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는 지금, 팔레스타인 민족 인종학살이 격화되고 있다. 그들이 나고 자란, 점령 당한 땅에서 말이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은 사망자 통계로, 급격히 30,000 명에 다가서고 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중요하지만 논의는 덜 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69,000 명이 넘는, 여전히 늘고 있는 부상자다. 사태가 지금처럼 악화되기 전, 가자 인구는 약 22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1%가 넘는 인구가 이스라엘점령군에게 무자비하게 살해 당했다는 뜻이다. 또한 3% 이상이 불구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루도 빠짐 없이 수시로 폭탄이 떨어진다. 겁에 질리고 슬픔에 잠긴 팔레스타인인들이 매서운 추위 속에서 주린 배로 잠을 청하는, 이른바 “안전” 지대에 있는 천막들 위로 쏟아진다. 가차 없는 폭력과 비인간화의 군사 작전이 그들을 겨눈다.
가자가 이미 세계 평균치를 웃도는 비율의 장애를 갖고 있다는 ― 가자 주민의 18.1%가 적어도 한 가지 만성적 건강 문제를 갖고 있으며 최소 40%의 가구에 정신 건강 상의 곤란을 겪는 이가 적어도 한 명은 있다는 ― 점을 생각하면, 사상자 수는 더더욱 충격적이다. 하루 평균 열 명의 아동이 절단 수술을 받으며 진통제나 마취제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백린탄을 쓰고 있다. 백린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치료가 어려운 화상을, 종종 뼈에까지 남긴다. 노골적으로 살해하지는 않더라도 엄청난 부상을 남기는 정책이 분명히 있는 셈이다. 서안에서 격화되고 있는 정착자 준군사조직들 및 점령군의 폭력은 빼고 말해도 이 정도다.
충격적인 사망자 수치나 일가족 몰살 보도 등이 현재의 담론을 사로잡고 있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부상자 수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계적으로 장애는 흔히 안타깝게도 ‘죽음보다도 못한 운명으로 여겨지며, 부분적으로 이는 수많은 사회가 너무도 정상신체중심주의적ableist이어서 종류와 경중을 막론하고 손상에서 비롯되는 생물학적 곤란이 접근성 없는 환경이나 보건의료의 부족과 결합되어 악화되기 때문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전 지구적 북부에서는 대개 의사-환자 간의 위계적 관계로 인해 의사의 태도가 불량하며 전 지구적 남부에서는 이어지고 있는 (신)식민주의로 인해 자원이 부족하다. 자본주의와 세계 전역에서, 특히 보건의료가 부족하거나 무상이 아닌 곳들에서 노동자들을 홀대하는 자본주의 논리 탓이기도 하다. 가자에서도 다르지 않다. 인구를 한층 더 쇠약화하기debilitate 위해 주기적으로 기반 시설이 표적이 된다. 우리는 이번 폭력의 와중에 의료 서비스를 붕괴시키기 위해 병원을 표적으로 삼는 정책을 목도했다. 이동이 어려운 사람이 폐허로 가득한 곳을 어떻게 지나갈 수 있겠는가? 작금의 인종학살이 야기한 심각한 문제들조차 해결하지 못하는데 ― 상당수가 이전의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야기된 ― 진행성 건강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인구를 불구로 만드는 정책을 펼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실제로, 2024년 1월, 이스라엘 문화유산부 장관 아미차이 엘리야후는 이스라엘이 “가자 주민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 길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장애가 있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사회에서는, 현재의 정책이 노골적으로 설계된 것이라고, 팔레스타인 인구를 당장 죽이지는 않더라도 (끊임 없는 폭격 하에서 죽음과 질병과 쇠약화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트라우마는 말할 것도 업고) 부상을 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가자 인구 전원이 식량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26%는 재앙적인 수준의 기아에 처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세계 기아 인구 다섯 명 중 한 명이 가자에 살고 있다. 유병률도 치솟고 있다. 즉각 죽임 당하지는 않는다 해도, 이 인구는 굶주리고 트라우마를 입고 부상 당하고 보건 의료의 부족을 생각하면 치명적인 질환에 노출되어 있고 마실 물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인구가 잦아들 기미가 없는 ― 실상 오직 심해지기만 하는 ― 인종학살로 인해 신체적으로 쇠약화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푸아를 위치시키기: 학계로부터 해방하기
“쇠약화는 죽음보다 못한 운명으로 여겨진다.”[1]Jasbir K Puar, The Right to Maim: Debility, Capacity, Disabilit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7), 140. 재스비어 푸아는 여러 상을 받은 2017년 저서 『불구로 만들 권리: 쇠약화, 역량, 장애The Right to Maim: Debility, Capacity, Disability』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년 이 책에서 트랜스젠더 권리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출산장려주의, 마이클 브라운 총살 이후 흑인의생명은중요하다 시위대와 팔레스타인인의 연대나 장애 운동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자유주의적 권리 담론에 대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룬다. 하지만 이 글의 관점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푸아가 팔레스타인을 중심에 놓는다는 점이다. 동성애국민주의에 관한 논의로 유명한 푸아는 『불구로 만들 권리』에서 이스라엘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말미에 “이 분석의 궁극적인 목적은 팔레스타인 해방에 복무하는 것”이라고 쓴다.[2]Puar, The Right to Maim, 154. 실제로, 이스라엘의 정착자-식민주의가 현재 벌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 학살은 불구로 만들 권리와 그에 따른 인구의 쇠약화의 가장 극명한 예라는 점에서 이 작업의 핵심이다.
학계에 확고히 자리 잡고 이름을 널리 알린 ― 그녀는 러트거스 대학교 여성·젠더 연구 교수이자 대학원장이다 ― 푸아와 그녀의 글은 학계에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가 제시하는 개념들은 대계 상아탑 속에서만 쓰이는 듯하다. 현재 인종학살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 책의 어휘 일부가 소셜미디어에서 보이기는 하지만, 장애나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포스트식민주의적 폭력에 관한 다른 이론들과 같이 널리 쓰이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는 아마도 그녀가 (다른 여러 학자와 함께) 미셸 푸코의 작업에 기대고 있는데 그는 블랙팬더 표절을 비롯해 여러 가지 문제로 좌파 영역 내에서 정당한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푸코나 다른 후기구조자들의 논의는 필요 이상으로 현학적이고 그들이 말하는 담론과 권력의 물적 토대를 무시하는 면이 있기도 하다. 『불구로 만들 권리』도 마찬가지로 밀도 높은 책이다. 하지만 푸아는 푸코의 생명정치학을[3]생명정치란 흔히 우생학을 수단으로 삼는, 생명 자체에 대한 정부의 통제로, 그 목적은 (푸코가 “규율적 권력”이라고 칭하는 개인 층위와 반대되는) … (계속) 장애 정의 연구에서 포스트 식민주의 사유에 이르는 다른 이론들로 담금질해 활용하며, 쇠약화로부터 얻는 경제적 이익이 논지의 핵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그녀가 물적인 것을 무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비록 후기구조주의적인 경향이 있기는 해도, 이 글에는 어떤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라도 만족할 만큼 유물론도 충분히 포함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정책을 분석하는 데에 매우 큰 비중을 두는 이 책은 선견지명은 오늘날 특히 두드러진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학계에서 해방되어 학계 밖에 있는 이들의, 작금의 위기를 이해할 수 있는 더 폭넓은 어휘를 갈망하는 이들의 손에 주어져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쇠약화인가 장애인가
푸아는 동의어 같아 보이는[4][역주] 쇠약화로 옮긴 debilitaion은 ‘무언가를 약화시킴’이라는 뜻으로, 신체와 건강의 맥락에서는 주로 소모성 질환을 묘사하는 데에 쓰인다. … (계속) 이 두 용어가 서로 연관되지만 매우 다른 현상임을 보여주는 데에 공을 들인다. 의료적 모델에서든 사회적 모델에서든 (혹은 둘을 결합한 모델에서든) 장애는 정체성이다. 식민주의적 수단을 활용해 저들의 정의 정의定義를 퍼뜨리려 드는 전 지구적 북부의 신자유주의적 사회들에서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쇠약은 사람들을 인구집단의 층위에서 생명정치적으로 관리하게 위해 가해지는 위해a condition of harm이다. 이것은 정체성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process이다. 그 부산물 중 하나로는, 쇠약화된 이들을, 로렌 벌랜트의 용어를 쓰자면, “느린 죽음” ― 생존 이상이라고 하기 어려운 근근이 이어가는 삶[5]Lauren Berlant, Cruel Optimism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1). ― 속에 방치하는 것이 있다. 푸아는 이 개념에 기대어 쇠약을 정의하면서도 쇠약화란 느린 죽음과 똑같은 것은 아니며 느린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쇠약의 원인들은 군산복합체, 환경 독석, 감옥 및 치안, 위험한 노동 조건 등 전 세계 자본주의, 식민주의의 여러 책략과 이어져 있다고 지적하면서, “쇠약이라는 개념은 일시적으로 급증하거나epidemic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풍토병적인endemic 부상 및 신체적 배제를 다룬다”고[6]Puar, The Right to Maim, xvii. 쓴다. “풍토병”이라는 말이 단서다. 옥스포드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풍토병은 “영구적인 지역적 원인들로 인해 특정 국가에 상시적으로 만연”(강조 추가)한다. 쇠약이란 우리가 투쟁하는 사회경제적, 정치적 체제들의 통상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라는 뜻이다.
쇠약화가 부수적 피해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푸아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곧 살펴 보겠지만, 오히려, 불구로 만들 권리가 생명정치적으로 관리한 산물이라는 것이다. 레나 오버마이어의 말대로, “부수적 피해란 이 말 자체가 시사하듯 실제 목적에 부차적으로 가해지는 해를 뜻한다. 하지만 민간인 피해에 있어 부수적인 영역은 거의 없고 고의적인 영역은 훨씬 많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쇠약이 의도적으로 주변화된 인구집단들에 가해진다는 점이다. 쇠약화(그리고 때로는 느린 죽음을 통한 살해)는 이 과정의 고의성을 보지 못하도록 호명되는 이들이 그 위해를 “자연스러운” 부산물로 간주할 정도로 비인간화되는 타자Other로 표식되는 인구를 제거하는 한 방법이다. 오버마이어가 설명하듯 이는, 열등하고 인간성을 결여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들을 제거하는 것을 이데올로기 및 실천의 총체적 기반으로 하는 정착자-식민주의의 근저에 있는 ‘제거의 논리’의 일환이다. 실제로, 쇠약화되는 이들은 “죽음을 내어주지 않는 것 ― 죽게 두거나 죽게 만들지 않기 ― 이 [그 자체로] 비인간화하는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팔레스타인인들은 죽기에도 모자랄 만큼 인간이 아니라는 듯이”[7]Puar, The Right to Maim, 141. 비인간화 된다. 모든 쇠약화되는 인구집단이 마찬가지다.
쇠약화와 장애는 서로 다르기에, 각 인구집단은 겹칠 수 있다. 즉, 누군가는 장애화되는 동시에 쇠약화될 수 있다. 하지만 쇠약의 자매 개념 ― 역량capacity ― 은 전 지구적 북부에서 흥미로운 효과들을 발한다. 모든 장애인이 쇠약화된다고 생각할 법하지만, 해당 사회들의 재활 및 의료care 체제 ― 막대한 이윤을 내는 체제 ― 는 장애인을 유순하고 (그들의 노동과 그들의 필요에 따라 생성되는 노동 양자의 면에서) 생산적인 개개인으로 체제에 편입시키는 장애인의 역량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이들은 자유주의적, 인권 기반 장애 담론에서 “임파워먼트”의 형상으로 활용된다. “영감 포르노”로 환원된다.[8]이 말이 낯설 수도 있겠지만, “영감 포르노”는 장애 공동체에서 특정 현상을 가리켜 꽤 오래 써 온 용어이며 푸아 역시 사용한다. 호주의 … (계속)
그런 한편, 반드시 장애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면서도 쇠약화될 수 있다. 푸아의 말대로 쇠약이라는 개념은 “다름 아닌 장애로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번역의 사전 차단foreclosing을 통해 영구적인 쇠약화 상태에 남는 몸들을 포괄한다.”[9]Puar, The Right to Maim, xiv. 그들은 주변화되기에 장애 정체성을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다른 특권을 누리는 이와 똑같이 정상신체able-bodied라고 할 수 있을까? 푸아는 팔레스타인을 예로 들며 아니라고 답한다. “… 고통을 겪는 서안의 주민들 중 그 누구도 이상화된 정상 신체가 아니다.”[10]Puar, The Right to Maim, 158
이런 물적 현실도 반드시 이야기되어야 한다. 장애인과 그들을 둘러싼 의료·재활 산업 복합체가 그들로부터 이윤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뒤에서 살펴볼 것처럼 쇠약이라는 미리 정해진 결론 역시 쏠쏠하다. 그들을 불구로 만드는 것이 전쟁 기계에 득이 되어서든, 감옥 산업 복합체가 그들의 부러진 등골에서 돈을 뽑아 내든 말이다. “그러므로 쇠약화란 그저 착취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유감스러운 부산물이 아니다. 이윤 확대를 위한 필수적, 구성적 요소다.”[11]Puar, The Right to Maim, 81.
불구로 만들 권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인구·기반 파괴
쇠약은 어떻게 생산되는가? 푸아에 따르면 (“죽게 만들기” 혹은 “살게 두기”로 정의할 수 있는) 주권적 죽일 권리나 (“살게 만들기” 혹은 “죽게 두기”로 정의할 수 있는) 인구의 생명에 대한 생명정치적, 우생주의적 관리와 마찬가지로, 동시에 주권적 권력이자 생명정치적 권력으로 작동하면서 둘의 경계를 혼란케 하는 “불구로 만들 권리” 또한 있다. 그녀가 쓰기로, 자유주의적 “인도주의적” 인사들은 전쟁 중에 작동하는 이 권리를 친절하게도 “살게 두기”로 정의하곤 한다. 하지만 “죽게 두지 않기”라 해야 옳다.[12]Puar, The Right to Maim, 139.
불구로 만들 권리는 두 층위에서 작동한다. 첫째는 한 인구집단에 대한 고의적인 신체적, 정신적 쇠약화다. 푸아르가 전쟁과 인종학살이 미치는 심리적 영향에 초점을 두지는 않지만, 그런 현실들은 깊은 외상을 남기며 또한 불구화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예컨대 팔레스타인 아동의 점령 경험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정의할 수 없다. 폭격은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2003년에도 상존하는 공격 위협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아동 93%가 불안감을 느낀다는 보고가 있었다. 불구로 만들 권리는 이런 정신적, 신체적 영향에서 더없이 확연히 나타난다.
하지만, 기반시설 파괴를 통한 한 인구집단의 고의적 쇠약화 또한 있다. 오버마이어가 쓰기로,
보건 기반 해체는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고의적으로 구급대원 및 의사를 살해하거나 해치기, 거의 붕괴에 가까운 상황을 야기하는 의료 시설 쇠약화, 회복에 필수적인 물품에 대한 차단 확대.
건물 잔해로 인해 도로를 이용할 수 없다면, 계속되는 공격으로 보건의료 체제가 작동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이 굶주린다면, 공중 위생이 없다면, 진통제나 마취제나 붕대가 다 떨어진다면, 인구집단은 신체적 혹은 정신적 상해를 겪지 않는다 할지라도 절대적으로 쇠약화될 것이다 (폭력의 수위를 생각하면 믿기 어려운 결과로 이어질 터이다).
물론 이 모든 일은 나크바 이래로 계속 벌어지고 있으며, 오버마이버의 논문의 초점인 귀환 대행진은 물론 제1, 2차 인티파다에서도 명백히 나타났다. 그러니 현재의 인종학살에서도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으며, 노골적으로든 아니든 앞으로도 계속해서 정책으로 유지될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새삼스럽지 않다.
자본은 언제나 길을 찾는다: 불구화의 수익성
팔레스타인 및 그 인구의 쇠약화는 수익이 된다. 과거에는 사람과 땅의 재활이 식민주의 기업들이 막대한 돈을 버는 데로 이어졌다. 푸아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런 식으로 소득 산출원이 되었다고 설명한다.[13]Puar, The Right to Maim, 146.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 고용을 마뜩지 않아 하기에,[14]Puar, The Right to Maim, 147. 자본주의는 그들의 신체로부터 이윤을 낼 다른 길을 필요로 한다. 쇠약화가 그 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제 완연히 팔레스타인 인종학살로 돌아섰기에, 그 파괴로부터 이윤을 낼 또 다른 길이 필요하다. 이미 사유지 해변를 꿈꾸머 국가가 가자를 식민화해 정착지를 재건하면 어떤 모습이 될지를 궁리하는 이스라엘인들이 있다. 새로운 길을 열기 위한 가자의 전면적 초토화는 현지와 외국을 막론하고 개발 회사들에 갖가지 사업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물론 군산 복합체도 이윤을 얻는다. 예를 들어, 악명 높은 엘비트시스템즈는 수요 증가 덕에 2023년 사분기 말에 전년 대비 이윤 확대를 달성했고 모건스탠리나 TD뱅크 분석가들은 충돌 격화 초기부터 수치를 주시했다. 실제로, 오버마이어는 팔레스타인 인구에 대한 폭력은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의 군사 신기술에 대한 일종의 광고 노릇을 하며, 충돌 격화 전후로 군사 기술 판매고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 투쟁의 전 지구적 성격을 밝히고 주변화된 이들 간의 연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현재 벌어지고 있는 다른 충돌들, 인종학살들을 함께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인종학살이 벌어지고 있으며, 애플, 테슬라 등에서 사용하는 원재료를 생산하는 코발트 광장에서 아동들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다. 이 지역이 벨기에 식민지였던 시대를 떠오르게 하는 일이다. 당시에는 강제 노역과 처벌로서의 불구화도 성행했다. 이렇듯, 전 세계 각지, 전 역사 속 여러 체제가 시초 축적과 이윤 창출을 위해 인구집단을 생명정치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죽일 권리 대신 혹은 그에 더해 불구로 만들 권리를 행사해 왔다.
저항에 부상 입히기: 팔레스타인 봉기 진압을 위한 이스라엘의 불구화 정책
하지만, 팔레스타인 인구에 대한 불구화와 기반 파괴는 또 하나의 목적에도 복무한다. 바로 이스라엘의 정착자 식민주의 및 그 인종학살에 대한 저항을 진압하는 것이다. 푸아가 쓰기로,
여기서 핵심은 그저 “목숨 자체”를 포획하고 빼앗는 것이 아니라, “저항 자체”를 포획하려는 시도다. 한 인구를 절멸시키지 않으면서도 얼마 만큼의 저항을 앗아갈 수 있을까? 물론 또 한 가지 질문은, 팔레스타인의 생명력, 용기, 반란을 짓밟으려는 그런 시도들에 어떤 생산적, 저항적, 숫제 창조적 효과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15]Puar, The Right to Maim, 136.
이스라엘은 불구 만들기를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사기를 무너뜨리고 그들을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쇠약해진 상태로 만들고자 한다. 간단하다. 불구로 만들 권리는 그저 자본주의적 이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폭력에 대한 저항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다. 이스라엘 정치인들이나 그 동맹들이 자신들은 그저 하마스를 격파하려는 것뿐이라고 지껄여 대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현재 목도하고 있는 폭력의 격화와 인구집단에 대한 의도적인 불구화가 그 충분한 증거다. 모든 민간인이 공모자로 지목되기에, 더 이상 “무고한” 이는 없다 ― 인종화되는 인구집단이 그렇게 여겨지는 경우가 드문 것을 생각하면, 언제는 그랬을까 싶기도 하다. 이스라엘에는 모두 무력 저항을 하는 이들로 보인다. 그렇기에, 불구로 만들 권리는 이스라엘 정착자 식민주의의 목표들과 민족 청소라는 그 절차에 대한 모든 저항을 분쇄하는 데에 활용된다.
적어도 당시 이스라엘 방위부 장관 이츠학 라빈이 “뼈 부러뜨리기” 정책을 도입했던 제1차 인티파다 이후로 이것은 노골적인 전술이었다. (1988년에 [나블루스를 습격한 이스라엘군 병사에게] 폭행 당하는 모습이 영상으로 기록된) 팔레스타인인 와엘 주데Wael Joudeh는 이를 두고 그들이 “제 힘을 남김 없이 짜내어 우리를 두들겨 팼다. 그저 우리 뼈를 부러뜨리고 신체적 고통을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모욕하고 우리의 얼을 산간조각내려 했다”고 기술했다. 같은 글에 카디자 아부 슈레이파Khadija Abu Shreifa의 이야기도 실려 있는데, 그녀는 시위에 나온 팔레스타인 소녀들을 성희롱하는 이스라엘 병사에 맞서 싸우다가 폭행 및 어깨와 발에 근거리 사격을 당했다. 이로 인해 현재 영구적 쇠약을 안고 있다. 오버마이어는 이런 형태의 폭력이 35,450 명이 불구가 된 ― 종종 주먹만한, 심지어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총탄 관통상을 입은 ― 귀환 대행진 시기까지 이어진 경과를 설명한다.
이런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 골절 정책과 귀환 대행진 당시의 과도한 불구 만들기는 팔레스타인 민족의 저항을 진압하고 단념시키기 위해 노골적으로 불구로 만들 권리가 행사되었음을 드러낸다.
필수적 보론: 수무드sumud와 일상의 저항
이것이 저항이 분쇄된다는 뜻일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다. 아무리 많은 폭탄이 떨어져도, 아무리 많은 팔다리가 잘려나가도, 아무리 많은 가족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도, 팔레스타인인들은 여전히 가슴 속에 저항을 품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수무드라는 개념이다. 직역하자면 “꺾이지 않음steadfastness”이라는 뜻이다. 팔레스타인의 유산과 긴밀히 얽혀 있는 식물인 단단히 뿌리 내린 올리브 나무를 연상시키는 수무드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 저항하고 정착자 식민주의의 숨 막히는 폭력 속에서도 사회적 응집성, 정체성은 물론 즐길 줄 아는 힘까지도 내려 놓지 않으려 하는 ― 결기다. 유세프 알렐루Yousef Alhelou의 말대로, “이스라엘인들은 파괴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재건하다. 슬프게도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런 고통을 견디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다. 이러한 저항은 수무드의 실천이자 삶의 방식이다.” 그 땅에 머물면서 갖은 수를 써서 ― 예컨대 무너진 건물들을 뒤져 부상자를 구조하거나 사방에 폭탄이 떨어지는데 병원에서 일하거나 ―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진전시킴으로써, 팔레스타인 민족은 수무드를 실천한다. 아마도 그의 마음과 몸, 정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이스라엘점령군의 표적 공격으로 가족을 살해 당한 《알-자지라》 기자 와엘 알-다도우Wael al-Dahdouh가 나크바 이후 수무드를 체화한 팔레스타인인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16]알렉스 터롤Alex Turrall 덕에 이 트윗을 보고 한 생각이다.
팔레스타인인이 고향 땅에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게 하는 그 모든 저항이, 실상 제 땅에 남기로 하는 그 결기가 이스라엘의 정착자-식민주의에 맞선 공격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압도적인 힘 앞에서 생존을 위한 싸움을 멈추지 않는 팔레스타인인들은 그 자체로 사미둔samidun이다.
오드리 로드의 잘 알려진 말대로, “자기 볼돔은 … 자기 보존이며 이는 정치적 전투 행위다.” 사라 아메드는 이 말을 인용하면서 “… 어떤 집단의 성원이 된다는 것은 사형 선고가 될 수 있다. 당신이 당신으로서, 당신의 위치에서, 당신이 함께하는 이들과 함께 살아서는 안 된다고 여겨질 때, 생존은 급진적 행위가 된다”고 썼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기돌봄이라는 말을 신자유주의가 의심스러운 건강보조제를 팔거나 정신 건강 돌봄의 책임을 정신 질환 당사자에게 전가하는 등에 가져다 쓰고 있기는 하지만, 그 뿌리는 쇠약화된 이들의 일상을 사회적으로 재생산하는 급진적 행위에 닿아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적용해 보자면, 이는 존재가 곧 저항임을 보여준다.
주
| ↑1 | Jasbir K Puar, The Right to Maim: Debility, Capacity, Disability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7), 140. |
|---|---|
| ↑2 | Puar, The Right to Maim, 154. |
| ↑3 | 생명정치란 흔히 우생학을 수단으로 삼는, 생명 자체에 대한 정부의 통제로, 그 목적은 (푸코가 “규율적 권력”이라고 칭하는 개인 층위와 반대되는) 인구의 층위에서 생명권력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는 것이다. 대개 표적은 인구집단의 인구통계, 즉 출생률 및 사망률, 장애 수준, 고용 수치 등이다. 생명정치는 이런 통계학statistics ― 문자 그대로 국가의 학문the science of the state ― 이 자본과 식민주의에, 또한 인종주의나 정상신체중심주의 같은 억압 체제들에 복무함을, 그리고 국가가 이런 수치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행정적 목적 전반에 복무함을 보여준다. 학계, 특히 후기식민주의 연구나 학계 페미니즘 같은 분야에서는 “생명정치”라는 개념으로 다양한 현상을 가리켜 사용한다. |
| ↑4 | [역주] 쇠약화로 옮긴 debilitaion은 ‘무언가를 약화시킴’이라는 뜻으로, 신체와 건강의 맥락에서는 주로 소모성 질환을 묘사하는 데에 쓰인다. 어원상으로는 힘/능력bilis을 없어지게 하다de-로 풀이할 수 있으며 이는 장애dis-ability의 어원적 의미와 일치한다. |
| ↑5 | Lauren Berlant, Cruel Optimism (Durham, NC: Duke University Press, 2011). |
| ↑6 | Puar, The Right to Maim, xvii. |
| ↑7 | Puar, The Right to Maim, 141. |
| ↑8 | 이 말이 낯설 수도 있겠지만, “영감 포르노”는 장애 공동체에서 특정 현상을 가리켜 꽤 오래 써 온 용어이며 푸아 역시 사용한다. 호주의 활동가이자 코미디언이었던 고 스텔라 영Stella Young이 대중화시킨 이 용어는 장애인의 삶이 경탄을 자아내는 서사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적어도 나는 저렇진 않잖아” 생각하며 시혜적으로 이야기 속 장애인의 “등을 다독여” 줄 수 있는 비장애인을 위한 이야깃거리가 되는 일을 가리킨다. 이는 재현이 강화하는 규범 ― 장애가 있는 삶은 손상 자체로 인해 남들보다 못한 것이 된다고 여기는, 개인적 비극으로서의 장애라는 규범 ― 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해당 장애인을 예외로 만들어 준다. 하지만 다른 장애인 전반에 대한 규율 수단으로 쓰일 수도 있다. 단상에 오른 동료만큼 성공하지 못했다며 그들을 꾸짖은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패럴림픽 광고 대부분이 영감 포르노의 훌륭한 예이긴 하지만, 영국의 채널포에서 참여자들을 “초인”이라 칭하며 낸 2016년 리우 경기 광고가 특히 그렇다. |
| ↑9 | Puar, The Right to Maim, xiv. |
| ↑10 | Puar, The Right to Maim, 158 |
| ↑11 | Puar, The Right to Maim, 81. |
| ↑12 | Puar, The Right to Maim, 139. |
| ↑13 | Puar, The Right to Maim, 146. |
| ↑14 | Puar, The Right to Maim, 147. |
| ↑15 | Puar, The Right to Maim, 136. |
| ↑16 | 알렉스 터롤Alex Turrall 덕에 이 트윗을 보고 한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