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유럽의 타자들 (파티마 엘-타예브, 2014/2018)

원문: Fatima El-Tayeb, “European Others,” Political Critique, 2018. 원래 Vivian Paulissen et al. (eds.), Remixing Europe: Migrants, Media, Representation, Imagery (Amsterdam, 2014), pp. 76-79으로 발표된 글이며 2018년에는 Courageous Citizens에도 실렸다.

백인이자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유럽인이라는 것은 그저 낯선 장소에 놓이는 일이 아니라 또한 낯선 시간성 속에 놓이는 일이기도 하다. 저 두 자질을 모두 갖지 못한 유럽인은 ― 물리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문화적으로 ― 이제 막 도착한 것으로, 심지어는 여전히 다른 데 있는 것으로 읽히곤 한다. (법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학술적 …) 유럽 담론에서 ‘이주민migrant’이라는 개념은 국경을 넘는 이들을 가리키지만 여기에는 유럽 내의 인종화된 공동체들 전부도 포함된다. 그런 공동체들은 그들에게 부여되는 영구적인 지위를 통해 (유럽이 아닌 어딘가로부터) 이주 중인 것으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 지위는 대대로 전달되며 따라서 갈수록 이주라는 실제 사건과는 동떨어진 것이 된다. ‘이주민’이 이동을 가리키는 말에서 정적인, 세습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종화된 차이가 여전히 가시적인 한 유럽성 속으로의 이동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종화된 인구들은 공간적, 시간적 역설 속에 위치 지어진다 ― 그들은 도착의 순간에 영구적으로 동결되며, 이주라는 실제 순간/사건이 멀어질수록 이 역설은 깊어져 시공간 속 그 존재의 ‘퀴어함’이 된다. 작금의 소위 전후 노동력, 식민후 이주민 3세대는 그들의 조부모, 실제 이주민 1세대보다도 더 외부인alien이자 때와 장소를 벗어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바로, ‘인종’을, 따라서 인종화된 인구들을, 반드시 유럽 외부에 놓는 정규화된 색맹성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에 의해) 내부적 존재일 수 없(도록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냉전 후 세계에서 유럽 연합이 군사화된 합중국의 지배에 비해 종종 보다 인도적이고 균형잡힌 (또한 그 제국주의적이었던 과거를 성공적으로 털어 낸) 대안으로 보이곤 하는 핵심적인 정치적, 경제적 행위자로 굳건히 자리 잡았지만, 유럽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전에 없이 미해결 상태에 있는 듯하다. 대신에, 기독교적인 것으로, 세속적인 것으로, 유대-기독교적인 것으로, 그리고 적어도 암묵적으로는 백인인 것으로 오락가락하며 정의되는 유럽 정체성에 대한 위협을 둘러 싸고 불안 가득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 마치 ‘비유럽적인 것’을 체현하는 이들, 그러니까 유색인 공동체들, 특히 흑인, 롬인, 무슬림을 쫓아내면 유럽의 경제적, 정치적 미래에 불확실성이 모두 사라지기라도 할 것인 듯 말이다.

동시에, 인종주의와 유럽에 관한 일을 하다보면, 이 대륙에 그런 선입견은 없다는 전제를 종종 마주하게 된다 ― 많은 백인 유럽인이, 대개는 미합중국의 집착이랄 만한 것을 언급할 때, 자신들은 ‘인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주장까지 나간다. 유럽인들은 인종에 어떤 무게를 부여하는지가 유럽과 합중국의, 핵심적인 차이라고까진 하지 않더라도, 차이라고 여기곤 하며, 유럽 정체성 형성에 있어서 인종(과 인종주의)의 역할을 중요하게 논하는 것이 종종 유의미한 유럽적 맥락 없이 미국식 ‘정치적 올바름’을 강요하는 식이 된다고 지적하려 든다.

그들에게 그것은 오히려 이주 공동체들, 그리고 그들의 타고난 성차별주의, 반유대주의, 동성애혐오에 대한 필수적인 비판을 침묵시키려는 시도로 여겨진다 (‘이주민 극단주의’ 담론이 넘쳐나지만 그런 공동체들에 대한 비판이 금기시된다는 가정 또한 똑같이 넘쳐난다). 그리고 실제로, 언뜻 유럽이 미합중국의 (포스트)인종적 시간성 바깥에 존재하는 듯 보일 수도 있다. 후자는 불관용과 차별을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서사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 유럽의 색맹성 신화는 결코 ‘인종적’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반유대주의는 여전히 예외이자 인종주의와는 명확히 별개인 것으로서 분석되곤 한다). 다시 말해, 인종 개념이 유럽에서 기원했으며 유럽의 파시즘 체제와 식민제국 모두 노골적으로 인종에 기반한 정책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는 유럽 대륙과 그 내적 구조들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가정이 득세하고 있다.

유럽의 기나 긴 인종, 인종주의 역사에 대한 억압은 이윽고 오늘날 유럽대륙의 (어두운 피부색이든 머리싸개든 비유럽적인 것의 시각적 표식과 연결되는)’다문화’ 상태를 새로운 것, 좋게 보아도 조정이 필요하며 나쁘게 보면 저항해야 할 상태, 가장 중요하게는 숫제 ‘실패했다’고 선언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다문화주의는 그저 (뜻대로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을 기술하는 말이 아니라, 유럽/서구를 진보와 인권의 필연적인 허브로 위치시키는 선형적인 전 지구적 진전의 서사를 통해 이 현실을 관리하고 통제할 특정한 담론적 수단을 대표한다. 이 서사는 유럽을 다시금 중심에 되돌리기 위해 계속해서 역사를 새로 써야 할 필요성을 낳으며 그럴 능력을 요구한다. 그 결과로, 지금 시점에 역사와 기억에 대해 헤게모니적인 담론을 만듦에 있어 식민의, 그리고 (국가) 사회주의의 유산을 억압한다.

이러한 시공간적 지식 관리 체제는 인종화된 인구들을 추방된displaced 이들이자 시대착오적인anachronistic 이들로 설정한다 ― 그들은 통과 중인 것으로, 다른 곳에서 와서 잠시 여기 있을 뿐 그들을 ‘받아 준 나라host nation’에는 아무 뿌리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이 중심이라 할 수 있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제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2차 세계대전, 파시즘, 스탈린주의 등 높이 살 수 없는 현실들도 포함하는 유럽성의 선형적 서사는 국경을 초월하지만 확고하게 내적 한계들 속에 머무는 정체성을 위한 기반으로서 구축되고 이용된다.

그런 서사는 유럽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분명한 분리를 요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그 서사의 일관성을 위협하는 긴장을 낳는 불가능한 임무다. 역사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긴장들은 비유럽성의 표지로서 인종과 종교를 중심으로 삼았다. 여기 있지만 진정으로 여기 속하지는 않는다는, 인종화된 공동체들의 시간적 유예는 비적소성out-of-placeness 또한 낳는다. 그들의 유럽 내에서 불안정한 위치로 인해 유색인 공동체들은, 극단적인 이동 결핍을 겪는 동시에, 이동의 과잉을 통해 규정된다. 그들을 영원한 이주민, 임시적 여건에 영구적으로 고착된 이들로 틀 짓는 담론은 장기적으로 머무는 데 관련한 권리들의 획득을 막으면서 그들을 배제하는 물적 조건들을 정당화하고 생산한다. 그들을 국가라는 큰 들에서의 공간/시간에 위치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양립불가능해 보이는 공간들, 정체성들의 체현은 그들을 삭제할 근거가 되지만, 또한 저항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들이 마주하는 구체적인 여러 가지 배제와 주변화에 대응해, 이주민 2, 3세대는 종종 유럽 바깥에서 기원하고 초국가적 디아스포라 담론들에서 유통되는, 힙합 문화에서 유색인 여성 페미니즘에 이르는 저항 및 분석 양식들을 가져오고 변용한다. 배제적인 시공간 구조들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 ― 비백인/비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 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대안적인 모델들로 리믹스된다.

그런 리믹싱은 인종화된 유럽인들의 예술과 행동주의에서 행해지는데, 그 시작은 1980년대 초 흑인음향영상집단Black Audio Film Collective의 실험적 작업이다 ― 아마도 가장 잘 표현된 것은 존 아콤프라John Akomfrah의 『역사의 마지막 천사The Last Angel of History』(1996)일 것이다. 아프로미래주의afrofuturism, 대서양 양안의 노예제라는 근본적인 추방에서 태어난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공존한다는 관점, 억압당한 자들의 전통은 예외상태란 실은 [상시적인] 규칙임을 알려준다고 주장하는 힙합과 발터 벤야민의 혼종적 기원들을 훌륭하게 연결 짓는 작업이다. 이 같은 행동주의적 리믹싱은 카나크어택Kanak Attak 등의 집단들에서 계속되면서, 진보하는 시공간을 구조 짓는 대립적인 이항 ― 동양/서구, 고대/현대, 시골/도시, 근본주의/계몽, 이슬람/유럽, 과거/미래 ― 사이에서 인종화된 유럽인들을 지우는 논리를 ― 반대항이라 상정되는 이것들 간의 불안정한 관계를 공격적으로 체현함으로써 ― 거부하고 있다. 물론 유럽 힙합 어디에나 리믹싱이 있다. 초지역적, 초민족적trans-ethnic 대항 담론을 통해 국가의 공간적 논리를 무화하면서.

유럽에서 식민주의, 인종주의, 이주의 특수한 역사들은 특히 흑인, 무슬림, 롬인 공동체들 사이의 교차와 중첩을 자아낸다. 그 결과 이들이 공유하는 (교외, 감옥, 구금시설, 도심 빈민 지구 등의) 공간, (힙합과 같은) 문화, 역사, (실은 유럽인이 아니라는) 위치성이 생겨난다. 이런 연결들은 각 집단 별로 다른 재현적 기능을 부여하는 지배적 (정책 생산) 담론에서는 억압된다. 무슬림은 이주가 가하는 내적인 위협, 이미 여기 와 있지만 영원히 이질적인 채로 남는 ‘타자’로 나타나는 한편 (흑인 유럽인을 포함하는) ‘아프리카인’은 아직 저기 국경에서 밀고 들어오는 중인 대인원, 유럽의 다윗을 쓰러뜨리려 위협하는 인구학적 (그리고 인종적) 골리앗을 표상한다 (널리 펴진 이런 식의 은유는 급격히 확장되는 중이자 갈수록 사유화되는 중인 미등록 이주민 대량 감금 체제와 합세해 EU 이주 체제 외접 국경에서 나타내는 엄청나게 높은 사망률을 정상화하는 데 기여한다). 마지막으로 롬인, 노예제와 인종학살을 포함해 유럽 대륙에서의 500년 역사가 있으며 유럽 유색인 소수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은 현 시대 유럽에서 인정 받는 존재로서는 완전히 부재함과 동시에 여전히 극단적인 폭력, 빈곤, 배제를 마주하고 있다. 다른, 즉 유럽이 아닌 지역에서 왔을 뿐 아니라 다른 시간에서, 유럽 대륙 민간 전승의 중심에 ‘집시’가 있는 데서 나타나듯 이상화된 유럽의 과거에서 온 것으로 틀지어진다.

이런 집단들에 대한 담론적 분리는 색맹성 이데올로기, 다공적인 경계를 허할 수 없으며 계속해서 뚜렷이 구분되고 동질적인 공동체들을 생산해야만 하는 그 이데올로기 속에서 유색인 공동체들의 ― 서로 간의 그리고 백인 유럽과의 ― 현존하는 교차가 어떻게 부정되는지를 보여주는 징후이다. 이런 체제가 낳는 특수한 배제 형식들은 항상 직접적일 수는 없는, 대신에 유럽의 깊숙이 인종화되어 있는 자아 감각을 둘러싼 침묵을 깨뜨릴 위치성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회, 탈정체화, 분기를 활용해야만 하는 저항 방법들을 요구한다. 이 같은 민족성의 ‘퀴어링’ 전략은 다민족 힙합 크루, 흑인·무슬림 페미니스트, 퀴어 퍼포머, 도시 게릴라 비디오 아티스트 등이 대륙 도처에서 실천하고 있다. 그 토대가 되는 것은, 수백만 명이 몸소 살아내고 있음에도 불가능하다고 선언되는 정체성을 체현하는 공통의 특유한 경험, 더없이 익숙한 모든 것에 대해 줄곧 이방인으로 규정되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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