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Léopold Lambert, “They Have Clocks, We Have Time: Introduction,” The Funambulist, Iss. 36, “They Have Clocks, We Have Time,” June, 2021.
[전략] 2014년 봄에, [중략] 건축의 무기화에 관한 내 작업을 잘 알고 있던 그녀[법학자 레니사 마와니Renisa Mawani]가 조언을 하나 했다. “레오폴드, 당신의 작업은 매우 흥미롭지만 당신은 공간을 너무 많이 생각해요. 시간도 생각하셔야 해요.” 솔직히 말하자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시간이 시간이지, 생각할 게 뭐가 있다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내게 새겨진 레니사의 말은, 모든 좋은 조언이 그렇듯, 내게 변화를 일으키는 만남을 할 채비를 시켰다. 그 만남이 벌어진 것은 두 해가 지나서, 칸디스 프리센Kandis Friesen이 내게 라시다 필립스Rasheedah Phillips의 작업과 흑인 양자 미래주의Black Quantum Futurism를 소개해 주면서였다. 그것을 계기로 이 지면에 그녀의 기고를 네 번이나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중심주의, 식민 지배, 시간적 저항과 관련한 나의 시간 이해는 전부가 지난 다섯 해 동안 그녀가 한 작업에서 배운 바를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그녀의 글 제18호(2018년 7-8월호)에 실은 그녀의 「주인의 시계/지도 박살내기Dismantling the Master’s Clock/Map」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발행한 글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 중 하나로 남아 있다 ― 많은 독자들 역시 감명 받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모든 지면을 시간에 할애한 이번 호에 글과 표지 미술 두 가지로 함께 해 주기로 한 것이 특히나 기쁘고 영광스럽다.
이번 호의 제목 “그들에겐 시계가 있고 우리에겐 시간이 있다”는 카나키Kanaky에서[1]역주: 프랑스의 자치령이며 뉴칼레도니아라는 영문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 누벨칼레도니를 가리킨다. 어원은 인구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 (계속) 몇 번인가 들어 본 표현(“Eux, ils ont des montres, nous, on a le temps”)이다. 여기서 기리고 싶은 말이다. 식민 지배 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이 있다”는 것은 언뜻 직관에 반하는 듯 보일 수 있다. 이를 다른 하나와 관련 지을 수 있다. 카나크인이자 뉴칼레도니아 의회 의장인 로크 와미탄Roch Wamytan이 말하는 시간적 삽입구temporal parenthesis로서의 식민주의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과 연관되는 이 두 관념을 식민 폭력을 겪고 있지 않은 우리가 내미는 것은 주제 넘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둑 맞은 땅의 알파요 오메가인 식민주의의 시간적 틀을 거부하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 없이 힘 있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 이와 관련한 일화를 잠깐 이야기 해보려 한다. 2018년, 반식민주의 활동가 몇 명이 파리에서 카나크 독립 투쟁에 연대하는 행사를 하나 조직했다. 끝날 무렵에 친구 하나와 나는 청중으로 참석한 어느 카나크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대화 중에 언젠가 친구가 그에게 몇 살이냐고 물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3,000살이요.” 선주민이 카나크 땅에서 살아 온 시간을 말한 것이다. 식민주의는 우리가 식민주의란 벗어날 수 없다고 믿기를 원한다. 하지만 선주민족의 시간을 통해, 심지어는 지정학적 시간을 통해서도, 시간을 사유하는 일은 식민주의를 훨씬 덜 그래 보이게 한다. 변함 없이 돌아가는 식민주의의 시계는 식민 권력을 위안하지만, 아일랜드와 팔레스타인에서 에밀리 자시르Emily Jacir가 보여주듯 그것의 최후는 그저 … 시간 문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라는 클리셰는 이런 역사 관념에 정치적으로 생산적인 전망을 주지 않는다. 역사를 책에 적히거나 비석에 새겨질 때 구현되는 회고적 서사로 개념화한다. 나는 (이 책에도 글을 실은) 메리엠-바히아 아르파우이Meryem-Bahia Arfaoui와 함께 일하면서 많은 것을, 특히 역사들은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해하든 하나의 집단으로 이해하든) 사람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식민 폭력은 역사를 쓰기보다는 역사들을 지운다는 것을 배웠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 열강에 납치된 아프리카인을 천이백만 명 넘게 대서양 건너로 끌고 간 중간 항로가 그 가장 분명한 예 중 하나다. (라시다 필립스가 종종 인용하는) 『시간의 식민화The Colonisation of Time』(2012)에서 조르다노 난니Giordano Nanni는 소위 “아메리카들”의 정착형 식민화에서부터 대서양 횡단 노예 무역에 이르는 대양을 건너는 여정들은 선박의 위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시간 장치들 덕에 비로소 가능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시간”이라 부르는 것은 공간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물리학의 개념인 연속체가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차원 위상 표면 ―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마그마로 표현하는 ― 을 상상해 보면 평소에는 무관해 보일 두 개의 공간-시간 결절 사이의 관계로서의 연속체를 알아볼 수 있다. 이것은 내가 근작 『비상사태: 프랑스 식민 연속체의 공간적 역사States of Emergency: A Spatial History of the French Colonial Continuum』(2021)에서 시도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 연구에서는는 알제리(1955-1962), 카나키(1985), 타히티(1987), 프랑스 여러 방리유(2005, 2015-2021) 등지에서 벌어진 프랑스 비상사태의 식민사를 반식민주의 봉기가 식민 폭력의 격화를 마주하는 공간-시간의 성좌로 이용해 프랑스 식민 연속체의 일각을 추적했다. 이 식민 연속체의 대표격인 시간은 늘일 수도 압축할 수도 있으며, (알제리 혁명 중의 1961년 10월 17일 같은) 하루나 (2005년 방리유 봉기 때의 10월 마지막 주 같은) 한 주도 한 해보다도 “길게 이어져” 보일 수 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우리는 또한 각 공간이 서로와 동시에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시간적 층위들(과거와 미래)의 무한성을 그려볼 수 있다. 우리가 제34호 《파리 코뮌과 세계The Paris Commune and the World》(2021년 3-4월호)에서 몽니스 H. 압달라Mogniss H. Abdallah, 하제르 벤 부베이커Hajer Ben Boubaker와 함께 만든, 파리 북동부 노동계급 지역에서 한 훈련이 그것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1871년 파리 코뮌부터 알제리 혁명, 보다 가까이는 반인종주의 조직화에 이르는 정치적 지질geology을 발굴했다. 이번 호에서 제안하는 것도 그것이다. 케빈 버나드 물트리 데이Kevin Bernard Moultrie Daye는 자신의 비정사영법extraorthographics을 샌프란시스코에 적용하고 미리엄 힐라위 아브라함Miriam Hilawi Abraham과 나스라 압둘라히Nasra Abdullahi는 아프리카의 뿔의 지각 변동과 시간적 규모들을 살핀다.
시간의 단일성과 직진성 모두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은 현실과 그 속에서의 정치 참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크게 바꿀 수 있다. 예컨대 “기억”이 과거의 경험이 아니라 현재의 경험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 관념은 급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홀로코스트의 집단기억을 1960년대 탈식민 운동의 집단기억과 한데 묶는 대화를 통해 마이클 로스버그Michael Rothberg와 함께 이를 제안할 것이다. 시마 타리크Syma Tariq는 인도 아대륙 분할과 관련해 정시성punctuality으로서의 사건 개념에 도전한다. 이 책이 “기억”과 “사건”에 더해 세 번째로 의문에 붙이는 시간 관련 개념은 “기다림”이다. 샤흐람 코스라비Shahram Khosravi와 함께, 카프카(『심판』)와 베케트(『고도를 기다리며』) 사이에서 권력을 가하는 수단으로서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는 일을, 그리고 또한 혁명적인 몸짓으로서의 기다림을 논할 것이다. 이번 호가 시간을 둘러싼, 그리고 그 적용에 관련되는 유럽중심적 헤게모니를 둘러싼 의문들을 배가하는 데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영감을 얻는 독서가 되기를 바란다.
주
↑1 | 역주: 프랑스의 자치령이며 뉴칼레도니아라는 영문명으로 잘 알려져 있는 누벨칼레도니를 가리킨다. 어원은 인구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멜라네시아계 선주민 민족의 이름인 카나크Kanak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