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운명에 어떻게 수긍하게 되는가

<청담보살>을 보고 왔다. 통상적인 선의 코믹 멜로로서 그럭저럭 웃긴 영화였으나, 내가 통상적인 선에 있지 않은 탓에 별로 웃으며 보진 못했다. 구태의연함의 극치를 달리는 설정들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한다. 영화의 내용과 이 글의 내용에 큰 관계는 없다.

여성은 운명에 어떻게 수긍하게 되는가, 와 사람은 어떻게 운명에 수긍하게 되는가의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다. 비단 여성이 아니라도, 힘 없는 자라면 누구나 운명에 수긍하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처한 상황에 운명 혹은 숙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법을 배우며 살아간다.

그것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유리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타인에게 내어주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대개의 경우 그 과정은 자신의 삶을 마주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이미 한 번 자신에게 주어진 것의 앞에서 좌절한 이들, 그래서 그것에 운명이란 이름을 붙인 이름의 가르침에서 그 과정은 시작된다.

청담보살 오태랑은 세습무로 살아간다. 어머니에게서부터 이어진 그의 역사는 어쩌면 할머니, 그리고 할머니에게서부터 이어진 것일는지도 모른다. 대여섯 살 즈음의 오태랑에게 그의 어머니는 운명의 남자를 점찍어 준다. 운명이라곤 해도, 확실한 것은 없다, 몇 가지 조건들을 써 주었을 뿐.

우연히 마주친, 그 조건에 맞는 남자가 문제가 된다. 미모의 유명 역술인으로 상당한 부까지를 쌓아 놓은 오태랑 앞에 나타난 운명의 남자는 보잘것 없는 사람이다. 가진 것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교양이나 예의마저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오태랑은 받아들인다, 그것을 운명이라 배웠으므로.

남은 것은 운명을 보다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하릴 없이 오태랑은 그 남자에게서 좋은 면들을 찾아 내야 한다. 노력하면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법이다. 하나 쯤의 칭찬할 구석은 말이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그 남자는 ‘겉보기엔 저래도 꽤 착한 사람, 그래서 꽤 괜찮은 사람’이 된다.

몇 가지 변수가 생기지만 운명에 대한 순응에서 시작된 오태랑과 남자의 관계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것으로 발전한다. 그것이 단순히 운명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진짜 사랑임을 확인하는 장치까지를 영화는 내어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쯤,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사람은 누구나가 겪게 마련이다.

운명이란 이름이 붙은 사건을 거부할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어쩌면 사람은 사건에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건에 운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후, 삶은 한결 쉬워진다. 삶이 주는 고통들을 묵묵히 받아들이며, 그 가운에 소소한 행복을 찾으면 그만이니까.

덧.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 갈 때, 오태랑에게 점을 본 사람들은 오태랑이 얼마나 용한지, 혹은 오태랑의 점집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자랑을 한 가지씩 늘어 놓는다. 그 중 한 명이 말하기를, 내가 열 살이나 어린 남자랑 사귀었는데, 여기 오니까 헤어지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헤어졌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가 게이더라구요. 인생 망칠 뻔했지 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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