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의 이미지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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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드 타임라인 어드벤처의 행사 〈이미지 리딩룸〉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접한 이미지 몇 가지에 관한 단상을 남겨둔다. 이수경의 《미소녀》 연작과 《F/W 16》도 소개되었지만, 이미지 리터러시의 부족으로 충분히 읽지 못해 그에 관한 생각은 남기지 않았다.

# 로타의 설리와 설리의 설리
여성을 무해하고 무력한 존재로 그리는 로타의 사진을, 여성 모델들이 스스로 원해 찍은 경우가 적지 않다는 말과 함께 보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이런 이미지가 생산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이런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은 누구인가. 소위 ‘남성적 시선’을 위한 이미지인 로타의 사진을 비판하다 보면, 스스로 그 모델이 된 이들의 생각을 함께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성적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이, 이 세계를 안전하게 살아가는 한 방법인 것을 아는 한, 그들을 무작정 비판할 수도 없다.
로타의 설리 사진과 설리의 설리 사진을 비교해 보면 생각이 조금 분명해 지질지도 모른다. 로타와 설리, 두 유명인이 함께 한 이 사진은 누구의 사진인가? 모델들이 익명의 일반인으로 남지 않는 이 경우, 로타의 사진은 단순히 로타의 사진이 아니게 된다. 아니 애초에, 독창성이라곤 없는 그의 사진을 그에게 귀속시켜야 할 이유는 ― 표면적으로 그가 연출하고 그가 셔터를 눌렀다는 점 외에는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설리 스스로가 로타의 모델이 되기를 자청했다면, 이 사진을 기획한 것은 다름 아닌 설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로타의 설리 사진과 설리의 설리 사진 ― 설리가 직접 셔터를 누르지 않은 사진을 포함해 ― 은 구분되지 않는, 모두 설리의 사진이 된다. 그 사진의 주체가 이렇게 하나로 압축된다면, 비판적인 검토는 조금 더 쉬워지지 않을까.
나는 이것이 로타와 설리의 콜라보레이션이라기보다는, 여성혐오과 자본주의의 콜라보레이션이라고 여긴다. 자본주의 하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일은, 개인이 스스로의 가치를 밝히는 일은, 개인의 개별성이 아니라 그 상품성에 기초하게 된다. 여성혐오라는 기제 안에서 여성의 상품성은, 남성에게 무해한, 남성이 욕망할 만한, 그런 곳에 있다. 그렇게 말한다면, 설리 스스로가 자신을 상품화하는 사진들을 설리의 주체적인 자기표현으로 보기는 어려워진다. 그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틀 속에 있는 한, ‘자기’와 ‘사회’는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설리가 스스로를 상품화하고 있는지는 별도로 따져보아야 할 문제다. 연인과의 섹스를 암시하는 ― 소비자들이 스스로를 대입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섹스 혹은 섹스어필이 아니라 ― 사진, 노브라 차림의 사진이 과연 설리의 상품가치를 높이는 것인지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안적 시장, 이를 테면 틀 바깥의 여성을 찾는 이들의 시장에서 하나의 상품이 되고는 있지만, 대중문화의 중심지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시장 바깥’을 남기지 않는 자본주의의 속성 때문에 설리가 상품화되고 마는 것인지, 혹은 설리 스스로가 자신을 일종의 대안 상품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나는 아직 조심스럽다.

#이윤성의 다나에와 토르소
이윤성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화풍을 충실히 따른다. 그 화풍으로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것은 라오쿤, 수태고지, 다나에와 같은 그리스 신화의, 그러니까 서양미술사 불후의 모티프들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 다나에는 밀실에 갇힌 채 황금비로 변한 제우스에게 강간당하는 대신, 황금비를 자신의 쾌락의 원천으로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다나에의 얼굴에 서린 것은 피해자의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라, 오히려 정복자의 환희에 가까워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역시 이 다나에가 일본 애니메이션 풍으로 그려졌다는 것, 그것도 소위 ‘서비스 컷’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다나에를 그린 한 도판은 만화처럼 세 프레임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다나에만은 프레임의 경계선을 넘어 전신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이것을 다나에의 신체를 훼손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주체성을 보존하는 표현방식으로 읽기는 어렵다. 오히려 전시될 상품으로서의 다나에를 훼손하지 않는 문법에 가까워 보인다.
놀라웠던 점이 있다면, 일련의 그림들을 주체적인 여성의 이미지로 읽는 흐름이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어떤 작품이든 그것을 긍정적으로 읽으려는 시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 작가를, 한 작품을 띄워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 시대의 부산물로서의 ― 시대상의 방증으로서의 작품을 긍정적으로 읽음으로써 시대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한 일이어야 할 것이다. 이 그림들에서 직접적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읽는 것은, 전자에 가까워 보였기에 놀라웠다.
나도 시도해 보자면, 긍정적인 요소는 다나에가 아니라 토르소에 있다. 다나에의 달뜬 표정은 한편으로 황금비를 정복한 자의 환희지만 동시에 황금비에 온전히 정복당한, 그러니까 강간 판타지에서 그러하듯 강간을 더 이상 강간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 자의 표정이기도 하다. 그것이 구분되지 않는 이상 다른 레퍼런스 없이 다나에를 긍정적으로 읽기는 어려워 보인다.
물론 토르소로 표현된 인물도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잘린 팔다리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온다. 피는 소용돌이치듯 휘감아 돌며 토르소를 감싸고 있다. 이 피 흘리는 토르소는 자신의 피를 무기로 삼은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더 이상, 고요한 그림을 위해 팔다리를 삭제당한 것이 아니라, 팔다리를 삭제당한 와중에도 스스로의 힘을 온전히 보존하는 한 여성의 토르소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 토르소를 직접적으로 여성의 주체성을 드러낸 것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토르소의 표정 역시, 하드코어 포르노와 연관 지어 읽는다면 다나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내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여성의 팔다리를 삭제하는 사회현실 속에서는 최대한의 주체성마저도 팔다리 없이 실현될 수밖에 없다는, 그러나 반대로, 팔다리를 삭제해도 주체성을 온전히 앗을 수는 없다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비유로서 읽는 것이다.
이 토르소의 독해가 비장애인중심적인 관점에서 ― ‘온전한 신체’를 ‘온전한 주체성’과 상당부분 동치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나는 답답하다.

# 주권 없는 신체
발표자는 ‘몰카’ 사진들, 혹은 광고 모델의 사진을 보여주며 주권을 잃은 신체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연한 독해였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나는 주권 있는 신체를 상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패싱될지에서부터 자신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이르기까지, 몸을 무대로 행해지는 모든 일에서 나는 늘 주권 없는 신체만을 알아 왔다. 뜻하지 않게 남성으로 읽히는 나의 몸, 뜻한대로 구부리거나 펼 수 없는 나의 몸을 경험하며 유일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주권 없는 신체였기 때문이다.
발표자는 주권 있는 신체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지를 물었다. 물론 나는 답할 수 없다. 내가 그린 몸과 내가 그리다 만 몸은 모두 주권 없는 신체였다. 하나는 달팽이였다. 자신의 좁은 방을 멋대로 침입하는 민달팽이를, 그리고 집주인을 보며 노이로제에 걸린 한 여성. 자신의 분비물을 달팽이로 착각하고, 이윽고는 스스로가 달팽이가 되어버리는 꿈을 꾸는 한 여성을 그린 적이 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인물의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소설을 쓰려 했던 적이 있다. 성별도, 나이도, 덩치도, 나는 명시하지 않았다. 그것이 침범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그러나 주권 있는 신체를 나는 늘 동경한다. 자신의 젠더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는 몸, 중력을 거스르는 듯 자유로이 움직이는 몸, 그런 것들을 나는 동경한다. 전자에 관해, 요새 고민하고 있는 것은 드랙이다. 그러나 드랙퀸이나 드랙킹에 관한 것은 아니다. 드랙퀸의 문법을 따르는 여성 ― 포퀸(faux queen)과 드랙킹의 문법을 따르는 남성 ― 포킹(faux king)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기존의 문법을 몇 번이고 뒤틂으로써 자신에 대한 자의적 독해를 차단하는, 어떤 몸의 실천들에 대해 요즘은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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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온전한 신체’를 ‘온전한 주체성’과 상당부분 동치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나는 답답하다.

    특히 이 점이 비장애인 신체인 제가 사고할 수 있는 범위에 한계가 있었음을 강하게 지적해주었어요.
    단순히 부끄러운 것도 아닌,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드네요.

    1. ‘비정상’ 혹은 ‘장애’의 이미지를 그 자체로 정상이라는 체제에 저항하는 것으로, 그 자체 주체성으로 읽는 독해가 가능할까 싶다가도, 그 역시 장애를 정상성과 대비되는 것으로 읽는 것 같아 저어되고… 여전히 답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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