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Anusha Kedhar, “Hands Up! Don’t Shoot!: Gesture, Choreography, and Protest in Ferguson,” Bulletin Winter 2014, Collorado Colledge, 2014.
이제 다들 이 문구를 잘 알고 있다. 올해 초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경찰이 마이클 브라운을 살해한 데 항의하는 시위의 구호가 된 문구다. 다른 인상적인 ― “어림 없지, 안 갈 거야!Hell no! We won’t go!”나 “정의 없이 평화 없다No justice? No peace!” 같은 ― 운동 구호와 마찬가지로 불의에 맞선 집단적 분노의 정수를 포착하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 구호들과 달리 “손 들었어요, 쏘지 마세요!”는 그저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도 행한다embody. 이 문구는 쏘지 말라는 간청이자 손을 들라는, 몸으로 내리는bodily 명령이다. 마이클 브라운Michael Brown이 죽은 후로 우리는 퍼거슨의 젊은 흑인들이, 인도의 티베트 승려들이, 흑인 하버드 로스쿨생들이, 미주리주 초등학생들이, 모스크바 젊은이들이, 뉴욕시 어느 교회 교인들이, 손을 들고 있는 사진을 본다. 서 있는 사람도 무릎 꿇은 사람도, 고개 숙인 사람도 고개를 꼿꼿이 세운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마이클 브라운에게, 세계 전역에서 시민 위에 군림하는 국가의 억압에 희생당한 이들에게 몸으로 연대하는 행위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기자 매트 피어스Matt Pearce의 말대로 손을 드는 몸짓은 “다른 종류의 무기가 되었다.”
이 몸짓은 그것을 상연하는 갖가지 몸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렇게나 정형화되어 있는 몸짓에 어떻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가? 우리는 이 시위들을 어떻게 안무적 전술이자 저항의 몸짓으로 읽을 수 있는가? 퍼거슨 시위에서 몸을 이용하는 것에 어째서 그렇게나 큰 의미가 있는가?
아래에서는 이 몸짓을 읽는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볼 것이다. 물론 결코 이것이 다는 아니다.
1. 아비투스Habitus: 팔을 허공으로 들어 올려 높이 뻗고는 손을 펴서 무기가 없는 빈손임을 보인다. 소리 없는 외침, 이 몸짓은 관중에게 호소한다. 저는 죄가 없어요. 무기를 갖고 있지 않아요. 위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항복합니다. 시키는 대로 할게요. 굴복과 공포는 흑인의 몸에 새겨져 있다. 일상의 아비투스에 속한다. 사회학자 로익 바캉Loïc Wacquant에 따르면, 사회학자, 인류학자, 철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용어인 “아비투스”는 “사회가 장기적인 기질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느끼고 행동하도록 훈련된 능력들과 구조화된 성향들이라는 형태로 개개인 속에 녹아들어 그들의 지침이 되는 것”이다.
합중국의 젊은 흑인들은 경찰을 대할 때의 이 굴복의 몸짓을 일찌감치 배운다. 흑인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예컨대 경찰이 차를 세우라고 하면 느리고 신중하게 움직이면서 경관에게 자신의 행동을 하나하나 읊으라고 가르친다. 몸의 움직임을 실시간 중계하듯 말이다. 안전벨트 풀겠습니다. 글로브 박스를 열게요. 신분증 드리겠습니다. 공개된 장소에 있는 흑인의 신체가 사실상 위협적이고 무도하며 “제자리를 벗어난” 것이라 여겨지는 사회에서 흑인들은 자신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정당화하도록, 제 몸을 권력 구조, 제도가 읽을 수 있게 만들도록 강제된다. 더없이 일상적인 움직임 ― 마이클 브라운이나 트레이본 마틴Trayvon Martin의 경우 집으로 걸어가기, 레니샤 맥브라이드Renisha McBride의 경우 남의 집에 노크하기, 키마니 그레이Kimani Gray의 경우 허리띠 추스리기 ― 까지도 의문시, 문제시되고 의심스레 여겨진다. 반복적인 상연을 통해 “손 들었어요, 쏮지 마세요” 몸짓은 흑인 신체 생존 레퍼토리의 일부가 되었다.
2. 실패한 신호Failed Sign: 이 보편적인 신호가 무시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이 굴복의 몸짓이 보아지거나 들어지지 않는다면? 경관 대런 윌슨Darren Wilson은 마이클 브라운의 항복 신호를 무시했다. 브라운의 “손 들었어요, 쏘지 마세요” 몸짓은 국가와 시민, 경관과 체포 대상, 백인과 흑인 사이의 골을 넘어 소통하는 데 실패했다. 문학 교수이자 블로거인 케구로 마차리아Keguro Macharia가 지적하는 대로 마이클 브라운의 죽음은 “흑인의 몸, 죽여도 되는 몸[…]이 수행하는 이 신체적 통속어의 실패를 나타낸다. 흑인이라는 것blackness은 이 전 지구적인 신체적 통속어에 있어서 구멍이, 이 몸짓을 읽어낼 수 없게 만드는 오류가, 이 몸짓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가처분성이 된다. 언제나, 심지어는 ‘항복합니다’라고 말하는 움직임일 때도, 애초에 위협적인 것으로 읽힌다.” 요컨대 흑인이라는 것은 이 움직임 신호의 한계를 드러내는, 이 보편적인 굴복의 몸짓을 잘못, 범죄, 책임을 물을 일의 몸짓으로 만드는 요소다. 이 몸짓은 항복 의사를 전해야 했지만 실패했다. 마이클 브라운을 구하지 못했다.
3. 무고함의 몸짓: 살아 있다는 것, 흑인이라는 것. 그것이 윌슨의 마이클 브라운을 유죄로 확신하는 데 필요한 “증거”는 그게 다였다. 그는 마이클 브라운을 쏘았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적어도 여섯 번을, (아마도) “그가 정말로 죽었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내 동료이자 콜로라도대학교 버틀러센터 기관장인 폴 버클리Paul Buckley는 이를 “흑인 신체에 대한 과잉살해overkilling”라 칭한다. 이제, 이미 죽은, 마이클 브라운의 검은 피부는 그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갈리고 헤집어져야 한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을, “그가 정말로 무고했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거듭 부검되고 베여야 한다. 정수리의 총상으로는 부족했나? 그가 무장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했나? 그가 손을 들고서 “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는 증인들의 말로는 부족했나? 흑인의 몸에 대한 과잉살해와 과잉부검은 무관하지 않다. 죄가 피부에 있다면, 무고함은 피부 아래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서 검은 몸은, 심지어 죽은 채로도, 무겁고 가혹한 증명의 부담을 진다.
마이클 브라운이 무고함을 확인할 신체적 증거는 사망 당시 그의 자세로 족하다. 공중으로 손을 든 시위 참여자들은 이를 몇 번이고 상기시킨다. 그 몸짓은 마이클 브라운이 무릎을 꿇은 채로, 고개는 숙이고 손은 든 채로 총에 맞았음을 상기시킨다. 경찰이 손을 든 사람에게는 총을 쏘지 말라는 규칙을 어겼음을 상기시킨다. 백인의 공간에서 움직이는 검은 몸은 결코 무고하게 여겨지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공간 자체가 희다는 점을 말이다.
“손 들었어요, 쏘지 마세요”라는 구호는 시위 참여자들에게 마이클 브라운의 마지막 움직임을 재상연함으로써 그에게 연대할 것을 호소할 뿐 아니라 그의 마지막 육체적 주체적 행위를 몸으로 구사함으로써 공감할 것을 호소한다. 집단적 몸짓으로서 그것은 우리가 마이클 브라운이 무고하다는 신체적 증거를 주목하고 공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4. 안무적 전술Choreographic Tactic: 안무가이자 무용수이자 학자인 수전 레이 포스터Susan Leigh Foster가 쓴 대로, 시위는 “통제되지 않는 신체적 분노에서 터져나오는 실천” 아니면 “몸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도구로서만 사용하는 실천”으로 개념화된다. “어느 쪽도 몸을 또렷하게 의미를 표현하는signifying 행위주체로 가정하지 않으며, 어느 쪽도 이 시위 자체에 쓰이는 전술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이 시위들을 안무적 전술들로서 분석하는 일은 퍼거슨 시위대는 무도하고 무법적이며 종잡을 수 없는 검은 몸들의 폭도mobs라는 대중적이고 언론이 부추기는 관점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시위대의 행동은 세심하게 리허설되고 안무된 것이다. 현상태에 저항하고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채택된 의도적인 몸짓들이다. 포스터가 쓰기로, 그들은 손을 들고 평화적으로 시위함으로써 “시위 행위를 통해, 그들에 대한 선입견을 합리화하는 데 쓰이는 고정관념들을 반박한다.” 시위대의 몸들은 대개 “권위의 위치에 있는 몸들에 순응하기를 거부”하지만 퍼거슨 시위대의 경우에는 궁극적이자 더없이 명백한 협조cooperation의 몸짓을 통해 전술적으로 부당하고 인종주의적인 국가에의 비협조를 수행한다.
5. 자유의 안무정치Choreopolitics of Freedom: 뉴욕대학교 공연이론 조교수 안드레 레페키André Lepecki는 최근에 “안무치안choreopolicing”과 “안무정치choreopolitics”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안무정치를 저항의 안무로, 아예 자유롭게 움직일 자유로 정의하며, 이것이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궁극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안무치안은 “경찰이 시위대가 이동하는 공간을 규정하고 모두가 자신에게 허락된 장소에 있게 만드는” ― 저지선을 치고 군중을 해산시키고 몸들을 끌어내는 ― 방식들로 정의된다. 그가 주장키로 안무치안의 목적은 “정치적인 것의 형성과 표현 일체를 방지하는 특정 종류의 움직임을 실행함으로써 정치 행위를 해소하는” 것이다. 이어서 레페키는 자유의 표현으로서의 정치 집회와 복종의 시행으로서의 경찰의 응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시위의 안무정치와 국가의 안무치안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묻는다.
퍼거슨에서 우리는 안무치안의 증거 ― 군대 같은 전형으로 줄지어 선, 전장에서처럼 갑자기 치고 들거나 꾸준히 전진하는 경찰 ― 를 수없이 보았다. 심지어 퍼거슨의 여러 거리에서 그들이 취한 해산 전술 역시 무리를 흩뜨리고 공황을 유발하도록 의도된 일종의 안무된 혼돈이었다. 퍼거슨에서의 경찰의 전형과 저지선이 갈수록 군사화되어가는 경찰 병력의 안무치안 전략이라면, “손 들었어요, 쏘지 마세요”의 몸짓은 안무정치적 반항 전술이 되었다. 집회 참여자들은 손을 들고서, 어디 한 번 발포해 보라고, 대답해 보라며, 경관들의 잘못을 생각해 보라며 경관들을 향해 나아간다. 그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상기하게 한다. 시위대의 움직임은 흑인의 몸이 공공 장소에서 어디에서 언제 어떻게 누구와 움직일 수 있는지를 제한하는 국가 권력 구조를 거역한다. 마이클 브라운 같은 흑인 청소년이 길 한가운데를 걸었다는 이유로 공격 받고 살해 당할 때, 그저 무리지어 퍼거슨을 가로질러 걷는 단순한 행위는 저항 행위, 자유의 안무정치가 된다.
앞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퍼거슨 시위의 사례에서 몸을 이용하는 것에 어째서 그렇게나 큰 의미가 있는가? 합중국에서 흑인의 몸은 처분가능한 것, 인간이 아닌inhuman 것,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경찰이 마이클 브라운의 몸을 거리에 네 시간이나 내버려두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언론인 찰스 P. 피어스Charles P. Pierce의 지적대로 “시신body이 길거리에 네 시간이나 누워 있는 일은 없다. 선진 사회에서는 그렇다. 시신은 네 시간이나 거리에 누워 있는 것은 내전이 끊이지 않는 소국에서 생기는 일이다. […] 시신이 가로수가 자라는 교외 주거지역 길가에 방치되지는 않는다.” “손 들었어요, 쏘지 마세요” 시위는 감시 당하고 규율 당하고 통제 당하고 살해 당하는 바로 그 몸들을 데려가 권력과 목소리를 준다. 거리에 방치된 그 죽음 몸들을 부활시키고서, 우리에게 권력과 저항의 힘으로서의 흑인 신체의 살아 있음을 마주하라고 요구한다. 강제한다.
레페키는 정치적 존재라는 것이 자유로이 움직일 능력을 갖는다는 것이라면 이상적인 정치적 주체란 “춤추는 이”이리라고 주장한다. 내게는 퍼거슨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이야말로 춤추는 이들이다. 극도로 치안 되는 공간들에서도, 그의 아름다운 표현으로는 “여지를 전혀 주지 않는 안무 스코어” 속에서도, 자신들의 움직임을 제약하는 통제의 공간을 자유의 공간으로 바꿀 수 있는 이들, 그곳에서 반항적으로, 대담하게, 힘있게 움직이는 이들 ― 그곳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능력을 갖는 ― 이들이다. 두 손을 들고서 시위대는 그저 마이클 브라운을 위해서가 아니라 또한 트레이본 마틴을 비롯한 이들을 위해 움직일 공간을 되찾는다. 이름이 알려진 이도 그렇지 않은 이도 있지만, 그 모든 흑인들이 어떤 식으로든 두 손을 들고 말했다, ⸻.
이 글은 대배심 판결이 나온 다음 날 발행되게 되었다. 편집자들은 내게 글에 고치거나 재고하고 싶은 곳이 있는지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고통과 실망감으로 가득하다. 마이클 브라운이 손을 들고 있었던 것은 아무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위대가 이제 109일째 손을 들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진실로 여겨지는 것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의 그 말뿐이다. “폭동은 들어지지 않는 자들의 언어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콜로라도대학교 흑인학생회에서 조직한 시위는 감동적이었다. 11월 25일, 우리는 캐스케이드가를 막고 도심을 행진했다. 곱은 손으로 피켓을 들고 목이 쉬도록 구호를 외쳤다. 침을 뱉거나 가운데 손가락을 드는 행인도 있었지만 주먹쥔 팔을 뻗어들거나 옆에서 목소리를 보태며 연대를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끝도 없는 허망함과 믿기지 않는 절박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시위였다. 평화 시위에는 제도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힘이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는 때였지만 흑인 공동체에 연대를 보내고 정의에 헌신에 목소리를 내는 우리 학생들이 자랑스러웠다.
- 이 글은 2014년 10월 6일자로 《페미니스트 와이어The Feminist Wire》에 실은 글을 다듬은 것이다. thefeministwire.com/2014/10/protest-in-ferguson/
참고문헌
Foster, Susan. “Choreographies of Protest,” Theatre Journal, Vol. 55, No. 3, (2003), pp. 395-412.
Macharia, Keguro, “hands up don’t shoot,” Gukira: With(out) Predicates. August 15, 2014. http://gukira.wordpress.com/2014/08/15/hands-up-dont-shoot/
Lepecki, André. “Choreopolice and Choreopolitics; or the task of the dancer” The Drama Review, Vol. 57, No. 4, Winter (2013), pp. 13-27.
Pearce, Matt. “Protesters use hands up gesture defiantly after Michael Brown shooting,” Los Angeles Times. August 13, 2014. http://www.latimes.com/nation/la-na-hands-up-20140813-story.html
Pierce, Charles P. “The Body in the Street,” The Politics Blog. Esquire Magazine, August 22, 2014. http://www.esquire.com/blogs/politics/The_Body_In_The_Street
Wacquant, Loïc. “Habitus”, in Jens Becket and Zafirovski Milan (eds),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Economic Sociology, London: Routledge, 2005, pp. 315-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