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에 사는 고모는 해마다 합중국에 우리 가족에게 올리브유를 보낸다. 그해에 열린 올리브 중 우리 몫을 보내는 것이다 ― 1800년대 후반부터 그 나무들을 기른 증조부모, 조부모가 물려준 몫. 우리 가족의 나무에서 올리브를 수확해 기름을 짜는 일을 고모가 맡아 해주고 있다.
어렸을 적에는 고모와 아버지, 다른 형제자매들이 수확철에 할아버지 할머니를 도운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올리브 나무 밑둥에 둘러서서 커다란 그물을 받쳐 잡고는 긴 막대기로 가지를 흔들어 올리브를 떨어뜨렸다는 이야기. 서로 즐거이 노래를 불러주었다는 이야기, 해가 중천에 뜨면 나무 그늘에 모여 점심을 먹곤 했다는 이야기.
적어도 한 세기는 변함 없이 이어진 오래된 유산이다. 실제로 올리브 착유기 하나는 증조부모대부터 쓴 것이다.
하지만 10월 7일 후로, 올리브 농부들은 자기 과수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정착자들이 총을 쏘고 물리적으로 막고 온갖 식으로 겁박한다. 새로운 일은 아니다. 지난 수 년간 정착자들은 수백년 된 나무들을 뽑고 쓰러뜨리고 불태웠다.
올리브 수확철은 10월부터 11월까지다. 운이 좋으면 12월 초까지도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다 끝난 일이다 — 모두가 소득원을, 유산을 잃었다.
올리브가 가지에 매달린 채 썩어 간다.
*
요즘은 외국에 살면서 내가 팔레스타인 사람임을 실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떠올린다. 소셜미디어 타임라인은 카프카도 생각 못할 비현실적인 일로 가득하다. 한쪽에서는 손가락이 몇 개 안 남은 손을 꼭 쥔 채 울고 있는 팔레스타인 아이가 보인다. 다른 쪽에서는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발렌타인 물건으로 가득 찬 상점에 신나 하면서도 화를 내는 미국 친구들의 게시물이 보인다. 그런 사이에서, 팔레스타인 기독인인 나는 올해는 크리스마스를 쇠지 않기로 한, 상喪을 치르는 공동체에 속해 있다. 우리 선조들에게서 나온 축일인데도.
말했다시피, 초현실적이다.
합중국에서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으로 자라면서 늘 두 개의 세계를 살아 왔지만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이 지금만큼 부대낀 적은 없었다. 가자에서는 무너진 건물에 깔린 시신들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나는 장편소설 데뷔작 홍보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이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6년 전이다. 풀타임으로 일하는 세 아이의 엄마로서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으로 쓴 소설이다. 이미 빠듯한 일과에서 시간을 더 쥐어짜서.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쓰는 사람에 속한다. 여섯 시 반까지 쓰고 나면 “진짜 삶”이 시작된다. 아이들을 깨우고 도시락을 싸고 출근 준비를 하고 아이들을 태워다 주고 출근하고. 잘 풀리는 날에는 저녁 준비도 해 두고 빨래도 돌린다.
그런 나날 중 어느 하루, 아직 동이 트는 중이던 무렵에, 새 캐릭터 하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계속 부딪히는 젊은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남자. 마커스는 볼티모어에 사는 경찰이다. 마커스와 아버지 둘 다 팔레스타인 뿌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점차 서로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아침마다 조금씩 책을 써나가면서 난민인 마커스의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전쟁과 망명과 빈곤에서 비롯된 어떤 길을 따라 팔레스타인인이 된 반면 마커스의 정체성은 그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채로운 노동계급 도시 볼티모어에서 자란다는 것이 큰 영향을 미친 정체성이었다.
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국의 상실을, 그와 함께 계급 긴장으로 가득한데다 인종주의적이었던 과거를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살아가는 절박함을 견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로를 씨앗 삼아, 이 부자에게 맥락을 부여하면서 소설의 싹을 틔웠다. 둘에게 각자의 이야기를 주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리고,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목소리를 주고 하면서, 지난 6년 동안 이 소설은 한 줄 한 줄, 한 쪽 한 쪽 씩 자라났다.
소설을 쓰는 동안 나를 이끈 것은 노동 계급 팔레스타인계 미국인들 ― 올리브 농부들의, 땅을 경작하고 땅을 존중하는 이들의 사촌들 ― 의 삶을 탐구하고 싶다는 열정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존재 자체가 논란거리인 (“팔레스타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라는 말을 한 번 사는 인생으로는 다 듣기도 힘들 만큼 많이 들었다) 합중국에서 사느라,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우리 공동체를 “존경할 만함”이라는 중상류층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를 썼다. 의사가, 공학자가, 변호사가 되어 칭찬을 받았다. 집은 크고 호사스러워야 한다. 옷은 디자이너 브랜드여야 하고 아이들은 우등생이어야 한다. 이해는 간다 — 자기 민족이 미디어에서 야만적이고 미개하게 그려지다 보면 강박적으로 “아냐, 우린 그렇지 않아!” 하고 외치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중상류층이 되어야만 진정한 팔레스타인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미국에 당도해서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쪽에 속하게 된 이들은 어쩌잔 말인가. 치과 보험이 없어서 충치 치료를 미루면, 전문대에 다니면, 퇴근할 무렵이면 삭신이 쑤시는 일을 하면, 결혼해 아이 2.5명을 낳고 흰 울타리를 두른 예쁜 집에 살지 않으면, 덜 팔레스타인이게 되기라도 한다는 것인가.
팔레스타인 정체성을 중상류층 식 존경할 만함이라는 독에서 해방시키고 싶다. 미화원 여성에 대해 쓰는 이는 많지 않다. 자기네 자동차 윤활유를 갈아주는 정비공에 대해 쓰는 이는 많지 않다. 할인쿠폰을 모으고 닭가슴살 한 덩이를 온 가족이 먹을 만큼 불릴 줄 아는 이주민 어머니에 대해 쓰는 이는, 자기 아이가 경제적으로는 안정을 이루었지만 자신과 아랍어로 대화할 줄은 모를 때 숨죽여 우는 난민에 대해 쓰는 이는.
책 제목 『뒤에는 바다가 있다Behind You Is the Sea』는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스페인 남쪽 연란에 상륙한 부하들에게 내린 유명한 명령에서 따 왔다. 등 뒤의 배를 불태워버린 그는 부하들에게 진격밖에는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냉혹한 일이지만, 합중국에 도착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생존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는 것을, 고향으로 돌아갈 길은 없으니 여기서 해내는 수밖에는 없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
소설이 마침내 세상에 나오게 되어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러나 대체 어떤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인지. 인종학살의 와중에, 시인들이 체포되고 작가들이 폭탄에 갈가리 찢기는 이 때에, 누가 책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출판계마저도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를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검열을 목도했는가. 공공연히든 — 더 위험하게는 — 소리 없이든 얼마나 많은 팔레스타인 작가들이 취소 당했는가.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강연 하나를 취소 당했다. 이번 소설을 내기 전에 아동 문학을 탐색해 보았고, 파라 록스Farah Rocks 시리즈를 냈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시리즈였다. 초등학생들에게 작가가 된다는 것과 상상력의 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예정이었다.
구체적인 계획 논의를 마치고 9월에 계약서 서명까지 한 터였지만, 갑자기 주최측에게, 그러니까 학부모교사연합회PTA 어머니들에게 그런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늦가을 “혹은 내년”으로 다시 일정을 잡을 수 있을지 알아보겠다고 건조하게 말하고 넘어가려는 그들의 태도에 모욕감과 분노가 일었다. 더 자세히 말해 달라고 하자 “저희에게 그럴 의무는 없습니다”라는 말이 돌아 왔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았다.
나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작가고, 학생들이 글의 힘에 관한 나의 강연을 듣는 것은 마뜩잖은 일이다.
삭제는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야기의 중요성을 믿어야 한다. 글쓰기는 지루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내년에도 팔레스타인의 올리브 농부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기 나무를 다시 찾아갈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들이 알려 준다 — 그들이 내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들의 겸허한 회복력이 내게 영감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