라지 않을 만큼은 벌 길을 찾을 줄 아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어버렸다. 그랬던 사람들이 깨끗한 물 한 모금, 빵 한 덩이조차, 휴대전화 충전기조차 구하기 힘들어졌다.
도착해서 마주한 힘든 현실
마침내 칸 유니스에 도착해, 시끌벅적한 시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져서 내가 이방인 같이 느껴졌다.
지난번에 친구를 만나러 왔을 땐 빛으로 가득했던 거리 곳곳이 허물어져 있었다. 농지마저도 아무 생명도 살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수퍼마켓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종일 일해야 겨우 밥은 먹을 수 있는 이들이 연 작은 노점들이 서 있었다.

과일이나 야채 조금, 얼마간의 냉동 고기가 최근들어 나오기 시작했지만 노점에서는 대부분 통조림을 판다. 여전히 요리하는 데에 꼭 필요하므로 장작을 파는 곳도 있다. 구호품으로 연료가 조금 들어오긴 했찌만 모두가 쓸 수 있는 양은 아닌데다 조금만 사기에도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싸다. 요즘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바로 매일 불을 지피는 일이다.

옷을 파는 노점 하나를 지났다. 실은 폭격 당한 가게들에서 건진 옷가지를 쌓아 둔 천막 수준이다. 흙투성이만 아름다운 옷들이 폐허와 생존을 동시에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피자와 페이스트리를 파는 빵집을 지났다. 맞은 편에는 병원이 하나 있었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병원을 보기는 오랜만이다. 휠체어에 앉은 나이든 여성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얼굴은 가리고 있었지만 온 몸에서 피로가 보였다. 젊은 남자가 화를 내며 나왔다. 매일 병원에 오는데 도무지 약이 들어오지를 앉는다고 했다. 바로 옆 정문 쪽에서는 아이들이 땡볕을 맞으며 이것저것을 팔고 있었다.
힘이 되는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기분 전환이 좀 될 줄 알았지만, 어떤 말로도 덜 수 없을 육중한 무게만 느꼈을 뿐이다. 우리가 마침내 가자시에 돌아왔을 때 남아 있을 것들을 계속 생각했다. 다들 이번 강제 이주 후로 가자시는 알아보지도 못하게 바뀌었다고 말한다. 무엇이 남을까.
구호품이 겨우 조금 들어오기는 했지만, 가자는 여전히 피를 흘리고 있다. 사람들은 지치고 다친 채로 오로지 기억과 믿음에 의지해 버틴다. 상처는 우리 깊숙이 남을 것이고, 잠깐이라도 즐거우려는 순간마다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나올 것이다.
대부분은 가자를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지만, 가자에서 산다는 것, 가자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 가자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얼마나 숨막히는지, 그 어떤 카메라도 보여줄 수 없다.
미래에의 희망의 맛
그날 나를 웃음 짓게 한 유일한 순간은 빵집에서의 한때였다. 카운터에 기다란 참깨 카악ka’ak이 보였다. 아침마다 아부 쿠웨이크가 팔았던 빵이다. 아부 쿠웨이크는 가자에서 카악으로 유명했다. 가자 사람이라면 거의 전부 그를 알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그에게서 카악을 샀다. 내가 그를 알게 된 무렵에 그는 이미 노인이었는데, 아마 거의 평생 카악을 판 것 같다.
어린 시절 먹던 이 빵을, 전쟁이 시작된 후로는 맛도 보지 못했다. 아마도 아부 쿠웨이크는 세상을 떠난 듯 싶다. 전쟁 중에 그렇게 됐는지 그 전의 일인지 모르겠다. 그 빵을 다시 보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 아직 따뜻한, 어찌어찌 아직 살아남은, 옛 가자의 한 조각.

잠시 후에는 제빵사가 튀르키예식 페이스트리가 담긴 쟁반을 들고 나왔다! 대학에 다닐 때 아침마다 먹던 것들이었다. 늘 아이란ayran(요거트 음료) 한 잔을 곁들였다. 웃음이 나왔다. 한순간 마치 그 날들이, 친구들과 건물 계단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빵을 나눠먹곤 했던 날들이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학교는 무너졌다. 그 건물도 무너졌다. 친구들은 흩어졌다. 남은 것이라곤 그 맛, 우리를 그때로 돌려보내주는 그 풍미 뿐이다.

아버지는 페이스트리 열다섯 개를 주문했다. 중학생 쯤 되어보이는 소년이 우리 빵을 구워주기를 기다렸다. 자그마한 손이 불길 위를 재빨리 움직였다. 그렇게 베어문 빵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언제까지 내게 기쁨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과거를 갈망하는 아픔과 섞이니까.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파괴된 그 모든 것은 우리 속에, 우리 기억 속에, 우리 상상력 속에, 그리고 어쩌면 내일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연약하지만 담대한 우리 희망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