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하는 남자들과 몰락하는 세계: 연극 〈맨 끝줄 소년〉

스토리는 진부했다. 문학에 대한 삐뚤어진 열정으로 (범법을 포함한) ‘위험한 일’에 빠져드는 ‘맨 끝줄 소년’ 클라우디오와 그런 소년의 글에 매료된 문학교사 헤르만. 여성 캐릭터들은 평면적이다. 남편에게 ‘도덕주의자’ 소리를 듣는 후아나, 권태로운 중산층 기혼 여성 에스테르. 소설이라면 굳이 끝까지 읽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소설을 읽고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이 작가는 자신의 글만을 남긴 채 세상의 모든 것을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구나, 하는. 클라우디오의 욕망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기 위해, 라는 명분을 달고 있지만 실은 그것은 글에 대한 욕망이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욕망이다. 자신의 글로 자신의 삶을, 주변인들의 삶을 집어 삼키겠다는 욕망.
그런 욕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르만은 클라우디오에게 글을 완성할 것을 종용한다. 관객들에게 소설의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심어 놓는다. “작가 후안 마요르가는 우리 관객을 그런 분위기로 몰아넣고 소년이 쓸 작품의 결말에 신경을 쓰게 하지만 정작 소년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맨 끝줄 소년’은 자신의 자리에 몸을 숨긴 채 온 교실을 둘러보듯 세계를 보고자 한다. 자신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 이해를 글로 읽힌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주장하듯 상상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세계를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려 하는 일이다. 〈맨 끝줄 소년〉**은 그런 욕망에 관한, 진부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리를 뜰 수 없었던 것은, 단지 극장의 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설을 소재로 삼는 연극, 스페인어 희곡을 한국어로 연기하는 연극, 여러 공간들을 하나의 좁은 무대에서 보여주는 연극, 이러한 간극들을 가진 연극으로서 〈맨 끝줄 소년〉은 몇 가지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소설을 연극으로 재현하기 연극의 절반쯤은 클라우디우의 소설이다. 클라우디오가 관찰하는, 라파 네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뜻이다. 관찰을 토대로 쓰는 것이니 어쩌면 수필이나 숫제 기사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연극의 삼분지 일쯤은 그래서 클라우디오의 낭독으로 이루어진다. 나머지는 ‘연극으로서’, 그러니까 대사와 행동으로 상연된다. 관객은 지금 자신이 라파 네 집을 직접 관찰하고 있는지 클라우디오가 재구성한 사건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한 클라우디오가 낭독하는 장면들이, 혹은 낭독 중간중간의 장면들이, 무대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일부는 무대 위에서, 일부는 무대 뒤 유리창 너머의 통로에서. 그럼으로써 이 연극은 소설(의 낭독)과 연극(의 상연)을 교차시키며 연극이라는 장르가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 왜 『맨 끝줄 소년』이라는 소설이 아니라 〈맨 끝줄 소년〉이라는 연극이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실험한다.
무대는 이러한 실험에 적절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네 개의 책상은 학교와, 헤르만의 집, 라파의 집 등 각각의 공간을 맡는다. 공간 전환은 무대를 가로질러 다른 책상으로 가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초점 전환은 책상 위의 스탠드가 맡는다. 무대 뒤로는 유리벽이 있고, 유리벽 너머에서는 시야 바깥의 사건, 혹은 회상 속의 사건 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별다른 장치 없이도 급격한 장면 전환을 이루어내는 이 무대는 소설의 행갈이와 무대의 장면전환이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준다.

허수와 실수 허수, 그러니까 루트 마이너스 일은 클라우디오가 라파에게 가르치고 싶어하는 것이자 라파는 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개념이다. 클라우디오는 이것을 제 소설의 제목으로 삼는다. 아마도 삶의 정수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는 무료한 중산층의 삶을 비꼬는 제목일 것이다. 혹은 관찰을 토대로 한 것으로 이야기되는 그 소설이, 실은 허수와 같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일임을 몰래 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허수, 텅 빈 숫자, 내용 없는 숫자. 한국어에서는 그것에 실체가 없음이 강조되지만 영어로 imaginary number, 혹은 스페인어로 número imaginario라고 쓰면 조금은 달라진다. 그것은 엄연히 상상 속에 현존하는 것이다. 수식에서 사용되듯, 상상에서 시작된 그것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실체적인 작용을 해낸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중산층의 삶도, 클라우디오의 소설도, 앞문단에서 쓴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 될는지도 모른다.
중산층의 삶은 아무런 정수랄 것 없이도 세계를 가득 메우는 것이 되고, 클라우디오의 소설은 아무런 사실 없이도 이 사실의 세계를 집어삼키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빗물조차도 저렇게 맨발로 춤추지 않는다”는 클라우디오의 시가 그러했듯, 아무런 사실 없이도 그의 문장들은 이 세계를 뒤흔들어 버리고 말 것이다.허수는 제곱을 하면 실수가 된다.

중산층 남자들의 몰락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실제로 누가 썼는지야 알 수 없지만) 프로그램북에 실린 예술의 전당 고학천 사장 글의 제목은 “중산층의 몰락, 위기의 남자들은 어디로!”이다. 이 글의 제목대로 이 연극은 (비경제적인 의미에서) 몰락한 중산층을 다룬다. 대학에 돌아가고 싶지만 공부는 커녕 집수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에스테르, 일하던 갤러리가 문을 닫게 생긴 딜레탕트 후아나, 자기 사업을 펼치고 싶지만 회사에서조차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아버지 라파, 소설가가 되고 싶었지만 좌절하고 문학교사가 된 헤르만.
에스테르는 자신이 걸어 둔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후아나는 예술의 현존을 신봉하지만 그림을 팔기는커녕 예술의 가치로 남편을 설득하지도 못한다. 라파는 사업을 핑계로 접대부가 나오는 술집에 갔던 것을 들킨다. 헤르만은 자기 서가엔 제임스 조이스 따위는 없다고 외치지만 실은 소중히 꽂아두고 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꾸리지 못하는 것이 하나의 몰락이라면, 이들은 몰락을 겪고 있다.
이야기의 끝에 몰락하는 것은 남자들이다. 외사에서 자리보전이 어렵게 된 라파, 클라우디오에게 집을 침범당한 헤르만. 후아나는 자신이 팔지 못한 그림을 직접 사다가,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에 건다. 에스테르는 비록 이혼은 미룬 듯하지만, 클라우디오에게도 라파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챙기기로 한 듯 보인다. 중산층의 몰락이 곧 남성들의 몰락이라는 것은, 몰락한 적 없이도 이미 몰락한 개인들 ― 여기서는 그러니까 여성들의 삶을 연극이 어떻게 포착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지점이다.

후아나가 일하는 갤러리를 상속 받게 된 자매는, 후아나가 전시하는 작품을 두고 ‘환자의 예술’이라 칭한다. 고금의 개개인이 병들지 않았더라도 예술이 필요했을까? 삶이 권태롭지 않았더라도 연극이 필요했을까? 관객들은 스스로가 환자인지 아닌지를 되물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이 건강했더라면 이 연극에서 무엇을 보았을지를 생각하며, 그 허수와 같은 상상을 거듭함으로써, 관객들은 건강한 자신을 찾게 될 것이다.
예술에 힘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 누군가의 삶을 고매하게 이끌기 때문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그러한 많은 것들을 해내든 못 해내든 예술에는 힘이 있다, 고 나는 믿는다. 세계를 흔들 수 있는 힘이 ― 그리함으로써 세계 속 인간들에게 자세를 고칠 것을 요구하는 힘이 말이다.
연극이라는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자세를 요구하는가. 그것이 내게 남은 고민이다.

* 김유미, 「문학이냐 삶이냐, 소년으로 상징되는 허수의 존재론」, 프로그램북.
** 후안 마요르가 작, 고 김동호 연출, 손원정 리메이크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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