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아랍어): 베이루트 함무드, 〈34년째 수감 중인 왈리드 다카: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을 분열시켰고, 지도부는 민중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알-아크바르》, 2019.04.11
- 나는 아랍어를 전혀 모른다 (위의 원문 정보를 한국어로 적어야 했을 정도로).
- 아래는 아랍어-영어 기계 번역을 한국어로 다시 옮긴 것이다. 총 다섯 가지 버전을 참고했다.
- 따라서 나의 오역 뿐 아니라 영역문 자체의 오역이나 누락, 비일관적인 역어가 반영된 곳이 있을 수 있다.
- 문단은 임의로 구분했다.
- 언급된 글의 영어 제목은 공식 출간본(중 하나)을 따랐다.
- 왈리드 다카Walid Daqqa(1961-2024)는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활동 및 이스라엘 병사 살해 혐의로 1986년에 이스라엘에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37년형으로 감형되어 2023년에 형기를 다 채웠으나 수감 생활 중에 별건으로 2년형을 선고 받은 탓에 석방되지 못했고, 2024년에 암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86년 이후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지식인이자 작가로 살았다.
수학적 값으로서의 시간은 거리 나누기 속도다. 철학에서는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아마도 “감각 직관의 순수 형식”이라는 칸트의 정의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수감 당한 이들에게 시간은 어떻게 해석될까, 혹은 어떻게 측정될까. 머리카락이 몇 가닥이나 새었는지, 얼굴과 눈가에 “골짜기”가 몇 개나 새겨졌는지로 측정할까? 인간이 콘크리트 “상자”에 수십 년을 갇혀 있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그 긴 세월을 보내고도 심장은 어떻게 겨우 밤하늘의 별을 보며 사랑과 경이로 두근거릴 수 있을까? “제4차 송환 대상fourth batch”(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시민 수감자들’48 prisoners)[1][역주] 2013-2014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에서 이스라엘은 총 104명의 장기수를 석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세 번에 걸쳐 78명이 석방되었으나 … (계속) 중 한 사람이라면, 혹은 이스라엘이 그 어떤 협상에서도 석방에 응하지 않고 있는 오슬로 협정 이전에 투옥된 이라면 어떨까? 34년의 옥고를 치른, 이스라엘과 그 동지들에게서 1984년에 시온주의 병사 모셰 타맘을 납치, 살해 했다는 혐의를 받는 왈리드 다카가 이런 질문들에 답한다.
감옥의 시간도 우리의 시간과 똑같이 흐르는지라, 오늘 4월 11일은 1988년에 이브라힘 알-라이Ibrahim al-Ra’i, 통칭 “아부 알-문타시르Abu al-Muntasir”가 순교한 날이기도 하다. 천 년에 한 번 벌어지는 자연 현상 같기까지 하다. 11개월간 이어진 심문에도 침묵을 지켰고 결국 감옥에서 암살 당한 그는 백절불굴의 본보기가 되었다. 그 이래로 침묵은 원칙으로, 고백은 배반이자 일탈로 여겨진다. 이스라엘은 알-라이에게 다카 작전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두었다. 그의 다섯 동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1948년에 점령 당한 땅, 바카 알-가비예 출신이었다.
삼십 하고도 사 년을 감옥에서 보내셨습니다. 체포 당한 날은 어땠나요?
기억은 선택적이고 망각은 축복입니다. 도무지 잊을 수 없으면 이차 방어선이 가동되죠. 선별적 기억 말입니다. 그래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체포는 몸에도 정신에도 트라우마예요. 신체적으로 자유롭다가 포획자들에게 몸을 통제 당하는 삶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죠. 묶이고, 갇히고, 차이고 … 하는 삶으로요. 그 순간에 제 몸은, 그리고 아마 제 정신도, 사로잡히는 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몸을 보듯 외부에서 바라보고 있었어요. 어쩌면 제 정신이 냉정한 이성으로, 묶인 채 지프차에 실리는 저 몸뚱이는 더 이상 자기 책임이 아님을 받아들였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정신이 아무리 세포들을 다잡아도 그들이 가하는 고통을 막을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 순간 제 머릿 속을 가득 채운 것이 뭐였는지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저는 직장에서 체포 당했습니다. 네스카페 한 잔과 함께 피타 두 개 ― 올리브유와 자타르를 바른 것 하나,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라브네를 바른 것 하나 ― 를 먹으려던 참이었죠. 라브네 샌드위치, 레바논 식으로 말하자면 “신부 라브네”를 한 입 베어 물고 미처 삼키기도 전에 땅바닥에 고꾸라져 수갑을 찼습니다. 그 순간에, 제 정신은 우선 상황을 해석했습니다. 트라우마의 순간에 정신은 속임수를 써요, 라브네 빵을 못 먹게 된 상황으로 해석하는 거죠. 체포가 아니라 어머니가 떠오르는 빵 맛을 생각하는 거예요. 체포란 보통의 시간에서는 한 순간이지만, 감옥의 시간에서는 그 한 순간이 34년이 되도록 길게 늘어지죠.
몇 번이나 절망하거나 더 이상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생각에 빠지셨나요?
절망이란 말은 너무 거창해서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쓰지도 않습니다. 그 상황에서 절망은 아무도 누릴 수 없는 사치예요. 우리 민족에게, 우리 아랍 국가에게 ― 바그다드 아미리야 방공호에서 숯덩이가 된 아이나 이스라엘의 야만적인 폭격으로 무너진 다히예(베이루트 남쪽 교외)에서 건물 잔해에 깔린 아이의 모습으로, 혹은 가자에서의 대량학살이나 서안 검문소에서의 피도 눈물도 없는 살해의 광경으로 ― 찾아온 끔찍한 재앙에 눈물 지은 적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눈물 흘리는 건 한 순간이고 금방 균형을 되찾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는 수감을 그들의 의도대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랍 전체와 투쟁의 조건을 살펴볼 수 있는 어떤 경험, 위치, 각도로 생각합니다.
감옥이란 인류가 인간을 벌하기 위해 발명한 가장 추악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죠. 수감자는 그 벌을 어떻게 이겨내나요?
감옥은 아주 더러운 곳이에요, 그야말로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죠. 그런데 수감은 감옥이라는 장소 이상으로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정신성 혹은 문화로서의 감옥 말입니다. 우리 목 위에 달린 것이 금세 제 주인을 가두는 감방이 될 수 있어요. 몸은 속박 없이 돌아다닐 때조차도요. 아랍 세계에 이동식 감방이 얼마나 많습니까. 두 가지 감옥 ― 장소로서의 감옥과 정신으로서의 감옥 ― 모두를 극복하려면 의식화와 교육이 필수적입니다. 수감자 운동이 공을 들이는 지점이 바로 거기죠.
의식화와 교육은 팔레스타인 역사, 나크바, 아랍 국가의 쟁점과 우려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문화, 제 식으로 말하자면 “해방liberation; Al-Taharrur의 문화”가 빠지면 안 됩니다. 점령으로부터의 해방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자유freedom; Al-Hurriyah”의 가치를 이해하고 체화하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해방과 자유는 굉장히 다릅니다. 전자가 외부를 상대로 한 투쟁이라면 후자는 보다 어려운, 사회와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내적 투쟁이에요.
안타깝게도, 우리가 식민주의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그것이 국가 건설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해방 운동가들이 이 투쟁에서 어떤 쟁점에 대한 의견을 표하는 동지들, 동료들을 억압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가자와 라말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자유는 해방을 이끌어내는 가치이지만 해방은 투쟁의 한 단계일 뿐, 투사들이 자유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사회와 국가의 건설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해방운동가가 자유란 [그저 억압 받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궁극적인 길잡이로 삼아야 할] 가치임을 깨닫지 못하면 일단의 해방을 이룬 후에도 총을 내려 놓기 어렵습니다. 다른 정치 세력에 속하는 동료와 논쟁이 생기면 내부를 향해 총을 겨누게 되기 십상이죠.
이에 더해, 개인적은 차원에서는 늘 가족 간의 유대가 기나긴 수감 생활을 견딜 수 있도록 큰 힘을 주었습니다. 특히 자신과 저의 운명을 하나로 여기는 제 어머니 파리다와 아내 사나가요. 이 인간적 감정, 사나가 제게 주는 위대한 사랑은 단단히 견딜 힘을 줄 뿐 아니라 글을 쓰고 창작을 하고 팔레스타인 및 아랍 세계 민중의 문제와 이어짐으로써 저를 새로이 만들 수 있게 해주었어요. 책이나 잡지, 논문 같은 것들을 보내주거든요. 수감 생활에서 제일 안 좋은 점은 지루하다는 거예요. 아무 것도 없는 감옥 마당을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이죠. 사나는 제가 감옥에서 보내는 시간이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를 향해 곧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어요. 폭력과 증오로 넘실대는 바다에 굴하지 않고, 삶의 민트와 바질로 만든 저희의 조각배가 새 탄생이라는 미래의 해변에 닿을 수 있도록이요. (수차례의 진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 부부가 꿈을, 아이 밀라드를 잉태할 수 있을 부부 동침 면회를 허가하지 않았다.)[2][역주] 밀라드는 탄생이라는 뜻으로, 왈리드 다카가 오래 전에 지어둔 이름이다. 왈리드는 1999년에 옥중에서 사나와 결혼했고, 사나는 왈리드가 … (계속)
무엇이, 그리고 누가 그리우신가요?
소망과 향수는 모든 팔레스타인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 분모라고 생각합니다. 장소에 대한 소망이 팔레스타인 정체성의 구성요소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난민은 제 나라를 그리워하고 귀환하고 싶어 합니다. 수감자도 제 집을, 가족을, 동네를 그리워 하죠. 하지만 사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런 장소들이 갖고 있는 기억이고, 귀환한다는 것은 기억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런 장소들은 긴 세월 동안 달라졌다는 것을, 더는 같은 기억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현대성과 기술적, 경제적 세계화가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들어버렸음을, 우리가 상상하는 기억으로 귀환한다는 것을 불가능해져버렸다는 것도요.
이게 제가 귀환과 해방을 포기했다는 뜻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과거의 팔레스타인으로, 선인장과 석류와 물레방아가 있는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건 기억 속에만 존재하니까요. 팔레스타인이 낭만화되면 귀환의 권리는 유토피아적인 것이 됩니다. 귀환의 낭만화는 우리를 귀환 자체와는 더 멀어지게 만듭니다. 저는 미래의 팔레스타인으로, 민족 정체성이 고국 땅 전체와 일치하는 그런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오슬로 협약은 우리에게 국가와 맞바꾸어 고향 땅 일부를 내어 주었고, 협약에 참여한 이들은 귀환을 귀환의 이야기로 대체해 버렸습니다. 귀환이 민담 같은 것이 되어버린 거죠. 우리 정체성을 구성하는 그런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합니다만, 부풀려져 버린 거예요. 민속춤(답케)이 귀환의 강령을 대신해 버리게 되었고요. 귀환이 귀환과 비슷한 것으로 대체되어 버렸고, 고향땅은 고향 땅 비슷한 것으로 축소되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해방 운동을 주권 없는 권력authority으로, 권력이라고 할 수 없는 권력으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낭만적 과장이 해방 활동의 부재를 상쇄하게 되었고, 팔레스타인을 해방에서 한층 더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언어가 실제 고향 땅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그들이 수감자에게 붙이는 호칭을 생각해 보십시오. “옥중의 지도자Dean of Prisoners”, “불굴과 인내의 장군Generals of Steadfastness and Patience” 같은 것들이요. 이렇게 부풀려진 언어는 수감자들을 해방시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우리가 새로 만들 고향땅을, 혹은 기억을 소망합니다. 미래를, 제가 지을 집을 소망합니다. 제가 정한 곳에서 기억을 새로 쓸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옥중의 동지들에게 이따금 말하기도 하는데, 도시의 소음과 부산함을 피해 지을 그 집에서 커피를 끓일 겁니다. 마당에는 토종닭 네 마리, 다마스커스 염소 두 마리, 그리고 조용한 개 한 마리가 있을 거예요. 개 짖는 소리가 고요를 깨면 안 되니까요.
석방되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수감자는 많은 것을 박탈 당합니다. 물질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생활이죠. 단 한 순간도 혼자 있지 못합니다. 삽십 년 동안 하루 이십사 시간을 좁은 감방에서 동료들과 함께 지냈어요. 거기서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씻죠. 말도 못하게 숨막힙니다. 심지어는 마당에서도 카메라로 감시 받죠. “빅 브라더”(이스라엘 방송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처럼 살아야 해요, 실제로 생중계 되고 있고요.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건 바다에 가는 겁니다. 바다가 그리워요. 사람 없는 외진 해변에 앉아 혼자서 바다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바다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어요. 그간 제 몸에 쌓인 어깨 위의 족쇄와 사슬을 전부 벗을 것입니다. 바다에게 그 긴 세월 동안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할 것입니다. 아이처럼 소리 지르고 울고 모래를 갖고 놀 거예요. 오로지 바다 앞에서는 약해질 수도, 부끄럼 없이 옷을 벗을 수도 있으니까요. 다시 … 균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바다 앞에서 지난 세월의 아픔을 털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의 몸이 되실 텐데, 일상의 많은 것이 달라졌다는 걸 알고 계실 겁니다. 어떻게 준비하고 계신가요?
지난 삼십 년 동안 엄청난 발전이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원시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끝난 시대에 속하는 사람이고, 새 시대를 받아들이고 그 기술적 발전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현실과 평행하는 가상 현실 같은 건 특히요.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건 그런 발전에 따른 사회적 변화, 가치관 변화를 받아들이는 거겠죠. 기술은 생활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관점과 이해도 달라지게 했습니다. 이것 역시 기술이 우리의 시공간 인식에 미친 영향 때문이죠.
현대적 삶의 정글에 세세하게 관여하지 않고 밖에서 바라보는 원시인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제가 이런 도덕적 변화, 가치관 변화를 몸에 익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적으로는 뒤쳐졌다 해도요. 인터넷을 통해 빛의 속도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서로 다른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죠. 그런데 이건, 천사나 악마 같은 형이상학적 존재들의 특징입니다. 장소에는 가치가 없고, 시간이 가치입니다.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순수하게 물질적인 가치요.
그런 점에서 우리의 사회적, 인간적 삶의 더없이 미세한 지점들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자기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볼 시간이나 아이의 어금이나 새로 나는 걸 보며 인간적인 즐거움을 느낄 시간이 사라졌어요. 사람들이 삶을 즐기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만 도덕적, 윤리적으로는 빈곤해요. 시간이 없어서, 삶의 속도에 쫓기느라 자신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어서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야말로 크나 큰 비극이죠. 어제의 일에는 신경도 쓰지 못합니다. 그저 역사고 옛날 일이죠.
장소가 가치를 잃으면 거기에 담겨 있던 많은 가치도 사라집니다. 애국심이나 도덕 같이 ― 동네, 마을, 민족국가에서 비롯되는 ― 본질적으로 공간적인, 안정성과 진정성을 대표하는 가치들 말입니다. 문자 문화가 이미지와 속보의 가치로, 그런 문화로 대체되어 버렸습니다. 시간이 빛의 속도로 만들어 내는 가치들은 또한 빛의 속도로 사라집니다. 가상 세계에서의 우정, 순식간의 사랑, 인터넷에서 잠깐 알고 지내는 지인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러니, 이 나이의 제가 그런 현실에 익숙해지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함께 하지는 않더라도 밖에서 그 새로운 현실을 이해해 보려 노력할 것은 확실합니다. 이 발전이 어디로 나아가는지 알아볼 거예요. 이 현상이 아직 종착지에 이른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끝내 이 시대의 이방인으로 남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이 문제를 다루는 책들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아무튼, 제 삶에서 달라지지 않을 중요한 영역인 개인적, 가족적인 층위에서는 어린이나 청소년인 조카들과 연락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는 매 순간을 즐기고 있죠.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습니다. 그게 청소년 소설 『올리브유의 비밀The Oil’s Secret Tale』을 쓴 동력이 되었죠.
정치수일 뿐만 아니라 이야기 작가이자 화가이기도 하시죠. 그쪽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글을 쓰는 것은 그저 옥중에서 단단히 버티기 위해서예요. 창작을 위해 쓰지는 않습니다. 제가 쓴 글의 대부분은 아내가 형제들,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어떤 작가들이 거기서 문학적 가치를 발견한 거죠. 몸이 육중한 콘크리트, 쇳덩이, 가시철망에 파묻히면, 그리고 이런 충격적인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 그리고 그걸 맨눈으로 보고 순전히 이성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 미쳐 버리고 말 겁니다. 미친 현실에서는 광기야말로 이성의 정점이죠. 그래서 상상력은 감옥 담장을 넘어서는 다른 현실을 창조합니다. 글쓰기는 감옥 바깥의 것들이 스며들어오게 하는 일이에요. 매일 꾸준히 하려고 하죠. 민중의 삶과 연결되기 위해서, 우리 민족, 우리 아랍 국가에 관한 문제들과 연결되기 위해서 담장 밑으로 땅굴을 파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가 옥중의 현실과 동떨어진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글 속에 어떤 현실을 창조해내는 일인 만큼, 감옥의 현실을 이해하고 해체하는 수단이기도 하죠.
실제로 지난 삽심 년간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고문은 굉장히 현대화되었죠. 부드럽고, 조용하고, 교묘하고, 몽둥이는 쓰이지 않아요. 몇 년 전에 『의식 녹이기: 고문의 재정의Melting Consciousness, or the Redefinition of Torture』라는 소책자를 썼는데, 이스라엘 감옥에서 행해지는 여러가지 현대적 고문을 해석하는 글입니다. 가장 지독한 유형이 의식을 녹이는 (혹은 주조하는) 겁니다. 최신 인간 공학 이론을 토대로 인간이라는 재료를 새로 빚어내는 거죠. 가장 힘든 점은 그 끔찍한 고통의 이유를 모른다는 겁니다. 몽둥이의 형태로 오더라도 불확실성보다는 확실성이 견디기 쉽습니다. 고문을 재정의하려면 고통을 재정의해야 했죠. 몸, 수감자의 몸은 더 이상 고문의 주된 표적이 아닙니다. 정신과 영혼이 표적이죠.
직접 쓰신 「평행시간Parallel Time」이라는 글(서간)이 알-미단 극장에서 공연으로 올라갔죠, 당신의 평행시간에서 벌어진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었나요?
온갖 사건이 있었고 제가 감옥에서 보낸 시간이 감옥 밖에서 보낸 시간보다 긴지라 더 중요한 사건 하나를 짚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단순하고 나날이 이어지는 감옥 생활에서 배운 것들은 있어요. 제가 수감됐던 감옥 중 한 곳에 맹인 수감자 한 명이 있었습니다. 눈과 다리와 손을 잃은 사람도 있었고요. 저희가 매일 그 두 사람을 마당에 데려다 줘야 했죠. 처음에는 수감자들이 몰려 들어서 그들을 데리고 나갔어요. 모두가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을 도왔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원하는 사람이 줄었습니다. 불평을 들은 적도 있고, 피하는 사람을 보기도 했습니다. 아무래도 몸을 써야 하는 일이니까요.
이 부상 당한 투사들을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납니다. 오싹해지는 광경이었죠. 다른 수감자들이랑 똑같이 손발을 결박 당한 채였어요. 앞이 안 보이는데도요. 민족수감자운동에서 만든, 옥중 투쟁을 요약하는 구호가 있습니다. “간수가 우리를 이기지 못하도록, 수감자를 민족적, 도적적 가치로서 지키자.” 그런 광경을 보게 되면 이 구호에 의문이 생깁니다. 간수가 우리를 이긴다는 게 무슨 뜻인가? 눈이 먼 수감자, 팔다리를 잃은 수감자의 모습에 익숙해지면, 처음 봤을 때만큼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면, 그때가 간수가 우리를 이긴 때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라도 억압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혹은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연대와 연결의 능력 뿐만 아니라 현실과의 관계 또한 잃었다는, 이미 인간적 감정을 잃고 길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감정을 둔화시키는 데에 아주 능합니다. 감옥은 이 세상의 소우주예요. 이스라엘이 나라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감옥을 수천 명의 수감자로 채웠던 제2차 인티파다 때, 온 세계와 구경꾼들은 그 광경에 익숙해졌습니다. 순교자, 부상자, 수감자 수의 폭증과 함께 감정이 둔화되었죠.
지난 삼십 년 동안 생긴 일 중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수감자의 할아버지, 수감자의 아들, 수감자의 손자를 만났습니다. 감옥에 같이 있을 때도 있었죠. 이런 일이 여러 번, 여러 경우로 반복됐어요. 감옥이 팔레스타인인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기라도 한 것처럼, 세례 의식이나 유치원, 학교, 대학처럼 자연스레 거치는 교육 과정이거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물려주는 유산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수감을 투쟁 경로의 필수적인 경유지가 아니라 실패로 여겨야 합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올리브유의 비밀』에서 수감의 대물림 문제를 다루려 했습니다. 주인공이 수감자들과 같은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세대가 감옥과 멀어졌다는 것에 대해 과학적, 윤리적 고민을 시작하죠.
지난 몇 년간 크네세트에서 수감자와 관련된 법을 수십 가지 제정했습니다. 그런 법들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특히 수감자운동이 이룬 모든 것을 무화하기 위한 법들이요.
이스라엘이 수감자들을 겨냥한 법을 제정하고 억압적 조치를 시행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것은 종교 이데올로기와 교리가 이스라엘 관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강해졌다는 점이죠. 감옥에서 교리가 작동하는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랍비가 하는 말이 각종 조치에 적용된다는 것이 일상에서 체감됩니다. 내부안보부 장관(길라드 에르단)은 우익 지지자들과 소통하기 위한 웹사이트를 만들었고 그들은 그가 저희를 더 단단히 옭아매도록 요구하거나 상세한 제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정치인들인 자기 당의 더 좋은 자리에서 재선되고 싶어 하니까, 지지층의 요구를 받아들여 수감자들을 옭아매고요.
종교적, 민족적 인종주의는 저희에게 적나라한 형태로 다가옵니다. 자기네 민족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거죠. 종교 경전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걸 비교적 세속적인 맥락에 욱여넣고 감옥의 상황에 적용하려 하다 보면 후자가 터져버리고 맙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방종한 삶을 살면서 경전의 절대성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전이란 게 온갖 정치적, 군사적 차원에서 변질되어 있죠. 감옥도 그 일부이고, 이는 이스라엘의 힘의 일부를 이루는 ‘제도들의 국가’를 약화시킵니다. 저는 이 면에서는 수감자들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장관이나 총리가 수감 생활의 구석구석에 끼어든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없다는, 그들이 약하다는, 내부가 곪고 있다는 뜻입니다.
감옥 속에서, 오늘날 수감자운동의 현실을 어떻게 보시나요?
수감자 운동은 감옥 밖 민족운동의 연장입니다. 정치적으로 분열된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수감자 운동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죠. 분열이 길게 이어지면서 분명의 경제, 분열의 문화가 생겨났는데 정말로 두려운 건 이 문화가 정체성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분열된 수감자의 현실은 파편화된 농성이나 투쟁, 개인적인 단식 농성 같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수감자 운동에 있어서 제가 걱정하는 건 이스라엘의 법률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고 민족 기획 전체가 당면한 위험은 바로 이것, 분열입니다. 공동의 민족투쟁에는 민족 정체성의 기반을 이루는 보편적 가치들이 결정화되지만 분열된 상황에서는 하나의 통일된 민족 기획이 아니라 여러 개의 민족 기획이 있게 되며, 이런 투쟁은 보편적 가치들을 낳지 않습니다. 대신 당파적 가치가 강화되고 정체성은 해체되죠. 우리가 다 똑같이 마클루바를 먹고 답케를 춘다고 해도 말입니다.
수감자 운동은 그런 가치들을 생산할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근년 들어 더 이상 공동의 투쟁이 아니게 되었죠. 구 구성요소들이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분열의 종식을 급선무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랍 세계에서 각 민족이나 분파의 파벌주의와 광신이 부활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회와 국가가 모두 무너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당신을 지지하는 대중운동에 만족하시나요?
수감자 지지 대중 운동은 약합니다. 앞에서 말한 저 이유에서 말입니다. 폭넓은 운동이 있다고는 해도, 단결하지 않으면 쓰러진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일일 뿐이죠.
팔레스타인과 관련해 가장 중요하면서도 역사적인 일 중 하나는 아마 오슬로 협약일 텐데요, 이 협약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그리고 “1948[년 이스라엘 국경 내에 남은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시민권자] 수감자”가 지금껏 협상에서 배제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슬로”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갈라 놓았습니다. 자연히 수감자들도 갈라졌죠. 고국땅이 아니라 서안의 국가를 말하는 사람은 ― 자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 팔레스타인 민족과 정체성에 관해 나크바와 난민 서사가 가장 중요한 요소인 역사적 서사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내부(1948) 수감자들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PLO)나 산하 분파 소속이었습니다. PLO는 스스로를 48년 팔레스타인인들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민족 유일의 정당한 대표체로 여겼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그들을 대표하지 않게 되면서, 쟁점의 일부였던 내부 수감자들 더 이상 대책의 일부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통탄할 일이죠. 팔레스타인에 돌아온 모든 지도자가 ― 협정에 서명한 이들 뿐 아니라 ― 예외 없이 수십 년 동안 우리를 옥중에 방치했습니다. 이걸 두고 부도덕하다거나 어떻다거나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지도부에 대한 판단은 우리 민족과 역사에 맡기려 합니다.
저희를 배제한 교환 협상으로 득을 본 이들의 정신과 정치관에는 오슬로가 만들어 낸 분위기가 내면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말로는 다른 정치적 기획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오슬로 협정의) 정치적 경로에 들어가고 나면 지명, 선출, 그리곤 권력 투쟁이죠.
현재 무장 투쟁을 벌이는 청년들은 “오슬로” 이후에 태어난 세대입니다. 아직 절망에 빠지지 않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건 절망이냐 낙관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현상은 감정이나 당파적 이해관계를 배제한 심도 있는 연구와 진지한 독해가 필요로 합니다. 우리 민족이 정체 세력들이 분열되고 최악의 상태에 있을 때조차도 모욕을 거부하는 민족임을, 이 민족에게 기꺼이 희생할 힘의 열의가 있음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런 청년 중 상당 수가 어떤 분파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천명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점령을 거부하는 만큼이나 현재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상황 또한 거부한다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체포되신 1984년 후로도 적군은 한동안 레바논 남부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2000년과 2006년을 거쳐 이제는 레바논 민족과 저항 투사들의 손으로 레바논 남부가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기세도 꺾였습니다. 이스라엘군은 격퇴 당했고 추진력과 의지, 대레바논 방침을 잃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저항이 71년 동안 (이스라엘군이 높은 비용으로 인해 “주둔의 효용이 없음”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가자에서 철수한 것을 빼면) 팔레스타인을 단 한 뼘도 해방시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파샤 이래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들은 이기고 우리는 지는가? 때로는 서구 열강의 힘의 비밀은 농업 개혁이라고, 또 때로는 경제 개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해군 함대가 있으면 우리도 강국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죠. (당시로서는) 마지막으로 일군의 과학자들이 프랑스에 가서 과학을 가지고 오기도 했습니다. 과학이 우리 나라를 오랫동안 식민지로 삼은 서구의 힘의 비밀이자 토대라고 생각했던 거죠.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고 있습니다. 이십 세기 내내 결국 찾지 못했죠. 반면 시온주의 운동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답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계속 논의했고 여전히 그러고 있습니다. 누구는 이슬람이 해법이라고, 누구는 사회주의가 해법이라고 … 단결과 귀환이 해법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논쟁이긴 하지만 이것이 근간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역량을 기르는 것이 근간이 되어야 합니다. 시온주의 운동은 나크바 전부터 역량을 길렀습니다. 1920년대에 예루살렘에 히브리대학, 하이파에 테크니온을 지었고 리딩 발전소도 세웠습니다. 사해 인산염 공장들의 최대 주주가 되기도 했고요. 바꾸어 말하자면, 시온주의는 경제, 과학, 정치, 그리고 군사까지 전 영역에서 위로 가려고 했던 겁니다.
우리가 영혼과 가슴이 필요하다고 혹은 정신과 몸이 필요하다고 토론하고 분열되는 동안 ― 지식인, 정치 엘리트 이야깁니다 ― 시온주의는 세속주의를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적으로 이성의 말과 마음의 말을 화해시켰습니다.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세속주의자와 초정통파를, 제도들의 국가라는 틀 속에 통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차이를 파괴와 전쟁의 힘에서 건설의 힘으로 바꾸지 않는 한 역량을 일굴 수 없음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양성을 잘 활용했지만, 인종과 혈통을 기반으로 삼았으니 분열과 붕괴의 씨앗을 심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런 방면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랍인으로서의 우리의 미래, 팔레스타인 대의의 미래입니다. 질문에서 “철수”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군사 용어죠. 저항은 오로지 군사적인 영역이라는 관점을 깔고 있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방위적인 저항입니다. 전방위적인 점령을 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어떻게 보나 전체주의적인 점령을, 팔레스타인에서 우리 삶의 모든 면면을 파고 드는 점령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랍 세력을 이루는 요소들을 전방위적인 역량으로 확대 혹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체제입니다. 아랍인들이 내부적 문제들과 시온주의에 맞서 수립할 수 있을 가장 중요한 전략적 균형은 바로 그 체제의 민주주의입니다.
가치이자 실천으로서의 자유는 개개인들, 집단들의 힘과 창발성을 폭발시켜 그들이 정체성을 재생산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습니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채우고 가다듬어야 정체성이 진정한 시민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저는 아랍 국가들의 교사 임금, 대학의 연구비, 생활 수준, 팔레스타인의 해방이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빵 한 덩이 구할 여력이 없는 사람은 팔레스타인이든 타인이든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짐과 일상적인 고민을 나누어 지지 않는 정치 체제는 그들에게 민족의 고민을 나누어 지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는 검, 보석, 거울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종종 궁금했습니다. 왜 거울을 들고 있을까? 검이 군사력, 보석이 경제력이라면 지력은 책일 텐데 말입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다른 나라들에 버금가는 강국으로 거듭난 이 나라는 자신을,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아는 것이 지식을 재생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지식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 책으로도 배우는 것이 있겠지만, 자신을 모르는 민족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새로운 지식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소비자로 남겠죠. 일본 태양의 여신이 아니라도 이미 아는 이야기입니다. 지하드 알-나프스Jihad al-Nafs(자신과의 투쟁)는 우리가 역량 있는 민족이 되기 위해 벌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투쟁입니다. 언론, 대학, 학교에 솔직한 거울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해 줄 거울 말입니다.
주
| ↑1 | [역주] 2013-2014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에서 이스라엘은 총 104명의 장기수를 석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세 번에 걸쳐 78명이 석방되었으나 이스라엘은 막판에 약속을 깨고 “제4차 송환 대상” 26명의 석방을 거부했다.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14명의 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시민권자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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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역주] 밀라드는 탄생이라는 뜻으로, 왈리드 다카가 오래 전에 지어둔 이름이다. 왈리드는 1999년에 옥중에서 사나와 결혼했고, 사나는 왈리드가 밀반출한 정자로 임신에 성공해 2020년에 딸 밀라드를 낳았다. 뒤에서 언급되는 『올리브유의 비밀』(2018)에 같은 방식으로 태어난 주인공이 등장한다. |
Mohammed el-Kurd, Perfect Victims: And the Politics of Appeal, Haymarket Books, 2025를 통해 알게 된 글이다. 미래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는 대목이 인용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