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Nana Adusei-Poku, “Ⅶ. Post-Post-Black?”, Taking Stakes in the Unknown: Tracing Post-Black Art, transcript Verlag, 2021. 책의 결론부다. 앞은 아직 읽지 않았다. 2016년에 《NKA: 동시대 아프리카 미술 저널》에도 같은 제목의 글이 실린 바 있는데 이 글 역시 확인하지 못했다. 역주는 〔, 〕로 표시했다.
포스트포스트블랙Post-Post-Black?
도통 내 정체성의 다른 측면을 억압해서 나의 어느 한 측면이 득을 볼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오드리 로드, 1983)
전시 《프리스타일Freestyle》은 한 세대의 작가들을 정의하려는 시도였는데, 다른 프로젝트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새로운 용어에 따라 특정한 예술 실천들을 정전화하고 틀 지으려 했다. 예컨대 “제도 비판institutional critique” 개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때로 미술에 대한 이해를 제한할 수 있는, 생산된 작업들을 충분히 다루는 일은 거의 없는 방식이다 (Graw, 2005). “제도 비판”과 달리 포스트블랙post-black이라는 용어는 본질적으로 정체성 정치와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흑인 미술Black art이 광의의 미술 담론들과 미술 시장에서 새로운 종류의 인정을 얻고자 하는 욕망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그 적용을 복잡하게 만든다. 민족에 근거한 시선ethnic gaze에 반발하면서도 동일한 제약을 공시적으로 생산하기 때문이다.[1]리건Ligon과 함께 이 용어를 만든 델마 골든Thelma Golden은 이 모순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Golden 2001, 14). 〔Thelma Golden. 2001. “Post…” In Freestyle: The … (계속) 그런 점에서 《프리스타일》은, 예술적 실천보다는 인종적, 문화적 기표들을 둘러싸고 조직되었던 19세기 전시들의 복잡한 역사와 관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스타일》은 흑인 미술을 어떻게 전시할지에 관한 새로운 표준을 수립했으며 개별 실천들에 주목하고, 한 가지 형식이나 스타일, 주제를 고집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생산되고 있는 스타일들의 과잉을 포용하며, 무엇보다도 젊은 세대 예술가들에게 유의미한 플랫폼을 제공한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포스트블랙이라는 용어는 다중주의적multiplicist이며 다양한 뉘앙스를 지니며 속박되지 않은 흑인성, 흑인성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과도한 폭력과 구조적 억압에서 해방된 흑인성을 상상코자 하는 수백 년 된 욕망을 되풀이한다. 포스트블랙 미술은 예술계에서 흑인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혼종적 공간을 인정하고 창조했다.[2]Hall 1996, 471 참조. 〔Stuart Hall, 1996. “What Is This ‘black’ in Black Popular Culture?” In Stuart Hall: Critical Dialogues in Cultural Studies, edited by David Morley and Kuan-Hsing … (계속) 이 책에서 분석은 마크 브래드포드Marc Bradford, 레슬리 휴잇Leslie Hewitt, 필립 메츠Philip Metz, 미칼렌 토머스Mickalene Thomas, 행크 윌리스 토머스Hank Willis Thomas의 작업은 제각기 흑인성에 대한 감수성과 이 세상에서 아프리카계 후손이 인간으로서 존재할 길을 열었으며, 이는 그것이 그 자체로 존립하는 패러다임이 아님을 역설한다. 이 작가들의 성취란 이상적인 흑인성이나 흑인의 본질이란 없다는, 그리고 정체성은 궁극적인 원본 없이 영원히 유동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일이다. [185] 남는 문제는 이 혼종적 공간이 정치적 공간인가 하는 것, 아니면 그것이 다중성들의 다중성에 내재하는 상이한 차이의 잠재력을 큰 틀에서의 지속적인 영향력이 없는 한낱 유행이나 현상으로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개성 관념을 재기입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용어의 모호한 구획은 제도적 인종주의를 넘어선다고 주장하고 바로 그 구조를 재생산함으로써 흑인 작가들의 성취를 약화시킬 크나큰 위험을 안고 있다.
포스트블랙은 비평가, 큐레이터, 갤러리스트, 콜렉터, 미술사가, 학예사에게서 그저 피부색으로 일축되기를 원치 않은 흑인 작가들을 위한 공간을 열어두고자 하는 비판적인 용어로 설명되었다. 그 우산 아래서 전시를 연 작가들이 할렘 르네상스와 흑인미술운동에 관심이 적거나 그 영향을 적게 받았다는, 혹은 그들의 작품이 흑인성이나 인종적 불평등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포스트블랙은 흑인 작가와 그들의 작업에 다가가고 그것을 읽어낼 방법론의 전환을 요청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포스트블랙은 보편적이고 숭고한 것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관념과 작가의 선택은 언제나 그들의 고유하고 흔들림 없는 개성에 따른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고 주장해 왔다.
윌리스 토머스의 작업 《이름없는/낙인없는: 1968-2008 미국 흑인 기업에 대한 고찰Unbranded: Ref lections on Black Corporate America 1968-2008》은 자본주의와 흑인성의 깊은 얽힘을, 그리고 흑인임을 정적이고 단선적인 정체성으로도 문화적으로 생산된 것이 아니라 아무튼 “자연적”인 것으로도 간주하지 않는 흑인성 관념에의 욕망을 강조한다. 휴잇의 《실시간 리프Reiffs on Realtime》과 브래드포드의 《새로운 검둥이 드나들기Enter and Exit the New Negro》에서는 작품을 분석하는 개인의 여러 위치성간의 상호작용이, 작업에 겹겹의 의미를 집어 넣어 흑인성에 의미를 부여하는 여러 층위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작가 특유의 소재 활용과 만난다. 토머스의 《풀밭 위의 점식 식사: 세 흑인 여성Thomas’s Les dejeuner sur l’herbe: Trois Femmes Noir》을 다룬 장에서는 모든 예술은 이론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젠더와 흑인성의 교차는 물론) 흑인성을 조성하는 이론적 담론들과 예술을 조성하는 담론들 간의 대화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흑인성을 복잡하게 만드는 이러한 렌즈는 합중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독일의 메츠와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은, 그의 작업 《내가그랬더라면Iwhishiwas》에서 볼 수 있듯, 흑인성이 구체화되는articulated 여러 방식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그 방식들을 확장하기도 한다. 이 사례들 각각은 결국, 코벤 머서Kobena Mercer의 말을 쓰자면 디아스포라의 대화술Dialogics of Diaspora을 제대로 대하기 위해서, 미술 분석의 참조점들이 확장되어야만 함을 뜻한다.[3]Mercer 2012 참조. 〔Kobena Mercer. 2012. “Art History and the Dialogics of Diaspora.” Small Axe 16 (2 38): 213–27.〕
처음 나왔을 때는 잠재력 있고 유망했지만, 2001년으로부터 19년이 지난 지금 포스트블랙은 논의에서 사라져 버렸다. 최초의 《프리스타일》 전을 둘러쌌던 불씨는 사위었고 버락 오마바의 2007년 선거운동과 함께했던 희망은 오바마 연임 후 2016년에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절망감으로 바뀌어버렸다.[4]2008년에 찾아온 1930년대 이래 합중국 최대의 경제 위기는 권력 대표의 전환점이 된 버락 오바마 출마 및 합중국 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정부 출범과 … (계속) [185] 포스트블랙이라는 말이 담론에 들어오고 4년이 지난 시점에 퍼포먼스 이론가이자 작가인 말리크 게인스Malik Gaines는 《주파수Frequnecy》 도록에서 이 용어가 무례하게도 민권 운동의 정치적 성취를 묵살하는 것으로든 신임 큐레이터를 위한 마케팅 전략으로서든 모호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리스타일》(2001), 《주파수》(2005), 《흐름Flow》(2008)을 비롯해 신진 작가들의 “F” 시리즈를 이어 로렌 헤인즈Lauren Haynes, 나이마 J. 키스Naima J. Keith, 토머스 J. 랙스Thomas J. Lax의 공동 조직으로 열린 《앞Fore》(2012-2013)은 포스트블랙 미술을 언급하는 대신 작가들의 다양한 표현 수단과 함께 그들의 생년(1971-1987)을 강조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포스트블랙이라는 용어는 이미 대화에서 사라졌다. 심지어는 골든이 여전히 키를 잡고 있는 할렘 스튜디오미술관Studio Museum in Harlem에서마저도.
대신, 2012년 비무장 청소년 열일곱 살 트레이본 마틴Trayvon Martin의 피살로 촉발된 또 하나의 커다란 전환이 합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플로리다에서 마을 방범대로 활동하던 민간인 자경단원 조지 짐머만의 소행이었다. 짐머만은 이후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나 자기방어를 주장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합중국 법무부에서 민권법 위반 여부를 조사했으나 “증거 부족”으로 추가 기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짐머만의 무죄 선고에 대응해 급진적 흑인 조직가 세 명 ― 알리샤 가르자Alicia Garza, 패트리스 쿨러스Patrisse Cullors, 오팔 토메티Opal Tometi ― 은 #흑인의생명은중요하다#BlackLivesMatter라는 흑인 중심 정치 운동 기획을 개시했다. 짐머만의 무죄를 선고 받은 즈음에 레키아 보이드Rekia Boyd가 살해되었고(시카고, 2012) 얼마 후 마이크 브라운Mike Brown(퍼거슨, 2014), 에릭 가너Eric Garner(뉴욕, 2014), 타미르 라이스Tamir Rice(클리블랜드, 2014), 타니샤 앤더슨Tanisha Anderson(클리블랜드, 2015), 샌드라 블랜드Sandra Bland(텍사스, 2015), 미아 홀Mya Hall(볼티모어, 2015), 월터 스콧Walter Scott(노스찰스턴, 2015)이 살해되었으며 이외에도 많은 이들이 어떤 죄목으로도 기소되지 않은 (근무 중인 경우도 아닌 경우도 있었던) 백인 경관, 백인 자경단, 우월주의자들에게 살해되었다. 이런 살인에 연루된 경찰들은 대개 잠깐의 정직 후에 임무에 복귀하거나 세상에 돌아 왔다. 이런 범죄들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촬영되어 일종의 대중적 목격을 이루는, 그리하여 흑인의 죽음을 스펙터클로 만드는 일이 늘고 있다. [186] 한편, 흑인 트랜스 남성Trans-men과 여성Womxn은 주변화되고 있다. 퍼거슨의 사례에서처럼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해시태그 공유로 시작된 일은 금세 맹렬한 시위가 되었으며 시위대는 최루가스와 고무탄으로 무장한 군사화된 경찰에 두들겨 맞았다.
브라운 살해와 이어진 퍼거슨 시위는 흑인에 대한 경찰 폭력에 관한 대화를 전국적인 대화로 끌어올렸다. 퍼거슨의 광장에서 젊은 흑인 활동가들, 조직가들은 경찰이 시위대에게 악랄하게 반격하는데도 굴하지 않고 경찰의 잔혹 행위에 맞선 강력한 저항을 구축했으며 전국적, 국제적 지지를 모았다. 흑인의생명은중요하다는 계속되는 전 지구적 기획으로 발전해 호주, 캐나다, 덴마크, 독일, 일본, 뉴질랜드, 영국에서 (모든) 흑인에 대한 체제의 폭력에 맞선 싸움을 지지하는 시위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현대 합중국 안팎에 40개 지부를 두고 있으며 대중 시위와 함께 의식 고양에도 힘쓰고 있다.[5]”Black Lives Matter” 2020 참조. 〔“Black Lives Matter.” 2020. https://blacklivesmatter.com〕
반흑인 인종주의 및 폭력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면서 예술도 변화했다. 흑인이 자신의 가치와 존재의 중요성을 주장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우고 조직해야만 하는 분위기 속에서, “포스트블랙”이라는 관념은 과오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F” 시리즈는 “동시대 미술은 그 위치, 시간, 역사적 맥락에 깊이 얽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다른 유형의 탐구로 진화했다 (Studio Museum in Harlem 2012). 2015년, 스튜디오미술관은 아만다 헌트Amanda Hunt가 조직한 전시 《어떤 성좌A constellation》 전을 열었다. 2015년 11월 12일부터 이듬해 3월 6일까지 열린 이 전시에 헌트는 스튜디오미술관 영구 소장품 수장고에서 여덟 작가를 불러냈다. 20세기 중후반에, 앞 세대가 탐구했던 인종, 신체, 계급을 둘러싼 문제들을 계속해서 논한 젊은 작가들과 함께 등장한 이들이었다. 그리하여 2015년은, 2001년에 가능했던 깊으면서도 혁신적인 전환을 제안하는 대신, 이 주제를 다룸에 있어 훨씬 미묘한 세대 사이에서의 접근을 보였다. 헌트의 글 두 번째 단락에서는 인종, 신체, 계급이라는 주제를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이 역력히 드러났다.
우리는 매체에서나 사적 대화에서나 이런 주제에 관한 전국적인 대화에 있어 특히나 위태로운 순간을 지나고 있다. 갖가지 복잡한, 수백 년 묵은 질문들이 흑인 민족주의의 탄생과 민권 운동 이래로 해소되었다고 생각할 이도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실상, 우리는 이제 겨우 우리의 집단적 역사를 풀어내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 전시는 정체성과 실존을 둘러싼 탐구에 내재하는 심대한 복잡성과 미묘함에 대한 다가적 접근법들을 제시한다. (Studio Museum in Harlem, 2015)
헌트는 “수백 년 묵은 질문들이 해소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말을 걺으로써 포스트인종을 둘러싼 논쟁을 넌지시 언급할 뿐이지만, 집단적 역사를 꾸준히 풀어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는다. 제도와 체제의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그녀는 동시대 미술가들이 과거에서 영감을 끌어내는 방식과 같은 미술사적 형태를 다루려 하는 논의 쪽에 초점을 맞춘다.
할렘 스튜디오미술관 건립으로 이어진 문화사는, 계속되고 있는 체제적이고 과도한 폭력과 깊이 얽혀 있다. 그 폭력이 트레이본 마틴 살해 이후 공적 담론에서 다시 한 번 논의되고 있기에 이 미술관 설립을 잠시 짚어보려 한다. 1969년의 미술관 건립은 합중국의 풍경에서 벌어졌던 또 하나의 인종적 부정의의 물결,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합중국 여러 도시에서의 “인종적 무질서racial disorder”라고 불렀던 일의 결과였다. 1967년, 시민무질서국가자문위원회National Advisory Commission on Civil Disorders에는 1월부터 9월까지 120개가 넘는 도시의 “소수자” 거주구역 ―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구역 ― 에서의 소요가 보고되었다. 이 같은 불안상태의 불을 댕긴 것은 대개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도한 폭력이었다. 마찬가지로 할렘의 “도시 위기Urban Crisis”도 흑인 미국인에 대한 끈질긴 폭력의 결과였으며,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64년에 백인 경관이 15세 비무장 청소년 제임스 파월을 살해하면서 촉발된 것이었다. 사회학자 케네스 B. 클라크Kenneth B. Clark는 이 봉기와 그것을 범죄시하는 언론에 응수해 이 일은 그저 범죄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로서 검토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이 말은 2020년에도 여전히 절절하다. 아내인 메이미 클라크Mamie Clark와 함께 1954년 학교 인종분리 철폐로 이어진 대법원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s. Board of Education 재판에 기여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진 클라크는 이 사회 구성의 중심에는 “실존하고 또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만성화된 매일의 폭력”이 있다고 지적했다. 1962년, 클라크는 할렘청년에게무한한기회를Harlem Youth Opportunities Unlimited (HARYOU)이라는 기획을 창립했다. 할렘 청년들을 위한 교육, 고용 기회를 지원할 풀뿌리 공동체 인프라를 만드는 데 전념한 단체로, 공동체 행동, 교육, 고용, 특별 프로그램, 예술·문화 등 다섯 개 하위분과를 두고 있었다 (K. B. Clark 1964). “게토 청년: 무력함의 결과와 변화를 위한 청사진에 대한 연구Youth in the Ghetto: A study of the consequences of powerlessness and a blueprint for change”를 위한 모금에 처음에 23만 달러가 모였고, 이어 연방 기금에서 백만 달러, 뉴욕시 반빈곤 기금에서 350만 달러를 지원했다. 노동부도 스태프 교육 및 배치에 5백만 달러를 지원했다 (Cahan 2016, 17). 백인 경관들이 흑인의 조직화와 힘돋우기에 깊은 의심과 공포를 품었던 탓에 HARYOU는 처음부터 뉴욕시경 지능범죄부의 감시를 받았다 (Mendez 2018).
1945년부터 1971년까지 할렘 지역구 하원의원을 지낸 애덤 클레이튼 파월이 이미 정부 지원을 받는 청년 프로그램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터였다. 1962년에 정치적으로 자기 편인 이들을 설득해 공동체팀연합Associated Community Teams (ACT)을 만들었던 것이다 〔원문에는 “Teams가 아닌 “Act”로 되어 있음〕. HARYOU와 ACT는 1964년에 합병했는데, 파월을 할렘의 흑인 공동체에 대한 체제적 폭력의 핵심 요인 중 하나로 여겼던 클라크는 이를 크게 주저했다. [188] 클라크는 파월이 이 조직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하고 프로그램은 유명무실하게 만들 것을 두려워 했다. 합병 결과, 클라크는 사임하고 청년 기획들의 유요성을 조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Matlin 2013, 102–7). 미술사가 수전 캐헌Susan Cahan은 HARYOU-ACT의 예술, 문화 프로그램이 십대 수천 명의 요구에 부응해 삶을 바꾸는 경험을 가능케 했다고 쓴다. 『짓누르는 불안Mounting Frustrations』라는 1960년대 미술관 연구서에서는 할렘 스튜디오미술관 설립을 위한 정치적 옹호가 그 지역 라틴계 및 흑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 앞다툰 백인 정치가들과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를 강조하기도 한다. 로메르 비어든Romare Bearde 같은 할렘 예술계를 이끈 인물들이 새 미술관 이사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Cahan 2016, 19–21). 1967년 할렘 봉기와 스튜디오미술관 설립을 비롯한 정부 지원 프로그램을 통한 백인 정치가들의 할렘 진출이 계보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 정치가들은 이 지역에 대해 더 강한 통제력을 얻으려 했을 뿐 아니라 갈수록 주류가 되어 가던 민권 운동을 의식해 “선의”를 증명하고 싶어 했다. 이에 더해, 할렘 스튜디오미술관 설립은 뉴욕시 미술관들이 “평소에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전시와 소장에 있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미술가들을 대개 배제하면서 말이다. 커핸이 이중 체계라 부르는 이런 방식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근 몇십 년 간 많은 유색인 미술가들이 대형 미술관에서 전시 기회를 얻었으며 그 중 일부는 작품이 소장되기도 했다. […] 유색인 미술가를 섭외하는 상업 갤러리는 더 많다. 하지만 1970년대 이래 가장 의미심장한 변화는 완전한 통합이나 평등이 아니라 문화 기관들의 이중 체계 개발이다. 한쪽은 “주류”이고, 한쪽은 “문화적으로 특수한”. 이런 새로운 평형상태 속에서, 문화 기반의 많은 기관들이 대형미술관에의 공급처가 되었지만 차등 대우 패턴은 상존하고 있다. 두드러지는 몇몇 예를 제외하면, 대형 미술관에서 유색인 미술가의 작업을 보이는 일은 ― 민족성 및 정체성 기반 전시에서부터 “다른other” 미술사들까지, “작가가 〔소장품 중에서 전시 작품을〕 선택”하는 큐레이토리얼 개입에서부터 공공 서비스 기획까지 ― 큐레이토리얼 경향에 종속되고 있다 (Cahan 2016, 11).
비영리 조직으로서 할렘 스튜디오미술관은 체제의 배제 형식들을 협력 큐레이터 레거시 러셀Legacy Russel이 제안한 《급진적 열람실Radical Reading Room》(2019.05.03-10.27.) 같은 전시나 프로그래밍을 통해 간접적으로 다루는 쪽을 택해 왔다. 미술과 큐레이팅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육성하고 (예컨대 켈리 존스Kellie Jones가 기획한 《에너지/실험: 1964-1980년간 흑인 미술가와 추상》 전을 통해) 흑인미술사의 미술사적 경로들을 위한 인큐베이터 역할을 한다. 이런 기획들은 중요한 흑인 기획들을 끌어올릴 뿐 아니라 그것을 폭넓은 스펙트럼의 미술 시장과 미술관, 잡지, 학교 등 ― 스태프 및 전속 작가를 다양화하려 노력 중인 ― 관련 기관들에 되먹임한다. [189] 본관 건물을 확장하고 그로써 프로그램과 입지를 확대한다는 계획을 통해, 미술관이 행하는 이런 중요한 역할은 더더욱 강화되고 있다.
할렘 스튜디오미술관의 위신과 영향력이 높아지고 한편에서도 주류 미술관에 대한 비판은 흑인의생명은중요하다 운동이 시작되고 2012년 이후에서야 커지기 시작했다. 이런 비판은 인식, 구조, 재현의 차원에서 벌어지는 흑인에 대한 체제의 배제와 폭력 형식들에 대한 의식이 높아진 것과 관련이 있다.[6]D’Souza 2018, 5. 〔Aruna D’Souza. 2018. “Act I.” In Whitewalling: Art, Race & Protest in 3 Acts, 14–58. New York: Badlands Unlimited.〕 휘트니미술관에서만도 여러 번의 시위가 열렸는데, 몇몇만 꼽아보자면, 2014년 휘트니비엔날레에서는 미술집단 아프리카말로얌을뭐라고하지콜렉티브Howdoyousayyaminafrican Collective가 철수했고[7]Heddaya 2014; R. Lee 2014. 〔Heddaya, Mustafa. 2014. “Artist Collective Withdraws from Whitney Biennial [UPDATED].” Hyperallergic. 05 2014. … (계속) 2016년에는 데이너 슈츠Dana Schutz가 〔1955년 당시 14세로, 백인 여성을 공격했다는 혐의로 백인 남성들에게 납치, 린치를 당해 사망한 흑인〕 에밋 틸Emmett Till을 그린 《열린 관Open Casket》을 내리라는 요구가 있었으며[8]D’Souza 2018. 행동주의자 모임 이곳을탈식민화하라Decolonize this Place에서 미술관 이사회에서 워런 캔더스Warren Kanders를 제명하라고 요구하며 수 차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9]Decolonize this Place 2020. 〔Decolonize this Place. 2020. “9 Weeks Of Art in Action—DTP.” Activist Organization. Https://Decolonizethisplace.Org/9weeksofartinaction2. June 22, 2020. … (계속) 1960년대 행동주의는 흑인 미술가들이 주류 정전에 포함되게 하는 방식을 겨냥했지만 지금의 행동주의는 체제로서의 미술관 기저에 있는 체제의 구조를 폭로하고 그 직접적 변화를 요구하는 쪽으로 초점을 옮겼다. (D’Souza 2018)
2019년에 뉴욕시 문화부에서 낸 예술, 문화 분야 노동 인구에 관한 보고서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인종/히스패닉 혈통과 관련해, 응답한 예술 노종자는 뉴욕시 인구해 비해 덜 다양하다. 시 인구의 32%에 해당하는 백인이 66%를 차지했다. 반대로 히스패닉,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시아인은 과소대표되고 있다 ― 인구의 22%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정체화하는 문화 노동자는 10%, 주민 22%인 히스패닉으로 정체화하는 이는 11%, 주민 14%인 아시아인으로 정체화하는 6%였다.
“공동체 참여” 역할을 택한 응답자가 뉴욕시 전체 인구 구성과 가장 비슷했다. 경비, 소매/판매, 시설 등 서비스 근로자는 주로 유색인이었던 반면 이사진, 경영진은 각각 70%, 68%가 백인(비히스패닉)이었다. (SMU DataArts 2019)
이런 수치는 아마 골든이 “포스트블랙”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며 이는 포스트블랙이라는 개념이나 그것이 연 공간과 합중국의 실제 사회정치적 현실 사이의 엄청난 간극을 보여준다. 1977년에 백인 경관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맞아 죽은 애브너 루이마Abner Louima나 1999년에 백인 경관 네 명에게 총알 마흔 발을 맞고 살해 당안 아마도 디알로Amadou Diallo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흑인에 대한 폭력은 《프리스타일》 전이 구상되기 직전 몇 해에도 언제나처럼 잔혹했다. [190] 그렇다면 21세기의 도입부에 열린 “F” 시리즈의 맥락에서 어떻게 저런 폭력 행위가 다루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주장컨대, 더 넓은 미술계(왜 미술 시장)에의 포함을 위한 싸움은, 신진 흑인 미술가들에게 있어, 전선이었다. 미술만으로 반흑인성 정서anti-blackness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자본주의나 백인 우월주의 같은 권력 체계들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도 순진하지만, 미술이 우리의 지각과 상상을 무너뜨리고 열어 젖히고 방해하고 뒤흔들고 밀어붙이고 확장할 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포스트블랙은 체제의 폭력을 종식시키는 데에 힘 쏟거나 활동가로 일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도발적이었지만 이후 이 젊고 기운 넘치는 미술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백인) 미술계에는 위협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또한,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하게는, 포스트블랙 미술은 흑인 디아스포라 내의 여러 관점을 강조하면서 재현의 정치를 확장했다. 1990년대의 재현 정치학이 받아들인 기존의 미적 접근법을 따르지 않기에 플랫폼을 갖지 못하거나 무시되었던 관점들을 말이다. 이는 자기 경험의 특수성을 말하고 싶지만 미술계의 “타자화된” 용어들에 기대기고 싶지는 않았던 ― 바꾸어 말하자면, 흑인의 경험에 관한 작품을 만드는 데 집중하면서도 흑인 미술가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 흑인 미술가들에게 있어 중요한 자유를 뜻했다.
시각적 재현에 관한 담론은 매우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런 담론들은 또한 정적인 관념들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다양한 표현 스타일, 형식이 특정한 미학적 순간의 우선순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눈 밖에 나게 된다.[10]이 주제에 관해서는 Bey 2024를 참조. 〔Dawoud Bey. 2014. “The Ironies of Diversity, or the Disappearing Black Artist.” Artnet. 2014. … (계속) 그간 눈에 들거나 눈 밖에 난 흑인 미학의 핵심 측면으로 추상, 시선에 대한 태도, 흑인 신체의 시각적 재현 등이 있다. 포스트블랙은 미술가를 특정 스타일에 따라 정의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포괄적인 용어였다. 오히려, 충분히 검게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너무 희게 읽히는 경우에까지도, 수많은 논의가 벌어질 수 있게 함으로써 다양한 표현 스타일, 매체, 형식을 포괄하고자 했다. 2000년대 초의 특징은 논의가 외적이기보다는 훨씬 더 내적이었으며 따라서 작품들이 정체화가 아니라 경험을 배경으로 흑인성을 협상하는 일과 훨씬 더 관련된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재현 관련 논의의 커다란 전환을 본다. 브래드포드가 그랬듯 “새로운 검둥이”라는 관념에 들어서는 동시에 미지의 것에 걺으로써 발을 빼는 일은 신나는 가능성이자 우리 시대 특유의 혼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의 사회정치적 현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주장컨대, 흑인으로서 우리는 함께 다른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상상을 펼치기 위해 이 협상의 공간을 필요로 한다.
[191] 이시간성理時間性heterotemporality의 맥락에서 시간적 탈구에 관해 쓰면서, 또 하나의 시간적 탈구가 일어나는 것을 본다. 바로, 이 작품들이 촉발한, 외적 논의와 내적 논의 사이의 구분이다. 비판적 인종 이론, 탈식민 이론, 퀴어 이론 같은 학적 접근들은 기성 계몽 인식론들에 도전한다는 목표에 있어 상당한 진전을 이루어서, 미술관이나 미술사학계가 백인 우월성을 우리 사회들의 사회적 현실로 영속화하는 해묵은 교과과정이나 내용을 고수하는 데에서 보여지듯 제도적 실천과 사상 사이에 실질적인 간극이 생긴 지경이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이 동시대 흑인 미술에 관한 자문위원을 고용해야 하는 이유,[11]Solomon 2014. 〔Deborah Solomon. 2014. “Student of History Is Making Some.” The New York Times, April 2, 2014, sec. Arts. … (계속) 그렇게나 풍부하고 풍성한 디아스포라 역사들을 다루는 대학 수업이 없다시피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수백 년을 이어진 주변화된 지식 ― 내가 이 책에 담은 ― 의 외주화는 스스로가 역사의 “선한” 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현장 실천가들이 메우기 힘든, 어쩌면 인정하기는 더더욱 힘든, 간극을 낳았다.
우리네 삶의 구석구석에서 어떻게 인종주의의 여러 면면이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모든 사회가 갖는 (정착자)식민 이후, 노예제 이후의 책무일 것이다. 대학 교과 과정을 바꿈으로써든 교직원을 다양화함으로써든 차별을 인정하고 급여를 평등화하고 흑인 문화 노동자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보장함으로써든 로기관들을 탈식민화하려는 기관의 시도는 너무나도 적다. 많은 기관들, 사회들은 세상에서의 다양한 존재 방식들이 자리를 갖고 어쩌면 그 너머를 사유하거나 미지의 것에 걸 공간을 열기보다는 전형적인 사고를 고수한다.
“흑인의 작품을 채우고 있는 어떤 미학이 있다고 믿는다 […] 미학적 정식이란 본질적인 인종적 자질이 아니라 문화적 반응들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비어든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시작했다. (Bearden 1974, 189) 흑인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정체성에 관한 질문들을 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모든 작업들은 2000년대 초의 미학적 정식들이다. 그 시기에 흑인으로 사는 일의 조건들은 이 작가들로 하여금 재현의 레퍼토리를 확장해야 하게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술을 이론과 표현이 있는 지식의 한 형식으로, 이 세상에서 (온갖 복잡한 일, 불순물, 변동과 함께) 살아가는 한 방식으로 여긴다면, 이 작가들이 제기하는 질문들, 역사들을 위한 공간을 넓히는 것이 핵심적인 일이 되며 학생들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는 일이 중요성이 훨씬 커진다. 이는 자기 긍정과 연속성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미래를 창조하는 데에 관심을 두는 미학 담론에 이바지할 것이다.
세미나를 할 때면, 아직 미술사의 고전 정전에서는 자리를 찾지 못한 글들을 읽으려는 열려 있고 열정적인 태도를 마주하게 된다. 페미니즘 이론, 퀴어 이론, 탈식민 이론, 비판적 인종 이론을 막론하고 그런 글들은 지금껏 교육 받으며 자신들이 배워 온 바를 해체하고 재고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학생들의 욕망을 사로잡는다. 자신의 자기 개념self-conception, 식민주의의 유산, 오늘날까지도 굳건한 잔혹한 인종적 전형들 사이의 연결성을 사유하기 시작하면 학생들은 폭력을 생산하는 시각 이미지들에 개입할 준비를 한층 더 갖추게 된다. [192]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실천을 바꾸기 시작했다. 이런 독해, 전시, 참고자료로서의 작품들이 없다면, 차이라는 관념에서 발을 빼고 헤게모니적 관점들을, 따라서 인식론적 폭력을 재생산하게 되기 십상일 것이다.
성찰의 지점에 도착하는 것은 겨우 시작일 뿐이므로 이는 작은 발걸음이다. 반흑인성 정서가 우리 사회에, 수백 년 동안 주류 교육 과정과 정전에서 흑인 사상가와 작가를 배제하고도 남은 체제 속에 이렇게나 깊이 새겨져 있는데 포스트블랙 같은 개념을 어떻게 논할 것인가? 지식 교환 및 생산 과정이 평등했던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 시간적 탈구에 다리를 놓고 평등한 토대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가? 나는 포스트블랙에 관한 질문들은 여기서 시작하며 따라서 정체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사로서, 미술가로서, 큐레이터로서, 학생으로서 우리가 교실에, 갤러리 공간에, 미술관에, 그리고 그 너머에 어떤 종류의 정치를 ― 정치적 내용과 담론을 ― 수립하기를 원하는가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작품과 질문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때다. 어떤 이름이 붙어버리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프리스타일》 전이나 다른 “F” 시리즈에 전시된 작품들은 전시가 제공한 틀을 넘어섰으며 이것은 모든 전시의 목표이기도 하다. 브래드포드, 휴잇, 메츠, 토머스, 윌리스 토머스가 제기하는 질문들은 그들의 위치가 비롯된 겹겹의 역사 만큼이나 심오하며, 이 질문들을 풀고 인식하고 논의해야 한다. 내가 이 작가들, 작품들에게서 배운 바는 그 무엇도 결코 총체적이거나 정적이지 않으리라는 것, 권력을 가진 자들이 바라 마지않는대도 그러하리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지식과 미학적 통찰을 매일의 정치적 실천에 도입하는 것이 핵심이다. 인종적 부정의가 계속해서 행해지면서 과거의 상처를 들쑤실 때, 우리의 트라우마를 현재에 새겨 넣을 때라면 특히나. 포스트블랙 미술은 하나의 파열a rupture이었다. 그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주
↑1 | 리건Ligon과 함께 이 용어를 만든 델마 골든Thelma Golden은 이 모순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Golden 2001, 14). 〔Thelma Golden. 2001. “Post…” In Freestyle: The Studio Museum in Harlem, edited by Christine Y Kim and Franklin Sirmans, 14–15. New York, NY: The Muse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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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Hall 1996, 471 참조. 〔Stuart Hall, 1996. “What Is This ‘black’ in Black Popular Culture?” In Stuart Hall: Critical Dialogues in Cultural Studies, edited by David Morley and Kuan-Hsing Chen, 465–76. Comedia. London: Routledge.〕 |
↑3 | Mercer 2012 참조. 〔Kobena Mercer. 2012. “Art History and the Dialogics of Diaspora.” Small Axe 16 (2 38): 213–27.〕 |
↑4 | 2008년에 찾아온 1930년대 이래 합중국 최대의 경제 위기는 권력 대표의 전환점이 된 버락 오바마 출마 및 합중국 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정부 출범과 때를 함께했다. 선거에서 오바마가 당선되면서 인종 관념과 흑인성의 의미에 대한 논쟁이 펼쳐졌으며 이 논쟁에서 합중국의 수많은 흑인은 엄청난 환멸을 느꼈다. 경찰의 손에 수많은 흑인 합중국 시민이 살해된 것, 흑인 아동, 여성, 젠더비순응자, (트랜스)남성에 대한 끊이지 않는 경찰 폭력과 살해에 대응해 #흑인의생명은중요하다 같은 운동이 시작된 것이 오바마 정부(와 뚜렷한 침묵) 하에서였다. “우리가 믿는 변화”, “그래 우리는 할 수 있어” 같은 오바마의 선거 구호는 202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뜻모를 말이 되어버렸다. 유색인이 감내하는 체제의 폭력이 훨씬 큰 규모가 되었고 나라가 전에 없이 갈라졌기 때문이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여전히 운영되고 있고 합중국군이 2011년 6월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고는 해도 합중국의 중동 개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합중국이 포스트인종 시대에 진입했다는 백인 자유주의식 관념은 지금은 코웃음 칠 일이지만 2008년에는 진지한 논쟁거리였다. |
↑5 | ”Black Lives Matter” 2020 참조. 〔“Black Lives Matter.” 2020. https://blacklivesmatter.com〕 |
↑6 | D’Souza 2018, 5. 〔Aruna D’Souza. 2018. “Act I.” In Whitewalling: Art, Race & Protest in 3 Acts, 14–58. New York: Badlands Unlimited.〕 |
↑7 | Heddaya 2014; R. Lee 2014. 〔Heddaya, Mustafa. 2014. “Artist Collective Withdraws from Whitney Biennial [UPDATED].” Hyperallergic. 05 2014. https://hyperallergic.com/126420/artist-collective-withdraws-from-whitney-biennial/.〕 |
↑8 | D’Souza 2018. |
↑9 | Decolonize this Place 2020. 〔Decolonize this Place. 2020. “9 Weeks Of Art in Action—DTP.” Activist Organization. Https://Decolonizethisplace.Org/9weeksofartinaction2. June 22, 2020. https://decolonizethisplace.org/9weeksofartinaction2.〕 |
↑10 | 이 주제에 관해서는 Bey 2024를 참조. 〔Dawoud Bey. 2014. “The Ironies of Diversity, or the Disappearing Black Artist.” Artnet. 2014. http://www.artnet.com/magazine/features/bey/bey4-8-04.asp.〕 |
↑11 | Solomon 2014. 〔Deborah Solomon. 2014. “Student of History Is Making Some.” The New York Times, April 2, 2014, sec. Arts. https://www.nytimes.com/2014/04/06/arts/design/darby-english-joins-moma-as-consulting-curator.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