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적인 기근 속에서 굶주리는 팔레스타인 가족들은 생각도 못할 일을 목도하고 있다 — 빵을 구걸하는 아이들과 노인들을, 죽여 달라 기도하는 부모들을, 침묵하며 보고만 있는 세계를.

하루하루 새날이 밝아도 가자지구에서는 그저 굶주림이, 탈진이, 절망감이 깊어질 뿐이다.
이백만 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석 달이 넘도록 전례 없는 재앙을 견디고 있다. 무자비한 전쟁, 가차없는 봉쇄, 용서 못할 전 세계의 침묵 속에서, 그 어떤 의미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기근을.
가자에서 기근은 매일의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저 박탈감 같은 것이 아니다. 기운이라고는 한 톨도 남지 않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쓰러지는, 명백한 현실이다.
어린이, 여성, 노인 — 누구도 피해 가지 않는다. 길을 가다 무너지는 몸들, 폐허가 된 빵집 앞에서 혹은 도착할 기약이 없는 구호품 보급소 앞에서 스러지는 목숨들을 우리 눈으로 목도하고 있다.
밀가루 1kg 가격이 30달러를 넘었고 설탕 1kg은 이제 130달러도 넘는다. 음식이라곤 아예 구할 수조차 없거나 상상 속에나 존재한다 싶을 정도로 귀하다.
정말로 비극적이게도, 필수품들이 그저 비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비싸서 사지 않는 게 아니라, 애초에 살 수 있는 것이 없다.
기름도, 쌀도, 빵도, 심지어는 참치캔조차도 없다. 이따금 뭐라도 있다 싶으면 고춧가루 한 줌, 주방세제 한 병 같은 식이다 — 굶는 와중에 이런 음울한 아이러니라니.
라파 북부나 카타네Qataneh 지역 같이 “안전하다”고 여겨지던 곳들도 사지死地가 되어버렸다. 구호품을 구하려 이런 곳들을 찾아간 굶주린 민간인들이 표적이 되고 있다.
UN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지난 5월 이후 구호 식량을 구하려던 팔레스타인인을 천 명 이상 살해했다.
UN 구호 책임자[인도주의·긴급구호 담당 사무차장]를 지낸 마틴 그리피스가 경고한 대로, 이 인위적인 기근은 “21세기 최악의 범죄”라 할 만하다.
아마도 가장 가슴 아픈 이미지는 겨우 생후 몇 개월만에 심각한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난 야히아 알 나자르의 사진일 것이다. 피골이 상접하도록 쪼그라든 몸, 팔레스타인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광경이 전 세계에 낱낱이 전해졌다.
참을 수 없는 허기
우리는 더 이상 추상적으로 허기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매일 “빵을 주세요!”, “먹고 싶어요” 하고 외치지만 아무도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 겨우 다섯 살 난 내 어린 사촌은 새벽에 잠에서 깨어 아버지에게 빵 한 덩이만 구해다 달라고 애원하지만 그도 역부족이다. 딱 한 덩이조차 사치가 되어버렸다.
실망에 찬 아이들의 눈빛을 견디지 못해 천막에서 도망쳐 버리는 아버지들도 있다.
어느 어머니가 아이가 죽기를 기도하는, 순전히 더는 먹일 길이 없어서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천막 입구에 앉아 눈물을 떨구며 두서 없는 기도를 읊조리는 어머니들이 있다. “신이시여, 부디 이 아이들을 거두어 가소서 … 이 고통에서 구해 주소서.”
사람들은 더는 거리를 걸어다니지 않는다. 몸을 질질 끈다. 약할 대로 약해져서 다리가 몸을 버티지 못한다. 얼굴이 움푹 패여 생기라고는 찾을 수 없다. 아이들은 앙상하다. 창백하고 수척한 남자들은 무겁게 침묵하며 간신히 제 뼈를 옮긴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빵 한 조각을 먹고 있는 젊은 남자에게 자신에게도 나누어 달라고 청하는 모습을 내 눈으로 보았다. 허기가 우리를 어르신들이 한 입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까지 내몰았단 말인가.
결혼한 이들도 더 이상 아내에게 먹을 것을 구해다 주지 못한다. 이미 몇 달 전부터 나는 아이 가질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정한 게 아니라 이 인종학살이 아이들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먹을 게 뭐가 있지?” 아침이면 아내가 이렇게 묻는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부끄러움을 삼키며 답한다. “난 오늘은 안 먹으려고.”
경건함이 아니라 절망에서 비롯된 단식이다. 물을 — 구할 수 있을 땐 — 마시며 스스로에게 거짓 희망을 말한다. 또 하루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먹을거리
매일의 끼니가 무無로부터 만들어낸 것들이다. 파스타나 쌀에 렌즈콩을 섞어 장작불로 익힌 것, 맹물로 끓인 수프. 먹어도 한 시간이면 다시 배가 고프다. 허기를 피해 잠을 청하지만, 잠에서 깨면 허기도 같이 깨어난다.
낮에는 종일 어지럽다. 조용히 입을 다문다. 몇 마디 말로 서로를 위로한다. 고통이 수그러들길 바라며 낮잠을 잔다. 나는 14kg이 줄었고 여전히 고전하고 있다. 하물며 직업이, 돈이, 기댈 이 없는 사람들은.
타는 듯한 7월의 태양 아래 거리에서 한 아이가 간절한 눈으로 얼음물 장수를 바라본다. 한 잔에 50센트지만 그 돈이 있는 사람이 없다.
전기도 선풍기도 그늘도 없다 — 사방에 갈증만 자욱하다. 누가 샌드위치라도 하나 먹으며 지나가면 어린 아이들이 다섯 명이고 열 명이고, 어쩌면 나이 먹은 어른들까지도, 모여 들어 한 입만 달라고 간청한다. 탐욕을 부리는 게 아니라 순전히 필사적인 것이다. 다들 사람이니까, 허기 앞에서 다른 것들은 전부 힘을 잃었으니까.
시장은 아직 남은 곳마저도 모두 텅 비었다.
남가자의 마지막 생명줄 나세르 병원은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하는 이들의 만남의 광장이 되어버렸다. 약이나 식량은 없고 그저 어머니들의 절규, 환자들이나 아사 직전인 이들의 눈물만 가득하다.
소리 없는 학살
이제 가자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꿈꾼다. 굶주림의 고통에 몸부림 치는 아이들이나 서지도 못하는 아내를 보며 죽어가느니 유산탄이나 공습에 목숨을 잃는 쪽이 속편하다.
이제 죽음이란 끝이 아니다. 해방이다.
지금 가자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자연재해가 아니다. 고의적인 기근 — 보이지 않는 데서 사람들이 말라가는, 소리 없는 학살이다. 전 인구를 굶기고 있다 — 천천히, 잔인하게, 계획적으로.
동시에, 기반시설들도 파괴 당하고 있다. 병원을 폭격한다. 밀가루를 가득 실은 구호품 트럭 주위에 모여든 민간인들을 살해한다. 그리고 모니터 너머에서는 세계가, 그 어떤 인류애조차 없이, 가만히 보고만 있다.
빛을 잃은 도시, 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그것이 지금의 가자다. 기적은 바라지 않는다. 그저 조금의 빵을, 조금의 약, 조금의 존엄을 바랄 뿐이다.
우리의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듯, 세계는 보고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쓰는 것은 울기 위해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서다. 가자는 허기에 숨이 막히고 있다. 어둠 속에 가라 앉고 있다. 온 세계가 보는 가운데 몰살 당하고 있다.
* 아흐메드 아지즈는 가자지구에서 활동하는 팔레스타인 언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