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념비의 내러티브

2010년에 쓴 글.

반기념비[1]의 내러티브

〈Mahnmal gegen Faschismus〉와 〈Negative-form Monument〉를 중심으로

광주 망월동 국립묘역에는 거대한 기념탑이 솟아 있다.[2] 1980년 5월의 광주 항쟁을 기리는 이 탑은 전통적인 기념비의 개념에 딱 들어 맞는 것으로, 높게 솟은 두 팔이 구를 떠받들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 탑과 함께 조성된 넓은 추모 광장을 찾는 추모객들은 실은 관광객에 가깝다. 가족단위로 찾아 온 이들이 묘역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탑이 다 나오게 찍으라”며 사진 찍는 이들을 닦달하는 모습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망월동에는 두 개의 묘역이 있는데, 하나는 사건 직후 지역민들과 유가족들에 의해 조성된 구묘역이고 또 하나는 후에 정부에 의해 조성된 신묘역이다. 화려한 공원과 추모 박물관, 그리고 기념탑까지가 있는 신묘역이 조성되고 시신들은 다 이장되었지만 유가족들은 구묘역의 폐쇄를 반대했다. 과거사의 청산은커녕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가 내어 준 화려한 묘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고인들의 뜻이 이어지는 것을 막는 일이라 판단한 때문이다.

추모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연표에 새겨진 “전두환, 97년 무기징역”과 같은 빛바랜 문구, 혹은 추모탑 안내 리플렛에 씌어 있는 “51.8m가 되었더라면 좀 더 의미 있었을 것”이라는 문구는 80년 5월 광주의 기억이 신묘역 조성과 함께 어떻게 봉인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올해 정부 주관 추모제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방아타령〉이 연주 목록에 오르고 전투 경찰 3500여 명을 포함한 4000여 명의 경찰 병력이 배치되자 유가족 대표가 참가를 거부한 것은 ‘기억의 봉인’이 단순히 상징적이거나 미학적인 선언이 아님을 피력한다.

기념탑은 고인돌처럼 무겁게만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에게 과거의 의미를 일깨우기는커녕 오히려 우리의 생생한 기억을 석화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 성스런 장소가 그다지 인기 없는 ‘관광지’로 전락한 것도 별로 이상하지 않다.[3] “시대가 많이 변한 지금, 예전의”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앞의 인용구는 군부 정권 당시 세워진 4.19 기념비에 대한 전진성의 평가이나, 전통적인 기념비, 혹은 기념비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양태의 전통적 기념비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된 하나의 실험인 ‘반기념비’의 개념과 가치, 그리고 한계를 독일의 홀로코스트 모뉴먼트를 중심으로 살펴 볼 것이다. 전후 독일의 전쟁 추모비는 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추념함으로써 자신들의 죄의식을 새로운 민족적 정체성으로 통합시켰다. 전통적인 기념비의 풍모가 강하게 베어있었던 이러한 추모비에는 자칫 죄의식을 물화시킬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반성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반기념비이다.

전진성은 반기념비의 개념적 배경을 다음의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아무리 아름다운 수사를 동원하더라도 홀로코스트의 죄업이 씻겨질 수는 없다는, 그리고 둘째로 사라진 희생자를 추모하는 예술적 시도에서 통상적인 미는 적합한 카테고리가 못 된다는 반성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은 특정한 매체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기억 주체들이 다양한 매체를 전전하며 끊임없이 새롭게 구축해 가는 것이라는 인식이다.[4]

본문에서는, 홀로코스트 추모에 있어서의 독일의 상황을 간략하게 살핀 후, 이러한 반성과 새로운 인식 위에 세워진 요헨 게르츠Jochen Gerz와 에스더 샬레브-게르츠Esther Shalev-Gerz의 〈Mahnmal gegen Faschismus〉 및 호르스트 호하이젤Horst Hoheisel의 〈Negative-form Monument〉를 중심으로 반기념비 제작의 의미와 경과를 요약하고, 각 작품의 내재적인 내러티브에 대해 논할 것이다.

  1. 전통적 범주의 홀로코스트 추모물

전통적인 모뉴먼트의 범주에 속하는 독일의 홀로코스트 추모비들은 전통적인 추모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를 하고 있다. 대개의 추모물들이 희생자들을 영웅으로, 혹은 순교자들로 묘사하지만 이 경우 희생자들을 말 그대로의 피해자로 묘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독일에 세워진 추모비는 다른 곳에 다른 이에 의해 세워진 것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전통적인 홀로코스트 추모물들은 희생자들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수용소에 갇힌 희생자들의 모습이나 유대인을 상징하는 다윗의 별, 혹은 수용소에 있던 난로의 모습을 재현한 것 등이 그에 속한다. 보다 추상화된 형태의 경우로는 솔 루이츠Soll Lewitts의 작품과 같이 관을 형상화 한 작품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전통적인 추모비들은 앞서 지적한 기념비의 한계, 즉 ‘기억의 석화’라는 문제를 피해갈 수 없었으며, 여기에 더해 ‘소극적 가해자’로서의 나치 전범이 아닌 독일인들의 정체성이 갖는 이중적인 태도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일례로, 솔 루이츠의 〈Black Form〉은 1987년 뮌스터 궁 중앙 광장에 설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인들의 항의에 직면하게 되었다. 바로크 양식을 딴 대학 광장을 한 가운데에 마치 관과 같은 형태로 독특한 위용을 지닌 채 설치되어 있었던 이 작품은 한 술 더 떠 그것이 그래피티로 뒤덮이면서 위화감이 더 짙어졌고, 시민들은 이 작품이 비싼 광장의 외양을 망친다고 여기게 되었다. 대학 고위 인사들의 운전기사들은 이 작품으로 인해 차를 돌릴 공간이 없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결국 큐레이터와 작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학 당국은 1988년 작품을 철거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작품이 철거된 공간을 지나며 시민들의 전쟁 범죄에 대한 죄책감은 더욱 짙어졌고, 결국 시 당국은 솔 레위츠에게 작품을 다시 제작해 줄 것을 청탁하게 되었다.[5] 기억을 석화시킬 뿐더러 무화시키기에 이르는 전통적 기념비의 무용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기되는 추모의 필요성이 상충됨을, 그리하여 다른 형태의 추모물이 요구됨을 잘 드러내는 예라 할 것이다.

  1. 모뉴먼트에 반대하는 모뉴먼트

반기념비의 주요한 연구가인 제임스 E. 영은 독일의 홀로코스트 추모 작업이 시지프스적인 반복 속에 있다고 진단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특정한 작품으로 미처 다 어루만질 수 없는 상처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속죄 방법으로서의 반복이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벗어날 수 없는 형벌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국가의 탄생을 정당화하고 신격화하거나 반대로 자국민의 희생을 순국으로 떠받드는 전통적 기념물의 범주에 속할 수 없는 전후 독일의 기념물은 만신창이가 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현실 속에서 찾은 하나의 길이 바로 반기념비의 형태다.[6]

마그리트 칼Margrit Kahl은 함부르크 유대교 성당 터에 성당의 지붕 설계를 딴 모자이크 작품을 설치했으며 노버트 라데마허Norbert Rademacher는 베를린 노이쾰른의 죄업을 씻는 의미의 영사 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알프레드 허드리카Alfred Hrdlicka는 함부르크 인근의 파괴 불가능한 나치 모뉴먼트들에 대응하는 모뉴먼트들을 제작하는 작업을 시작했다.[7]

이러한 일련의 반기념비 작업 중에서 학계와 세간의 관심을 가장 크게 받은 것이 바로 서두에서 언급한 요헨 게르츠와 에스더 샬레브-게르츠의 〈Mahnmal gegen Faschismus〉와 호르스트 호하이젤의 〈Negative-form Monument〉이다. 먼저, 〈Mahnmal gegen Faschismus〉는 하부르크 시의 의뢰로 1986년, 도심에 위치한 쇼핑 타운의 광장에 건설된 것으로 전통적인 기념비와 같이 공중으로 높게 솟은 12m의 사각 기둥 형태를 하고 있다. 독일어, 러시아어, 아랍어, 영어, 터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등 7개 국어로 적힌 안내문[8]과 함께 관객들에게는 납으로 뒤덮힌 알루미늄 기둥 옆에 납을 긁어 낼 수 있는 철필이 제공되었으며 누구나가 이 기둥 위에 원하는 메시지를 쓸 수 있었다.

당초 이 작품은 관객들의 서명이 네 면을 완전히 뒤덮으면 그만큼이 땅으로 묻혀 다시 서명 공간이 생기도록 기획 되어, 파시즘에 반대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관객들의 자발적인 서명을 모으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후 7년에 걸쳐 한 단계씩 낮아진 끝에 1993년 11월 30일 땅으로 완전히 가라앉기까지, 이 기둥에는 수많은 이들의 서명과 함께 유치한 낙서들과 그래피티, 심지어는 나치 문양까지도 기록되었다. 모두가 다른 형태로 기억하는 홀로코스트의 의미들을 여실히 확인한 후 그 모든 것을 껴 안은채 땅으로 가라앉은 기둥은 현재 지하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요헨 게르츠는 이 작품을 두고 “우리는 무언가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받침대가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 주제 넘게 설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들에게 있어 전통적인 모뉴먼트의 교훈성과 선동성은 그 자체로 파시즘의 산물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었기에, 파시즘에 반대하는 그들의 작품은 동시에 모뉴먼트 자체―전통적인 모뉴먼트의 교훈적인 기능과 관객이 생각해야 할 과거를 오히려 잠식하는 경향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어야 했던 것이다.[9]

제임스 영은 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일종의 시각적인 언어 유희로서 기획된 것이다. 이 작품은 사라지기 전까지 파시즘에 저항해 상징적으로 솟아 있음으로서 우리에게 자신을 대신해 일어 설 것을 촉구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뉴먼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상징적으로 솟아 있는 것 뿐이며, 작가가 아무리 애쓴다 한들 그것은 그러한 상징 속에서 완전히 소진될 뿐임을 이야기한다. 작가들은 그들이 이러한 상징의 무력함, 대리적인 저항으로의 초대, 화석화된 작품에의 숭고한 응답을 혐오함을 시사한다. 반대로 그들은 반기념비가 관객들을 움직여 대리적인 저항에서 실직적인 저항으로, 상징적인 것에서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끌 것을 기대하고 있다.[10]

한편, 앞의 작품이 일시성을 통해 모뉴먼트의 무의미함과 한계를 폭로하고 관객들에게 참여를 통해 능동적인 기억의 주체가 될 것을 요청했다면, 〈Negative-form Monument〉는 과거의 흔적을 제시하고 그곳으로 관객을 불러 들임으로써 기억을 작품에 봉인하지 않고 관객에게로 내어주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전쟁 중에 독일군에 의해 파괴된 분수를 복원하는 의미에서 기획된 것으로, 그 분수는 당시 유대인 유지였던 아슈롯Anschrott이 기부한 돈으로 시청 광장에 건립된 것이었다.

1908년에 처음 세워진 아슈롯 분수는 1939년 4월 9일, 독일군의 점령과 함께 파괴되었으며 43년에는 흙으로 메워져 화단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후 카셀 시는 피라미드 없이 평범한 분수의 형태로 63년에 이를 복원하였으며, 84년에는 역사적 기념물 복원 위원회가 구성되어 그 자리에 세워질 작품을 공모했다. 첫 공모에서는 당선작이 뽑히지 않았으며, 마침내 86년에 호르스트 호하이젤의 기획이 채택되어 〈Negative-form Monument〉가 세워지게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후에는, 카셀의 시민들조차 “영국군의 공습으로 분수가 없어졌다”는 수준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하게 된 역사를 복구하고자 한 것이 호르스트 호하이젤의 제작 의도였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쟁을 직접 경험한 세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게 된 이 분수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대신 호르스트 호하이젤은 그것을 정반대의 형태로 제시하는 작품을 기획한다. 12m 높이의 고딕 피라미드를 같은 자리에 다시 세우는 대신 똑같은 모양의 하얀 색 피라미드를 땅 속에 파 묻은 것이다. 분수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대신, 끊임없이 물이 흘러 들어 가는 깊은 웅덩이가 생겼다. 호르스트 호하이젤은 이 피라미드 모양의 웅덩이를 관객들이 들여다 볼 수 있도록 했을 뿐 아니라,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완성된 피라미드를 땅에 파묻기 전까지 현장에 세워 둠으로써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시민들이 알도록 했다.

〈Mahnmal gegen Faschismus〉와 마찬가지로, 과거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제시하는 대신 〈Negative-form Monument〉 또한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추모할지에 대해서는 관객들에게 맡기고 있다. 작품이 제시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해석이나 재구성되어 고정된 기억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건 혹은 사물에 대한 기억 그 자체이다. 작가는 이에 대해 “그 장소의 깊이로부터, 아슈롯 분수의 역사를 현재로 끄집어 내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11]

한편, 〈Mahnmal gegen Faschismus〉가 관객들의 즉각적인 결단과 가시적인 참여를 요구했다면, 〈Negative-form Monument〉는 관객들에게 명상과 고민의 기회를 제공한다. 앞의 작품이 관객들에게 “하부르크의 시민들과 방문객들이 여기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 넣도록 초대한다”는 말과 함께 철필을 제공하고 이에 더해 작가들이 직접 나와 행인들이 이름을 쓰도록 독려했다면, 이 작품의 경우 관객들을 불러 들이는 것은 광장 가운데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이다. 물소리에 끌려 작품에 다가간 관객은 그 장소의 역사와 상처를 확인하고, 어두운 웅덩이 속으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공히 반기념비의 흐름 위에 있는 두 작품이 갖는 이러한 차이가 낳는 의미와 한계는 다음 단락들에서 살피게 될 것이다.

위에서 살핀 두 작품으로 대표되는 반기념비는 스스로의 형태를 없앰으로써, 자신이 표현하는 기억을 없애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념비의 전제에 반함으로써 기억에 반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그것은 전통적인 모뉴먼트에 투사되어 왔던 영원성의 환상을 없앴다. 스스로의 존재 이유에 반함으로써 반기념비는 역설적으로 모뉴먼트의 목적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은 것이다.[12]

  1. 실패한 실험

하지만 작가들의 이러한 실험 의도가 관객들에게 그대로 전달 된 것은 아니다. 제임스 영이 기존 모뉴먼트의 양식에 반하는 반기념비의 실험을 의미 있을 뿐 아니라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한 반면, 노엄 루푸는 작품들이 의도와는 달리 현실적으로 전통적인 기념비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음을 지적하며 “사회적인 반응으로 인해 전통적인 재현의 범주로 포섭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13]

노엄 루푸가 제시하고 있는 자료들에 따르면 두 작품은 모두 관객들에게 전통적인 모뉴먼트와 같은 방식, 그러니까 경건하고 압도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 졌으며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모뉴먼트와 마찬가지로 관객들에 대한 설득력을 갖지 못하였다. 〈Mahnmal gegen Faschismus〉에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서명 대신 관광객 연인의 이름과 나치 문양이 그려졌으며, 관객들이 〈Negative-form Monument〉의 심연을 들여다 보며 상연에 잠기는 대신 네오 나치의 무리들이 그곳에서 집회를 열고 흑색기를 나부낀 것이다.

하부르크의 시민들은 〈Mahnmal gegen Faschismus〉의 “흉한” 외형을 이유로 이 작품을 격렬히 반대했다. 시민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이 어찌 할 수 없는 흉한 작품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여겼다.[14] 애당초 하부르크의 시민들은 이 작품을 전통적인 모뉴먼트의 추상적인 버전으로 생각하였으며, 은유적인 재현의 맥락 안에서만 받아들였던 것이다.[15]

하부르크 시민들의 이러한 반응은 네오파시스트 그래피티가 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작품이 공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기둥에는 철필로 쓴 이름을 뒤덮은 그래피티들이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개중에는 나치의 문양 또한 있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스와스티카 역시 서명일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16] 정작 하부르크 시민들은 네오파시스트 그래피티를 끌어들이는 이 작품을 그저 보아 넘길 수 없었다.[17]

도심 한 가운데 세워진 흉물스러운 기둥이 심지어 네오 나치의 게시판으로 전락해버리기까지 하자 시민들은 “그것을 없애 버려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작품이 땅에 묻혀 사라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해방으로 받아 들였다. 그 흉물스러운 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아름다운 도시의 경관을 헤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 작품은 더 이상 하부르크 시민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었으며, 그것의 부재는 못마땅한 추모를 이제는 마쳐도 좋다는 것을 의미했다.[18]

〈Negative-form Monument〉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셀 시민들은 이 작품이 조성된 공간을 일종의 성역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반응은 작품이 건립되기도 전부터 나타났는데, 카셀의 내로라하는 인사들까지 포함된 일군의 사람들이 호르스트 호하이젤의 제안에 반대하는 서명을 모으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애쉬론 분수의 역사를 추모하는 가장 적절한 조형물은 그 원형을 복원하는 것 뿐이라고 여겼으며, 하부르크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모뉴먼트가 도심 한 가운데에 들어서는 것 역시 마땅치 않게 여겼다.[19]

앞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새로운 형태의 추모 방식을 창출하는 대중적 반응을 이끌어 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제는 아슈롯 분수 기념물로 알려진 이 뒤집어진 분수의 위치와 용도, 그리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으로의 침잠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반기념비성을 갉아 먹었다. 하나의 강력한 상징물이 된 이 작품은 작가의 동의 아래 기독유대인 협회Society for Christian-Jewish Cooperation의 공식 로고가 되기에 이르렀는데, 노엄 루푸는 이러한 것이야 말로 반기념비가 맞서고자 했던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20]

〈Negative-form Monument〉의 실패는 1998년에 있었던 네오 나치 그룹의 점거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네오 나치 그룹은 시청의 허가를 얻어 이 작품이 있는 곳에서 집회를 열고 옛 분수의 주춧돌 바로 위에서 검은 기를 흔들었다. 카셀 시민들에게 이것은 기념물이 갖는 피해자 중심의 홀로코스트 담론과 양립할 수 없는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21] 이 작품 역시 (전통적인) 홀로코스트의 은유로서 이해되었으며, 자연스레 이 작품 스스로가 깨고자 했던 (미적) 거리를 두고 다루어졌던 것이다.[22]

제임스 영이 두 작품의 차이를 따지지 않고 한 데 묶어 성공적인 반기념비의 대표적인 경우로 호평하는 것만큼이나, 노엄 루푸는 두 작품을 한 데 묶어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노엄 루푸의 이러한 혹평은 앞에서 다룬 결과론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며, 그가 두 작품이 모두 전통적인 모뉴먼트 혹은 전통적인 홀로코스트 담론이 갖고 있는 문맥을 그대로 갖고 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노엄 루푸는 기억과 반기억, 기념비와 반기념비가 같은 기억에 대한 같은 재현이며, 이 모든 것이 똑같이 집합적인 추모 체계에 속한다고도 말하고 있다.[23]

노엄 루푸는 두 작품이 모두 전통적인 모뉴먼트와 마찬가지로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관객들에게로, 혹은 공적 영역에로 되돌리지 못한 채 스스로에 봉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리트 로고프Irit Rogoff의 견해를 인용해  관객의 위치에 있어서 〈Mahnmal gegen Faschismus〉가 적지 않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문제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개인의 사적인 기억들이 작품의 정치성[24]을 통해 치환될 뿐 아니라 집단화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집단화의 위험은 사회적이거나 역사적인 문학에서 널리 다루어져 온 것으로, 집단화된 기억은 공적인 영역에서 전용된 은유가 되어 가변적이고 선택적인 것이 된다. 요컨대, 특히 반파시즘과 평화를 위한 공간에서라면 이러한 기억들은 시각적으로 드러난 서사 구조를 만듦과 함께 모뉴먼트가 제시하는 메타 내러티브에 포섭되게 된다는 것이다.[25]

노엄 루푸는 〈Negative-form Monument〉 역시 같은 종류의 메타 내러티브를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이 작품의 뒤집어진 구조가 여전히 전통적인 은유에 기반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뒤집어진 피라미드와 끝 없어 보이는 심연을 향해 흘러 들어가는 물의 구조적인 어두움으로 인해 이 작품을 심지어 재현불가능성에 관한 논의 자체를 재현하며 “거꾸로 가는 세상”이라는 홀로코스트의 은유로 만든다는 것이다.[26] 결국 뒤집어진 분수는 은유를 만들었을 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27]

제임스 영은 두 작품의 차이를 논하는 데에 특별히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노엄 루푸는 두 작품이 미적으로, 그리고 개념적으로 명백한 유사성을 지닌다고 단언하고 있지만[28] 두 작품은 매우 상이한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아래에서는, 두 작품의 공통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이 어떠한 지점에서 차이점을 갖는지를 따지고 제임스 영이나 노엄 루푸와는 다른 평가를 도출해 낼 것이다.

실상, 〈Mahnmal gegen Faschismus〉가 어떠한 종류의 견고한 메타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표면적으로만 살펴 보아도 이 작품은 관객을 압도하는 크기의, 전통적인 모뉴먼트와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가장 큰 특징인 ‘서서히 사라진다’는 점 조차도 그것이 새로운 서명 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며 여전히 지하에서 사라진 부분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차별점을 잃고 만다. 그렇게 볼 때 반기념비로서의 이 작품에 남는 것은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이름을, 현실적으로는 원하는 무엇이든을 작품 위에 쓸 수 있도록 했다는 상호 소통의 측면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굳이 현실적인 실패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이 요구하는 상호 소통은 작품에 내제된 메타 내러티브에 속박된 일방향 적인 것에 불과함을 알기는 어렵지 않다. 제 3 제국 당시의 독일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거론하지 않은 채 “파시즘에 반대한다”고 단순히 선언하는 것은, 관객들을 전혀 설득하지 못한 전통적인 모뉴먼트의 발화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연명을 요구받는 관객들은 실상 파시즘에 대한 기억, 즉 이 작품이 전통적인 모뉴먼트로부터 되찾아 관객들에게 되돌려 주고자 했던 봉인된 기억을 전혀 되돌려 받지 못한 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반대할 것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다.

서론에서 소개한 전진성이 밝힌 세 가지 이외에도, 반기념비의 흐름에는 중요한 한 가지의 배경이 더 존재한다. 바로, 더 이상 사회가 직접 전쟁을 경험한 세대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전쟁 범죄의 가해자들은 물론이고, 독일인으로서 그들의 범죄를 막지 못했다는 심정적 죄의식을 지닌 전쟁 경험 세대는 이제 죽거나 죽어가는 시점에서 당시 독일은 지은 적이 없는 죄에 대한 속죄를 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지은 적이 없을 뿐더러 들어서 아는 기억까지도 희미해 져가는 시점에서, 민족의 과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임스 영은 이 작품에 대해 작가들이 기억의 부담을 그것을 찾는 이들에게 되돌릴 수 있어야 할 독일 홀로코스트 추모물의 개념적인 면, 혹은 조형적이거나 건축적인 형태가 갖는 난해함과 모호함을 구체화하려 한 것이라며, 자기완결적인 기억을 갖는 공간을 창출하기보다는 방문객들이나 지역 주민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기억을 들여다 보고 행동의 동기를 찾도록 요구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29]

하지만 실상, 당사자로서조차 공감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기억을 마주하며 작가는, 그 기억을 대면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옥죄는 끈을 놓아 버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전통적인 모뉴먼트들이 구체적인 기억들을 봉인하고 있는 것이었다면, 〈Mahnmal gegen Faschismus〉는 그 봉인을 해제한 것이 아니라 봉인은 그대로 둔 채 오히려 기억을 삭제한 것이다. 기억의 부담을 그것을 찾는 이들에게 되돌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질 수 없는 기억의 부담을 관객들에게 떠 넘겨 버린 것이다.

〈Mahnmal gegen Faschismus〉는 반파시즘의 선언을 선결적으로 제시함으로써, 파시즘 시대의 기억을 봉인한 채 현대의 반대만을 모음으로써 과거에 대한 기억의 작업을 청산하려는 기획이다. 나아가 작가는, 현대의 반대를 수집하려는 계획조차도 실패한 상황에서도 작가는 앞서 언급했듯 “스와스티카 역시 하나의 서명일 뿐”이라는 태도를 취한다. 제임스 영은 이에 대해 나치 스스로의 서명보다 과거를 기억하기에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느냐[30]며 옹호하고 있지만 그러한 논리대로라면 나치 시대를 가장 잘 기억하는 방법은 나치 시대의 지속이 될 것이다.

반면, 네오 나치가 자신의 작품을 점령한 데 대한 호르스트 호하이젤의 반응은 이와는 매우 상반된다. 호르스트 호하이젤은 사건이 있은 직후 언론을 통해 아슈롯 분수의 연표를 발표한다. 아슈롯의 후원을 통한 건립과 나치에 의한 파괴, 자신의 작품 설치로 이어지는 연표의 끝에는 네오 나치의 집회가 기록되어 있었다.[31] 이를 두고 제임스 영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모든 기억이 한 데 모이는 무게 중심이 되기를 바란 의도를 담은 것으로 보았으며 노엄 루푸는 앞서 소개한 대로 세간의 반응이 그 자체로 작품의 실패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았으나[32] 여기에는 다른 해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호르스트 호하이젤은 자신의 작품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 나아가 판단을 봉인하지 않기를 바랐으며, 네오 나치의 집회 역시 작품 밖에서 기억되어야 할 하나의 사건으로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임스 영이 생각한 대로 가치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그저 하나의 새로운 기억일 뿐도 아니며, 노엄 루푸가 제시한 세간의 반응처럼 성역이 침범당한 사건도 아닌―아슈롯 분수의 파괴와 마찬가지로 일어 났으며 어떻게든 기억되어야 할, 동등한 종류의 사건으로 말이다. 요컨대, 아슈롯 분수라는 공간에서 벌어진 카셀 시와 나치와의 관계는 아슈롯 분수에도, 그것을 기려 만든 자신의 작품에도 귀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노엄 루푸는 작품이 갖고 있는 메타 내러티브의 명백한 증거로 ‘어두운 심연’을 언급하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피라미드가 크기와 모양만이 원형과 같은 뿐, 색을 달리 하여 백색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그것은 종종 ‘팬텀’으로 이야기된다―로 제작된 사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얻은 별명이 보여주듯, 백색의 피라미드는 작품의 구체적인 물질성을 상쇄한다. 한 때 그곳에 있었으며 지금에 와서 복원되었음에도 그것은 명백히 흘러간 과거임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특정한 모뉴먼트에 가둘 수 없는, 흘러간―그리하여 현재의 관객들에게 열린 상태로 존재하는― 역사 말이다.

물론 노엄 루푸가 말하는 ‘어두움’의 메타 내러티브가 홀로코스트를 성역화하여 추모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면, 그와 같은 비판 역시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노엄 루푸는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추모물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그 의미나 평가를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만약 그가 홀로코스트를 추모해야 함에 반대하는 것[33]이라면, 결론은 게르츠 부부나 호르스트 호하이젤의 작품은 물론이고 어떠한 종류의 추모물도 만들 수 없다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홀로코스트 자체에 대한 재평가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르틴 브로샤트Martin Brozat가 제안한 ‘역사화’ 개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은 ‘절대적인 추모와 반성’ 이외의 무엇도 용납되지 않는 성역에 안치된 나치 시기가 과학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비판적인 이해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담고 있는 말이다.[34] 한편으로 독일인들을 무력감과 피의식에 빠지게 만들었던 의무적인 반성과 추모의 강압을 넘어 폭넓고 다면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개념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화 개념에 비추어 보아도, 그리고 그에 더해 앞서 가정한 노엄 루푸가 언급하지 않은 입장까지를 생각해 보아도 호르스트 호하이젤의 작품이 고정된 메타 내러티브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호르스트 호하이젤이 제시하는 것은 파괴된 조형물의 흔적이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잔인한 학살과도, 감히 공감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삶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오히려 그것은 분수를 파괴한 독일군보다는, 그러한 사건을 잊은 카셀의 시민들의 잘못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모뉴먼트가 공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직된 추모를 하고, 요헨 게르츠와 에스터 샬레브-게르츠가 전후 맥락이 생략된 채 반파시즘을 선언한 것과는 선명히 대조되는 부분이다.

요헨 게르츠는 자신의 작품을 덴크말Denkmal이 아닌 만말Mahnmal, 즉 경고와 약속으로서의 미래를 내포하는 종류의 기념비로 규정하고 있다.[35] 과거에 대한 습관적인 추모를 벗어나 미래를 생각하는, 말하자면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과거를 인식하려 했다는 점에서 〈Mahnmal gegen Faschismus〉가 만말의 영역에 속함은 사실이라 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대면하는 태도가 능동적이지 못한 점, 여전히 고정적인 선언을 내리고 있는 점에서 이 작품이 작가의 의도대로 반기념비Gegen-Mahnmal로까지 나아갔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게르츠 부부의 시도는 오히려 호르스트 호하이젤의 작품에서, 구체적인 역사를 환기시키고 그에 대한 능동적이고 진실된 판단과 행동을 촉구함으로써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으로 반기념비로서의 두 작품에 대한 호평과 혹평을 모두 검토하고, 어느 쪽으로든 두 작품을 하나로 묶을 수는 없다는 이 글의 견해까지를 논했다. 노엄 루푸의 지적대로 두 작품 모두 그 결과에 있어서는 실패를 맛보았으며, 지금에 와서 반기념비로 명명될 만한 굵직한 흐름이 없다는 점에서 반기념비의 실험에 일정 수준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움을 부정할 수 없겠으나, 고정된 메타 내러티브를 배제하고서도 여전히 모뉴먼트로서의 긍정적인 기능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민에 있어서 반기념비를 검토하는 것은 빼 놓을 수 없는 작업임을 감히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노엄 루푸는 반기념비의 가장 주요한 연구가인 제임스 영조차도 심사위원으로서 호르스트 호하이젤의 반기념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지적하며 사실상 반기념비의 개념이 잊혀졌음을 시사하고 있지만[36] 지금에 와서 우리는 곳곳의 기념물, 혹은 추모물들에서 반기념비의 인식을 발견할 수 있다. 〈Mahnmal gegen Faschismus〉보다 한 해 먼저 제작돼 전사자들을 영웅으로 받드는 대신 한 명 한 명 이름을 가진 희생자로 제시함으로써 관객들이 개개인의 추모를 할 수 있도록 한 마야 린Maya Ying Lin의 베트남 참전용사 메모리얼이 그러하며, 희생자들을 상징하는 168개의 빈 의자의 광장을 중심으로 공원 형태로 조성된 오클라호마 메모리얼이 또한 그러하다. 노엄 루푸가 ‘전혀 반기념비가 아니다’라고 평하고 있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작가 피터 아이젠만 역시 자신의 작품을 “방문객들에게 유럽에서 살해된 유태인들의 기억에 대한 대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방문객 스스로가 그 기억을 찾는 과정을 제공한다”고 말하고 있다.[37]

전통적 모뉴먼트와 대비되는 이러한 모습들은 기실 현대 메모리얼의 전반적인 특성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대상이 되는 사건―홀로코스트에 대해 통합된 정체성을 갖기 어려웠던 독일의 상황은 권위의 해체, 다원화의 움직임과 함께 어느 사회에서나 그 일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문은미는 현대 메모리얼의 개념과 표현 특성을 관람객의 체험과 참여를 작품의 중심에 배치하여 방문자 스스로 메모리얼의 기억과 의미를 찾아 가도록 하며, 과거의 기억이나 역사적 사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보다 희생자들의 부재를 표현함으로써 역사와 개인의 운명, 그리고 방문자들의 감흥이 상호 결합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대상의 성격과 설계자의 방식에 따라 가변적, 임시적, 혹은 유동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특성들은 한 데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집단적이고 공적인 체험을 제공할 뿐 아니라 사적체험의 형성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과거 기억과의 교감과 고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게 된다.[38]

실패한 실험으로밖에는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반기념비들을 자세히 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그 이름은 이어지지 못했으나 현대contemporary 모뉴먼트 전반이 반기념비의 실험이 구현하고자 했던 것들을 잇고 있다는 점에서, 모뉴먼트의 나아갈 길을 논하기 위해 지난 세대의 반기념비들이 어떠한 양태로 존재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비교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시대적으로 반기념비라는 새로운 양식이 요구되었음을 말하기 위해서라면 제임스 영과 같이 둘을 모두 묶어 의미 있는 시도로 평하면 될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으로부터 이렇다 할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면 두 작품을 모두 실패작으로 치부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현대 모뉴먼트가 두 작품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서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러한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여겨지기에 우리는, 두 작품의 어떠한 부분을 잇고 어떠한 부분을 고쳐야 할지 논해야 하는 필요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요헨 게르츠와 에스더 샬레브-게르츠의 작품은, 제임스 영의 지적대로, 석화되어 부담으로만 남아버린 독일의 현대사를 차단함으로써 관객들에게의 새로운 기억의 창출을 시도한 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맥락을 제시하지 않은 채 또 하나의 봉인된 메타 내러티브를 세운 점을 비판할 수밖에 없으며, 반기념비의 정신에 동의하는 작품 활동에 있어서 이 점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와 달리 호르스트 호하이젤의 작품은 한 발 더 나아가 과거의 기억과 부담을 차단하지 않고 오히려 반성적으로(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과거사를 대한 태도에 대한 반성을 말한다) 받아들임으로써 관객 개개인에게 유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인 역사관과 세계관 구축을 촉구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추모물들이 사건의 일시나 희생자의 수 등을 작품이나 혹은 별도의 기록을 통해남기고 있듯이, 당사자들조차 잊은 역사의 흔적을 반성적으로 복원함으로써 내재적 비평의 대상이 될 만한 영역에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자료

Gordon, Ardi, Goldberg, Amos, “Holocaust Monuments And Count-Monuments”, The Multimedia CD ‘Eclipse Of Humanity’, pp. 1-10, SHOAH Resource Center, Yad Vashem, Jerusalem, 2000.(Excerpt from Interview with James E. Young on May 24, 1998.)

Lupu, Noam, “Memory Vanished, Absent, and Confined”, History and Memory(Fall/Winter 2003, Vol. 15, No. 2), pp. 130-164

Young, James E., “Memory and Counter-Memory”, Harvard Design Magazine(Fall 1999, Number 9) pp. 1-10(PDF)

________, “The Counter Monument: Memory against Itself in Germany Today”, Art and the Public Sphere, pp. 49-78, ed. W. J. T. Mitchell,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92.

Wilson, Sarah, “A stranger with secrets : Jochen Gerz, Future Monument, Public Bench”, Phoenix: Architecture/Art/Regeneration, pp. 84-100, Black Dog Publishing, London, 2004.(PDF)

문영민, 〈폭력과 모더니티: 기억의 재각인〉, 《모더니티와 기억의 정치》, pp. 21-53, 현실문화연구, 2006

문은미, 〈현대메모리얼의 개념 표현특성에 관한 연구〉, 《기초조형학연구》(vol.9 no.6, 2008. 12) pp.197-207

전진성, 〈과거는 청산되어야 하는가?〉,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pp. 155-186, 후마니타스, 2005.

___, 〈조국을 위한 희생: 근대 전쟁기념비에 관하여〉, 앞의 책, pp. 187-226.

___, 〈홀로코스트와 문화적 기억〉, 앞의 책, pp. 375-400.

[1]  이 글에서는 두 작품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모뉴먼트와 메모리얼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았으며, 카운터 모뉴먼트와 카운터 메모리얼 역시 구분하지 않고 반기념비로 통칭했다. 다만 본문에 있어서는 문맥에 따라 기념물과 추모물, 기념비와 추모비 등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읽을 때에는 특별히 구분을 두지 않아도 좋다.

[2]  반기념비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광주 망월동 묘지를 언급하는 것은 문영민, 〈폭력과 모더니티: 기억의 재각인〉, p. 41-42, 《모더니티와 기억의 정치》, pp. 21-53, 현실문화연구, 2006에서 힌트를 얻었다.

[3]  전진성, 〈조국을 위한 희생: 근대 전쟁기념비에 관하여〉, p. 190,《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pp. 187-226, 후마니타스, 2005.

[4]  전진성, 〈홀로코스트와 문화적 기억〉, p. 384, 앞의 책, pp. 375-398.

[5]  James E. Young, The Counter Monument: Memory against Itself in Germany Today, pp. 49-50, “Art and the Public Sphere”, pp. 49-78, ed. W. J. T. Mitchell,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92.

[6]  James E. Young, 앞의 글, pp. 51-53.

[7]  James E. Young, 앞의 글, p. 53.

[8]  We invite the citizens of Harburg and visitors to th town, to add their names here to ours. In doing so, we commit ourselves to remain vigilant. As more and more names cover this 12 meter tall lead column, it will gradually be lowered into the ground. One day, it will have disappeared completely and the site of the Harburg monument against fascism will be empty. In the end, it is only we ourselves who can rise up against injustice.

[9]  James E. Young, 앞의 글 p.56.

    요헨 게르츠의 말은 Claude Gintz, “‘L’Anti-Monument’ de Jochen et Esther Gerz,” Galeries Magazine 19(June-July 1987):87을 이 글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10] James E. Young, 앞의 글 pp. 61-63.

[11] Horst Hoheisel, “Rathaus-Platz-Wunde,” p.7, Aschrott-Brunnen: Offene Wunde der Stadtgeschichte(Kassel), 1989.

    James E. Young, 앞의 글, p.72에서 재인용.

[12] James E. Young, 앞의 글, p. 77.

[13] Noam Lupu, “Memory Vanished, Absent, and Confined”, p. 155, History and Memory(Fall/Winter 2003, Vol. 15, No. 2), pp. 130-164.

[14] Noam Lupu, 앞의 글, p. 141.

[15] Noam Lupu, 앞의 글, p. 143.

    필자는 그 이유로 〈Mahnmal gegen Faschismus〉가 여전히 교훈적인 발화 방식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16] James E. Young, 앞의 글, p. 65.

[17] Noam Lupu, 앞의 글, p. 144.

[18] Noam Lupu, 앞의 글, p. 146.

    마지막 문장의 원문은 “Its absence would the completion of Denkmal-Arbeit”이나 문맥에 따라 의역했다.

[19] Noam Lupu, 앞의 글, p. 151.

[20] Noam Lupu, 앞의 글, p. 152-153.

[21] Noam Lupu, 앞의 글, p. 153.

[22] Noam Lupu, 앞의 글, p. 154.괄호 안은 필자가 추가한 것이다.

[23] Noam Lupu, 앞의 글, p. 158.

[24] 개개인의 기억(의견)이 공개적인 공간에 위치한 기둥에 기록됨으로써 공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발화의 지위를 얻는 것을 가리킨다.

[25] Noam Lupu, 앞의 글, p. 139-140.

[26] Noam Lupu, 앞의 글, p. 151.

[27] Noam Lupu, 앞의 글, p. 152.

[28] Noam Lupu, 앞의 글, p. 150.

[29] James E. Young, “Memory and Counter-Memory”, p.9, Harvard Design Magazine 9(Fall, 1999), pp. 1-10.

[30] James E. Young, “The Counter Monument”, p. 65.

[31] James E. Young, “Memory and Counter-Memory”, p. 5.

[32] Noam Lupu, 앞의 글, p. 153.

[33] 홀로코스트는 ‘희생 번제’를 가리키는 말로, 원래는 핵 폭발이나 자연 파괴로 인한 지구의 멸망을 가리키는 데 쓰이던 말이었다. 나치 시기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는 초창기에는 제노사이드와 같은 일반적인 단어가 사용되었으나, 미국계 유대인 단체 등의 홀로코스트 보상 운동 등이 진행됨과 함께 종교적 색채가 짙은 홀로코스트라는 단어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유대인이자 사학자인 노르만 핀켈슈타인은 자신의 저서 〈홀로코스트 산업〉을 통해, 홀로코스트에 대한 추모와 독일에 대한 비판이 실제 피해자, 혹은 그 관계자들이 아닌 미국계 유대인 단체들을 통해 주로 진행되었으며 그것이 주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문제나 시오니즘 운동과 연관되어 있음을 폭로하고 있다.

    한편, 홀로코스트는 주로 유럽 사회의 전통적인 유대인 혐오의 연장으로 이야기되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당시의 유대인 학살이 잠재적 공산주의자에 대한 학살, 즉 반공산주의적인 학살이었으며 실제로 부르주아 계급에 속하거나 반공산주의를 견지한 유대인들의 경우는 탄압을 피했음은 물론 당시 정부와 적극적으로 공조하기도 하였던 사실이 논란이 되고 있다.

[34] 마르틴 브로샤트의 ‘역사화’ 개념에 대해서는 전진성, 〈과거는 청산되어야 하는가?〉, p. 171-172, 앞의 책, pp. 155-186을 참조하였다.

[35] “A Stranger with Secrets: Jocehn Gerz, Future Monument, Public Bench” p. 13, Phoenix: Architecture/Art/Regeneration, pp. 84-100, Black Dog Publishing, London, 2004.(PDF 파일)

    한편 전진성은 이안 부루마의 견해를 인용해 ‘만말’을 “정확한 국역이 불가능한 개념으로, 굳이 의역하자면 ‘과거의 죄업을 상기시키는 기념물’ 쯤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진성, 〈홀로코스트와 문화적 기억〉, p 383 참조.

[36] Noam Lupu, 앞의 글, pp. 156-157.

    호르스트 호하이젤은 1997년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공모에 브란든부르크 문을 폭파하고 그 자리에 석판을 깐 공터를 조성하겠다는 제안으로 응모하였으나 제임스 영 역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모에는 피터 아이젠만과 리처드 세라의 작품이 채택되었다.

[37] 문은미, 〈현대메모리얼의 개념 표현특성에 관한 연구〉, pp. 202-204, 《기초조형학연구》 vol.9 no.6 (2008. 12) pp.197-207을 참조하였다.

    인용호 속의 피터 아이젠만의 말은 James E. Young, At Memory’s Edge―After-Images of the Holocaust in Contemporary Art and Archtecture, p.131, Yale University Press, 2000의 내용을 문은미의 글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38] 문은미, 앞의 글, p.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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