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을 먹고 살기

《2022 코미디캠프: 파워게임》(의 기획공연)(지금아카이브 제작, 2022.08.20-28, 서울: 펀타스틱 씨어터)은 각각 김은한, 안담, 배선희, 신강수가 쓰고 출연하는 네 개의 공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보문구는 “‘강해서 웃기고 약해서 웃긴 우리’의 파워게임”, “힘을 갖고 놀아보기. 서로를 쥐락펴락 해보기. 뒷통수 맞고도 박수치기. 이겨도 져도 즐거울 파워게임에 초대합니다!”.[1]공연 홍보물. 나머지 모든 인용은 홍보물에서 혹은 배우의 대사에서. 후자는 기억나는 대로 적당히 적었다. 폭은 넓다. ‘떨어진 꽃잎, 나뭇가지로 돌아가더라니 호랑나비였구나’(김은한; 아라키다 모리타케의 하이쿠,)에서 ‘여기는 파워 게임, 우리 개는 파워 개임’(안담)까지. 관객에게 반응을 요구하는 신강수의 공연에서부터 제4의 벽이 있다고 해도 좋을 닫힌 연극에 가까운 (그러나 유일하게 무대를 내려와 객석에 뛰어드는) 배선희의 공연까지. ‘퀴어따리 친구들’(담)이나 ‘바이섹슈얼’ 혹은 ‘장애인’인 나(선, 강)가 등장하고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같은 구호가 울리는 세 공연은 비교적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만 김은한의 무대에서는 (아마도 그 역시 같은 의식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직접적인 언급은 찾기 힘들다. 안담과 배선희는 아주 사적인 영역에까지 파고드는 사회의 힘을 소재로 삼지만 무대와 객석의 (권력)관계를 전면화하지는 않는 반면 김은한은 관객에게 속으로 웃기를 청하고 신강수는 여러분이 웃지 않으면 코미디를 그만 두겠다는 으름장을 놓는다.

웃음의 폭과 층 ― 함께 웃(지 않)기

김은한은 코미디를 사랑하지만 감히 자신이 사랑하는 코미디를 겁없이 펼치지는 못하는 ―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젖꼭지 빔~’ 같은 걸 하고 말아버리곤 하는 ― 어느 코미디언이 어느 관객에게 소개 받은 비밀클럽에서 하이쿠를 낭독하는 이야기를 올렸다. 무엇이 웃기고 재밌을 수 있는지, 누가 무엇에 함께 웃을 수 있는지에 관한 실험이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추측에 그치는 것은 그는 속으로 웃으라고 말했고 관객들이 정말로 소리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나는 그 자리에 없었던 듯이 말했다. 반쯤은 사실이다. 나는 속으로도 겉으로도 잘 반응하지 않는데다 웃음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다만 그의 무대가 처음이었던 덕에 (이것이 기획의도에 속하는지 아닌지는 가늠할 수 없지만) 웃음의 폭과 층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했던 말이나 동작이 다른 이들의 무대에서 패러디 될 때마다 웃는, 앞에서는 그의 청을 따라서든 다른 이유로든 웃지 않았던, 관객들을 보면서다.

단순히 반복이 웃겼을 수도,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뜬금 없이 튀어나온 것이 웃겼을 수도 있겠다. 도무지 웃기지 않은데도 이를테면 주류적이어서 그저 의아하거나 불쾌했던 코드가 그 반복 속에서 무시되고 무력화되는 모습이 웃겼을 수도 있겠다. 반대로 성이나 장애, 차별금지법 같은 화두를 웃음과 함께 다루어 본 적이 없는 관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복 속에서 나온 웃음은 어쩌면, 관객 하나하나가 극장 밖에서 가져온 각자의 경험이 서로와 얼마나 다르건, 이 극장에서 인용을 통해 공통의 무언가가 생겨난다는 즐거움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인용되는 내용이나 인용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 발생 자체에서 비롯하는 감정. 웃음이란 너무도 정치적이어서 낯선 이와 함께 하기는 쉽지 않지만, 극장에서 붙어 앉는 관객은 종종 생면부지의 타인이고 관객끼리 대화를 나눌 일은 흔치 않지만, 객석은 무대를 경유해 공통의 경험의 유대가 생겨나는 곳일 수도 있으니까. (기본적으로는 이런 낙관은 품지 않는 편이다.)

마지막 무대는 신강수. 나는 웃기려고 말했는데 상대는 언제나 감동을 받아버리고 만다, 는 흔한 상황에서 출발해 예의 협박을 한 후 이어 가는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우스울 수는 있어도 웃기기는 어려운 것들, 실은 감동적이어야 하는 것들이다. ‘형’을 자처하며 국민의힘 이준석에게 애정어린 충고를 건네거나 ‘라떼는’ 류의 이야기를 펼치거나 하는 식이다. 웃긴 말을 하면 감동을 받아버리곤 하는 관객들에게 이번엔(이라고 적었지만 저번을 알지는 못한다) 처음부터 감동을 지향하는 ‘꼰대’로서 말을 건네는 것이다. 장애인의 자기서사에서 어떻게든 감동(만)을 찾아내는 이들과 고루한 무용담에 감동(만)을 전제하는 이들의 거리는 얼마만큼일까. 웃음도 감동도 허락되지 않는 장애인의 위치에서 그가 하는 말들은 모두 어중간해진다. 저 어중간한 거리를 무너뜨리고서야 비로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코미디는 그만 해야겠다고 했다. 또 할 것이다.

비합리를 먹고 웃는 여자들

웃지 말라고도 웃으라고도 하지 않은, 안담과 배선희의 공연을 좀 더 열심히 보았다. 안담은 반응하지 말라고, 관심을 주지 말라고는 말한다. 함께 무대에 오른 ― 혹은 무대에 끌려 온 ― 개 무늬의 긴장과 흥분을 막기 위해서다. 그가 준비한 것은 ‘나만 있으면 된다는 개저씨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외출도 공연도 금지 당한 여자의 이야기’. 간식과 칭찬으로 무늬를 구슬려 케이지에 들이고 지퍼를 잠근 후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늬가 낑낑대거나 컹컹댄다. 지퍼를 열고 무늬를 달랜 후 다시 시작한다. 뒤로 이어지는 것은 사랑의 역설에 관한, 처절하다면 처절한, 경험담이다. 사냥개로 길러지다 버려진 무늬는 겁도 많고 경계심도 많다. 안담만 있으면 된다, 는 말은 곧 안담은 꼭 있어야 한다는 뜻이어서 그는 이제 혼자서는 외출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유일한 방법은 이렇게 무대에까지 무늬를 데리고 올라오는 것이다. 무늬는 여기에도 오로지 그만 있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무늬를 혼자 두지 않기 위한 사랑의 결단은 ― 안담이 자신의 삶을 모두 포기하지 않는 한 ― 이렇게 학대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동물행동권 카라에서 만든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이라는 훌륭한 문서가 있는데요, 사람들이 공연팀에게 메일로 그 문서를 보내는 모습이 계속 상상되는 거예요.’

배선희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그를 가두는 것은 자기 자신 ― 망상과 두려움과 자살 사고 같은 것들 ― 이다. 자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칼을 숨기고 부정적인 기운을 내보내려 쑥차를 마시고 귀신을 퇴치하려 양갱을 먹는다. 줄곧 아프고 힘들었지만 상담사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자신이 화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여성으로서 갖게 된, 여성으로서의 삶을 견디며 쌓인 화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린다. 알아버렸으므로 분노는 더 커진다. 그러던 그는 꿈에서 토미에를 만난다. 토미에는 이토 준지의 세이렌이다. 그 누구라도 토미에를 만나면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 끝에는, 광기 어린 살육이 있다. 토미에를 사랑하는 이들은 늘 토미에를 살해한다. 늘, 이라는 말이 붙는 것은 토미에가 불사의 몸이기 때문이다. 수없이 조각내어도 토미에는 곧 다시 살아난다. 새로운 삶의 끝에는 또 살육이, 그 죽음의 끝에는 또 부활이 있다.

배선희를 찾아온 토미에는 이 무한한 죽음에 끝을 내어 달라고 간청한다. 자신을 완전히 죽여달라고, 다시는 재생하지 못하도록 마지막 세포 하나까지 모두 없애 달라고. 배선희는 겁에 질린 채, 그러나 성실히, 자신을 지키고 가꾸는 데에 썼던 온갖 요리기구들을 동원해 토미에를 다지고 삶고 튀긴다. 삼킨다. 비로소 죽지 않는 몸에서 벗어나 영혼이 된 토미에는 환희 섞인 분노로 외친다. 드디어 정말로 죽었다고, 하지만 이토 준지 그 씨발 새끼가 살아 있는 한, 그가 죽어도 그의 책이 남아 있는 한, 되살아나는 저주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그는 가볍다. 날아간다. 토미에의 청대로 토미에를 죽이는 배선희와, 토미에를 향한 제 사랑을 이기지 못하고 토미에를 죽이고 마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 그보다는 토미에와 세이렌, 배선희와 오디세우스의 차이를 생각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이들은 바다에 뛰어든다. 혹은 미처 그럴 새도 없이 난파한 배와 함께 가라앉고 만다. 토미에를 본 이들은 토미에를 살해한다. 토미에는 되살아나고 그들의 삶은 무너진다. 죄책감과 공포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자살에 이른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를 막고 자신의 몸을 묶어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도 무사히 항해를 마친다. 패배한 세이렌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오디세우스가 몸을 버림으로써 세이렌 이후의 삶을 도모할 때, 배선희는 토미에의 몸을 받아들임으로써 삶을 이어간다. 오디세우스는 몸을 묶어둔 덕에 바다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홀린 채로 들었던 세이렌의 노래를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므로, 부하들은 귀를 막고 애초에 듣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잠시 몸을 억눌렀다기보다는 그 바다에 몸을 버리고 온 셈이다. 이들은, 적어도 오디세우스는, 이제 몸을 버린 합리성으로서, 세이렌이라는 비합리는 물론 자신의 몸 또한 사라진 세계를 살아간다.

반대로 배선희는 토미에라는 비합리를 양식으로 삼는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다. 온갖 고통을 짊어지고 남은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가 비합리와 합리, 몸과 정신, 사랑 혹은 쾌락과 승리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할 때 배선희는 그러지 않을 수 있다. 유혹을 유일한 능력이자 과업으로 가진 세이렌이 유혹에 실패하고 어쩔 수 없는 죽음을 택할 때 이 ― 배선희가 이토 준지에게서 구해 온 ― 토미에는 자신을 죽이라고 말함으로써 배선희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 이제 토미에를 죽이는 일은 토미에가 지금껏 겪어 온 폭력과 끔찍한 운명을 반복하는 일인 동시에 토미에에게 가장 적실한 사랑을 표하는 일이 된다. 여태껏 토미에에게 사랑에 빠진 누구나가 저도 모르게 저질러 온 살해가 배선희에게서는 더없이 의식적이면서도 충실한 결단의 행위가 된다. 토미에와 배선희 둘 모두 행복한 이 순간에는 사랑과 두려움, 승리와 패배가 나뉘지 않는다.

미친 사랑의 가능성

쑥차로 양갱으로 정화하는 대신, 갖은 건강식을 만들어 먹는 대신, 이 독기 가득한 죽은 살을 먹고서야 배선희는 기운을 차린다. 이제는 귀신이 무섭지 않다. 이제는 삶도 죽음도 무섭지 않다. 꿈에서 깬 그는 헬륨 가스 한 캔을 발견한다. 헬륨 가스를 들이마시고 높아진 목소리로 지금껏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는 가운데 천천히 목소리가 돌아온다. 이것을 몇 번인가 반복한다. 그 헬륨 가스를, 그는 정화제 같은 것이 아니라 지금껏 숨겨 두었던 무언가, 지우고 치워 두었던 어떤 기억들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버리거나 태우는 것이 아니라, 겨우 걸러 놓았던 것을 다시 들이켠다. 무겁고 독한 것들을 다 집어 삼키고서야 ― 여전히 즐겁지는 않을지라도 ― 가벼지워지고 명랑해진다.

안담은 사랑이 사람을 보수적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는 존재와도 이어지는 일인 사랑은 타자를 향해 나를 열어 젖히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하나의 문을 열어 두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닫는 일이기도 하다고.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다른 모두를 의심하고 미워하게 되기 마련이라고. 안담은 무늬를 산책시키다 누군가가 보이면 무늬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어 멀찌감치서부터 경계한다. (안담이 추측하기로) (무늬가 보기에는 안담에게 해코지를 하는) 그런 이들은 대개 남성이므로 무늬는 갈수록 남성을 경계한다. ‘무늬는 젠더 횡단을 몰라요, 젠더를 종단할 뿐이죠. 정확한 이분법을 갖고 있어요. 자기가 어떻게 패싱될지 궁금한 퀴어따리 친구들은 무늬를 만나 보시면 됩니다.’ 이상한 말이다. 만나 보아야 한다는 것. 무늬가 아무리 강력한 이분법을 두고 있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아는 남녀의 이분법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리라. 실은 무늬의 관심은 상대의 성별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안담을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예감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우리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어떤 횡단이 언제나 열려 있을 것이다.

스스로조차 피하며 살다가 온갖 독을 집어 삼키더니 객석을 휘젓고 다닐 만큼의 기운이 생긴, 비합리를 먹고 살고 웃는 배선희를 보며 미친 사랑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토미에가 그에게 줄 수 있었던 것, 그가 토미에에게, 망상 속의 고양이 포옹에게, 3층인 집의 창을 두드리며 길을 묻는 할머니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을. 너만 있으면 된다는 무늬밖에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 외출도 친구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할 성 싶은) 이들을 향해 불안과 분노를 품게 되어 버린 안담은 실은 무늬 말고 다른 한쪽으로도 문을 활짝 열었다. 잠시 멈추어, 굳이 이해할 필요 없을 멀리 있는 삶을 생각한다. 시간을 못 맞추거나 집에서 나올 생각을 않거나 늘 화가 나 있거나 한 사람을 보면서 ― 저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겠지. 혹시 개를 키우나?

References
1 공연 홍보물. 나머지 모든 인용은 홍보물에서 혹은 배우의 대사에서. 후자는 기억나는 대로 적당히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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