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가자시의 집을 떠난 지 열 달, 스물한 살 누어가 당시와 지금의 집을 생각한다.

이스라엘의 대 가자 전쟁이 시작되어 집을 떠날 채비를 하면서, 화장품과 가장 좋아하는 책 — 지금으로서는 필요 없어보이기도 하는 것들 — 을 챙겼다. 집을 떠오르게 하는 그런 소소한 물건들이 멀리서 공격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평안을 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떠나 있게 될 줄은 몰랐다 — 우리 모두 그랬다. 우리는 지금껏 그랬듯 이스라엘의 화가 풀릴 때까지 몇 주, 어쩌면 한두 달 쯤 갈 거라고 생각했다.
집을 떠나 살게 된 지 열 달이 넘었고, 집이라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립다. 옥상에서 책을 읽거나 내 침대에서 잘 수 있는 날이 다시 오기는 할까. 집을 알아볼 수나 있을까. 내게 다시 집이라는 게 생기기는 할까.
나는 2002년생으로 가자시에서 나고 자랐다. 스물한 해 중 열일곱 해를 봉쇄 하에서 보냈고 이스라엘군의 가자 공격에서 살아 남은 것이 적게 잡아도 다섯 번이다. 하지만 기간이나 강도나, 이번 학살에 비할 만한 때는 없었다.
가자 사람 누구도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는 더없이 잔인한, 더없이 고통스럽고 초현실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열 달이 넘도록 같은 날을 몇 번이고 다시 사는 기분이다 — 하루하루 가슴이 더 아파진다는 것만 빼고는 똑같은 나날을. 매일이 폭격, 총격, 포격, 두려움의 연속이다. 사망자 수는 치솟고, 이 지옥을 끝낼 협상은 갈수록 먼 이야기가 되는 것만 같다.
이스라엘은 가자에서 최소 40,005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했다.[1][역주] “가자지구 보건부는 [2025년 7월] 29일(현지시각) 2023년 10월7일 가자 전쟁 발발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6만34명이 사망하고 … (계속) 의학 학술지 《랜싯The Lancet》에 글을 실은 학자들에 따르면 실제 사망자 수는 186,000명에 이를 수도 있다. 무수한 시신이 아직도 폭격 당한 건물 아래 파묻혀 있고 기아로, 치료를 받지 못해서, 기반시설이 무너져서 죽어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이 지옥을 살아가는 우리는 사망자 수가 그보다 더 많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가까이에 폭격 당한 집이 여러 채 있지만 아직 아무도 잔해를 걷어내지 못하고 있다.

‘갈 수 있는 데가 있나?’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우리는 자문한다. “어디로 가지? 갈 수 있는 데가 있나?”
내게 집은 그저 내가 살았던 건물이 다가 아니었다. 집이란 따뜻한 실내가 주는 안전하다는 느낌, 내 옷들을 바라보는 일, 베개의 안락함이었다. 엄마나 집안을 돌아다니는 소리였다. 온 집을 가득 채운 군침 도는 무사칸musakhan — 수막sumac을 향신료로 써서 구운 닭고기에 양파 납작빵을 곁들인,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 — 냄새였다.
집은 밖에도 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과 등굣길, 공기 중에 가득한 향신료 냄새, 시장, 라마단 기간 저녁의 노란 등, 함께 기도하고 코란을 읽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었다.
피란 생활을 하면서 집의 의미가 달라졌다. 이제는 벽과 욕실과 물과 누울 매트리스와 덮을 담요가 있는 곳이 집이다. 담요를 얼굴까지 덮어쓰면 어떻게든 공격을 막아주리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더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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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달라진 날
10월 7일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저 북부에 있는 집을 떠난 날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을 두고 떠난 날이다.
한때는 작가가 되기를, 문학 학부 과정을 마치고 외국에서 석사 학위를 따기를 꿈꿨다. 가자로 돌아와 청소년들에게 우리의 역사와 유산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림을 계속 그리고 미술 갤러리를 열고도 싶었다. 하지만 가장 큰 꿈은 해방된 내 나라를 보는 것이었다.
토요일 이른 시각, 오전 여섯 시쯤, 미사일 떼가 북가자 하늘을 가로질렀다. 고등학생인 막내 여동생은 등교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이 — 그녀뿐만 아니라 모두가 — 학교에 가는 마지막 날이 될 줄은, 학생도 학교도 사라지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폭음에 잠을 깼다. 겁에 질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데이르 엘-발라에 사는 오빠가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집은 동쪽 국경에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육로를 통한 침입에 취약할 터였다. 둘은 — 국경과 먼, 가자 중부에 있는 — 오빠네 집으로 옮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데이르 엘-발라로 피란한 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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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즐거움들
전쟁은 일상의 소박한 — 진부하기까지 한 — 즐거움들을 그리워 하게 한다.
향긋한 장미와 올리브, 야자나무와 오렌지 나무가 자라는 뒤뜰이 그립다. 가장 그리운 것은 레몬 나무 — 흰 꽃의 은은한 향 — 이다. 여름 저녁이면 가족과 함께 나무들 사이에서 시간을 보냈고, 추운 겨울에는 불을 피웠다.
물이 거의 없을 때도 혹은 계속되는 단전으로 전기가 없을 때도 젊은이들로 북적이던 가자시의 카페와 거리가 — 그 생기가 — 그립다.
커피와 바닐라 컵케익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책 읽기를 즐겼다.
집을 떠났던 10월 7일, 무엇을 챙길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폭풍의 언덕』 한 권, 잠옷, 화장품 — 피란을 조금은 괜찮게 느끼는 데 도움이 될 일상적인 물건들 — 을 챙겼다.
심지어는 —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다정한 위안을 조금은 줄 — 바닐라 컵케익도 얼마간 챙겼다.
그 후로 케익을 먹어보지 못했다. 식사는 퍽퍽한 빵과 그때그때 살 수 있는 아무 통조림이나가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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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달이 지나고
오빠와 엄마 쪽 친척들이 살고 있는 데이르 엘-발라는 주말이나 여름 휴가 때 가족과 함께 왔던 곳이다. 우리 집 내 침대가 아니면 잠을 잘 수가 없다고 불평을 하곤 했다. 그 침대를 마지막으로 본 게 열 달 전이다.
지금은 엄마, 아빠, 여동생과 한 방에서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잔다. 매트리스는 좋고 깨끗하며 가족은 화목하고 함께 있다. 하지만 불면과 불안에 시달린다. 잠에 들려고 애쓰면서, 깨진 창문 너머로 하늘을 가르는 전투기들 사이에서 별을 찾는다. 우리 위로 미사일이 떨어질까 걱정한다.
데이르 엘-발라는 올리브나무, 야자나무로 가득한 땅이 펼쳐진 조용하고 깨끗한 소도시였다. 요즈음은 숨이 막힌다. 공공 서비스가 무너져 쓰레기가 쌓여만 간다. 야자나무는 먼지와 잔해로 뒤덮여 알아보기도 어렵다. 하늘은 — 폭격으로 인한 대기 오염 탓에 — 잿빛이고 땅은 오수에 젖어 있다. 공기마저 썩어서 쓰레기통 속 같다. 온갖 냄새가 다 난다, 집 냄새만 빼고.
처음에 오빠네로 오면서는 전쟁이 오래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수업 진도를 챙겼다 — 처지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도 폭탄이 떨어졌다는 걸 알고서는 새로운 소일거리를 찾기까지 한동안 희망을 잃기도 했다. 요즈음은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시를 쓴다. 불안하면 청소를 한다. 집에서 가져온 잠옷은 이제 너무 낡아서 행주로 쓴다.
물을 긷고 전화기와 전등을 충전할 전기를 찾으러 걸어다니는 게 일과다. 이웃집에는 태양열 패널과 발전기로 가동하는 수도가 있다. 거기서 전화기를 충전하고 가끔 샤워도 한다. 샤워를 할 때면 사생활이, 물이, 위생 용품이 없어 고통 받는 우리네 사람들 생각에 미안해진다. 통신 수단이나 샴푸, 비누, 주방세제, 세탁세제, 면도기 같은 생필품을 구하는 일만도 끊임 없는 투쟁이다.
다 갈 데가 없다. 아이들은 돈을 구걸하고 노인들은 길 한가운데에 혼자 앉아 있다.
거리에서건 천막에서건 많은 이들이 쉬지 않고 기도한다. 가자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한다 — 이 슬픔들, 어둠과 아픔을 끝내기 위한 기도를. 우리는 너무도 많은 사람을,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다. 나도 사촌이나 다른 친척 여럿을 보냈다.
살아 남은 매 순간이 기적이므로, 더 열심히 기도한다.

집, 그때와 지금
심신의 건강이 모두 악화되어 힘들다. 악몽을 꾸고 물과 통조림이 오염되어 배앓이를 한다. 많이 아프다. 약이나 진통제를 구하기가 정말 고역이다 — 겨우 찾는다 해도 매우 비싸다.
이스라엘이 가자를 공격하면서 같이 시작한, 그보다도 더 사악한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우리 서로 간의 유대감을 파괴하려 드는 일이었다. 우리를 불안과 분노, 자포자기와 심적 탈진으로 몰아 넣는 일.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 곁에 있었다. 차분히 안심시켜 주려고, 다정하고 긍정적이려고 노력했다.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었다. 무엇에든 최선을 다하려 애썼다. 불을 피우면 케이크를 굽기도 하고, 가능할 땐 흥겹게 놀았다. 도무지 그럴 수 없을 때엔 서로를 붙잡고 나쁜 일들, 최악의 일들을 견뎠다.
우리에겐 여전히 꿈꾸는 여정이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나갔다.
처음에는 희망을 품고 뉴스를 봤다. 무섭긴 했지만 왠지 전 세계가 일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제 아무도 그런 희망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이것이 다 끝나고 나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관한 희망만 남았다.
며칠 전, 엄마와 함께 오빠네 발코니에 앉아 있을 때였다. 엄마에게 안겨 내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근처 아파트에 폭탄이 떨어졌다. 귀가 먹먹해지는 폭음에, 곧이어 벽채가 쓰러지는 소리에 말문이 막혔다. 두 아이와 아버지가 살해당했다.
추억으로 가득한 집과 거기 사는 사람들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 일만은 그 누구에게도 없기를 바란다.
요즘은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기분이 든다. 생각날 때마다 가족들에게 — 특히 엄마에게 — 사랑한다고 말한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까.
내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기쁘게 죽을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도 보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내 가족을 갖고 싶다. 우리 집을 보고 싶다, 어떤 꼴을 당했든, 다시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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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역주] “가자지구 보건부는 [2025년 7월] 29일(현지시각) 2023년 10월7일 가자 전쟁 발발 이후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6만34명이 사망하고 14만587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이 올해 초 하마스와 휴전을 끝내고 재공습에 본격 나선 3월18일 이후 사망자는 8867명, 부상자는 3만3829명이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하마스 대원과 민간인 희생자를 구분해 발표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민간인으로 보인다. 희생자 중 어린이가 1만8592명으로 30.8%, 여성이 9782명(16.2%), 노인 4412명(7.3%)라고 설명했다. 알자지라는 주민 36명 당 1명이 숨진 꼴이라고 보도했다. 지난 1월 팔레스타인 통계청은 가자지구 주민은 전쟁 발발전보다 약 16만명이 감소한 210만명으로 추정한 바 있다.”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arabafrica/1210716.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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