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젠더 팬데믹? (맥스 손튼, 2021)

원문: Max Thornton, “Gender Pandemic?”, 2021.

인용의 정치학을, 그리고 혐오 클릭이 만들어 내는 웹 트래픽이 돈이 되는 일을 유념해 이 글에서 논의되는 트랜스혐오적 발언을 직접 인용하거나 링크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몇 년간 트랜스혐오transphobia는 유행병적 전환을 맞았다. 비방하는 이들에 따르면 트랜스라는 것은 전염이요 바이러스이며 유행병이다. 안타깝게도 도덕적 타락이자 남성이 여성의 신체를 식민화하는 것이라는 유서 깊은 트랜스혐오 수사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트랜스 여성과 출생 시 남성으로 지정된assigned male at birth(AMAB) 다른 트랜스들을 겨냥한 트랜스여성혐오적transmisogynistic 공격이다. 최근에 출생 시 여성으로 지정된assigned female at birth(AFAB) 청소년들 사이에서 공개적인 트랜스 정체화가 늘면서 트랜스남성과 트랜스매스큘린을 정당성을 깎아 내릴 효과적인 방법을 찾는 트랜스혐오의 혁신이 이어졌다. 이제는, 무책임한 소셜 미디어 인플루언서들이 외부의 영향에 취약한 어린 AFAB들에게 트랜스성이라는 역병을 퍼뜨리고 있다고들 말한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들이 쓸 수 있는 모든 예방 조치도 소용 없을지 모를 젠더 팬데믹이라는 것이다. 젠더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막는 백신만 있었다면!

여러 트랜스 학자들이 그렇듯 나도 이 수사학을 주의 깊게 살펴 왔다. 어떤 유사과학 연구가 “조기발현성 젠더 불쾌감rapid-onset gender dysphoria”, 약칭 ROGD라는 용어를 들고 나온 2018년부터다. ROGD는 전에는 예상치 못했던 트랜스 정체화 ― 부모에게 커밍아웃하기라고도 부르는 ― 의, 아마도 충격적일 등장을 가리킨다. 해당 연구는 금세 철회되었고 속속들이 반박 당했다. 하지만 순수한, 자연스러운 지정 젠더가 트랜스성이라는 전염성 정신-바이러스로 인해 쉽사리 변질될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이상하게도 사라지지 않고 회자되고 있다. 트랜스혐오자들이 유행병 이미지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타당한 고찰 같아 보이는 포장 속에 두 가지 지극히 의심스런 ― 트랜스는 전염성이 있으며 트랜스라는 것은 유해하다는 ― 전제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트랜스라는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지겹도록 반복해 말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진짜 팬데믹의 등장으로, 우리에게 장애 정치학에 근거한 응답이 필요하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전염은 가볍게 들먹여서도 무시해서도 안 될 일이다.

여러 면에서, 트랜스임은 곧 병이라는 생각을 논박하는 것이 중요하다. 퀴어함의 탈병리화는 동성애란 자연스럽고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이형이라는 관념을 펼친 마그누스 히르쉬펠트의 세기말 연구에서부터 『정신질환진단통계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DSM)을 개혁하려는 지금도 계속되는 노력에 이르기까지 백 년도 넘게 이어진 작업이다. 사회적, 성적, 심리적 건강을 위해 퀴어는 반드시 우리의 몸과 삶에 대해 공개적이고 수치심 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의학이 선별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는 통에 트랜스의 의료 접근성에 엄청난 장벽이 생기고 있다. 빈곤하고/거나 장애가 있고/거나 다른 식으로 주변화되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퀴어함 자체를 시설에 집어 넣을 이유로 취급하는 관행을 완전히 과거로 여길 수 있기를 바라기에는 확실히 아직 이르다. 시스이성애주의cisheterosexism를 뒤흔들고 퀴어와 트랜스의 해방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퀴어함에 대한 낙인을 없애야 한다.

하지만 트랜스의 병리화에 저항하는 데에는 두 가지 큰 위험이 있다. 첫째는 역사적 망각의 위험이다. 우리가 아는 젠더라는 개념은 자본주의의 강제적 정상신체성이 추동하는 의료의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십 세기 중엽의 의사들은 특이한 ― 인터섹스, 트랜스, 퀴어인 ― 몸들을 사회에 동화될 수 있게 만들어 길들이고자 했다. 우리에게 “젠더 정체성” 같은 개념을 가져다 준 이들의 길잡이가 된 질문은 어떻게 트랜스의 번성과 퀴어의 해방을 앞당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시민을 요하는 사회적, 경제적, 성적 규범들의 교란을 막을 것인가였다. 건강, 능력ability, 노동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젠더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 트랜스 탈병리화의 두 번째 위험이 놓여 있다. 바로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정상신체중심주의ableism라는 토대다. 피상적으로는 “나는 미친 게 아니라 트랜스젠더야!” 같은 말로 트랜스를 옹호하는 것이 설득력 있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신 질환에 더한 낙인을 가함으로써 트랜스의 낙인을 없애려는 시도는 지는 패다. 애초에 젠더가 의료적으로, 자본주의의 정의definitions와 명령에 맞는 능력을 갖게abled 만듦으로써 무도한 몸들을 규율하는 형태로, 개념화되게 만든 바로 그 논리에 굴복하는 일이다. 정상신체중심적 사회의 부당한 우선순위를 용인하는 일이자 암묵적으로 “내가 정말로 미쳤다면 당신이 나를 부당하게 대우해도 된다”고 말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신질환이 있는 트랜스를 포함해) 정신질환인들을 제물 삼아 사회적 지배 위계에서 (정신질환이 없는) 트랜스의 자리를 다지는, 결국 우리 모두가 더욱더 분열되고 정복되게 하는 일이다. 우리의 동지가 될 이들을 배반하는 일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애를 부정함으로써 트랜스의 정당성을 공고히 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장애를 끌어안기를 제안한다. 장애와 트랜스성은 사실 공통점이 매우 많다. 트랜스성은 장애와 마찬가지로 복잡하고 고도의 내적 다양성이 있는 체현이다. 많은 트랜스가 많은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다. 사회가 가르치는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동시에 종종 고통을 덜어줄 방식으로 몸을 바꾸려고 하면서 말이다. 많은 트랜스가 많은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지하는 바로 그 보건의료 제공자들의 차별과 부당대우를 마주하면서도 절박하게 의료를 필요로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안다. 그리고 물론, 많은 트랜스가 장애인이다. 장애와 트랜스성의 연결성을 끌어안는 것은 우리 정치 투쟁의 연합적이고 변혁적인 가능성들을 확장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정상신체중심주의의 반사상이 아니라 장애-트랜스 연대와 함께 트랜스혐오와 싸울 수 있을까? 트랜스혐오자들이 트랜스라는 것은 정신 질환이라고 일축할 때 우리는 “정신 질환”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들, 묵살되고 폐기될 수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범주로 쓰는 데에 맞설 수 있을까? 트랜스혐오자들이 트랜스젠더 전염을 염려하는 척하며 분란을 일으킬 때 우리는 그 바탕이 되는 몸의 투과성과 불안정성에 대한 공포를 논할 수 있을까? 맘 먹고 우리를 폄하하는 이들을 설득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몸의 자율성, 트랜스·장애인 해방, 모두에게 보다 살 만한 세상이라는 우리 공통의 목표가 우리를 단결케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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