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루이스(최순진 분)의 딸이거나 아들이고 중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인 캐롤(전박찬 분)에게는 이중의 문제가 있다. 사라진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박수진 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절박한 가운데에서도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 정확히는, 학교에서 제적 당하지 않으려면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를 찾아 다니는 일을 공결 사유로 인정 받아야 한다는 ― 것.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라는 기다란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것도, “진짜 가족”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개가 사라진 사건을 공적으로 중대한 일로 인정 받는 것도 쉽지 않다. 교사 홉킨스(박경구 분)는 두 가지를 조언한다. 실종 전단지에는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라는 가독성 떨어지는 이름 대신 둘 중 하나만을 적을 것,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으며 지금 마음이 어떠한지를 직접 상세히 써서 전교생에게 부고를 돌릴 것. 그에게서 루이스의 딸로 호명되는 캐롤은 둘 다 ―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델마나 그로토프스키가 아니므로, 그리고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므로 ― 거부한다. 쌓여 가는 결석 일수를, 커져 가는 제적 가능성을 무시한 채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를 찾아 다닌다.

“진짜 가족”을 들먹이는 제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들, 그러니까 개와의 관계에서 출발해 동성 연인과의 관계를 비롯해 법적으로 지위와 권리를 보장 받지 못하는 여러 관계들의 지워지지 않기 위한 움직임을 시사하던 이야기는 홉킨스의 저 말로 지우지 않으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라는 장황한 존재의 어느 일면도 지우지 않기 위한 노력, 그가 이 세계에서 발할 수 있을지도 모를 어떤 가능성들을 지우지 않으려는 노력, 자신의 삶에서 그를 위한 자리를 지우지 않으려는 노력. 캐롤이 쓰기를 거부한 그 부고는 이를테면 전향서다. 제도의 강요를 받아들이고 약간을 보장 받기 위해 제 삶을 부정하지는 않기로 한다. 홉킨스는 캐롤이 학교에서 즐겁게 웃는다는, 그 모습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는 말로 캐롤의 진심을 의심하고 캐롤의 자리를 위협한다. 무대 위의 캐롤은 대개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를 찾아 다니거나 홉킨스에게 항의하거나 하는 중이므로 관객은 그 웃음을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살아 있음을 확신하는 웃음이거나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웃음이었을 것이다. 믿음을 표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캐롤은 전향치 않기로 한다. 아무것도 지우지 않기로 한다. 그것이 자신의 자리를 지우는 일이 될지라도.

무대 위의 캐롤, 이라고 썼지만 《그로토프스키 트레이닝》(구자혜 작·연출, 여기는,당연히극장 주최·주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023.08.26-09.03.)[1]초연은 서울: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2017.11.09 -19.에는 무대라고 할 만한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두 덩어리의 객석은 서로를 등지고 벽을 향해 배치되어 있다. 배우들은 객석 사이의 변을 공유하며 관객들을 둘러싼 두 칸짜리 네모 모양의 통로를 돌아 다니며 연기한다. 힘들여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한 관객은 자기 앞에서 나오는 말보다는 뒤에서 나오는 말을 더 많이 듣게 된다. 고개를 돌리고 바라본다 해도 갑자기 반대편에서 또 목소리가 튀어나오므로 결국 모든 것을 보지는 못한다. 수어 통역과 두 덩어리의 객석과 통로들을 모두 시야에 넣을 수 있는 객석이 한 군데 더 있지만 한 쪽에 치우쳐 배치된 수어 통역사들이 시선을 제한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충분히 지각하지 못하거나 뒤섞여 잊기는 쉬워도, 애초에 다 지울 수 있을 만큼 알지 못하므로, 지우기는 오히려 어렵다. 캐롤의 안위를 걱정하고 캐롤을 돕는, 때로 홉킨스와 다를 바 없는 말을 하는, 개이거나 사람인 친구들 찰스(조경란 분)와 레이먼드(김효진 분)의 말은 많이 잊었다. 린다(최승미 분)는 종종 알아보거나 알아듣지 못했다. 누가 개이고 누가 사람인지, 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같은 것들을 자주 놓쳤다. 아마도 중요하지 않거나 덜 중요할 ― 그러니까, 아마도 농담이거나 괜한 소리일 ― 말들이나 영문을 알 수 없게 커지는 눈과 목소리 같은 것들은 오히려 선명하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결국 죽었나. 1장이나 2장 쯤에서[2]배우들이 종종 지금이 몇 장인지를 말한다. 이것이 연극임을 상기시키는 대사, 혹은 연극이라는 것에 관한 대사가 여럿 있다. 이미 그렇다고 했지만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뒤로도 계속 말했으므로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죽음에 이르는 동안의 여러 사정을 회고하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린다가 움직이는 동안에만 들려온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바닥 아래 바닥에서 끙끙대는 소리는 애초에 지하실에 메아리진 린다의 발소리일 뿐이었을지도, 린다가 바닥의 바닥에서 건져 낸 것은 죽어가는 개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였을지도 모른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이미 전에 한 번 바닥의 바닥에서 건져 올려진 적이 있다. 외로웠던 ― 여전히 그 누구도 한 번에 전화를 받지 않아 외로운 ― 루이스에게서다. 델마라고 불리며 살아 왔으나 그로토프스키로 불리며 살아가고자 한다고, 그러나 그 변화의 시점은 아직 정하지 못했으므로 당분간은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로 불리고자 한다고 한 것이 이미 십 년 전의 일이다. 루이스나 캐롤은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어쩌다 그리 들어가게 되었는지를 궁금해 했다. 캐롤은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그를 알았다고 했다.[3]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루이스와 함께 살기를 결정하기 전부터,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자신을 사랑할 것임을 (혹은 자신이 델마 혹은 … 각주로 이동 그런데 정말로,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바깥의 어딘가에서 그리로 들어갔던 걸까. 어쩌면 확실한 것은 루이스가 혹은 린다가 그리로 들어갔다는 사실 뿐이다.

홉킨스가 캐롤을 학교라는 제도 안에 남겨 놓고자 하는 것, 루이스가 캐롤이 무사히 졸업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그래야 이 “노스 캐롤라이나”를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래야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지워지는 것은 떠나는 쪽이 아니라 ― 이곳을 떠나 가게 될 아마도 대도시는 더 큰 무대이기는 해도 딱히 다른 무대는 아니다 ― 남겨지는 쪽이다. 린다는 떠나지 못한 사람, 남겨진 사람이다. 홉킨스도 루이스도 그렇겠지만, 린다에게는 욕망을 투사할 대상도 없으므로 더더욱 그렇다. 그는 다만 무너지는 세상을 기록하며, 기록의 삭제에 저항하는 기록을 반복하며, 매일을 보낸다. 무너지는 세상은 실은 루이스가 만들어 파는 행거다. 옷을 너무 많이 걸었나 싶어 하나씩 빼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으므로 쓰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그럴 거면 비싼 걸 사야지 왜 이런 걸 샀냐고 하지만 가격이 제 봉급의 1할은 되는 물건이다. 캐롤이 전향을 거부하듯 린다는 제 삶을 받쳐주지 않는 기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린다의 옷은, 아주 무거운 모양이다.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죽음에 이르렀나. 죽음을 택했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캐롤에게 자신의 사망을 등록하라고 말한다. 얼굴을 알아 볼 수 없게 찍었다는, 그러므로 다른 개를 입양했으나 그마저 죽었다는 또 몇 번의 사망 등록에도 쓸 수 있을 거라는, 사진을 몇 장 동봉한다. 캐롤이 연기에 재주가 있다면 이 가짜 사진으로 몇 번이고 더 걱정 없이 결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대의 규칙을 써서 무대를 무너뜨리고, 학교가 그를 제적 처리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는 사라진다. 공식적인 기록은 그의 존재를 담지 못할 것이므로 이대로 지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아마 그가 죽음을 사라짐을 혹은 삭제됨을 택하는 것은, 바닥 아래 바닥 어딘가에서 지내고 있는 이름 없는 개(이리 분)를 지우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캐롤의 결석 같은 것. 그나저나 캐롤은,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사라지기 전에도 이미, 위험할 만큼 충분히 여러 번을 결석했다.

공연 안내와 음성 해설을 (이름 없는 개 역과 함께) 맡은 이리는 공연을 앞두고 머리를 깎았다. 수술 자국을 기준으로 반을 민 머리. 공연의 시작이자 아주 중요한 말들, 그러니까 비상 시 대피 안내를 하면서 여러 번 말을 더듬었고 이후로도 몇 번인가 타이밍을 놓치는 듯했다. 가장 많은 것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가장 적은 말을 하는[4]가장 적은 것이 보이는 자리는 수어통역사들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대사가 뜨는 스크린을 보며 몇 안되는 관객을 마주 했다. 통역사의 적어도 일부는 … 각주로 이동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지를 이따금 생각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 채 자리를 골랐다. 정면에는 벽과 자막 스크린이, 오른쪽에는 수어 통역사들의 등과 음성 해설사의 얼굴이, 왼쪽에는 빈 벽이 보이는 자리였다.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고른 자리였다.

References
1 초연은 서울: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2017.11.09 -19.
2 배우들이 종종 지금이 몇 장인지를 말한다. 이것이 연극임을 상기시키는 대사, 혹은 연극이라는 것에 관한 대사가 여럿 있다.
3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루이스와 함께 살기를 결정하기 전부터,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가 자신을 사랑할 것임을 (혹은 자신이 델마 혹은 그로토프스키를 사랑할 것임을) 알았다고 했던 것 같다. 동물 ― 비인간 ― 에 관한 (아마도 사실이거나 옳은) 이런 저런 말들이 있었지만 썩 흥미롭지는 않았다.
4 가장 적은 것이 보이는 자리는 수어통역사들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대사가 뜨는 스크린을 보며 몇 안되는 관객을 마주 했다. 통역사의 적어도 일부는 농인이었다. 대사는 듣지 못하거나 적게 들었을 것이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