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에 대한 제국주의 전쟁과 그 뒤를 이은 점령 기간 동안, 공론장에서는 사담 후세인 치하 이라크에서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했다는 주장이 흔들림 없이 자리를 지켰다. 서방 연합이 두 해째에 접어든 2004년, 《뉴욕 타임스》에서 이제는 유명해진 편집부 서한을 실었다. “응당의 엄밀성을 갖추지 못한 몇 건의 보도”에 일말의 사의를 표하는 글이었다. 그들은 방법의 개선을 약속했을 뿐 지향은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마이클 고든과 주디스 밀러는 서구 언론의 대규모 증거 조작을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 이 같은 전사적全社的 편집 관행은 수십 년째 이라크에 성장 방해de-development를 강제하고 아랍-이란 권역 전반에 같은 기획을 가동하는 데 대한 여론을 세탁하는 역할을 했다.
스무 해가 지난 지금 새삼 그때의 언론계 이야기를 다시 들출 필요는 없다 ― 여전히 같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10월, 《타임스》의 제프리 게틀먼, 아나트 슈워츠 ― 관련 경험이 없는 전 이스라엘 정보 요원 ― 와 그 조카 아담 셀라는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무장 군사 단체들에서 알-아크사 홍수 작전 당시 대량 강간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제기하는 〈무언의 비명〉을 실었다. 해당 기사는 편집국장 조 칸과 국제부장 필립 팬의 감독 하에 최상층에서 승인한 이데올로기적 중상모략이었음이 낱낱히이 밝혀졌다. 팔레스타인 운동은 가자 인종학살에 대해 성폭력이 사실상 [이라크 전 당시의] 대량살상무기 거짓 의혹과 같이 무기로 쓰이고 있다고 옳게 지적했다. 그런데 퓰리처상을 수상한 게틀먼 등의 보도를 거짓 증언이라는 유구한 전략의 일환으로 ― 이라크나 리비아에서 혹은 짐크로우법 하에서 행해진 일들만큼이나 간악한 것으로 ― 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그 전략은, 증언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이어져 온 전 지구적 전쟁이 야기한 대상 비영속성object impermanence으로[1][역주] 시각, 청각 등으로 지각할 수 없는 동안에도 대상이 계속 존재함을 가리키는 발달심리학 용어 대상 영속성을 비튼 표현이다. 인해 곤란을 겪고 있다. 그들의 작품은 필연적으로 인종차별사racial history의 싸구려 모조품에 그치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이라곤 익숙한 격통 뿐이다. 이스라엘 선전가들은 결코 여기에 천착하지 않는다. 반박할 길 없는 거짓말들의 총체적 체제가 주는 혜택을 이미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종학살 변명에는 증언에 대해 일반적으로들 품고 있는 양가성을 갖고 노는 다른 수사 양식들도 있다. 오랜 시간 《타임스》에 사설을 써 온 칼럼니스트 미셸 골드버그가 두 해 전 오늘 실은 흥미로운 에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끔찍한 전쟁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기는 불가능하다〉라는 글이다. 주제는 10월 7일 직후 가자의 병원을 대상으로 한 공격 중 가장 먼저 세간의 주목을 받은, (가자에서 가장 오래된, 알-마아마다니al-Maamadani 병원이라고도 불리는) 알-아흘리 아랍al-Ahli Arab 병원에서의 대량학살이다. 이 글이 발행된 후로 가자의 모든 병원은 반복되는 폭격, 포위, 혹은/및 파괴를 겪었다. 이 사설은 알-아흘리 아랍 병원 관계자들이 세계에 행동을 간청하는 기자 회견을 연 후 곧이어, 다시 말해 ― 골드버그가 완벽한 포장지 노릇을 하는 ― 이스라엘군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온 매우 중요한 시점에 공개되었다. (그녀는 전직 시온주의 싱크탱크 직원(아담 래스건)이나 자녀가 복무 중인 이스라엘 전쟁을 보도하는 이(이사벨 커시너) 같은 예루살렘 지국의 동료들에 비하면 덜 물들었다. 보다 인도주의적인 성향의 사람들을, 그리고 확실히 자유주의적인 유대계 연대체들을 향해 말한다는 인상도 있다.)
해당 사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첫째, 현재 진행 중인 절멸 전쟁 내부에서 나온 팔레스타인측 증언에 의문을 표한다. 골드버그는 순교자 수 추정치와 병원을 타격한 미사일 발사 지점 양자에 대해 알-아흘리를 둘러싼 팔레스타인측 서술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녀는 “미국측 초기 첩보”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독립 전문가들”을 근거로 가자보건부를 불신하며, 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신들의 과거나 미래를 정확하게 재현하리라고는 신뢰할 수 없다는 암시를 준다. 그녀는 팔레스타인 내 포위와 폭력의 역사를 날조함으로써 이를 해낸다. 그녀가 보기에 알-아흘리를 가장 책임감 있게 읽어내는 방법은 2002년 제닌 난민촌 대량학살 “신화”의 연장선 상에서 읽는 것이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 군대에서는 다킬dakhil[2][역주] ”안쪽”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이스라엘 국경 내를 가리킨다. 내 군사 공격범들을 상대로 작전을 펼쳤다. 그녀는 아랍 세계에서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하고는 대량학살의 사전적 정의를 따지는 데로 넘어간다. 그런 난민촌이 생기게 된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피점령 난민촌 내 군사적 저항의 ‘여지를 주는permit’ 상류의 조건들에는 조금의 흥미도 비치지 않는다.
골드버그의 두 번째 조공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동조하는 이들을 달래는 것이다. 그녀는 [이스라엘에서] 시린 아부 아클레Shireen Abu Akleh[3][역주] 알자지라 특파원으로 제닌 난민촌에서 이스라엘군의 습격을 보도하던 중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아부 아클레는 당시 난민촌 … (계속) 암살을 덮어버린 것은 반대쪽도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그녀가 프레임을 짜는 방식이 흥미롭다. “과거에, 이스라엘에서 불의의 사고로accidentally 민간인을 살해하고는 팔레스타인인들을 탓한 적이 있다” (강조 추가). 누구도 이 전쟁 도중이 성급히 결론을 내리지 말하야 한다는 것,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폭력을 숨기는 것이건 유대인을 악마화하는 것이건 모든 이해당사자가 아젠다를 갖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결론이다. 그녀의 아젠다는 물론 후자를 집어 넣어 유대인 병사들이 정당한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다른 관점들은 일종의 혐오라는 암시를 주는 것이다. 사실상 골드버그는 제국주의, 정착자 식민주의, 자유주의적 제국주의 논리의 ― 인간 방패에 대한 ― 인종학살의 어마어마한 힘을 은폐한다. 유감스럽게도 투사들이 인구밀집지역이나 그 인근에 몸을 숨긴 탓이 된다. 기사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골드버그는 이런 논리를 통해 독자들이 전투원과 무고한 이를 구분짓도록 확실한 선을 긋고 관련된 분석은 숨겨둔 채 그들이 판결을 내릴 수 있게 한다.
물론 골드버그는 ‘인간 방패’에 유구한 제국주의적 역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팔레스타인 투사란 근본적으로 우리에 갇힌 채 점령과 포위에 저항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 그들이 공동 생활에 함께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런 구분은 사회 전체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임을 ―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골드버그의 글은 점령 당한 팔레스타인의 폭력의 구조를 얼버무리는 어설픈 인종학살 부정주의 ― 오직 한 방향으로만 작동할 수 있는 부정주의임을 말해 둘 가치가 있겠다 ― 에 속한다. 이스라엘이 병원을 폭격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이 특정 병원 폭격 사례를 두고 시비를 거는 것은 이스라엘이 구사하는 그 전략을 숨기기 위한 고의적인 선택이다. 가자의 병원들과 온갖 생명 유지 장치들을 파괴하는 것은 피식민 인구 사이에 패배감과 절망감을 조성하고 지리적 분열을 일으키고 민족 청소를 용이하게 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전쟁 자체와 마찬가지로, 그저 투사들을 지켜주고 치료해주는 인프라만이 아니라 반식민 저항의 사회적 기반이 표적이다.
스펙터클이 널리 유통되고 이데올로기적 유지보수 및 통제 ― 우리의 경우에는 테러리스트를 [전가의 보도처럼 쓸 수 있는] 유동적인 의미 사슬로 만들기 위한 기술적, 사법적, 군사적 기획 ― 에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지는 것, 이 둘을 살펴보면 인종학살의 대의를 밀어붙이기 위한 지배 계급의 전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선험적 결합이다. 언제나 이미 이 논리를 두르고 있는 ‘테러리스트’를, 국가 및 준 국가 권력이 내키는 대로 꺼내어 쓴다.
〈무언의 비명〉의 사회적 기능은 바로 이 영역에 해당한다 ― 팔레스타인인을 싸잡아 야먄인으로 그리는 것, 알-카삼 여단을 비롯한 저항 집단들에 용서할 수 없는 전방위적 범죄, 전략적-군사적 논리 혹은 자기방어의 영역을 벗어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씌우는 것. 특별한 일은 아니다. 다른 많은 이들도 알-아크사의 홍수 직후 이 닳고 닳은 길을 갔다. 그 하나로 문학 비평가 애덤 샤츠가 있는데, 그가 《런던 서평》에 실은 〈복수심에 불타는 병〉은 아마도 미국 문학계라는 상좌에서 시도된 인종학살 세탁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글일 것이다. 이런 글들이 자아낸 정서적 장은 절멸시켜도 되는 ― 응징을 위해 허무주의적 폭력을 쓰는, 이해는 받을 수 있을지언정 결코 지지 받지는 못할 ― 테러리스트라는 형상과 쉽사리 한몸이 되어서는 이내 모두가 비인간화에 짓눌리고 있는 가자 사람들에게 달라 붙어, 계속되고 있는 절멸에 대한 동의를 끌어내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담론적 술수가 모두 오래가는 것은 아니다. 가자의 순교자 수가 얼마가 되든 식민자의 성에 차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사회적·무장 저항과 전 지구적 고립·반정상화 캠페인 힘을 모아야만 굴복할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세칭 비례적 보복 전쟁이라는 관념은 소위 공평한dispassionate 관찰자들에게는 유효 기간이 정해져 있다 ― 바로 “그럴 줄 몰랐냐”가 “이 정도면 됐다”가 되는 순간이다. 이전에 그렇게 시한이 만료된 일로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라크전 당시의 섞어서 굽기shake-and-bake[4][역주] 이라크전 팔루자 전투에서 미군이 사용한, 백린탄의 연기와 고열로 적진을 교란한 후 고성능 폭약으로 최종적인 타격을 가하는 전술을 … (계속) 스캔들과 전쟁을 지지했던 미국 작가들, 언론인들, ― 《뉴요커》 편집장 데이비드 렘닉, (당시 마티 페레츠 소유 《신공화국New Republic》 편집장, 현 《유대동향Jewish Currents》 논설위원) 피터 베이너트 등 ― 편집장들, 심지어는 부시 정권의 연설문 담당자였으며 억지로 이라크전을 “불운한 일misadventure”로 칭해야 했던 초시온주의자 데이비드 프럼까지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그저 늘어놓은 반성의 장광설만 봐도 된다. 이 모든 남자들은 탈 없이 자리를 지키면서 제 교본을 가자를 상대로 다시금 쓰고 있다.
병원을 표적 삼는 일을 대중이 묵인케 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살펴본 것 같이 피식민자를 비인간화하는 것 외에도 대중 스스로의 탈구 ― 역사적 지식의 죽음, 조직화된 무지와 망각, 영원한 복종 ― 를 끌어내는 일 역시 필요하다. 이 전략은 ‘전운戰雲’에 국한되지 않으며, 한편으로는 팔레스타인인의 탈주체화, 다른 한편으로는 나머지의 전 지구적 스펙터클 논쟁 극장에의 통합, 이 양자의 유기적 통일체 속에서 작동한다. 임시 공동묘지나 폭탄에 패인 땅과는 거리가 먼 후자의 공간에서 총체적인 사회적 지식이란 존재는 하지만 가질 수도 검증할 수도 없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 현상학적인 대중의 개인화는 진리 내용을 저 널리 퍼져 있는 외부 영역에 내맡기는 데로 이어진다. 권위는 스펙터클 자체 ― 이 경우에는 식민 권력에 득이 되는 ― 에 부여되며 그 결과 무력감과 체념이, 아슬아슬한 권력 균형을 깨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찾아온다.
이런 의미에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무언의 비명〉과는 다르다. 다름아닌 이런 양가성을 빚어낸다는 점에서다. 이 글의 논리에서 팔레스타인인은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된 의도는 제국 체제 ― 영토에 대한 그 지배와 지식이 하나의 구조 내에서 미개 부족의 운명을 통치할 부담을 지우는 ― 의 섭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언어적 실천은 형식적으로 이미지-관중spectator의 주체위치에 상응한다 ― 어떤 도덕적 딜레마를 판결하는 위치에서, 그것을 ‘펼쳐opeing out’ 유감스럽고 아마도 알 수 없을 폭력의 풍경을 뒤덮어버린다. 물론 우리의 풍경 ― 테러리스트가 액자틀을 활보하고 거리 감각은 흐려지는 ― 을 말이다.
골드버그는 제국의 설계자는 아니다. 정말로 아니다. 그리고 그녀의 글은 원인이 아니라 징후다. 인종학살을 부정하는 기존 구조들 속에서 정서 세포를 붙잡고서, 그녀는 동료 유대인들에 대한 의무를 다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 겉보기에는 가자 폭격에 관한 것인 이 글에 마침표를 찍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세상 어디를 가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넓게는 미국에, 이번 병원 폭격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이번 일화를 이스라엘이 실제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하고 있는 폭력에 대한 비판을 막는 데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건, 보다 큰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
이라크에 관한 예의 자백 편지로 돌아가보자면, 우리가 골드버그나 그 부류의 글을 두고 그런 인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편리한 사실을 섣불리 끌어들이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 주의를 기울이면서 대신에 불편한 감정을 끌어들이고 있으니 말이다. 인종학살이 이주년을 맞은 이 달에, 골드버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제러미 벤-아미와 즉석 인터뷰를 진행했다. 워싱턴에서 가장 힘 있는 시온주의 로비 단체 중 하나인 제이스트리트J-Street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의 행보는 알-아크사의 홍수 이후 시기 유대 우월주의의 자유주의 진영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표본으로 남을 것이다. 가차 없고 뻔뻔한 전쟁이 사그라 들 줄 모르는 와중에 골드버그의 것과 같은 글들은 해묵어 보일 수도 있다. 소음 ― 거짓말, 가학, 우월주의triumphalism ― 으로 차음벽을 세우는 글들이다. 하지만 시온주의의 이 첨병을[5][역주] tactile edge를 tactical edge로 읽음. 얕보지는 말아야 한다. 지금처럼 부정주의와 수정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주
| ↑1 | [역주] 시각, 청각 등으로 지각할 수 없는 동안에도 대상이 계속 존재함을 가리키는 발달심리학 용어 대상 영속성을 비튼 표현이다. |
|---|---|
| ↑2 | [역주] ”안쪽”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이스라엘 국경 내를 가리킨다. |
| ↑3 | [역주] 알자지라 특파원으로 제닌 난민촌에서 이스라엘군의 습격을 보도하던 중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아부 아클레는 당시 난민촌 취재 사실을 사전에 이스라엘에 알렸고, [기자라고 적혀 있는] 그의 방탄조끼 역시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고 알자지라는 밝혔다. […]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와 교전 중에 ‘우연히’ 아부 아클레가 총에 맞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아부 아클레 피살 5개월 만이었다. 이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가 쏜 총에 맞았을 가능성을 계속 흘렸다.” 권영은, 〈”기자인 줄 알고 쐈다” 언론인 20명 이상 살해한 이스라엘〉, 《한국일보》, 2023.05.11. |
| ↑4 | [역주] 이라크전 팔루자 전투에서 미군이 사용한, 백린탄의 연기와 고열로 적진을 교란한 후 고성능 폭약으로 최종적인 타격을 가하는 전술을 가리킨다. 백린탄은 1980년 유엔재래식무기협약에서 금지한 무기이며, 미합중국은 협약 가입국은 아니다. 그럼에도 백린탄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초기에는 사실을 부정했고 해당 지역에서 피신하지 못한 민간인 모두를 공격했기에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
| ↑5 | [역주] tactile edge를 tactical edge로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