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Kaite O’Reilly, “Cirpping the Crip ― Is It Time to Reclaim Richard Ⅲ?“, Howlround, 2018.
최근 들어 재현에 관한 논의들이 스크린, 연극 무대, 오페라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문화적 유산, 인종, 성별 정체성과 관련한 다양성 부족에 관한 논쟁이 특히 그렇다. 영국에서는 필리다 로이드 Phyllida Lloyd가 여성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셰익스피어 삼부작으로 찬사를 받고, 2015년에 맥신 피크Maxine Peake가 맨체스터 로열 익스체인지 극장에서 《햄릿》을 올리고, 글렌다 잭슨이 런던 올드 빅 극장에서 상연한 “너무나도 빼어난magnificent” 《리어 왕》으로 지난 해에 이브닝스탠다드연극상 최우수 여우상을 받으면서, 크로스젠더 캐스팅이 주류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다양성과 동등성을 반기는 수많은 말들이 오가는 중에도 여전히 간과되고 있는 영역이 하나 있다. 바로 신경다양성과 비전형적 몸 ― 그리고 장애 캐릭터를 연기하는 배우들 말이다.
2002년, 그라이아이 극단Graeae Theatre Company는 내게 《껍질 벗기기peeling》 집필을 의뢰했다. 농인 배우 한 명과 장애 여성 배우 두 명이 등장하는, 장애에 대한 우리 산업의 관계를 다룬 메타연극적 풍자극이다. 아카데미상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인물 하나가 자신과 같은 누군가, 그러니까 비전형적인 몸을 가진 여성을 흉내 내어 받은 상에 파묻힌 비장애 배우들을 보며 눈알을 굴린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장애인 흉내내기cripping up가 흑인 분장blacking up에 대한 21세기의 응답인 거야.” 그녀와 두 동료는 전문 배우인데도 “진짜 연극에, 진짜 배우들”처럼 오디션 초대를 받은 적이 없기에 더더욱 뼈아프다. 대신에 그들은 “기회 동등 점검표의 진보 란에 체크 표시되는” 코러스를 맡아 어둠 속에 남겨진다. “쉬는off” 시간에는 무대 배경 뒤쪽 공간에 있어야 한다. 접근성이 떨어져 분장실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껍질 벗기기》가 초연되고 16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뭔가 달라졌나?
국가 포트폴리오 조직 극단 6곳의 협업 네트워크로서 접근성과 통합성inclusivity을 창작 과정과 작품의 중심에 놓는 달나라 경사로Ramps on the Moon 같은 기획이 생기면서, 비로서 장애 퍼포머 캐스팅과 접근성 미학 활용의 정치적, 문화적 힘이 영국 연극계에도 스며들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한층 더 좋은 소식이 찾아 왔다. 노던 브로드사이드 극단에서 《리처드 3세》를 제작하면서 장애 아이콘 매트 프레이저Mat Fraser를 캐스팅한 것이다. 이 일이 기뻤던 것은 단지 대개 “장애인 흉내”가 되곤 하는 주연에 비전형적인 몸을 가진 배우를 캐스팅하는 중요한 결정이 내려져서가 아니라, 여러 기획에서 매트와 함께 작업한 사람으로서 그의 재능이 비통할 정도로 충분히 쓰이지 않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그가 엄청난 퍼포먼스 기술을 보여주고 과거에 리처드를 연기해 찬사를 받은 (비장애) 배우들의 성전에 자리를 가질 기회가 온 것이다. 프레이저의 퍼포먼스는 평단의 호평을 받았고, 나는 원작으로 돌아갔다.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그의” 리처드를 곱씹을수록, 신체적 차이와 재현에 관한 의문들 ― 사라지지 않을 의문들 ― 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나는 「장애에 차이에 관한 연극에서 다양한 목소리의 필요성」에서 우리 무대에 다양한 “목소리들”과 몸들이 필요하며, 서구 연극 정전에서 장애는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조건에 관한 은유로 쓰여 왔다고 쓴 바 있다. 신체적 차이가 온몸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대변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으며, 이는 그 중에서도 리처드 3세 캐릭터가 보여주는 사악함이라는 악의 전형에서 가장 여실히 드러난다.
권력을 좇아 계략을 꾸미고 살인을 저지르는 셰익스피어의 악역은 아마도 그 원본인 “악의 천재”를 재현한다. 1막 1장에서 셰익스피어는 리처드가 소시오패스적으로 행동하는 이유와 논리를 분명히 밝힌다.
나는 아무렇게나 만들어졌어. 흉물스럽고, 완성되기조차 전에 겨우 반만 만들어진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 어찌나 변변찮고 못났는지 내가 절뚝거리며 걷노라면 개들도 짖어댈 정도란 말이네.
그는 “방탕하게 놀아날 재주도 없고 / 거울 속 미남을 바라볼 주제도 못 되”기에 “사랑의 장엄함”을 누릴 길이 없다.
그리하여, 사랑에 빠진 이가 되지는 못할 터이니, 악당이 되기로 하였노라.
현대극에서 이 빗나간, 비통한 “뒤틀린 몸, 뒤틀린 정신” 비유는 인물과 서사로 가는 지름길 노릇을 한다. 연극인이자 장애 퍼포먼스 연구자인 빅토리아 앤 루이스의 「장애의 드라마투르기」[국역본]에 따르면 악을 나타내는 신체적 차이의 전형은 대중의 상상력에 너무도 깊이 새겨져 있어 극작 지침서에서 신출내기 작가에게 악당은 다리를 절게 하거나 사지 하나쯤이 절단된 것으로 해서 곧장 그 위험성이 드러나게 하라고 말할 정도다. 물론 셰익스피어의 노력을 그런 매문가를 위한 꼼수 쯤으로 취급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어쨌거나 그의 “끔찍한 … 흉물스러운, 절름발이에 곱사등이인 불구자”(토머스 오스터마이어 작 《리처드 3세》의 묘사)가 살인을 저지르고 타락하게 된 것은 신체적 손상의 직접적인 결과다.
연출가 토머스 오스터마이어는 2016년 《가디언》 인터뷰에서 샤우뷔네Schaubuhne 극장과 바비칸Barbican 극장에서 상연한 작업에서 자신의 해석을 이야기하면서 비장애 배우 라르스 아이디어가 가짜인 것이 다 보이는 혹, 목과 이에 찬 보조기, 확연한 절룩거림, 커다란 신발로 리처드의 신체적 차이를 과장할 필요가 있었다고 강조했다. “리처드에게 있어서 장애는 그의 고통, 그의 운명의 일부”라는 것이다. 얼마 전 캐시디 다운 그레이브스는 토머스 오스터마이어의 《리처드 3세》를 다룬 《하울링HowlRound》 기고문에서 그러한 묘사에 의문을 제기했다.
앤서니 셰어Anthony Sher도 『왕의 해The Year of the King』에서 비슷한 방향을 취한다. 1984년에 스트래트퍼드에 있는 왕립셰익스피어극장에서 《리처드 3세》를 창작하고 공연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자기 상담사와 상의한 끝에 셰어는 리처드의 “사악함”은 복수 행위로서, 어머니의 사랑이 없었던 것과, 그리고 그러한 애정 결핍이 자아낸 아픔, 자기 혐오, “자아감각” 결여와 직결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고통에 빠지는 장애 혹은 신체적 차이라는 이 같은 관념은 우리 연극 정전에 편재하며, 한 가지 커다란 오해를 가리킨다. 수많은 연극에서 장애가 나타나지만 작가 자신이 장애가 있거나 그런 관점에서 쓰여진 경우는 거의 없는데, 아마도 이 점이 장애에 대한 연극적 묘사가 왜 그렇게나 실제 경험과 다른지를 설명해 줄 것이다. 물론 자신이 특정한 조건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느끼는 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문화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장애인으로 정체화하는 이들 대다수가 꼭 자신이 “고통 받고” 있다거나 모종의 비극적 불행의 희생자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고통은 곧 복수”라는 등식은 극의 뗄감에 불씨를 댕기고, 일종의 심리적 “진실”로서 널리 활용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리처드 3세》라는 비극과 그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가게 된다.
작년에 매트 프레이저가 리처드 3세로 캐스팅된 것은 영국 연극에서 동등성과 대표성을 위한 투쟁의 중대한 이정표였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리처드가 얼마나 괴물 같은지를, 그리고 그가 실제 인물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얼마나 벗어나는지를 생각해 보자 ― 장애 배우가 왜곡된 장애 배역을 연기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무대 위의 다양성을 늘리는 일일 수는 있겠으나, “진정성 있는 캐스팅”이라 불리는 일이 대본이 차이에 대하 깔고 있는 문제적인 전제와 부정적인 연상에 도전하는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에게 21세기의 감수성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말도 안 되지만, 그리고 나는 정치적 올바름을 경계하지만, 《리처드 3세》에 대한 고민은 내게 한 가지 중요한 도전을 제기했다. 고전에서 문제적인 부분을 삭제하지도, 현재의 문화적·정치적 관점을 갖지 못했다고 고전을 비판하지도 않을 거라면, 연극을 만드는 이로서 나는 이 문제와,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너무나도 악랄한 《리처드 3세》와 어떻게 대화할 수 있을 것인가?
리처드를 되찾을 때인가, 아니면 불구를 다시금 불구화할 때인가? 《돌아온 리처드 3세 혹은 사라 비어는 리처드 3세이(지 않)다richard iii redux OR Sara Beer is/not Richard III》는 장애 배우이자 활동가인 사라 비어와 라나스 그룹Llanarth Group의 연출가인 필립 재릴리Phillip Zarrilli와 협업한 작품이다. 우리가 공동창작한 이 퍼포먼스는 아래와 같은 전제에 기반했다.
리처드 3세: 악귀 같은 사람Bogeyman. 악당. 악의 화신. 그런가? 그가 아니라 그녀라면? 이 “병 속의 거미”를 웃긴 사람, 여성, 페미니스트, 그리고 똑같이 척추측만증이 있는 사람이 연기한다면? 죽도록 웃긴 타이밍을 아는 장애 여배우가 탐색할 때 이야기가, 몸이, 연기가, 캐릭터가 어떻게 달라질까? 이전의 비장애 리처드들은 어떻게 느껴지게 될까?
연출이자 공동창작자인 필립 재릴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돌아온 리처드 3세》는 셰익스피어 연극 공연이 아니다. 오히려 리처드를 “등이 불거진 독두꺼비”, “흉측한, 만들다 만 … 악당”으로 (거짓되게) (잘못) 빚어낸 셰익스피어가 깔고 있었던 일련의 문제적인 가정과 전제를 두들겨 패고 뒤섞고 다시 살피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에는 “진짜” 리처드 3세에 대한 역사적 조사도 있었는데, 인기 있는 개혁적인 군주, 길었던 장미 전쟁(들)의 싸움에서 수천의 병사가 기꺼이 따랐던 용맹한 군주를 발견할 수 있었다. 2013년에 래스터의 한 주차장에서 그의 뼈가 발굴되어, 우리는 그가 실제로 일종의 척추측만증이 있는 장애인이기는 했지만 엘리자베스 시대 이래로 허구 속 그의 몸에 덧붙여져 온 것처럼 팔이 앙상하거나 다리를 절거나 곤봉발이거나 다른 신체 기형이 있지는 않았음을 알고 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고들 한다 ― 플랜태저넷가 최후의 왕 리처드 3세의 기록은 리처드가 죽임 당한 보즈워스 전투로 헨리 7세가 왕좌를 차지한 이후 신임 튜더 왕가의 평자들, 기록자들에 의해 더렵혀진 듯하다. 흥미롭게도, 셰익스피어가 괴물 같은 리처드를 만들어 낸 것은 힘 있는 후원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인신공격이자 튜더 프로파간다였다고 봄직한 강력한 증거가 있다.
이런 악마화하는 허구는 최근 들어 케빈 스페이시, 앤서니 셰어, 알 파치노, 라르스 아이딩거 같은 배우들의 연이은 “스타 작품star vehicle”이 리처드의 몸을 일그러뜨려 그를 한층 더 불쾌하게 만드는 속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 “타자화”를 해체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배역 해석, 그리고 그들의 다채롭고 종종 기발하기까지 한 보철장치 사용 또한 뜯어보게 되었다.
[《돌아온 리처드 3세》] 공연은 원우먼쇼이자 사라 비어가 리처드 3세를 리믹스하는 데 쓰는 여러 가지 대안적인 렌즈, 목소리, 역할의 모자이크이다. 모두가 장애인으로 정체화하는 극단으로서 우리는 장애 관점에서 작업한다. 그러나 불구 문화에 충실하다 ― 신나게 불경한 어조로, 믿음이 안 가는 서술자를 통해 연기, 차이, 중상모략 당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엮는다.
필립 재릴리가 쓴 여는 말은 이렇다.
내가 온 곳은 … 가장자리
어둔 그늘진 곳,
이제 여기 당신들 앞에 나와
내 것인 것을 되찾는다.
이 비뚤어진 모습을,
이 똑같은 몸을.
내가 빼앗긴 것이자
내 것이었던 그것을.
이것은 탈환이다. 사슬 갑옷을 입고서 당당하고 비뚤게 서서 이런 대사를 읊는 자그마한 여성에게는 또한 무언가 엄청나게 강력한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