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소에 관한 단상

   토르소torso, 즉 머리와 팔다리 없이 몸통만 남은 조각상이 하나의 장르가 된 것은 우연을 통해서였다. “인체의 일부인 토르소가 그 자체만으로도 조형적이며 완벽한 개체로서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고대 인체조각 작품들이 땅속에 묻혀 있다가 파손된 부분으로 발굴되어 우리에게 제시된 우연에 의한 것이다. […] 만일 고대 인체조각이 파손된 대리석상으로서가 아니라 온전한 상태의 청동상으로 발굴된 것을 우리가 보아 왔다면 토르소의 개념은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 며 토르소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제시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창림 1997, 195). 다시 말해, 오랜 시간을 거치며 파손되고 남은 조각상의 몸통이, 그 자체로 하나의 미술작품으로 보이게 된 것이 곧 토르소의 기원인 것이다.
요한 요아힘 빙켈만Johann Joachim Winckelmann은 머리와 팔다리라는 “자연의 가장 고귀하고 가장 의미 깊은 부분을 잃은” 헤라클레스 조각상을 설명하며 이를 가지를 쳐내고 줄기만 남은 통나무에 비유한다 (Winckelmann 1759, xiv) (토르소는 인체의 몸통 혹은 나무의 줄기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이다). 하지만 이 글, 「로마 벨베데레 토르소에 대한 설명Description of the Torso in the Bevedere in Rome」에서 빙켈만은 토르소를 그 자체 고유한 작품으로서라기보다는 훼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상할 것이, 혹은 사유할 것이 남은 어떤 것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우리를 더 멀리 이끌고자 하는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이 슬픈 사색을 떠올리게 하며, [훼손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것들에서 여전히 배울 것이 많음을 보여준다” (xviii).
토르소를 위대했던 이상ideal의 흔적이 아닌 독립적인 감상의 대상으로 보게 된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다. 토르소는 특히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이후 하나의 주요한 장르로 인정받게 된다. 로댕에게서 토르소는 단순히 팔다리를 잃은 전신상이 아니라 팔다리를 생략한, 그럼으로써 몸통에서부터 응집된 에너지가 방출되는 새로운 예술이 된다. 로댕의 벗이었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글을 모은 책 『오귀스트 로댕』은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Archaic Torso of Apollo」라는 시로 시작되는데, 이 시는 이렇게 끝난다.

맹수의 털가죽처럼 빛나지도 않고
별처럼 사방으로 빛나 뻗지도 않으리
그러나 그대를 바라보지 않는 부분이 없기에
그대는 새로이 살아야 하리 (Rilke 1902)

로댕의 열렬한 독자 릴케는, 토르소를 시선을 잃고 말을 잃은 몸이 아니라, 온몸으로 보고 온몸으로 말하는 존재로 읽은 것이다.
그렇다면 토르소의 예술적 가치를 부정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로댕의 토르소가 보여주는 강렬한 시각적 인상은 물론이고, 예술을 ‘온전한 몸’을 재현하는 수단이 아닌 현실세계의 질서와는 다른 질서로 자신의 이상을 내어보이는 하나의 독립적인 체계로 만든다는 미학적 해석까지가 토르소의 존재 가치를 긍정하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물어야 한다. 생략을 통해 토르소가 내어보이는 응집된 무언가, 그 무언가는 대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말이다.
빙켈만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토르소는 어떠한 이상을 내어보인다. 여기서 이상이란 인체를 통해 체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인체란, 남성의 인체와 여성의 인체 두 가지로만 나뉜다. 남성의 몸통이 강건함을, 과장 섞어 말하자면 숭고함을 표현한다면 여성의 몸은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이상이라는 말이 함축하듯, 토르소는 실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상상적인 무언가 ― 여기서 감히 단언하자면 젠더 바이너리라는 상상 속의 무언가를 재현한다.
고대 조각상의 파편에서부터 현대의 초입에 있는 조각상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에 젠더 바이너리를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과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샤프츠베리에서 비롯되어 칸트에서 정립된 미적 무관심성의 이념은 미적 대상을 관조할 때 사심을 갖지 않을 것을, 특히 (혹은 종종) 성적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남성의 토르소든 여성의 토르소든 그것은 성적으로 독해되지 않는다, 혹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캐롤린 코스마이어가 이미 지적한 바 있듯, 무관심성의 이념은 미적 관조라는 사태를 서술하는 개념이기보다는 성애화된 시선을 숨김으로써 그 응시를 관조로 포장하는, 그 응시가 토대로 삼는 권력 관계를 숨기는 개념이다.
이러한 독법을 따른다면, 토르소는, 특히 여성의 토르소는, 실은 성적 응시의 대상이다. 여성의 누드를 담은 많은 고전 회화들이 주인공의 시선을 먼 데로 돌림으로써 관람자의 시선을 보호하듯, 토르소는 주인공의 시선을 삭제함으로써, 나아가 거부의 제스쳐를 취할 수 있는 주인공의 팔다리를 삭제함으로써 관람자를 보호한다. 토르소가 온몸으로 관람자를 바라볼 때, 그리 함으로써 자신의 빈 자리들을 강렬히 내어 보일 때, 관람자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삶대로, 자신의 상상대로, 그 빈 자리를 채울 뿐이다.
토르소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를테면 『오체불만족』의 저자와 같은 이들이 있다. 이들을 생각하면, 팔다리가 없음을 주체성 없음으로 읽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다. 토르소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여전히, 팔다리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낼 것을 요구 받고 있음을 ― 그러지 않는다면 주체성 없는 이로 읽힘을 알기 때문이다.
토르소의 정치학을 생각한다. 토르소가 팔다리 없이도 가능한 새로운 삶을 상상하게 하는, 새로운 정치학을 여는 그런 날이 올까를 생각한다. 절단된 어깨죽지와 장딴지에서, 팔다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자라 나오는 그런 토르소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까를 생각한다.

* 이창림, 「Torso 와 그 表現에 관한 硏究」, 『美術敎育論叢』 第六輯, 韓國美術敎育學會, 1997, pp. 193-229.
* Rilke, Rainer Maria, “Archaic Torso of Apollo,” trans. Jessie Lemont, in Auguste Rodin, Sunwise turn inc., 1919.
* Winckelmann, Johann Joachim, “Description of the Torso in the Belvedere in Rome,” trans. Curtis Bowman, in Essays on the Philosophy and History of Art, Vol. 1, Thoemmes Press, 2001, pp. xiii-xv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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