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의 재현에 관한 단상: 〈위를 보는 남자〉를 보고

이 영화를 알게 된 것은 어느 술집 스크린을 통해서였다. 장애인이 등장하는, 흔치 않은, 그것도 멜로 영화였다. 화면의 단서들을 갖고서 검색한 끝에 비로소 제목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영어 제목을 음차한 〈업 포 러브(Up for Love)〉라는 제목으로 개봉한 〈위를 보는 남자(Un homme à la hauteur)〉(2016)였다. 흔치 않은 영화를 접해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불편한  마음이 이를 가렸다. 
제목이 가리키는 주인공은 뇌하수체 이상으로 136cm의 신장을 가진 중년 남성 알렉상드르다. 이를 연기한 것은 182cm의 키를 가진 장 뒤자댕이라는 배우. 바로 이 지점이다, 불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말이다. 영화는 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저신장 장애인, 그러니까 키가 평균에 비해 작을 뿐만 아니라 종종 신체 비율도 평균과는 다른 저신장 장애인을 캐스팅하는 대신 ‘비율 좋은’ 장신의 배우를 축소하는 길을 택한다.
장애인 배우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장애인 연기를 장애인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택한 전략은, ‘보기 좋은 장애’를 그리는 데에 머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장애를 극복한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해 영화는, 장애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전략을 택한다.
물론 저신장 장애의 현실적인 문제들이 영화에서 온전히 생략되는 것만은 아니다. 비장애인의 신체에 맞춰진 가구들을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 비장애인 중심적인 세인들의 시선 ― “사람들은 나를 너무 쳐다보거나 아예 못 봐요” ― , 장애인과의 사랑에 대한 가족의 반대와 같은 문제들은 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프기도 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들이야말로 극복해야 할 ‘장애’의 실체이다.
장애가 사회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이런 설정은 오히려 적절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왜 불편했던 것일까. 나는 이 영화가 장애의 모든 장애를 지우고, 단지 장애라는 표식만을 남긴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낯설지만 귀여운 저신장, 타인들의 시선만 무시하면 어려울 것이 없는 삶,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장치가 더해진다. 장애라는 표식 이상이 둘의 사랑을 막지 않도록, ― ‘추한’ 외형이나 ‘불편한’ 질환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에 더해 ― 그러니까 가난 따위가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남자는 성공한 건축가(왜 그가 자신의 신장에 맞는 집을 설계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로 그려진다. 동시에 재산이 매력이 되지 않도록, 여자 역시 성공한 변호사다. 둘 다 이제는 진실한 사랑을 찾도록, 이혼 전력이 있다. 이런 식으로 장애와 교차될 여러 불편들이 모두 제거된 가운데, 타인들의 시선으로만 표시되는 장애라는 표식을 극복하고, 둘의 사랑은 이루어진다. 이쯤에서였다고 해 두자, 비장애인 배우를 쓴 것이 고깝게 느껴진 것이 말이다.
장애와 비장애의 재현을 고민하게 된 것은 아마 십 년 전쯤 극단 춤추는 허리의 연극을 보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 극에서는 지체 장애인들이 장애인 역할도 맡고 비장애인 역할도 맡았다. 미리 정보가 주어진 배역을 제외하고는, 나는 몇몇 배역이 비장애인 역할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한동안 곤란해 했다. 어려운 일이다. 주어진 장애의 표식을 의식하지 않는 것은 말이다. 비장애인은 표식 없는 존재로 여겨지므로, 표식을 가진 장애인이 이를 재현하기는, 관객의 의식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있는 표식을 없애는 것보다는 없는 표식을 만드는 것이 쉬우므로 ― 몸을 뒤틀거나(〈오아시스〉에서처럼), 몸의 일부를 움직이지 않거나(〈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처럼) 하는 방식으로 ― 반대로 비장애인이 장애를 재현하는 것은 쉽게 여겨진다. 그런데, 장애를 재현한다는 것은, 재현이 직접적인 복제가 아니라 언제나 사회적 의식을 매개로 하는 모방이라는 점에서, 장애에 관한 편견을 재현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백인이나 황인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흑인을 연기하는 것은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된다. 비장애인이 어떤 방법을 통해 장애인을 연기하는 것은 종종 찬사의 대상이 된다.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섣불리 말해 보자면, 흑인 한 명 한 명이 ‘또한’ 인간임이 밝혀졌으므로 전자는 비난 받지만, 장애인 한 명 한 명이 또한 인간임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 그것은 단지 어떤 이미지이고 따라서 가공과 재현에 열려 있으므로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나는 여긴다.
〈위를 보는 남자〉 역시, 장애/인이라는 단순한 이미지를 ― 어떤 실체를 갖는 삶이 아니라 ― 사용해 하나의 이야기를 만든 것으로 보였으므로,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직 이런 세계니까, 그리고 대중 영화니까, 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감히 내가 이해해도 좋은 문제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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