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에는 "저들의 영광"이라는 글을 썼다. 유신시대를 추억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 시대가 자신들에게 먹고 살 것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갖은 탄압 속에서도 그 시대에 그들은 주인공일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 때를 추억하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산업화의 흐름에서는 산업역군으로, 민주화의 흐름에서는 민주투사로 그들은 주인공일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 이전 세대에게는 또 반공의 흐름 속에서 참전용사라는 자리가 주어졌다. (물론 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주인공이 되지 못한 사람이 많을 터이지만.) 이름뿐일지언정, 그들은 주인공이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노동력 없는 노동자, 구매력 없는 소비자가 되어버린 그들이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래서일 거라고,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께에는 "우리에겐 채널이 없다"라는 글을 썼다. 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쯤에 청소년이었던 ‘우리들’은 채널을 갖지 못했다고 썼다. 우리들의 스타들이 활약하던 공중파 채널들에는 이제 그 다음 세대의 스타들이 나오고, 우리들만의 케이블 채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애매한 노동력과 애매한 경제력만을 가진 우리들에게는 여전히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해소할 채널을 갖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열풍’의 방식으로 그 욕망을 해소하고, 또 누군가는 그 열풍을 통해 무언가를 판다고 생각했다. 복고의 흐름 같은 것은 없는 것이 아닐까, 그저 건물 모퉁이에 생길 수밖에 없는 작은 회오리 같은 것이리라 생각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본다.
저들의 영광은 조금은 유지되고 있다. 실제로 해 주는 거야 전혀 없지만 여전히 그들을 추켜는 주는 보수 정권이 있고, 그때의 문화를 지켜주거나 미화해 주는 방송들이 있다. 회사에서는 상사로, 가정에서는 부모로 권위자 혹은 결정권자의 자리를 갖고 있다. 산업역군은 관리직이 되었고, 민주투사는 정치인이 되었다. 한 해에 한 번 정도는, 대통령까지가 나서서 참전 용사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제 먹고 살 길쯤은 갖고 있다면, 달리 주는 것 없어도 이 정도면 괜찮을는지도 모른다. 자기네 삶이었으므로 그들은 일상적으로 추억하고 자랑할 수 있고, 여전히 가진 것이 있다면 일상적으로 힘을 쓸 수 있다.
우리는 어떨까.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주인공이었던 곳은 그 ’90년대’의 대중 문화 시장 뿐이다. 더 이상 부모님이 씨디를 사주지 않고, 그렇다고 스스로 벌어 사기도 빠듯한 ‘청년’이 된 지금, 우리는 무력하다. 오직 소비자로서만 주인공 자리를 겪었는데, 소비할 능력을 갖지 못한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런 배역도 주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살 수 없으므로, 소비자로서의 그때를 추억하는 것 역시 용이하지 않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 주지 않는다면, 말라 죽어 버릴 것이다.
다시 조금 더 생각해 본다.
오직 과거의 영광만을 가졌을 뿐, 지금은 아무 힘도 없는 사람들이 있다. 더 이상 가정의 권위자가 아닌 노인 세대, 은퇴하거나 해고 당한 중년들, 모두가 주인공인 그 틈에서도 주인공 자리는 가져 보지 못한 혹은 너무 빨리 무대에서 내려온 전업주부, 혹은 장애인, 혹은 다른 어떤 소수자들. 쌓아둔 것이 없다면 그들은 아무 힘도 없고, 힘이 없다면 추억할 여유도 없다. 가끔 보이는 만만한 상대에게나 늘어놓을 수 있을까, 그들이 추억하는 영광은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다.
종일 트로트를 틀어주는 케이블 채널이나, 시간 맞춰 그들을 겨냥한 드라마를 틀어 주는 공중파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볼 시간이 없거나, 볼 티브이조차 없을 때도 많다. 만만한 상대를 자주 볼 수 없다면, 그러니까 온순한 자식이 있어서 잔소리를 할 수 있거나, 자신이 모는 택시나 지하철에서 젊은 여성들을 만나 되먹지 못한 훈계를 할 수 있거나, 그런 식으로 분풀이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은 무엇을 택할까. 어버이연합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나올 것이다. 그것으로 과거의 영광을 새로 실천하고 현재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교회에 나가도 좋다. 신과 목사로부터 영원한 주인공 배역을 받고, 어버이연합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맡았던 배역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게 된 우리는, 새로이 오디션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리메이크 영화에서 산업역군 배역을 따내기 위해, 그 출연료로 다시 한 번 소비하는 주인공이 되어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기도 하므로, 끊임 없이 오디션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진짜 배우가 되려는 이들은 종종, 하찮은 배역으로 무대에 오르기보다는 차라리 한 끼 굶고라서 방에서 연습을 하는 법이다.(물론 정작 성공한 배우들의 궤적은 다른 것 같지만.) 우리는 숨고 또 숨어 든다. 오디션에 합격하는 그날이 오기까지, 없는 사람이 된다.
또 한 번 생각한다.
애초에 주인공이라는 자리는 막이 내리면 사라지는 법이다. 촬영해 놓은 것이 있다면 재방송을 할 수 있겠지만 재방송은 무한히 행해지지 않는다. 다음 공연이 있다면 또 다시 그 무대에 오를 수 있겠지만, 캐스팅은 철마다 변하기 마련이다.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퇴장을 전제하고 있다. 수차례의 공연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더 이상 새 배역을 맡지 않아도 인정 받는 사람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추억하지 않고도 현재를 충분히 살 수 있을까. 선생님 소리를 듣는 지난 세대의 배우들이, 감독이 되고 제작자가 되고 숫제 사업가가 되는, 그리 하려고들 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무슨 채널을 가질 수 있을까. 소비자로서의 주인공이라는 배역을 어디선가 다시 맡게 된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소비할 능력을 갖춘 노동자가 되어도, 막은 또 내릴 것이다. 앞 세대의 그들처럼 우리는 또 채널을 찾아 헤맬 것이고, 그 마지막은 결국 다음 세대의 어버이연합인 것은 아닐까.
나는 우리에 속해 보지 못했다. 내 부모에게는 나를 소비자로 만들어 줄 능력이 없었고, 그래서인지 혹은 다행히도인지 나는 소비자가 될 생각이 많지 않았다. 우등생이라는 다른 주인공 자리를 겪었고, 여전히 학교에 남은 내게 그것은 퇴색하지 않는 영광이자 추억할 가치가 없는 기억이다.
이쯤에서 나는 내게로 돌아온다. 나는 어떤 채널을 가져야 할까. 학자가 될 것은 아니므로 학계는 나의 채널이 아니다. 운동을 나의 채널로 삼고 싶은 마음이야 있지만, 나는 성실한 주인공은 아닌데다 그것이 ‘청년’이라는 이름의 세대에 속한 자리이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실은 주인공이고 싶기는 한지부터가 문제이지만, 어쨌거나 이미 무대에 오른 이상 무어라도 배역은 있어야 하니까. 그냥 나라는 배역이면 좋겠는데, 여전히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