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언의 너머 혹은 선언의 틈

이른바 활동가가 피로와 좌절을 느끼는 것은, 때로는 적이 ― 책임자나 권력자가 아니라, 세상이 ― 너무도 거대하고 강력하여 아무것도 변하지 않거나 무엇을 해야 통할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지만 또 때로는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의 언어밖에는 배운 것이 없으므로 그 문법 그대로, 그러니까 부지중에 누군가를 빼고 말하게 되는 일이 너무도 잦으므로, 기껏 벼리고 벼려 찾은 말이 세상에서는 통하지 않는 일이 너무도 잦으므로 찾아오는 피로와 좌절이 있다. 아주 낭만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의 것과는 다른 언어를 배우고 익힌 이들, 이른바 예술가들에게 무력감을 안기는 “예술이 탄압과 차별 앞에서 무엇도 실질적으로 바꿔내지는 못한다는 생각”[1]김화용, 전시 서문, https://thebodymanifesto.xyz/ko/information/, 2021. 다음 단락의 인용도 같은 글.은 아마도 후자와 닿을 것이다. 물론 이들이 닿는 것은 둘이 딱 떨어지게 나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이자 전시기획자인 김화용은 “사진과 영상은 증언이 되고 노래가 [되어] 함께 입을 맞출 수 있게” 하며 예술이 “정치나 제도가 재빨리 봉합하지 못하는 간극의 시간에 함께 머무른다”는 믿음으로, 혹은 희망으로, 활동가거나 작가거나 활동가이자 작가거나 한 이들을 불러 모은다. “‘낙태죄’ 뒤에 존재한 위계와 배제의 문제, 음지화되어 있던 다양한 몸의 경험들, 알 기회를 뺏겼던 건강권과 연결된 정보, 견고한 편견에 눌려 차마 말하지 못했던 여성 및 소수자의 섬세한 감정 등”에 주목해 “‘낙태죄’가 없는 세상에서 작품을 매개로 임신중지를 포함한 몸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전시 《몸이 선언이 될 때》(김화용 기획, 서울: 보안1942, 2021.10.13-11.03.)다. 《몸이 선언이 될 때》는 한국과 폴란드의 낙태죄 폐지 투쟁을, 낙태죄에 국한되지 않는 갖가지 몸들의 자유를, 제도에 국한되지 않는 개개인의 역사와 욕망을 잇는다.

전시장 입구는, 마치 투쟁 없이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는 듯, 커다란 피켓으로 가로막혀 있다. 일렉트라 KB의 〈시위 피켓_AAA〉(2021)다. 실제 시위 현장에서의 퍼포먼스에 쓰이기도 한 이 이미지에는 “나는 태초부터 당신의 것이 아니다I WAS NEVER YOURS”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피켓 라인’을 지나 뒤를 보면 ― 여성 혐오에 맞서는 의미로 ― 마찬가지로 시위에서 쓰여 온 이미지인 〈붉은 번개〉(올라 야시오노프스카, 2020)가 늘어서 있다. 그 옆에는 셰어(나영정, 안팎, 이은진)의 <울퉁불퉁한 연대기: 터져나온 저항, 몸의 발화들>(2021, 디자인 협업 여혜진)이 놓인다.[2]그 옆에 놓인다, 고 썼지만 이 작업의 일부인 연표 두 줄만이 그렇다. (연표는 분류 기준을 명시하지 않은 세 개의 갈래로 구성되어 있고 같은 시기의 … 각주로 이동 한국에서 여성, 장애인, 퀴어, 빈민 등 소수자의 몸에 가해진 제도적, 문화적 폭력과 그에 맞선 싸움의 역사를 기록한 연표로 구성된 이 작업은 “우리의 임신중지를 지지하라”, “낙태죄 폐지는 ‘비정상인’ 승리의 역사 될 것” 등 상징적인 구호들을 함께 제시한다.

예술이 “함께 입을 맞출 수 있게” 한다면 대개 이런 간결하면서도 상징적인 이미지들 ― 도상이든 구호든 가사든 멜로디든 ― 을 통해서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함께 외치는 구호, 함께 부르는 노래에 담을 무언가를 찾고 만드는 것, 함께 행진하는 길을 내는 것 또한, 어쩌면 그것이, 예술의 역할이다. 사소한 이야기들을 샅샅이 뒤지는 것. 맞은편에서 A-P-P(The Archive of Public Protest)〈거리 투쟁의 아카이브〉(2020~)는 집회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모였는지, 어떤 구호가 나왔는지만이 아니라 거리에 나온 이들 하나하나의 얼굴을, 그 표정을 기록한다. 그 옆에서는 전규리가 〈다신, 태어나, 다시〉(2020)를 통해 죽음 가까이에 있거나 태어나지 못했거나 태어날 1930년, 1990년, 2050년 백말띠 여성의 삶을 추적하고 상상한다. 아들을 낳지 못한, 아들인 줄 알고 ― 딸이리라 짐작하면서도 ― 1990년생 백말띠로 자신을 낳았던 어머니와의 대화를 경유해서다.

김화용이 이 전시의 시간적 배경으로 지목하는 “‘낙태죄’가 없는 세상”은 미래의 어떤 시점(만)은 아니다. 후속 입법 ― 단순한 비범죄화에 그치지 않는, 권리로서의 임신중지에 대한 실질적인 접근성을 보장하는 ― 은 요원하고 낙인은 여전하므로 가끔 헷갈리지만, 낙태죄 없는 세상이란 바로 지금이다. 전규리의 어머니는 어떤 질문들에는 답하지 않는다.[3]물론 정말로 답을 않은 것인지 전규리가 편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치나 제도가 재빨리 봉합하지 못하는 간극”이란 바로 이런 지점일 것이다. 제도는 바뀌었지만 그 영향력은 남아 있는, 그렇기에 여전히 무언가를 말할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채 남는 영역. 혹은 일본의 유산 태아 공양 전통과 작가 스스로가 임신중지를 거치며 느낀 복잡한 감정을 엮는 애니메이션 〈미즈코[水子]〉(키라 데인·케이틀린 레벨로, 2019) 역시 제도의 변화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잔여 ― 오히려, 삶의 핵심 ― 를 건드린다.

〈My Embodied Memory〉(2019)에서 이길보라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사이에 앉아 둘을 인터뷰하며 이 간극을 형상화해 끄집어 낸다. 서른 해쯤 전, 혹은 예순해 쯤 전, 다른 시기에 다른 두 몸에서 벌어진 임신중지의 기억은 바로 몇 해 전의 일 ― 이길보라는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한다 ― 과 공명한다. 부끄럽다고, 보여주지 말라고, 할머니는 얘기할 수 있지만 자신은 보여줄 수 없다는 작가의 어머니와[4]그는 농인으로 수어를 사용한다. 나는 수어를 할 줄 모르므로 알 수 없지만, 자막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발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칭했다. 산 건 뒤돌아보기도 싫다는 할머니. 물론 그럼에도 이들은 많은 것을 이야기하며 그 이야기는 관객에게 그들이 지나온 시대를 전한다. 하지만 이 작업이 정치적이 되는 것은 단지 거기에 그 시대의 억압이 개개인에게 남긴 상흔이, 지금 우리가 싸우는 억압의 뿌리부터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니다. 부끄러워 하거나 진절머리 치게 되는 그 마음을, 피해나 분노로 축소할 수 없는 “간극”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보다 넓거나 적극적인 의미에서 낙태죄 없는 세상, 아예 성적인 억압이 없는 세상을 상상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유토피아의 도래를 전적으로 확신한다 해도,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모든 의심을 유예하고서 유토피아를 상상한다 해도 어떤 틈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전통적인 일대일-이성애-가족 규범 너머에서 시도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기록한 일렉트라 KB의 〈핵친족주의 이후의 퀴어적 변화들: 돌봄과 상호 원조의 급진적 가족 구조, 사이보그와 여성 신을 중심으로〉(2021)는 그저 자유롭고 즐거워 보이는 모습을 제시하지 않는다. 의료적 트랜지션은 꽤 오래도록 “말 한 마리가 내 가슴을 발로 차는 것 같은”[5]〈핵친족주의 이후의 퀴어적 변화들〉에 포함된, 레드 워시번의 「자유의 날」. 통증을 동반할 것이다. 함께 사는 이들의 담담한 표정에서는 언제까지고 삶에서 사라지지 않을 어떤 멸렬함이 읽히고 말 것이다.

강라겸의 두 작업은 보다 전면적인 ― 신화적이거나 공상적인 ― 차원에서 그러한 유토피아를 탐색하지만 그 역시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다. 성별의 경계는 물론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에 속박되지 않는 신화적 존재들을 그리는 〈소원도〉(2013)는 우리는 모르는 어떤 존재의 혹은 어떤 세계의 탄생을, 유토피아의 근원을 상상한다. “비체들”의[6]작업 소개에서 인용. 땅을 그린 이 변상도의 군데군데는 지옥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학적 상상력을 토대로 동성 생식과 진화된 존재를 말하는 〈난자 두 개로 태어난 새끼 쥐의 꿈을 꿔〉(2021)의 화자는 아마도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성기 결합과 여성의 죽음을 각오한 임신출산이 그저 전설이 되어버렸을 미래에 “난자 두 개로” 태어날 어느 아이가 살아갈 세계를 “질투”한다.

괴로움 없는 세계를 기대할 줄 모르고 이형異形의 몸에서 곧장 지옥을 떠올리며 담담한 표정으로부터는 어떻게든 멸렬함을 상상해 내고 마는 나는 결국 역사로 돌아가고 만다. 내 상상과 독해의 틀이 되어버린 역사적 조건들로. 임신이나 출산, 관계, 여성, 성소수자 같은 “낙태죄”를 둘러싼 화두들이나 “몸이 선언이 될 때”라는 말에서 떠올릴 만한 주체성과는 다소 동떨어져 보이는 전규리의 〈산증인〉(2021)을 마지막으로 짚었다. 한국전쟁 포로의 몸에 강제로 새겨졌던 반공 문신을 통해 문자 그대로 몸에 규범을 새기는 국가의 폭력을 추적하는 작업이다. 몸과 규범의 어느 역사, 혹은 몸과 규범의 은유와 함께, 무언가를 이해하고 상상하기 위해 얼마나 멀리까지를 에두르고 아울러야 하는가를 ― 그리고 대개 그것은 실은 괜한 에두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 생각하며 보았다.[7]작업 소개에 따르면 “〈산증인〉은 전후 한국 문신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사회-구조적 억압이 어떻게 우리의 몸과 자아상에 남아있는지 탐구하는 … 각주로 이동

References
1 김화용, 전시 서문, https://thebodymanifesto.xyz/ko/information/, 2021. 다음 단락의 인용도 같은 글.
2 그 옆에 놓인다, 고 썼지만 이 작업의 일부인 연표 두 줄만이 그렇다. (연표는 분류 기준을 명시하지 않은 세 개의 갈래로 구성되어 있고 같은 시기의 사건들도 성격에 따라 세 연표에 나뉘어 기재되어 있다.) 나머지 연표와 구호들은 전시장 안팎에 흩어져 있다. 작가로 기재된 이들 중 ‘안팎’은 나인데, 늘 그렇듯 미미한 역할만을 했다.
3 물론 정말로 답을 않은 것인지 전규리가 편집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4 그는 농인으로 수어를 사용한다. 나는 수어를 할 줄 모르므로 알 수 없지만, 자막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발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칭했다.
5 〈핵친족주의 이후의 퀴어적 변화들〉에 포함된, 레드 워시번의 「자유의 날」.
6 작업 소개에서 인용.
7 작업 소개에 따르면 “〈산증인〉은 전후 한국 문신의 역사를 통해 오늘날 사회-구조적 억압이 어떻게 우리의 몸과 자아상에 남아있는지 탐구하는 멀티미디어 설치 및 영상 프로젝트 시리즈 중 일부인 영상”으로 이 프로젝트에서 작가는 “여러 문신의 역사”를 추적한다. 다른 어딘가에서는 아마 보다 가까이서 저 화두들에 닿을 것이다.

One thought on “선언의 너머 혹은 선언의 틈

댓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