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시간 되찾기 ― 흑인성과 풍경에 대하여 (제이슨 앨런-페이전, 2021)

원문: Jason Allen-Paisant, “Reclaiming Time: On Blackness and Landscape,” BAK, 2021. First appeared in PN Review 257 (2021).

나는 지금 왜 나무에 관해 이야기하려 하는가? 우선 나는 숲에 둘러싸여 자랐다. 자메이카 커피그로브Coffee Grove에서 농장지대, 동물들, 수풀에 둘러싸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렇다면 숲 속에 우두커니 서 있거나 조용히 숲을 산책하거나 가만히 숲을 바라보면서는 왜 한 번도 이런 충동을 느낀 적이 없단 말인가? 「‘나무’라는 말과 함께 숲을 걷기Walking with the Word ‘Tree’」라는 시에서도 말했듯 내 가족에게 자연이란 실용적인 것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농부였던 조무보님은 땅을 가꾸고 땅land이 내어주는 것을 기다렸으며, 생계를 흙earth과 연결된 것으로 여겼다. 광경을 관조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은 흙 속에 있었다. 무관의 환경주의자들이었다.

그러다 다섯 살이 된 나는 교사였던 어머니와 함께 시내에 가서 살게 되었다. 갑작스레 다른 생활 방식으로 떠밀렸다. 계속 “가난”했을지언정 적어도 이제는 소도시에 살았다. “수풀에서 빠져 나왔다”고는 해도 “사회적 지위 상승”을 하지는 못했고 이는 좌절스러운 일이었다. 빈곤은 갇혀 있다는 느낌feelings of enclosure을 주곤 한다. 나는 빈곤이란 무엇보다도 어떤 정동이라고 생각한다 (일용품이나 자원의 부재가 곧 빈곤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반은 시골스럽고 반은 도회적인 삶을 살았고 늘 시골스러운 것을 떨쳐버리고 싶었다. 시골스러운 것이란 빈곤의 지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시골스럽고 자연에 휘둘리는 생활양식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중산층 생활양식의 허울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예를 들면 … 한 해에 한 번씩 바다에 갔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자메이카에서 중산층이 된다는 것은 곧 자연의 힘을 등진다는 것이다. 중산층이라는 것은 자연적인 것, 숲, 그리고 ― 숲이 “두피duppy”, 그러니까 정령의 공간으로 그려지는 담이나 신화를 비롯해 ― “원시적인” 것과 연결되는 공간 일체와 거리를 둔다는 뜻이다.

아프리카인을 선조들의 관습에서 떼어놓으려 했던 것을 생각하면, 신세계의 흑인은 자연에 대한 식민적 인식론을 내면화하도록 강제된 셈이다. 예컨대 (약이나 다양한 치유술을 포함하는) 아프리카의 영적 수행들이 식민자들에게 의심스럽게 여겨졌다는 사실은 그렇잖아도 복잡했던 땅과의 관계를 한층 더 문제적으로 만들었다. 도시 공간은 진보의 터전이다. 자연은 도시가 아니라 시골에 속한다. 자연은 무질서요 “티끌dirt”이며 우리를 끌어내린다. 자연이 통제해야 하는 것, 심지어는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자연 없이 사는, 흙 대신 화학 약액을 쓰는 유토피아가 부상했던 19세기 유럽과도 연결되는 지점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섯 살부터 살았던 포루스 시내 사람들은 잔디밭을 엎고 앞마당을 포장해 버린다. 풀밭을 덮는 데 집착한다. 현대의 지위 구분은 굳건하다. 우리가 스스로와 자신 사이에서 경험하는 균열, 스스로와 자연 세계 사이에 거리를 두려는 욕망과 집착은 노예제와 식민주의에 뿌리 내리고 있다. 우리는 흙과 함께 사는 “열악한 상태poor condition”과 거리를 두려 애쓴다. 폭력과 범죄가 야외를 탐험하지 못하게 하므로 문제는 더 심해진다. 풍경과 풍경의 가능성들은 식민의 역사와 그 여파에 뿌리 내리고 있는 사회경제적 역학에 기반한다. 역사 ― 사회적 폭력의 과거와 현재 ― 는 자메이카의 숲을 여가의 장소에 지나지 않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를 자연과 떼어 놓는 깊은 사회적 균열 속에 살고 있다.

흑인성과 풍경의 문제는 복잡하다. 흑인의 몸에게 있어 산책은 단순한 일이 아니며 어둡고 장막이 드리운 곳을 산책한다는 것은 도통 무고한 행동이 되지 못한다.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집단 기억의 한켠에는 흑인의 몸이 사냥 당한 역사가 있다. 최근의 사건들이 보여주었듯 도시가 종종 흑인에게 위험한 공간이라고는 해도, 흑인의 상상력 속에서 비교적 안전한 장소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도시다. 문화이론가이자 시인인 프레드 모튼Fred Moten의 말대로 야외가 연상시키는 것은 여전히 “늘 도망쳐야 하고 실제로 달아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산책을 할 것인가? 어떻게 여가를 즐길 것인가? 우리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

공간적 인클로저를 생각하고 있다. 내 지난 경험과 갇혀 있다는 느낌은 얼마나 식민 이데올로기들, 역사들에 뿌리 내리고 있는가? 지금 내가 기획하고 있는 시작詩作은 인클로저를 (거슬러) 쓰기다.

시에서 좀 벗어난 딴소릴 했대도 이해해 주시기를. 내가 시에서 다루는 고민들을 강조해 두는 편이 좋을 듯했다.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던 중에 사진가 잉그리드 폴라드Ingrid Pollard의 작업을 만났다. 폴라드가 1980년대 후반에 찍고 전시한 사진 연작에 특히 흥미가 갔다. 폴라드가 1980년대에 씨름했던 문제들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목가적 간주Pastoral Interlude》에서 폴라드는 익숙한 장소들을 찍어서는 새로운 방식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든다. 무엇은 자연스럽고 무엇은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은지에 대한 관객의 감각을 갖고 놀면서 우리가 풍경의 이데올로기적 작용들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말하자면, 땅에 표식이 붙여진marked 방식들을 “독해하게” 하는 사진들이다.

첫 번째 사진에서는 아마도 작가 자신일 어느 흑인 여성이 돌담 위에 앉아 있다. 뒤로는 울타리가 언덕들이 굽이치는 풍경에 경계를 긋고 있다. 그녀는 흰색 점퍼를 걸치고 종아리 중간 께까지 오는 녹색 양말에 베이지색 바지를 넣어 입은 차림이다. 머리는 녹색 스카프로 감쌌다. 허벅지에 카메라를 올려 두고 앉은 그녀의 눈은 프레임 바깥의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뭔지는 몰라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사진에는 이런 문구가 달려 있다. “흑인의 경험은 마치 도시에서만 살아지는 듯 여겨지죠. 호수 지역Lake District이 좋았던 것 같아요. 흰색으로 넘실대는 바다의 유일한 검은 얼굴이 되어 외로이 떠돌았죠.”

“…이 되어 외로이 떠돌았다”라는 말로 윌리엄 워즈워스를 떠올리게 했다는 건 물론 분명하다. 워즈워스의 상징적인 시를 이처럼 아이러니하게 가져 옴으로써 작가는 걸어서 땅을 떠도는 일에 덧대어지는 낭만적 연상들 ― 여가, 느긋함, 자아 찾기 ― 에 도전한다. 그곳의 풍경 속에, 그리고 문화적으로 재현되는 잉글랜드 전원 지역에 그녀와 같은 몸들은 부재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화자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작가는 자신을 거기에 있기를 원하는 것으로, 호수 지역의 즐거움을 아는 것으로 (“호수지역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러나 동시에 “불편, 두려움 …”이라는 낯선 감각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한다. 말줄임표는 계속되는 의문, 왜 그런 불편감이 있으며 가시지 않는지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일종의 무능력을 시사한다.

워즈워스의 시는 휴식 ― “산들바람에 흔들거리며 춤추는” 수선화를 볼 수 있게 해주는 휴식, 그리고 그런 경험이 마음에 주는 휴식 ― 을 말한다. 반대로 사진 속 여성의 보디랭귀지는 내게 완전히 쉬는 듯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녀의 표정, 맞붙인 다리와 무릎은 어떤 긴장 상태를, 그녀가 이 환경에서 온전히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지는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한 인터뷰에서 폴라드는 영국의 시골지역, 그 신화들과 압도적인 백인성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된 개인적임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그냥 휴가요. 가족끼리 휴가를 몇 번 못 가봤는데 ― 수입이 그만큼 안 됐거든요 ― 캠핑을 몇 번 하긴 했어요. 부모님 집을 나와서는 친구들이랑 호수 지역에 종종 갔어요. 한 주 내내 흑인은 한 명도 못 보곤 했죠, 의식이 돼요. 힘들었어요. 백인 친구들은 여유를 즐기지만 제겐 불안이 일었죠. 저는 전원 지대를 좋아하지만 딱히 느긋해지진 않아요. 그냥 그것에 대해 무언가 하고 싶었어요.

*

내 책 『나무와 함께 생각하기Thinking with the Trees』(2021)는 풍경의 문화적, 지리적 의미들을 파고들면서 시간, 인종, 계급의 관점에서 흑인성과 자연을 고찰한다. 흑인의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환경적 조건들을 환기시키는 한편 우리에게 대안적인 미래들을 상상하라고 촉구하는 시들이다. 아이러니를 통해 언어를 무기로 삼는 카리브의 전통을 따르는 책이자 사회적, 인종적, 공간적 경계들에 도전하기 위해 그리 하는 책이다. 공유되고 구성되는 풍경 공간과 협상하면서 변화하는 나의 “정체성”을 반추하는 한편 영국의 풍경과 영국의 생활 방식들에 자메이카의 렌즈를 갖다 대는 책이다.

『나무와 함께 생각하기』는 공간적 배제는 문학의 영역으로도 넘어온다는 사실과 씨름한다. 출판인과 독자의 눈에 자연수필은 백인의 일이다. 그들은 흑인 자연수필가의 부족, 혹은 “부재”를 한탄한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흑인 작가들은 자연과 생태에 무관심한 것인가?” 하고 묻는다. 이 질문은 자연, 흑인 작가, 자연과 관계 맺는 인간에 관한 온갖 전제들, 경직된 관념들로 가득하다. 흑인성의 풍경의 관계에 관한 어떤 현실들을 알지 못하는 질문이다. 역사에, 풍경의 비민주적인 면에, 비백인적 상상에서 “자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무지한 질문이다.

*

시간을 살 수 있는 이들

골든 리트리버 세 마리와 함께
구름이 되어 외로이
떠도는 이 누구인가

나는 아니네, 나는 아니네
나는 끝내 이 시를 이해하지 못했노라

이 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적 없네
이것이 내게 대체 어떻게
시가 될 수 있는지도

영어 선생이 내게
백인 나라의 상상력을 가르쳤던 때

잘은 몰라도 어째선지 알았지
이렇게 떠도는 것은
내게 허락된 일이 아님을

왜냐하면
우리의 시간은 종류가 다르니까
우리는 그렇게 훌쩍 그렇게 남김없이
그렇게 자유로이 떠돌 수 없으니까

다가오는 것 없다는 듯 주위에 매 한 마리 없다는 듯이는
그 땅과 저택을 다 가진 듯이는
내일도 영원도 제 것인 듯이는

저들은 제 시간을 쓸 권리가 있다는 양 굴지
왜냐면
그들은 속속들이 그렇게 세련되고 그렇게 안전하고
그렇게 깨끗하니까

그러니 워즈워스의 시는 늘 의미불명
내가 쉼 없이 들은 시는 나무에,
버섯에, 이상한 귀여운 것들에, 새들에 관한 것
나는 아직도 이름을 발음할 줄 모르는

내 시는 우리 마을 디제이 톰Tom the Village deejay
내겐 그게 더 쓸 만했지
수풀보다도 빈둥대는 치들의 삶보다

아마도 돈으로 시간을
산 것일 테지
세상 모든 시간을 가진 치들

*

흑인성, 자연, 역사의 관계에 있어서는 몇 가지를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거두절미하고 말해보다. 첫째, 자연과의 관계를 가로막음으로써 (주거 관행) 식민주의는 세상을 알 방법들을 가로막는다 (지식 관행). 둘째, 식민성의 작동은 자연에 대한 통제에 기반한다. 셋째, 그러한 통제의 일부는 타자화된 (위험한, 제자리를 벗어난, 통제되어야 하는) 흑인의 몸에 대한 통제다.

흑인을 자연에 동화시키는 것은 식민성이 기능하는 데 핵심적이다. 그러나 이는 물론 역설적이다. 식민성의 역학은 흑인을 자연에 동화시키는 동시에 또한 그/녀를 그로부터 분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 실비아 윈터Sylvia Wynter의 지적대로 신세계에서 아프리카인 “자신은 대자연에 대한 기술적 정복을 가져 온 대농장 체제의 쟁기를 위한 소 역할을 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유럽 식민주의의 역사는 몸들과 땅에 대한 통제의 면에서 비슷한 논리를 드러낸다.

하지만, 신세계에서, 아프리카인의 존재는 “민간 전승과 민속 문화를 일굼으로써 대자연을 다시금 인간화했고 대농당 체제의 끊임 없는 맹공에 맞서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땅을 언제나 대지Earth로 여기는 아프리카 식의 이해, 이 같은 신념들과 태도들의 중핵은 “사회적 질서를 붙드는 중심 패턴”을 구성했다. 성스러운 제의들 (춤, 북을 치는 박자, 신들의 드라마를 쳘치는 가장, 접신 의식을 통한 여러가지 “접지earthing”) 을 통해 아프리카계 카리브해인들은 다른 시간성을 만들어 냈다. 그럼으로써 성스러운 것의 감각을, 공동체를 대지에 묶어주는 조상 대대로 이어진 유대에 대한 긍정을 유지했다. 이것이 사회적 죽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을 가능케 했다. “새로운 대자연과 씨름”하는 이러한 시도의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아이티 부두, 산테리아Santería, 오비아Obeah, 푸쿠미나Pukkumina, 오리샤Orishas, 샹고 침례교Shango Baptists, 라스타파리Rastafari 등 토대 없는 개인들을 낳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삶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여러 형태의 종교적sacred 실천이 있다.

하지만 이런 저항 형태들은, 대안적인 현실을 창조하고 조상들의 세계관을 이어가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고 해도, 노예제 시기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자연-문화 균열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생태학자 말콤 페르디난드Malcom Ferdinand의 말대로, 노예제 폭력의 한 측면은 “노예가 된 자들이 그들이 살고 일한 땅에 대한 책임에서 배제되는 것”이었다.

땅에 대한 우리의 관계, 대지와 관계 맺는 우리의 능력은 어떤 면에서 우리의 자유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 즉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 또한 규정한다. 문화 이론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지적한 바 있는, 어원상 “자연nature”의 “원주민native”과도 “민족nation”과도 연결된다는 점을 언급해 둘 만하다.

흑인이 땅에서 배제된 역사는 우리가 자연과 환경에 있어 흑인의 미래들을 생각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

흑인을 죽이는 경찰과 백인 경관들, 흑인의 분노와 울분, 그런 것들에 관해 쓰느라 한동안 바빴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가 그런 것들을 쓰고 생각하는 데에 쏟는 시간이 우리에게서 시간을 앗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일들에 대해 써야만 한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식민성, 인종주의, 인간성, 시간의 관계에 관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나를 내 작업과 그 중심 주제인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변화 과정을 관찰하는 것은 시간의 탈환과 연결되는 정치적 행위다. 인종주의가 우리를 오직 ― 상처에, 분노에, 도발에, 배제에 ― 반응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밀어넣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시간을 훔쳐가는 일,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실제 삶과의 연결성을 강도질해 가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무와 함께 생각하기』에 실은 시들은 내가 쓰는 시간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표현한 것이다. 흑인의 삶에서 시간의 혜택 ― 여가, 느긋함, 정신적·신체적 안녕 등 ― 을 무도하게 앗아가는 환경적 조건들을 만들어 내는 사회적 맥락 말이다.

나는 지금, 상상컨대 한때는 아주 멋졌을 어느 나무 아래 서 있다. 몸통이 길게 갈라졌지만 아직 살아 있는, 9월이면 말라 바스락거리게 될 푸른 잎을 틔운 나무다. 밑둥에는 빈 공간을 가로질러, 완전히 죽은 것 같아 보이면서도 또 생기 넘쳐 보이는 잘린 부위가 놓여 있다. 갈색은 바래어 거의 회색이 되었고 지나는 이들의 발걸음으로 흙먼지가 두텁게 쌓였지만, 감송과 굶주린 관목 사이에 떨어진 이 도막은 죽음 속에서도 생기 넘쳐 보인다.

스러지며 기르고
부서지며 푸르고
산딸기를 먹이는 그 숨과
딱정벌레 집이 되는 무르녹은
썩은 줄기

과정. 만물의 흥망성쇠가, 생의 감각에 내게 들어온다. 생의 일부로서의 자아의 감각이.

느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시간, 시간의 방어에 관한 이야기다. 흑인의 삶에서 시간을 앗아가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느려지는 능력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몸의 여기 있는 능력에 관한 이야기다. 내 몸의 숲 속에 있는 능력에 관한 이야기다. 사람들, 내가 그저 서 있다는 이유로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 말하면서 나를 보는, 내가 여기 서서 듣고 보기로 했다는 이유로, 내가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 내가 그저 서 있다는 이유로 ―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우리가 일해 왔음을 생각한다. 선조들은 일꾼이었음을, 그저 일꾼이었음을 생각한다. 콩고를, 겨우 한 사람이 벨기에의 여든 배 가까이 되는 땅을 독차지했음을 생각한다. 나와 같은 이들에게 요구된 노동의 잔인함을 생각한다. 느림을 생각한다. 시간의 탈환을 생각한다.

이것은 탈환에 관한 이야기다 중간-
계급 사람들이 여가라 부르는 것의.
이제야 깨닫는다 그것이 그리웠구나 지난
몇 년을

*

시란 삶과 깊디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이 우리 연결의 터전이다. 시를 통해, 그저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멈추고 듣고 관찰하고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시가 주는 선물이다. 인종주의의 목적은 줄곧 반응하는, 영향 받는, 상처 입는, 화 나는 삶이다. 시는 다른 시간 감각, 유용성과 축적과 탐욕과 맹목적 진보에 ― 요컨대 자본 축적 논리와 전쟁, 인종학상, 갖가지 인적 재앙을 낳는 부르주아 이상에 ― 물들지 않은 시간 감각을 선사한다. 시는 내게 깊은 시간에 대한 감각을 주었다. 다시 말해 전체성에 대한, 연결에 대한 감각을 주었다. 시는 시간의 탈환이다. 반응이 아니라, 연결의 탈환이다.

필연적으로, 숲 속의 장막이 드리운 숨겨진 공간에 있을 때의 내 불안과 불확실성을 전하는 시도 있다. 하지만 내가 틀림없이 거기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 역시 그런 시들이다.

*

태양이 나무들에 빛을 흩뿌린다. 드러난 나무 속살이 반짝인다. 저녁놀은 나를 꿰뚫고 나는 저녁놀 속으로 들어간다. 내 속에서 산 것들이 익어 간다. 초저녁부터 밤이 찾아오는 12월에 여기까지 오는 길은 고되다. 그러고 나면 보인다, 내가 살아 있다. 나는 살기 위해 태어났다. 온라인 달력으로 일정을 잡고 겹치지 않게 조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컴퓨터 앞에서 온종일을 보내라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되돌아 오는 슬픔이 하나 있다. 포루스에서 자란 어린 한 때의 슬픔. 내 가난이란 무엇이었나. 너무 작은 공간에 살고 그리 멀리는 가지 못하던 것이 아니었던가. 맹목적으로 생활에 매달려야 했던 빈곤, 언제야 해야 하는 일이 있었던 노예.

우리에겐 허투루 쓸 시간이 없었다
멀리 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저
집 뒤에 난
숲에 들어가는 것
하지만 거기엔 나를 가로막는 담이 있었다

*

흑인의 몸을, 여가, 안녕, 건강 등에 대한 특권 일체와 함께 언제나 땅 바깥에 위치시키는 것은 권력이 쓰는 서사의, 그리고 흑인 문화를 자유, 여가, 탈출의 “외부 공간들”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도시화된 공간 속에 있는 것으로 새겨 넣는 흑인성의 지리학을 조형하는 결정론의 핵심 요소다.

최근에 코로나 팬데믹 내내 드러난 갖가지 불평등은 땅(그리고 여가로서의 땅)으로부터의 과도한disproportionate 배제를 강렬하게 증명했다. 땅에의 불평등한 접근성이 (신체적, 정신적 건강과 안녕에) 미치는 치명적인 악영향은 더 이상 이론상의 문제가 아니다. 생생하리만치 확연한 권력 구조와 체현된 현실의 문제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모두가 “봉쇄 조치 하에” 놓인 와중에, 뒤뜰이든 대장원이든 자연 공간에의 접근성은 분명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벌어진 예외 상태에 “대처”할 능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뒷마당에 수백 에이커짜리 숲이 있는 중산층들이 사람들에게 나돌아 다니면 안 된다고 소리지르는 꼴에는 정말이지 흥미가 없다.
― 트위터 @SammilLouui

앞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카리브해,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에서 땅을 흑인들의 삶에 대한 무기로 삼았던 식민주의의 역사는, 땅으로부터 배제된 흑인들의 역사는, 우리가 자연과 환경에 있어 흑인의 미래들을 생각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자연에 있어 흑인의 미래는 반드시 시간과 다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바이다.

*

나는 이것이 예술을 통해, 집단적으로, 성취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술은 인종화된 사람들에게 바릴론과는 다른 공간 (분해되지 않는 [공간])을 제공한다. 우리에게 예술이란 필시 함께함, 공동체일 것이다. 인간임이 다시금 연결의 문제가 되는 길일 것이다. 체제로부터, 우리를 집어 삼키려 드는 자본주의 기계의 의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할 유의 의식을 중심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것이 흑인의 삶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들, 깊은 시간에 대한 우리 감각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의식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이는 연대가 필요함을 함의한다. 연대가 인간 세상 이상의 것에의 연결을 요한다면, 연대란 물론 우리 자신들 사이의 연결이기도 할 것이다.

참고문헌

Ferdinand, Malcom. Une écologie décoloniale: Penser l’écologie depuis le monde caribéen. Paris: Éditions du Seuil, 2019.

Pollard, Ingrid. “How She Had to Fight for Black Representation: Interview,” Elephant Magazine, no. 42 (Spring 2020): elephant.art/ingrid-pollard-fight-black-representation-glasgow-international-womens-library-lesbian-archive-photography-rural-landscape-britishness-07022020/#.XqgFNGJm23C.twitter.

Moten, Fred and Saidiya Hartman. “To Refuse That Which has been Refused to You” Chimurenga, 19 October 2018:chimurengachronic.co.za

Williams, Raymond. Keywords: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Wynter, Sylvia. “Jonkonnu in Jamaica: Topwards the Interpretation of Folk Dance as a Cultural Process” in We Must Learn to Sit Together and Talk About a Little Culture: Decolonizing Essays 1967–1984, 192–243. Leeds: Peepal Tree Press, forthcoming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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