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머니

지금 컴퓨터 옆에는 해피머니 문화상품권 오천원권 일곱 장, 총 삼만오천 원어치가 놓여 있다. 모두 헌혈 ‘기념품’으로 받은 비매품이므로 구매 가격은 아니고,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시가도 아니다. 무의미해진 액면가일 뿐이다. “해피머니 상품권 발행사가 사실상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티몬을 통해 판매한 1000억원 상당의 해피머니 판매대금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에서”라는데, 티몬과 공모했다는 의혹으로 고소장이 접수된 상태라고 한다.[1]〈”해피머니, 상품권으로만 3000억 조달”…티메프와 공모 의혹도〉, 《한국경제》, 24.08.01., 〈’티메프 사태’로 부실 드러난 해피머니, … (계속) 지난주 언젠가 환불 신청 접수를 받기 시작했으나 이내 중단한 모양이다. 조금 전에 해피머니 사이트에 들어가 봤다가 창을 닫고 찾아본 기사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원래는 헌혈을 하면 영화관람권을 받았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가는 일은 거의 없어서 보통 어딘가에 처박아 뒀다 적당히 친구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제천으로 이사한 후론 친구를 만날 일도 거의 없어져서 몇 장의 유효기간을 놓쳐 쓸모를 잃었고 그 후로는 문화상품권으로 받았다. 책을 종종 사니까 쓸 일은 있었지만 ― 실물을 챙겨 다니기도 웹에서 핀넘버를 입력해 포인트로 전환하기도 ― 번거로우므로 이따금 몰아서만 썼다. 그래서 최근에 모인 것이 일곱 장, 삼만오천 원어치. 그렇게 쓰지 못하게 된 것이, 소식에든 움직임이든 빨랐다면 (머지포인트 때처럼 누군가에게 빚을 떠넘기는 형태로) 쓸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것이 그만큼.

몇 개의 장면을 떠올린다.

아마도 2006년이나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 협상이, 그러므로 한미자유무역 반대 투쟁이 한창이었던 무렵. 학교에서 모인 이들과 함께 집회에 가기 전에 사전모임을 했다. ‘교양’이나 ‘학습’으로 불린 모임이었을 것이다. 발제를 맡았다. 예나제나 경제에는 딱히 관심도 지식도 없어서 그날도 실표성이나 국익의 허상 같은 걸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나도 다른 교양이니 학습이니 하는 자리에서 주워들었을 남미 어느 나라 이야기를 읊었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이후 걷잡을 수 없이 가속화된 공공부문 시장화로 물이나 약 같은 필수재를 사기가 어려워진 나라의 이야기였다. 내 관심사는, 명분은, 오직 하나였다. 적절한 혹은 감당할 만한 가격의 물이나 약이 너무 적어진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데에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서는 남들을 제치고 앞자리에 줄을 서야 하게 된 세상에서 살아 남을 자신도 그런 경쟁을 거리낌 없이 할 자신도 없다는 것.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것.

다행히도 또한 불행히도, 협정이 비준된 후에도 한국이 당장 그렇게 변하지는 않았다. 이번 정권 들어서 예상치 못한 방식과 속도로 그런 일이 펼쳐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러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마스크 품귀 현상이 벌어졌던 때 말이다. 공적 마스크 제도가 시행되기 전까지, 상점에 달려간 사람들, 마스크를 대량으로 사잰 사람들이 있었다. 달려가야만 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누군가는 사지 못하게 만든 사람들이, 달려갔으나 사지 못한 사람들이, 애초에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비교적 젊고 건강한 데다 챙겨야 할 환자나 노약자가 있지도 않은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그러지 않았다. “마스크뿐만 아니라 마스크 원료도 수출을 금지하는 나라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정부와 대기업이 공조해 수출국 정부도 모르게 “은밀하고 재빠르게” 마스크 원료를 수급했다는 자랑에[2]〈쉿! 비밀…정부·삼성 ‘마스크 007작전’〉, 《한국경제》, 20.03.24. 인상을 썼지만, 가까이에 기저질환자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기분이 달랐을 것이다.

몇 퍼센트 되지 않는 할인률로라도 생활비를 조금이나마 아끼려고 상품권을 대량 구매했던 이들은 본사에 찾아가 줄을 선다고 했다. 사무실 문을 막기도 드잡이를 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중재 제도나 소송을 통해서도, 서두른 이들은 조금은 되찾을지도 모른다. 삼만오천 원은 별 것 아니므로, 애초에 일해서 번 것도 ‘필’요해서 구한 것도 아니므로 나는 그냥 넘긴다. 제때 쓸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괜히 한 번, 구제책이 있나 검색이나 해 볼 뿐이다. 당연히 소득 없이 창을 닫으며, 제 꼴에 인상을 쓴다.

대화에 참여

댓글 1개

  1. “한국소비자원은 오늘 오전[8월 19일] 9시부터 티몬·위메프에서 상품권이나 기프티콘을 구매하고 환불받지 못한 소비자와 해피머니 피해 소비자를 대상으로 집단 분쟁 조정 참가 신청 접수를 시작했습니다.

    신청 대상은 티몬과 위메프에서 판매한 티몬 캐시와 위메프 포인트, 기프티콘, 외식 상품권 등이며 무상으로 적립받은 캐시와 포인트는 제외됩니다.

    해피머니 상품권의 경우에는 구매처와 관계없이 참여 신청이 가능합니다.

    신청은 오는 27일까지 소비자원 홈페이지에서 가능하며, 신청을 위해서는 사업자에게 환급을 요구한 증빙자료 등이 필요합니다.”

    〈소비자원, ‘티메프’ 상품권·해피머니 분쟁조정 접수〉, 《MBC》, 24.08.19.

댓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