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가자 자발리아 난민촌에서 생활하는 작가가 몇 번의 피란에[1][역주] “피란”은 displacement를 옮긴 것이다. 동사형의 수동태 displaced는 “이주당하다”로 옮겼다. 영어에서 displacement는 쫓겨남, 쫓겨나듯 … (계속) 걸친 수많은 상실을, 그리고 가자에 가해진 파괴가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말해주는 바를 생각한다.
북가자 자발리아 난민촌 침략 67일차. 이곳은 첫날에 군사지역으로 선포되었고 이스라엘군이 사방을 완전히 봉쇄했다. 난민촌에 사는 사람 모두 출입구를 쓸 수 없게 되었다.
누군지 모를 어느 소녀의 침대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분홍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화장대가 딸린 것으로 보아 어느 소녀의 방이었으려니 할 뿐이다. 한때는 찬란했을 화장품통들에는 버려진 사이 먼지가, 그리고 포탄이나 주변 건물들의 잔해에서 나온 가는 입자들이 켜켜이 쌓였다. 우아한 방이지만 빛을 잃었다. 나도 여자지만 아직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애초에 나를 위해 이렇게 구석구석 꾸며둔 게 아니기도 하고.
그녀가 이 모든 아름다움을 뒤로 하고, 공포, 살인, 불의 띠[2][원주] ”불의 띠fire belts”(al-aḥzima al-nāriyya)는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대규모 공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러 블록을 단번에 초토화하는 … (계속), 처형, 강제 이주에 떠밀려 남쪽으로 떠났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그녀와 가족들은 아마 지금 천막에서 생활할 것이다. 맹렬하게 몰아치는 폭풍에 기둥이 뽑혀 머리 위로 천막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자는 사이, 어쩌면 깨어 있던 중에, 혹은 어쩌면 자기네 신세에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터뜨리고 있던 중에. 쥐떼나 온갖 벌레의 습격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익숙한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전쟁 덕분에 비로소 만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전쟁으로 생겨난 난민촌들에서 학살이 벌어지고 순교자와 부상자가 나오고 연료와 뗄감이 떨어지고 병원이 운영을 멈추고 물이 모자라고 공용화장실 앞에는 한없이 줄이 이어지고 하는 끝없는 소식들에도 어찌저찌 시간의 손아귀를 빠져나와 좋은 꿈을 꾸다가 한밤중에 천막 앞에서 개가 짖는 소리에 잠을 깨기도 할 것이다. 오직 팔레스타인인을 위해, 매 세대가 앞 세대보다 더 많은 피로 물든 나크바를 경험하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난민촌들이다. 오로지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이유로 그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길들을 헤메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그들이 가는 길에는 어디든 천막이 뒤따라간다 — 실제 천막이 아니면 상상 속의 천막이라도.
어여쁜 소녀야, 네 방 가득한 화장품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네가 돌아오고 우리가 살 권리를 회복할 때까지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 하지만 화장품이 잿빛이 된 얼굴과 흐려진 눈빛을 아름답게 해 주진 못할 거야. 줄곧 불을 때느라 얼굴이며 손이며에 생긴 반점들을 가려줄진 몰라도 탈진을, 분노와 좌절을, 고통을, 혹은 한때 밝았던 우리를 피부, 가슴, 기억에 주름으로 새겨버린 상처를 숨겨줄 순 없을 거야. 네 멋진 옷들을 입는다고 허기와 강제 이주와 뼈빠지는 고역에 기운을 잃고 너덜너덜해진 몸에 조금이나마 빛이 돌아올까. 약속할게, 이름 모를 소녀야. 네가 돌아와 다시 가져갈 때까지, 내가 네 삶을 지키고 있을게.
이 전쟁이 터진지 일 년이 넘게 지났다. 그러는 사이 장작불은 일상의 중심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퍼올린 우리 것임에도 식민자들이 우리에게 내어주지 않는 프로판 가스 대신이다. 식민자들이 훔쳐 간 자원은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 식민자들은 할 수만 있다면 공기마저도 빼앗을 것이다. 그걸 못하는 대신 미사일, 연막탄, 소이탄, 비행기 따위로 공기를 오염시키려 최선을 다한다. 그런 것들이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시시각각 우리 위로 날아다니면서, 생의 경험이라고는 점령과 식민지배, 그 잔인함밖에는 없는 무기도 들지 않은 이들에게 살상력을 과시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공기와 우리 삶을 더럽히는 최악의 오염물질은 우리 고국을 점령하고 있는 식민자들의 역겨운 숨결이다.
내 이름은 누르, 자발리아 난민촌 주민이고 이게 몇 번째 피란인지는 이제 셀 수도 없다. 우리가 죽음을 피해 생지옥으로 도망하는 재간을 잃고부터는 세지 않았다. 자문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삶을 계속하느니 죽는 게 낫지 않을까. 답이 그렇다라면 (그렇다) 우리는 왜 일 년 넘게 가자에 눌러 앉아 아름다운 것을 죄 앗아 가는 이 유령에게서 도망치는가. 내 답은 이것이다. 우리는 죽음 자체가 아니라 이 끔찍한 꼴을 한 죽음을 피하는 것이다. 무너진 건물에 깔린 채 죽음과 싸우며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는 도움을 청하는 게 두려운 것이다. 죽기 전에 수천 번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다 — 가자의 산 자와 죽은 자 대부분이 피할 수 없는 반복되는 각본이다. 폭격에 사람들 머리 위로 집채가 무너진다. 처음에는 생존자들의 비명이 또렷이 들린다. 하지만 조금씩 희미해져 결국은 신음이, 이윽고 죽어가는 숨소리만 들린다. 곧 조용해지고, 죽음의 냄새로 가득 찬다. 잠시 홀로 살아남은 이는 주위에 흩어진 장기나 사지를 보게 되기도 할 것이다. 미사일 연기를 들이쉬면 그녀의 가족들이 흘린 피 냄새가 같이 들어온다. 그들이 죽어가는 소리도 그들의 응시도 피할 도리 없는 그녀는 이 재앙의 유일한 목격자다. 하나씩 이어지는 죽음을 목격하다 제 차례가 되면, 평화롭게 죽을 자신의 권리를 지켜주지 못한 삶을 게워내기라도 하듯 혼을 내뱉는다.
이것이 가장 괴로운 일일 것 같은가. 전혀 그렇지 않다. 포탄 파편이 몸에 박혀 피를 철철 흘리며 건물 잔해에 깔려 있는데 당신을 구해 줄 죽음은 아직이라고 상상해 보라. 팔 뻗으면 닿을 데까지만 와 있다고. 젠장. 당신을 구해주려는 이들이 보이지만 그들이 끝내 실패한다면. 그래서 죽음이 당신을 가여이 여겨 거두어 줄 때까지 그저 다 포기하고 잔해 밑에 엎드려 있는 수밖엔 선택지가 없다면. 우리가 가자에서 죽음을 피해 달아나는 이유를 이제 알겠는가.
나와 가족들이 가자시 서쪽의 하이 알나스르Hayy al-Nasr로 이주당한 것은 2024년 10월 6일, 그러니까 전쟁이 시작되고 꼬박 한 해가 지나서였다. 이튿날 자발리아 난민촌이 세 번째로 군사 지역으로 선포되었고, 우리는 늘 그랬듯 우리 뜻과는 상관 없이, 머리 위로는 살인 미사일들이 수없이 날아다니는 와중에, 떠났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떠났다. 야만이 두려워서, 앰뷸런스 한 대 없는 곳에서 다치는 게 두려워서, 포로가 되어 학대 당하는 게 두려워서 떠났다.
지금쯤 되니 피란의 풍경에는 익숙해졌다. 수천 가구가 식민군이 표시해 둔 길을 따라 가는 모습, 핏기 없는 얼굴들, 휘청거리는 걸음들. 먼 길을 걷느라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 숨소리에 숨겨 욕을 중얼대는 남자들, 무거운 짐에 짓눌리는 여자들. 다들 주머니는 텅 비었고, 택시 기사들은 요금을 천정부지로 올려 절박한 사람들을 뽑아 먹기 시작했었다. 사람들은 목적지를 몰랐고 눈빛에서부터 길 잃은 사람 티가 났다. 점차 고난에 익숙해졌다. 비가 퍼붓는 길거리에서 하늘만을 이불 삼아 길바닥에 뻗은 채 밤을 보내야 하는, 그리고는 다시 땡볕 아래를 행군해야 하는 고난에. 다치는 사람 없이 이 아수라장을 지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버리고, 가는 곳마다 파편을 날리고 불을 뿜는 포화 아래에서 피란해야 하는 고난에.
이주당할 때마다 가방이 작아지게 마련이다.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 갈수록, 당신은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 끊임없이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은 덜 중요한지 선택을 강요당하니까. 그런 한편, 저들이 당신 대신 내린 첫 번째 결정, 예컨대 전쟁 선포나 당신의 삶을 중단시키고 그 존재를 지워버리고 당신을 절멸로 내몰기로 한 결정으로 인해 당신의 선택권은 사라진다. 전쟁통에서 인간에게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는다. 전후좌우 사방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가운데 쫓기고 달아나며 나날을 보낸다. 어디를 목적지로 삼든 당신의 일부를 잃게 된다. 아들을, 딸을, 자매를, 형제를, 조카를. 반드시 사랑하는 이들이 묘지로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전쟁이 숨을 거두지 않고 버티며 “더 내놔, 더!” 하고 씩씩대는 한,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일, 당신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이다.
피란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릴 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어떻게 하면 온 살림을 옷가방 하나에 다 담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발전과 진보의 시대를 살고 있잖아, 뭔가 인공지능 같은 게 이 딜레마를 풀어 줄 순 없는 건가. 그런데 무슨 지능 말이지. 문명 세계가 우리를 아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이 인종학살이 한 해 넘게 이어졌을까. 내가 질문을 던지면 현실이 답을 한다. “전쟁은 소위 문명 사회의 허세를 폭로했다.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인정人情’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이익’이다.”
온 세계가 손도 까딱 않고 보고만 있는 사이 식민자들이 수만 명의 아동들, 여성들을 끔찍하게 학살한다. 이는 헤아릴 수 없는 대재앙의 전조다. “권력의 균형” ― 힘 있는 자들이 관장하고 굴종적이고 약한 자들이 복종하는 깨진 균형 ― 의 법칙을 고수하는 이 세계에 분노와 연민이 끓어 오르게 하는 재앙. 빵조각이나마 받으려고 줄을 섰다가 이스라엘 전투기에 도륙 당해 산산조각난 어린 소녀의 시신 앞에서 정치 운운하며 얼마든지 눈을 감는 이가 있다면 말해 주리라. 정치 따위는 지옥에서나 하라지, 그들의 “이익”에 저주가 깃들기를. 당신이 오늘 눈 감은 그것이 내일 당신의 뺨을 칠 것이다. 식민자들은 한없이 피를 탐하고, 우리 하나 파괴하는 걸론 만족하지 못할 테니까. 그들의 목표물 목록은 방대하고 살해 명단에는 끝이 없다.
하나의 재앙은 또 하나의 재앙을 소환하기에, 피란의 재앙이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 있다 ―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결코 버리지 못할 것은 없다. 예를 들면 한참을 찾은 끝에 발견한, 겨우겨우 살 수 있었던 엄청나게 비싼 옷, 집이 폭격 당해 모든 것을 잃은 차에 구해서 그렇게나 기뻐했던 옷 같은 것. 그런 것마저도 막상 일이 났을 때 챙기려면 결국 짐이 되고 만다. 아주 먼 거리를 여행하게 된다면 도중에 주저 없이 버리게 될 것이다. 지금껏 너무도 많은 피란민이 먼지 덮인 소지품들을 폭격으로 여기저기가 패인 길가에 내던졌다. 소중했던 물건들, 아이들의 옷, 집에서 가져온 음식 따위를 눈물을 삼키며 제 손으로 내던졌다. 어차피 그런 보물을 버리는 이들도 제 앞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다. 물자 부족, 터무니 없는 가격, 모욕, 수모, 탈진, 그리고 그런 부정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분노. 하지만 길은 죽을 위험으로 가득하다. 사방으로 날카로운 것이 튀어나와 있는 건물 잔해에 베이거나 찔릴 수도, 체력이 다할 수도 있다. 지킬 수 있는 것은 영혼뿐이다. 물론 영혼마저도 수척해지고 팔다리를 잃고 밀려날 수도 있다. 그래도 영혼이 있는 한, 삶은 없고 도처에 죽음만 넘쳐난다 해도, 살아남으려는 ― 몇 번이고 살아 남으려는 ― 본능이 다시금 솟아난다.
쓰라린 피란길 끝에 하이 알나스르에 도착하면 언제나 생기가 넘쳤던 그곳 사람들이 따뜻하게 맞아줄 줄 알았다. 하이 알나스르는 가자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더없이 활기차고 우아한 곳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광경은 기대를 산산이 깨뜨렸다. 끔찍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모습에 아득해졌다. 아름다움의 흔적은 모조리 삼켜버리고 폐허밖에는 남기지 않는 대지진이 휩쓸고 가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우뚝 솟았던 건물들이 그저 돌무더기가 되어 있었다. 몇 블록에 걸친 구역이 전부 폭격당해 동네는 초토화되고 숯더미가 된 폐허만 남아 있었다. 무너진 집앞에는 철제 뼈대만 남은 자동차들이 서 있었다. 가게들, 상가들, 삶의 흔적들이 모조리 허물어져 있었다. 도시 전체가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 번듯한 건물 하나 남지 않은 곳, 그 영혼마저 잃은 곳이 되어 있었다. 이 악랄한 범죄를 보고 있자니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질문이 되살아나 설득력 있는 답을 찾아 논리의 문들을 두드렸다 — “우리가 무엇을 뿌렸길래 이런 파멸을 거두는가.”
우리가 열심히 일하며 삶을 꾸리고, 아름다운 기억을 쌓고, 소중한 기념일들을 챙기며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될까.
재앙이 불어닥친 이 도시의 이곳저곳을 걷노라면 유쾌한 웃음으로 떠들썩했던 그곳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불에 탄 자동차들을 보면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춰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신혼들을 태우고 달리던 수많은 차들이 생각난다. 바로 여기서 누구는 슬픔에, 누구는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바로 여기서 이야기들이 시작되고 끝났다.
그러다 돌연, 한 해만에, 우리는 사방에서 마구잡이로 몰려 오는 죽음과 파괴의 폭력에 포위당해 있다. 식민자들의 비행기가 신혼 부부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장밋빛 꿈을 파묻고 그들의 보금자리를 허문다. 이 파괴의 광경은 심지어 보는 것만으로도 해롭다. 험한 꼴에 눈이 상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고 자문한다, 대체 누가 이런 일을 허락할 수 있냐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헤집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미 이 모든 재앙을 거둔 우리는, 질문의 형태를 바꾸어야 한다. 이렇게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대체 어떤 곳인가?
아랍어에서 영어로 번역함.
주
↑1 | [역주] “피란”은 displacement를 옮긴 것이다. 동사형의 수동태 displaced는 “이주당하다”로 옮겼다. 영어에서 displacement는 쫓겨남, 쫓겨나듯 이주함을 뜻하며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져 피신하는 상황부터 강제적으로 쫓겨나는 상황, 대규모 개발사업이나 자연재해로 인해 이주하는 상황에까지 폭넓게 사용된다. 팔레스타인의 경우 주민들이 전장 확대에 따라 먼저 피신하기도 하지만 이스라엘군이 민간 구역 폭격을 (임박해) 예고하며 소개를 명령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강제 추방의 성격이 강하지만 displacement라는 단어는 그런 상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저자는 이 말과 함께 강제 이주forced displacement라는 말도 사용한다. |
---|---|
↑2 | [원주] ”불의 띠fire belts”(al-aḥzima al-nāriyya)는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대규모 공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러 블록을 단번에 초토화하는 규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