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카메라 배터리를 충전했다. 낡아서 혹은 애초에 정품이 아니라서, 그것도 아니라면 충전기가 정품이 아니라서, 지난해부터 이미 시원치 않다. 충전은 더디고 방전은 빠르다. 추위까지 겹치면 더하다. 카메라를 켠지 두 시간이 채 안 되어 배터리 잔량이 부족하다는 경고가 떴다. 손으로 데우니 한동안 잘 작동하다가 이번에는 아예 카메라가 꺼져 버렸다. 핫팩을 사서 카메라에 붙였다. 600 원짜리 손난로는 한데서는 열을 전혀 못 내는 듯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카메라는 여섯 시간쯤을 작동했다. 날이 어두워질 기미가 보였다.
카메라를 들고 간 곳은 대한문 앞이었다. 흰 옷을 입은 이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백기완 씨, 박제동 씨가 한 마디씩을 했고 무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몸을 바닥에 바싹 붙여 절을 하고, 천천히 종종걸음으로 두어 걸음을 가고, 또 온몸을 바닥에 바싹 붙여 절을 했다. 오늘로 닷새 째, 영등포와 여의도, 강남, 을지로를 거쳐 대한문 앞에서 청와대를 향해 오체투지를 시작한 이들의 제일 앞에는 쌍용차 노조 김득중 지부장이 있었다. 기륭전자 노조 김소연 지부장이 그 옆을 바쁘게 움직였다. 절을 하는 이들, 혹은 그 옆에서 피켓을 든 이들 사이에는 콜트콜텍 노동조합원이, 전교조와 언론노조의 조합원이, 알바노조의 조합원이 있었다. 여러 단체들의 활동가들이 또한 있었다. 나처럼 내세울 적이 없는 이들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절 몇 번에 횡단보도 앞에 닿았다. 경찰은 횡단보도는 걸어서 건너는 조건으로 행진을 허가했다며, 차도에 내려가기도 전부터 으름장을 놓았다. 늘 그렇듯 남대문 경찰서장의 명을 받아 말하는 남대문서 경비과장이었다. 약간의 시비가 있었지만, 또 여러 번 몸을 던져 횡단보도를 건넜다. 시청 광장 앞, 프레스센터 앞을 지나 청계천을 건넜다. 동아일보 앞에는 차도 위의 작은 섬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가 있었고 거기서 다시 교보빌딩 앞을 향해 횡단보도가 이어졌다. 그곳을 건너면 또 한 번 횡단보도다. 경찰들은 조를 이루어 바닥에 붙은 사람들을 들어 날랐다. 두세 개의 횡단보도를 공중에서 건넜다. 바닥에 붙었던 그 자세 그대로, 팔까지 쭉 뻗은 채 나무토막처럼 들려가는 사람도 있었고 얌전히 절하던 팔다리를 죽을 힘을 다해 버둥대는 사람도 있었다. 경찰들은 때로 흔들거렸지만 놓치지는 않았다.
경찰들은 사람들을 들어다 광화문 광장에 내려 놓았다. 광장 바닥에 나무토막들이 하나하나 쌓였다. 버둥대던 이들도 경찰이 떨어뜨리듯 내려 놓으면 다시 팔다리를 쭉 뻗고 바닥에 몸을 바싹 붙였다. 바닥 가득 사람들을 부려 놓은 경찰들이 뒤로 빠지고, 일어선 사람들은 다시 절을 했다. 세월호 희생자들, 정리해고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십육배를 했던가 십팔배를 했던가. 좁은 곳에서 사람들은 움직임 없이 절을 반복했다. 잠시 숨을 가다듬고, 이윽고 식사를 하고, 다시 모인 사람들은 또 바닥에 몸을 던졌다.
광장을 따라 한참을 몸을 던졌지만 여전히 광장이다. 광장은 넓었다. 겨우 이른 횡단보도 앞에서 경찰들은 또 사람들을 막았다. 경찰들과 대거리를 하는 사이 신고된 행진 종료 시각인 두 시는 이미 지났고, 그 사이 경고방송도 세 차례를 들었다. 남대문 경찰서장의 명을 받은 남대문서 경비과장은 한층 더 격앙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횡단보도에 몸을 던졌고, 경찰들은 이번에도 사람들을 들어 날랐다. 이번에는 세종문화회관 앞에 나무토막들이 쌓였다. 또 한 번 짐짝처럼 부려진 이들은 가만히 엎드려 있지만은 않았다. 엎드린채로 기어 방금 공중으로 건너 온 횡단보도를 향했다. 횡단보도를 막고 선 경찰들의 발치에 다다라서야 그들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또 빈자리 없이 사람들이 옮겨질 때까지, 그들은 그 자리를 지켰다.
다시 인도를 따라 가다가, 결국에는 막히고 말았다. 이번에는 방패까지 챙겨든 경찰들이 미리부터 길을 막아 섰다. 제일 앞에 있던 김득중이 방패에 손을 대고 엎드리자 모두의 움직임이 멎었다.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뒤에 있던 이들이 꾸물꾸물 기어 하나둘씩 방패 앞으로 모였다. 방패와 땅이 맞닿은 선을 따라 사람들의 손이 놓였다. 그러고도 뒤에는 여전히, 엎드린 사람들의 긴 줄이 있었다. 삼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담요를 보내 왔다. 경찰은 막아 섰다. 한참의, 수차례의 대거리 끝에 담요 몇 장이 몇 사람의 몸을 덮었다. 피켓을 들고 서 있던 이들은 겉옷을 벗어 그들의 배에 깔았다. 또 몇 번의, 한참의 대거리를 거쳐 담요와 침낭, 은박 깔개가 전해졌다. 일어서지조차 않고서 배만 조금 들어 깔개를 끼우고, 그 다음에는 다리를 들어 깔개를 끼웠다. 그렇게 그들은 두 시간이 지나도록 바닥에서 몸을 떼지 않았다.
잠깐 쉬기로 했지만 몸들은 여전히 바닥에 붙은 채였다. 잠시 지켜보자 하나둘씩 굳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어날 기운이 없어 그저 몸을 돌려 등을 바닥에 댄 채 가늘게 숨을 쉬는 이들이 많았다. 기지개를 켠 이들은 화장실에 다녀오고 옷매무새를 고쳤다. 잠시 후 또 바닥에 몸을 던질 참이었다. 경찰이 비켜주지 않는다면, 바닥에 몸을 바싹 붙인 채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거기까지밖에 함께 하지 못했다. 그곳을 벗어나 해야 할 작은 일이 있었다. 그들은 아홉 시를 훌쩍 넘기고서야 죽으로, 컵라면으로 허기를 떼웠다고 한다. 경찰들 앞에서 스물여섯 번의 절을 했다고 한다. 그들의 동료 스물여섯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쌍용차 노동자만이 아니라 거기 모인 모든 이들의 동료를 생각하면 훨씬 더 많은 숫자다. 평택의 농성장에, 구미의 농성장에 있던 이들이 서울로 출발했다고 한다. 흰옷 입은 이들은 밤새 절을 하기로, 그 옆에 있는 이들은 밤새 곁을 지키기로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