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퀴어한 이야기는 아니다.[1]이런 말로 시작하는 글은 대개 뜬금 없는 비난이기 쉽고, 이 글 역시 그렇다. 성소수자라고 반드시 퀴어한 것도, 퀴어해야 하는 것도 아니므로. … 각주로 이동 “나 레즈비언이야”, 재은(김효진 분)이 처음 커밍아웃할 때를 제외하면 계속해서 퀴어라고 ― 예컨대 “퀴어커플”이라고 ― 말하지만 일각에서 쓰는 대로 비규범성과 경계 허물기를 강조하는 용법이라기보다는 다른 일각에서 쓰는 성소수자의 동의어로서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이래은 연출, 도은 작, 서울: 정동극장 세실, 2023.07.06-21.)라는 제목이 역설하는 대로, 순진하고 순전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할 날을 기다리기. 이리저리 떠돌다 제 곁에 있는 사랑할 만한 사람, 어쩌면 이미 사랑해 온 사람을 뒤늦게 발견하기. 결혼에 골인하고 아이를 기르며 늙어가기. 삶에 지치기.
다툼과 피로와 짜증이 늚으로, 결국은 헤어지므로 순진하고 순전한 사랑 이야기라고 하긴 뭣하지만 시대가 시대니만큼 그런 것 없는 사랑을 상상하기도, 이야기하기도 역시 뭣하다. 순진하게 시작했으나 백년해로로 이어지지는 못한, 그러나 미움으로 돌아서는 대신 멀리서 서로를 응원하며 웃으며 만날 수 있는 사이로 남은 이들의 이야기다. 반복해서 순진, 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들의 사랑 밖에 있는 일들 ― 청소년으로서, 성소수자로서, 노동자로서 마주하게 되는 상처든 불의든 ― 은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씩 언급되거나 희미하게 지시될 뿐인[2]예컨대 종종 퇴근이 늦는 보육교사 윤경이 전하는 노동환경은 (여성)노동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지만 이것은 어렵지 않게 어떤 사랑으로 봉합된다. 긴 … 각주로 이동 모종의 사건들을 묻어 두고, 무대는 온전히 ― 서로로 인해 웃거나 서로로 인해 화내고 슬퍼하는 ― 이들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윤경(김시영 분)과 재은은 고등학생, 절친한 친구 사이다. 어느덧 연인이다. 혼인신고서를 내고 받은 불수리 확인서를 현관에 걸어두고 “우리는 현행법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며 자축하는 이들이다. 윤경이 “모르는 남자 정자를 내 난자랑 섞기는 싫어”서 입양을 결정한, 재윤(정다함 분)의 엄마들이기도 하다. 재윤이 자라는 만큼이나 커진 갈등을 대화나 커플상담으로는 결국 해소하지 못해 이혼한 사이다. 10대 때부터 상당한 시간을 함께 한, 2099년까지도 어디선가 서로를 마주치는, 2000년생들이다. 윤경은 장난기가 많다. 재은(과 재윤)은 그보다는 조금 진지하거나 화가 있다. 재은은 이런저런 스타트업에 관여하며 일하고 윤경은 꾸준히 보육교사로 일한다.
많은 사랑 이야기가 그러하듯 다른 많은 것들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사랑만이 중요하므로) 일부는 중요하지 않아서, (사랑이란 종종 불가해하므로) 일부는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배경으로 두고 순서 없이 생의 몇몇 장면들을 오가는 구성 탓이기도 할 것이다. 만나고 함께 하고 헤어진 이들의 삶은 만나고 함께 살고 싸우고 처음으로 고백하고 다시 만나고 헤어지고 함께 살고 하는 식으로 그려진다. 이런 구성은 어쩌면 서사의 일관성을 무너뜨리고 다른 가능성을 끄집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운명도 목적도 아닌 사랑의 가능성 같은 것. 그러나 알고 보니 이들은 2007년, 일곱 살 때 처음 만난 사이. 그날 한 이야기를 2099년까지 붙들고 있는 사이. 순진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기도 하다. 결정적인 어느 순간으로 소급되는, 태초부터 있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사랑으로 재정렬되는 이야기다.
빠져나갈 구멍, 혹은 새어 나가는 구멍이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구멍은 의외로 가까이에 ― 무대 한 가운데에 ― 있다. 배경에 커다란 원판이 서 있다. 뒷면은 막혀 있는 무대의 구조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뒤에서 약간의 조명이 퍼지지 않는다면, 언뜻 구멍으로 잘못 생각할 만큼 검게 칠한 판이다. 앞에는 곧 무대를 꾸릴 대도구들이 놓여 있지만 그걸 알아채지 못할 만큼 충분히 검다. 이들의 생활 공간은 모두 그 구멍으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그 구멍 앞에서[3]조금 멋부려 말하자면 ‘심연 위에서’. 춤추고 싸우고 웃고 화낸다. 혼인신고 불수리 확인서 역시 그곳에 놓인다. 무대가 어둑해지고 확인서 ― 아무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아 그저 반사판 쯤 되는 형태로 만든 ― 에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면 구멍 위에서 그 자그마한 네모만이 빛난다. 이 반기념비가[4]https://slowlyaspossible.net/420/ 참고. 이들의 삶에 유일한 기념물이다.
동성간 혼인은 둘이 이혼한 후에야 제도화된다. 이 때늦음을 아쉬워 하거나 늦게나마 이룬 성과를 축하하는 대신 둘은 그저 동성 커플의 이혼을 농담거리로 삼는다.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완성되지 못한 삶을 다른 데 기대는 대신 이들은 아무 기념할 일도, 기념비도 없는 삶을 그대로 이어 간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도 사랑도 아니었고, 일곱 살 때 처음 나눈 비밀, 아흔아홉살 까지 잊지 않고 있는 소망 그것 하나 뿐이다. 나는 UFO를 보았다, UFO는 실재한다, 그것을 확인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를 믿는다. 백 년이 흐르고 우주여행이 일상화될 때까지도 확인되지 않은 그것의 존재, 그러나 우주라는 무한한 구멍에서 결코 없음을 증명하지는 못할 그것의 부재. 그 구멍 위에서 춤추는 삶.
↑1 | 이런 말로 시작하는 글은 대개 뜬금 없는 비난이기 쉽고, 이 글 역시 그렇다. 성소수자라고 반드시 퀴어한 것도, 퀴어해야 하는 것도 아니므로. 퀴어하다, 그렇지 않다는 평가에는 종종 아무런 내용이 없으므로. 퀴어함을 자처한 적 없는 이야기에다 대고 갑자기 뱉는 이런 말은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무엇을 바란다고 말해도 좋다고 생각하는지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으므로. 주위의 관객들은 대개 즐거워 했고 이따금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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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예컨대 종종 퇴근이 늦는 보육교사 윤경이 전하는 노동환경은 (여성)노동의 문제를 생각하게 하지만 이것은 어렵지 않게 어떤 사랑으로 봉합된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들은 어느 시점에는 보안경을, 또 어느 시점에는 얼굴 전면을 덮는 보호구를 착용해 환경 문제를 생각하게 하지만 딱 그만큼이다. 아무런 언급이 없으므로 보안경까지만 나온 시점에는 그저 미래의 유행을 상상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
↑3 | 조금 멋부려 말하자면 ‘심연 위에서’. |
↑4 | https://slowlyaspossible.net/420/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