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섭의 떨리는 다리와 “무용수-되기”

휠체어를 탄 김원영과 김원영이 탄 휠체어가 무대를 빙빙 돈다. 양쪽에 객석을 두고 길게 뻗은 공간이다. 그가 교차하는 관객의 시선을 몇 차례 가로질러 통과하고 나면 이본 라이너의 〈트리오 ATrio A〉 영상이 재생된다.[1]1978년에 이본 라이너가 춘 것을 기록한 영상이다. 이 영상을, 그리고 이 공연 ― 휠체어를 탄 김원영과 그렇지 않은 최기섭이 함께 춤추는 〈무용수-되기〉(김원영·프로젝트 이인 제작, 서울: 언더스탠드에비뉴, 2021.12.04-05.)[2]2020년 11월 서울문화재단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에서 초연되었고 2021년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에서도 … 각주로 이동 ― 을 설명하는 몇 개의 문장과 함께다.

“걷다가 바닥에 앉고, 일어나서 팔을 들어올리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다가 다시 바닥에서 구르는 등의 평범한 움직임들로 구성되어 있”는 〈트리오 A〉는 여기서 “어떤 움직임이든 춤이 될 수 있다는 움직임의 ‘평등’을 현시”하는[3]최기섭, 「트리오 A」, 《무용수-되기》 웹사이트, 2021. 작품으로서 상연 ― 혹은 인용 ― 된다. 말하자면 어떤 움직임이 무용일 수 있는지, 누가 무용수일 수 있는지를 질문하(게 하)는 작품으로서. 이 영상이 끝나고 시작되는 둘의 움직임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자 또한 질문이다.

“평범”하지 않게 여겨지는 움직임 ― 예컨대 바닥에 앉거나 일어서는 것이 아닌 움직임, 바닥을 구르지 못하는 이의 움직임, 요컨대 장애가 있는 몸의 움직임은 춤일 수 있는가, 장애인의 몸은 무용수의 몸일 수 있는가. 거칠게 말하자면 이런 질문일 것이다. 둘은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김원영이 〈트리오 A〉의 움직임을 제 몸에 맞게 번역하고, 그것을 최기섭이 다시 제 몸에 맞게 번역한다.[4]영상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다만, 거기에는 두 사람이 영상을 함께 보며 〈트리오 A〉를 함께 배웠다는 말도 나온다. 번역본이 원본을 얼마나 … 각주로 이동 그러므로 둘은 달리 움직인다. 김원영이 휠체어 앞바퀴를 들고 몸을 뒤로 기울일 때 최기섭은 점프를 하는 식이다.

그 시점에서 이본 라이너도 점프를 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5]딴소리지만, 움직임을 기억하는 건 내겐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외국어를 들을 때 아는 단어는 그나마 알아 들을 수 있지만 전혀 모르는 단어는 도통 … 각주로 이동 그저, 최기섭의 움직임이 이본 라이너의 것과 얼마나 달라졌든, 김원영보다는 최기섭이 〈트리오 A〉에 가깝게 움직인다는 평을 들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어쨌거나 이본 라이너는 공중으로 뛰어오르고 바닥을 구른다. 김원영은 어느 쪽도 하지 ― 해내지 ― 못한다. 〈트리오 A〉가 “움직임의 ‘평등’을 현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김원영의 몸은 평등에 참여하는 데 실패하는 셈이다. 역으로 김원영의 움직임이 무용이라고 한다면, 〈트리오 A〉는 평등을 상상하고 현시하는 데에 실패하는 셈이다.

대답으로서 이들의 움직임은 이것 역시 무용일 수 있다고, 이들, 정확히는 휠체어에 앉은 이 역시 무용수일 수 있다고 답한다. 적어도 그러고자 할 수 있다고 ― “무용수-되기”를 (감)행할 수 있다고 ― 답한다. 역으로 질문으로서 이들의 움직임은 움직임의 평등이 현시된 적이 있는지를 묻는다. 움직임에 평등이란 것이 있는지를 묻는다고 하는 쪽이 좀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평등을 어떤 비교를 토대로 말할 수 있는 개념으로 여긴다면, 이것과 저것이 어떤 의미에서든 같을 때 말할 수 있는 개념이라면, 말이다.

움직임의 평등을 단언할 만한, 〈트리오 A〉보다 더 나아간 안무를 생각할 수 있을까. 휠체어 이용자‘도’ 혹은 다른 어떤 장애가 있는 몸‘도’ 할 수 있는 움직임을. 아닐 것이다. 반대로 예의 휠체어를 기울이는 동작과 같이 휠체어를 써서만 할 수 있는 움직임이라면 또 어떤가. 최기섭은 설 수도 뛰어오를 수도 있지만 바퀴는 갖고 있지 않다. 휠체어에 앉을 수는 있지만, 앞바퀴를 든 채로 균형을 잡는 연습을 하고 이에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일상적으로 휠체어를 사용하는 이가 생활 속에서 체득한 기울임과 무용수가 연습해 얻은 기울임은 아마도 다를 것이다.

이렇게, 움직임의 평등이 같음을 토대로는 성립할 수 없다면, 오히려 다름을 통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면. 평등을 찾는 안무는 오히려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움직임이 아니라 누구도 할 수 없는, 오직 그 제안자 ― 주인이라고 썼다가 고쳤다 ― 만이 할 수 있는 움직임을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고난 몸에 훈련을 더해서야 겨우 익힐 수 있는 동작, 실은 누구의 것도 아닌 그저 이상理想인 동작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각자 익히는, 서로의 삶이 다르기에 서로 따라 할 수 없는 움직임. 누구나 할 수 있어 보이는 것조차도 실은 그렇지 않음이 드러나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어떤 평등을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원영은 이윽고 무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멈춘다. 이동을 배제하고 상체만을 움직인다. (최기섭은 물론 나라도 대강은 할 수 있을 ‘평범한 움직임’이자 ‘생활’에서는 할 일이 없을 무의미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움직임이다.) 최기섭은 무대에 없다. 김원영 홀로, 비교 대상 없이, 한참을 움직인다. 김원영이 삶을 통해 익혔을, 그러니까 김원영의 삶이 김원영에게 가능케 했을 움직임을 생각하며 앞을 보고 있던 나는 잠시 혼란에 빠진다.[6]첫머리의 영상에서 〈트리오 A〉를 설명하는 문장에는 여기서 이본 라이너가 맨발로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일상적인” 움직임을 한다는 … 각주로 이동 이동을 멈춤으로써 휠체어를 지우는 것처럼, 적어도 이 ― 시각을 통해 감상하는 ― 무대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그의 삶의 조건 하나가 논외로 빠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혼란은 깊어진다. 그는 이제 휠체어에서 내려와 두 발과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동에 종종 휠체어를 필요하다는 조건에 더해, 휠체어를 이용해 이동함으로써 만들어 왔을 조건들까지가 ― 흔히 상상하기로 가능성까지가 ― 지워진다. 그간 익혀 왔기에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그만의 것일, 움직임이 완전히 끝난다. 그로서는 어렵고 불편할 움직임이, 종종 그에게 노력이나 극복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어 왔을 성싶은 움직임이, 그보다는 최기섭이 훨씬 능란히 해낼 것 같은 움직임이 시작된다.

물론 그가 때도 장소도 가리지 않고 휠체어에 앉은 채로만 지내리라고, 그것만이 익숙하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바닥에 앉거나 눕는 시간이 있을 것임을 알고 있다. 휠체어를 이용할 수 없는 환경에서 혹은 굳이 휠체어를 쓸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 무대에서 보인 것과 같은 식은 아니더라도) 손발을 땅에 짚고 움직일 것이다. 나의 혼란은 어쩌면 삶의 가능성이 기술로써 ― 휠체어를 비롯해 좁은 의미에서의 기술과 삶을 용이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기술 양자로써 ― 비로소, 특히 양적으로, 확장되거나 안정화되는 모습을 생각할 때만 당연하다.

김원영의 두 손과 두 발은 땅에 닿아 있다. 신체의 나머지는 모두 공중에 떠 있다. 두 다리는 엇갈려 있다. 최기섭 역시 옆에서 같은 동작을 하고 있으므로 이 문장의 주어는 최기섭으로 바꾸어도 좋다. 하지만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쓰면 주어를 공유할 수 없는 문장이 나올 것이다. 김원영과 최기섭의 키는 꽤 차이가 나므로 두 몸이 그리는 산山 혹은 호弧는 크기가 다르다. 김원영의 하체는 ‘일반적인’ (혹은 최기섭의) 상하체 비율에 비추어보자면 상체에 비해 짧으므로 두 산 혹은 호는 각도 역시 다르다. 김원영과 같은 ‘스코어’로[7]같은 사이트의 「바닥 변주 장면 스코어」 참조. 움직여도, 최기섭은 김원영과 같은 형태를 그리지 못한다.

혼란이 가라앉은 것은 최기섭의 다리를, 그 근육이 끝없이 떨리는 모습을 보면서였다. 일상적인 이동과 무용에 모두 쓰이는 그의 다리는 김원영의 것보다 길 뿐만 아니라 마땅히 더 강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김원영이 하지 못하는 동작을 해낼 수 있어야 한다. 김원영이 할 수 있다면 그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그는 김원영의 것과 같은 문장으로 서술할 수 있는 움직임을 해낸다. 그러나 그의 다리는, 김원영의 것과 달리, 힘에 부쳐 내내 떨린다. 팔로 체중을 지탱하는 동작은 김원영이 훨씬 익숙할 것이다. 팔은 그가 더 강할 만하다. 최기섭은 평소에 다리로 움직일 것이므로, 또한 다리 자체의 무게가 김원영의 것보다 훨씬 더 나갈 것이므로, 여기서도 속절없이 다리에 의지해야 한다. 다리를 지탱해야 한다. 이내 그의 다리는 힘을 잃고 부들부들 떨린다.

최기섭이 움직일 수 있는 폭은, 김원영이 움직일 수 있는 폭을 전부 덮지 못한다. 다리의 떨림을 보며 한편으로는 김원영에게 고유하게 가능한 움직임을 생각했다. 또 한편으로는 김원영만이 아니라 최기섭 역시 제 삶의 확인된 가능성에 벗어나 있음을 생각했다. 다른 곳에서 떨림 없이 가능할 최기섭에게 고유한 움직임을 생각했다. 김원영이 원본이 될 때 최기섭의 번역이 실패함을, 김원영의 것으로 비치기 좋을 실패가 〈트리오 A〉의 것이 되었다가 최기섭의 것이 되는 경로를 생각했다. 결국 모두가 실패하는 곳에서 말할 수 있는 평등을 생각했다. 엎드려 뻗친 자세에서도 다리가 떨리지 않는 김원영의 가능성 혹은 유능함이 실은 또 얼마나 무용한지를, 고유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 아무 의미도 내세울 수 없음이 아니라 ― 생각했다.

References
1 1978년에 이본 라이너가 춘 것을 기록한 영상이다.
2 2020년 11월 서울문화재단 장애·비장애 문화예술 동행프로젝트 《같이 잇는 가치》에서 초연되었고 2021년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에서도 상연되었다. 나는 전자를 보았고, 후자는 초연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들었다. 원래 25분 길이였던 것을 확장해, 이번에는 45분가량으로 제작했다. 저번 관극 후에는 (다른 것들을 함께 생각하며, 주로 드라마터그 하은빈의 글을 경유해) 「대체 텍스트, 번역, 비평 혹은 패싱의 정치학」을 썼다.
3 최기섭, 「트리오 A」, 《무용수-되기》 웹사이트, 2021.
4 영상에 나온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다만, 거기에는 두 사람이 영상을 함께 보며 〈트리오 A〉를 함께 배웠다는 말도 나온다. 번역본이 원본을 얼마나 정확히 옮길 수 있는지 혹은 번역본으로부터 원본을 얼마나 정확히 되찾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또한 번역이 얼마나 늘 불가능성을 품고 있는지가 아니라, 원본의 무엇이 번역을 실패하게 만드는지 혹은 원본이 얼마나 늘 실패하고 있는지가 문제였을 것이다. 라시내는 이 대목을 “<트리오 A>를 추는 데 실패함으로써 <트리오 A>를 추고, 그리하여 어떤 의미에서 <트리오 A>를 ‘실패’에 이르게 하는 춤”이라고 설명한다. 라시내, 「연출의 글」, 같은 사이트.
5 딴소리지만, 움직임을 기억하는 건 내겐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외국어를 들을 때 아는 단어는 그나마 알아 들을 수 있지만 전혀 모르는 단어는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것처럼, 움직임의 어휘가 내게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의상 디자이너 정호진의 “동일한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데도 기섭은 팔꿈치, 무릎, 골반뼈를, 원영은 어깨, 팔꿈치, 뒤통수를 축으로 삼아 움직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는 말이 흥미로웠다. 누군가에게는 있고 내게는 없는 어휘와 문장과 이해력. 정호진, 「의상 디자이너의 글」, 같은 사이트.
6 첫머리의 영상에서 〈트리오 A〉를 설명하는 문장에는 여기서 이본 라이너가 맨발로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일상적인” 움직임을 한다는 말이 있었다. 여기서 김원영이 신발을 벗고 (‘평범’할지언정) 일상에서 할 일은 없을 동작을 하는 것 역시 내게는 혼란을 주었다. 무용사를 알지 못하므로 저 말들의 함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탓일 것이다. (아마도 같은 이유로, 단어밖에는 정확히 기억하지도 못한다.)
7 같은 사이트의 「바닥 변주 장면 스코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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