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assan Abo Qamar, “Cooking in Gaza is now a toxic affair,” Al Jazeera, 2025.05.24.
먹기 위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나무와 쓰레기를 태울 때 나오는 유독한 연기를 마셔야 한다.
하산 아보 카마르 (가자에서 활동하는 작가)
)
가자에는 공포와 불안의 소리가 흐른다. 우리 모두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머리 위에서 정찰용 드론이 윙윙대는 소리, 좁은 골목을 지나는 구급차의 비명 소리, 군용기의 사나운 포효, 천둥 같이 울리는 폭격음, 건물 잔해에 깔린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하나가 더 생겼다. 텅 빈 가스통이 쩽그렁거리는 새된 소리.
가스 버너에 불을 붙일 때 나는 작게 딸깍거리는 소리에 익숙했다 ― 곧 따뜻한 식사나 차가 나올 것임을 알리는, 하루를 여는 작은 불꽃에. 이제 그 소리는 아무 데서도 들리지 않는다. 대신 쨍그랑 소리만 텅 빈 속을 울린다.
우리 집은 라마단 중반 즈음 마지막 남은 요리용 가스를 다 썼다. 가자의 다른 집들도 다 그렇듯 장작불로 바꿨다. “오늘부턴 수후르[라마단 기간 동안 일출 전에 가볍게 먹는 아침식사]에 마실 차 한 잔 못 끓이게 됐구나,” 어머니가 그렇게 말한 게 생각난다.
밤중에 불을 피우면, 겨우 잔불씨만 깜빡거린대도, 드론이나 쿼드콥터에 들켜 공습이나 총알세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밤중에 불빛을 겨냥하는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 물을 권리가 없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수후르로는 찬 음식을 먹고, 불을 쓰는 건 이프타르[라마단 기간의 저녁식사]로 미뤘다.
가스 부족으로 지난 달에 빵집들이 문을 닫은 후로 불에 더 의지하게 되었다 ― 우리 집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렇다. 많은 이들이 임시변통으로 진흙 화덕을 만들거나 골목길이며 천막 사이며에서 불을 지펴 빵을 굽는다.
검고 진한 연기가 사방에 자욱하다 ― 미사일에서 나오는 죽음의 연기가 아니라 서서히 우리를 죽이는 삶의 연기가.
아침이면 기침을 하며 일어난다 ― 그냥 지나가는 기침이 아니라 깊고 길고 숨 막히는 기침, 가슴통이 텅텅 울리는 기침이다.
그리고는 동생과 함께 동네 끄트머리로 간다. 수레로 땔나무를 실어다 파는 사람이 있는 곳이다. 폭격 당한 건물, 쓰러진 나무, 망가진 가구, 집이나 학교 잔해에서 모아 온 것들이다.
허약해진 몸으로 되는 만큼 지고 와서는 다음 고역으로 넘어간다. 나무에 불 붙이기. 쉽지 않다. 먼지를 들이마시며 몇 시간이나 나무를 꺾고 쪼개어야 한다. 아버지가 숨을 헐떡이면서도 돕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렇게 완고한 통에 매일 같이 실랑이가 벌어진다. 특히 아버지와 동생이 자주 다툰다.
불을 붙이면 연기 때문에 눈이 빨개지고 목이 아린다. 기침이 심해진다.
장작이 턱없이 비싸졌다. 전쟁 전에는 8킬로그램에 1달러면 됐지만 이제 그 돈으론 겨우 1킬로그램도 살 수 있을까 말까다.
가난 때문에 자기네 나무를 벨 수밖에 없는 사람이 많다. 동네에서 초록빛이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웃 여럿이 마당에서 키우던 나무를 베기 시작했다. 우리도 올리브 나무 가지를 꺾어 쓰기 시작했다 ― 괜히 건드렸다 꽃이 떨어져 올리브가 적게 열릴까봐 어릴 적엔 감히 손도 못 댔던 나무다.
벨 나무가 없는 집에서는 플라스틱이나 고무까지, 불이 붙는 쓰레기는 가리지 않고 쓴다. 하지만 그런 걸 태우면 유독 증기가 나와 그들이 들이쉴 공기를 오염시키고 그들이 요리하는 음식에도 스며든다.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플라스틱 맛이 묻어나고 한 끼 한 끼가 건강을 위협한다.
이런 공기에 계속 노출되면 중증 호흡곤란이나 만성질환이 생길 수 있고 심지어는 암처럼 치명적인 질환에 걸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 불이 없으면 음식도 없다.
가족과 환대의 상징이었던 부엌이 유독 구역이 되어버린 데에는 너무도 잔인한 구석이 있다. 한때는 온기를 뜻했던 불에 이제 우리 폐와 눈이 타들어간다. 그렇게 요리한 식사는 식사라고 하기도 어려운 수준이다. 렌틸콩 수프, 그리고 벌레 먹은 밀가루나 모래 섞인 밀가루로 만든 빵. 음식을 만드는 기쁨은 간데없이, 그저 두렵고 괴롭고 기진맥진할 뿐이다.
요리용 가스의 부족은 그저 음식을 구하기 어렵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았다 ― 가족을 한데 묶어주던 의례儀禮를 무너뜨려 버렸다. 식사란 더 이상 가족이 함께 모여 즐기는 시간이 아니다. 그저 견뎌야 하는 시간이다. 기침하는 시간이다. 오늘 피운 불로 누군가 너무 아프게 되지는 않기를 기도하는 시간이다.
폭격으로 죽지 않는대도, 우리는 서서한 죽음을 마주한다 ― 소리 없고 유독한, 똑같이 잔인한.
이것이 가자의 오늘이다.
생존이 곧 아침에 차 한잔을 마시기 위해 독을 들이쉬는 일을 뜻하는 곳.
장작이 금보다도 귀해져 버린 곳.
단순히 음식을 먹는 행위마저도 무기가 되어버린 곳.
그럼에도 우리는 불을 붙인다.
기침한다.
그렇게 살아간다.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