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의 소리 혹은 성격 ― 김멜라, 「나뭇잎은 마르고」

두어 달 전에 읽었다. 김멜라의 「나뭇잎은 마르고」.[1]전하영 외, 『2021 제 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1, pp. 77-110. 이하에서 인용문 뒤의 괄호 속에 적은 숫자는 모두 이 글의 쪽수이다. 대개는 체의 발음을, 정확히는 체의 말소리를 앙헬이 어떻게 듣는지 혹은 화자-작가가 어떻게 쓰는지를 생각하며 읽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았고, 조금 전에 다시 읽었다. 어젠 오늘 이 소설을 읽을 거라는 이야길 친구에게 하며 “대학동아리에서였나 만난 어느 지체장애인 여성과 어느 비장애인 여성의 로맨틱한 관계가 소재”라고 말했다. 체는 전자의 이름이다. 대학동아리에서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 는 맞지만 ‘로맨틱한 관계’란 것은 틀리거나 거친 정리(였)다. 연애담이라 말하려다가 연애를 하진 않았던 것 같아서 저렇게 고쳤는데, 영 틀린 것은 아니지만 ― 모든 연애관계 혹은 로맨틱한 관계가 그러하듯 ― 그저 그 말에 욱여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재미있냐는 질문에는 장애의 재현을 생각하기에도 바빠서 거기까진 모르겠다고 답했다. 주인공은 재미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고 덧붙였다. 체를 말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이 인물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하며 읽었다.

체의 소리 내기 (혹은 앙헬이나 화자나 독자의 소리 듣기)

― 오, 여버서여? (78) 김멜라는 둘의 말을 따옴표 대신 줄표로 표시한다. “한글 자음을 온전하게 발음하지 못[하]고 둥글게 말아올리거나 가볍게 입천장을 스칠 수 없는 혀는 반쯤 벌어진 입안에서 무언가에 붙들린 듯 뻣뻣하게 곧추서 있”는(78) 체의 말은, 보다 표준적인 표기를 따르는 (혹은 보다 표준적인 표기로 옮기는) 대신 몇 개의 자음을 지우고 몇 개의 모음을 조금 옮겨, 저런 식으로 쓴다. 앙헬의 말은 곧추선 글꼴로, 체의 말은 기울인 글꼴로 쓴다.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어요.” “듣다보면 익숙해져. 영어 듣기 평가처럼.” (90) 체를 처음 만난 날의 앙헬과 대니의 대화다. 대니의 말은 틀리지 않다. 앙헬에게는 “체가 하는 말을 다 알 수 있었던 시절”이 있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어느 순간, “[앙헬이 느끼기에] 체의 발음과 손은 뭉개지거나 뒤틀려 있지 않았고 실제로 그런 모습이었다 해도 앙헬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108) 이렇게 말할 만큼 누군가와 가까워져 본 적은 없지만, 내가 해 본 약간의 경험에서도 그랬다.

그러나 화자가 옮겨 적은 체의 말은 못 알아들을, 혹은 읽어도 이해 못 할 것이 되지는 않는다.[2]이해에 이렇다 할 어려움이 없다, 는 뜻으로 이렇게 썼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앙헬뿐만 아니라 소설을 읽는 우리 또한 처음엔 다소 … 각주로 이동 이 소설에 처음 나오는 체의 말 “오, 여버서여”도, 시간상으로 앙헬이 처음으로 들은 말 “오, 힌입생”도 자음이나 모음을 한두 칸쯤 옮기는 것만으로 금세 ‘여보세요’가, ‘신입생’이 된다. 한글 자모 스무남은 개. 자음끼리 혹은 모음끼리 조합해 만든 것을 모두 더해도 얼마 되지 않으므로, 약간의 맥락이 주어지는 것만으로도 읽기는 훨씬 쉬워진다. 이미 표준표기법을 그럭저럭 따라 옮긴 이 말들의 ― 아마도 중요한 ― 몇몇 대목을, 화자는 앙헬의 머릿속에서 앙헬의 언어 ― 표준 표기와 겹치는 ― 로 다시 풀기까지 한다.

여버서여라고 쓸 수도 있지만 어버서어라고 쓸 수도 있었을, 힌입생이라고 쓸 수도 있지만 히니쎙이라고 쓸 수도 있었을 발음들. 체를 발음이 훨씬 더 불명확한 인물로 설정할 수도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ㅔ와 ㅐ의 발음은 구분되지 않지만 문자는, 특히나 공식적인 문자들은 늘 이를 철저히 구분한다. 나는 ㅅ을 대부분의 사람들에 비해 ㅎ에 가깝게 발음하지만 ㅅ을 쓸 자리에 ㅅ이 섞인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대개는 ㅅ을 듣는다. 그렇지 않다 해도 ㅅ을 적는다. 정확히 듣거나 정확히 받아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체의 말 역시, 그런 식으로 걸러져 표기되었으리라는 뜻이다.

구태여 알아보기 힘들게 쓴다면야 물론 우스운 일이 되겠지만, 알아 듣기 힘들다는 발음을 읽기 어렵지 않게 쓰게 되고 마는 ― 혹은 그렇게 쓰고야 마는 ― 과정을 혹은 역학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표기에 쓸 수 있는 낱자의 수가, 따라서 인식할 수 있는 발음의 수가 제한적이라는 불가피한 조건. ‘표준’의 힘. 어쨌거나 글이란 읽을 수 있는 것이야 한다는 사실. 매번 앙헬의 머릿속을 빌어 다시 말하기는 용이치 않으리라는 판단.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개입하는지, 그 개입들을 어떻게 조율해야 할지를.

앙헬이 들은 ― 체의 발음과 문맥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앙헬이 걸러 낸 ― 소리라고 한다면 별 문제 아니게 될까. “다 알 수 있었던 시절”의 앙헬은 어떻게 듣고 어떻게 이해했을까. 기억에는 의미만 남고 (표기할 수 없는) 수많은 소리들은 사라졌다 해도 ― 앙헬에게 “이상하게도 체의 발음이 또렷하게 잘 들렸던” 어떤 장면을 (앙헬 혹은 화자가) 회상할 때, 체의 말들은 “내가 첫 손녀잖아”라든가 “난 여자 가슴이 좋아”라든가 하는 식으로 표기된다 (100-101) ― 귀는 여전히 저렇게 들었을까. 아마도 같은 시절에 속했을 말들 역시도, 오랜만에 갑자기 듣게 된 “여버서여”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적혀 있다. 첫 만남에서부터 “힌입생”이라고 분명히 들었다면, 아마 못 알아듣지 않았을 것이다.

말만 남은 세계

체와 함께 옥상에서 술을 마실 때면 앙헬은 체의 발음이 다른 사람의 발음보다 더 매끄럽고 정확하게 들렸다. 그럴 때 앙헬은 자신이 취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취한 사람에게는 취해 비틀거리는 세상이 온전해 보이니까. 그러나 산성 앞 식당에서 체가 어느 여름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앙헬은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음에도 체의 발음이 귓가에 부드럽게 들렸다.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지다, 어느 순간, 체가 하는 말을 다 알 수 있었던 시절로 돌아갔다. 체의 발음과 손은 뭉개지거나 뒤틀려 있지 않았고 실제로 그런 모습이었다 해도 앙헬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108)

짧은 소설의 끝부분 쯤에 있는 이 문장들 뒤로 체는 꽤 길게 말을 잇는다. 모두가, 앙헬의 것과 같은 발음과 표기법으로 적혀 있다. 이 장면에서 사라지는 것은 ― 어째서인지 ― 이를테면 언어적 장벽, 의식적인 층위에서 소리를 거르고 조정하고 번역하는 과정만이 아니다. 생각 혹은 마음을 전하는 데에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는 (장애라는) 신체적 특징들, 차이들까지가 단번에 사라진다. 몸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의 물리적 움직임이 소통이나 표현에 쓰이기도 ― “체는 그때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듯 허공에 손짓하며 말했다” (108) ― 하지만 이 몸은 앙헬의 속에만 있는 것이므로 이 대목에서 몸은 사라진다. (이 몸이 앙헬의 속에만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상상으로 혹은 변조로 만들어진 몸이어서만이 아니라 오직 그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상상된 몸일 것이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앙헬을 기준으로 한다면, 체가 앙헬의 소리와 앙헬의 몸짓으로 번역된다는 것은 앙헬이 체를 아무런 장벽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저 소리가 어떤 낱자를 발음한 것인지는 물론 저 몸놀림이 이를테면 증상인지 어떤 의도를 갖고 한 것인지 혹은 저 표정은 웃음인지 짜증인지 ― “체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서서 아주 짠 것을 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야 앙헬은 체의 그 표정이 웃는 얼굴이란 사실을 알았다.” (90) ― 를 생각할 것 없이, 말의 내용만을, 혹은 체의 마음만을 전해 받고 이해하면 된다는 뜻이다. 오래, 깊이 쌓인 관계의 힘을 믿는다면 완전한 소통 같은 말을 갖다 붙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체 고유의 몸이 사라진다는 것은 조금 더 복잡한 문제다. 장애라는, 체가 처해 있는 사회적 현실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둘째 문제다. 체의 성격은 많은 부분이 장애를 통해 ― 형성되었는지까지는 알기 어렵지만 ― 표현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애를 통해 이해된다. “다른 사람과 함께 걸을 때도 체는 상대의 속도에 맞추려 애쓰지 않았다 자기의 리듬대로 발을 뻗고 어깨와 팔로 타원을 그리며 나아갔다. 체와 함께 걷는 사람은 그녀가 자신의 속도로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었다” (85). 예컨대 이런 것은, 애초에 체의 속도가 상대의 (정확히는 상대가 되는 여러 비장애인중 누군가의) 속도와 비슷하다면 드러나거나 독해되지 않을지도 모를 일에 속한다. “앙헬이 잘 알아듣지 못하면 두 번, 세 번에 걸쳐 말했다. 하려던 말을 멈추거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 ― 죄소한에 호크 이어여? / 식당에 가서도 그녀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요구했다. / ― 호크, 호크여. /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면 고부라진 손을 들고 무언가를 찍어 먹는 몸짓을 해 보였다. / 체와 함께 간 사람은 그녀가 말을 마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 기다리면 체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었다” (93). 이런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발음이 달랐다면 그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음을 주변인들이 알 기회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 스스로도, 자신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주 늦게서야 깨닫는 일이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함께 간 사람은 […] 잠자코 기다”리는 관계가 만들어질 기회도 물론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뭉개지거나 뒤틀려 있지 않”게 된 체에게서는, 그의 성격이 적어도 일부분은 사라지거나 표면 아래로 숨겨질 것이다. “색채에 민감했고 그 색들을 조화롭게 자신의 몸에 배치할 줄 알았”으므로 “체를 보고 있으면 그녀가 옷이 아니라 그림이나 음악을 입는 것처럼 느껴졌”을(84) 수는 있지만, “걷거나 뛸 때 그 [비스듬한] 기울기로 작은 웨이브를 그리며 움직”임으로써” 주는 “그녀의 귀에만 들리는 음악이 그녀 주변에 흐르는 듯”하다는(85) 인상은 아무래도 사라져 버리기 쉽겠다.

앙헬과 체의 관계도 같지는 못할 것이다. “여자와 여자는 결혼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 듯 […] 알지만 그런 법규 따윈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청혼의 말을 건네는(97) 체를 보며 앙헬은 생각한다. “만약 체가 남자였거나 혹은 다른 여자였다면 앙헬은 그녀 앞에서 취하거나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십대 시절부터 찾아들었던 자살 충동을 체에게 털어놓지 못했을 것이다. 앙헬은 종종 다른 사람에게 끌리고 다른 사람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믿음에 관해서는 오직 체뿐이었다. 앙헬은 멀리, 더 크게 바라보는 체의 내면과 뒤틀리고 고부라진 그녀의 몸을 믿었다. 믿음이란 상대가 자신을 해치거나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안심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앙헬은 생각했다. 체의 어떤 면은 앙헬보다 크고 높았으나 신체적 힘은 앙헬이 더 셌다. 그 점이 앙헬을 안심하게 했다” (99).

어떤 성격들 (혹은 성격-읽기들)

물론 그의 모든 성격이 신체적 특성을 통해 형성되거나 독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은 체를 좋아하고 체는 하루에도 몇 번씩 길을 가다 인사를 받는다. “멀리 건물 창가에서 고개를 내밀고 체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 ― 한나야! 어디 가니? / 그러면 체는 손을 높이 들어 크게 반원을 그리며 웃었다. 앙헬은 체의 그런 모습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녀가 진심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93). 팔을 보다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것이 꼭 반원을 그리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체는 여전히 손을 들어 웃으며 답할 것이다. 사람을 믿지 않는 앙헬은 아마도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므로, 체가 어떤 몸을 하고 있건 이런 모습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대니가 “체의 그런 태도를 걱정하며 체에게 좀 더 자신을 아끼라고 말”한(94)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하고, 그것이 꼭 그의 장애와 관련된 것이라고 단언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런 체의 모습에서 조대한은 “이 소설은 사회적 약자를 그린 서사물에서 반복되곤 하는 박해나 곤경 등의 갈등을 명료히 드러내 보이지 않”음을 읽어낸다. “강아지처럼 기다리기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쓰다듬어줄 것이라고 믿고 거리낌없이 먼저 다가가서 마음을 건네는 따스함[3]이 강아지 비유는 앞 단락에 인용한 문장들과 함께 소설에서 직접 사용된 것이다, 자신만의 속도로 걷고 본인의 의사가 관철될 때까지 말하고 기다리는 느긋한 당당함, ‘장애인 동반 일인은 무료’라고 말하거나 ‘난 여자 가슴이 좋’([「나뭇잎이 마르고」,] 101쪽)다고 말하는 태연함 등은 그것이 너무 밝고 확신에 차 있어서 소수자의 역경과 고난으로 상정되는 어떤 어두운 기대치를 비껴나가게 만든다”는 것이다.[4]조대한, 앞의 글, 121쪽. 이 대목은 조대한이 앞에서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라는 찬송가 구절, 재생산, 퀴어, 장애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 각주로 이동 “어두운 기대치”까지 가지 않더라도, 소위 ‘진정한 자신’ 같은 것을 상상할 때, 당사자 자신의 상상에서든 주변의 상상에서든 혹은 멀리 있는 이들의 추상적인 상상에서든, 저 몸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을지 혹은 피해도 좋을지를 알기는 아마도 쉽지 않다.

한 페이지 앞에서 조대한은 “체는 예술을 사랑하는 소수자가 흔히 그러하듯 가난과 반자본주의를 체화한 인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며 “그녀는 물질적으로 풍족할 뿐만 아니라, ‘봉사고 명예고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 하지 말고 제대로 돈을 지불’(95쪽)하라고 단호히 외칠 정도로[5]“정중하면서도 다소 권위적인 말투로 체가 학생 대표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고 말”하는 교직원에게 체는 “얼아 저여?”하고 “짧게” 묻는다. … 각주로 이동 낭만적 열정 페이에 강한 반감을 지닌 인물”이라고 쓴다. “다시 말해 체는 예술을 사랑하고 나눔의 가치를 옹호하는 동시에 철저한 교환의 논리를 체득하고 있는 세대의 인물이기도 한 셈”이라고 정리한다. 내가 아는 ‘낭만적 열정 페이에 강한 반감을 지닌’ 이들은 대개, 교환의 논리 ― 언제나 불평등한, 너무도 자주 착취를 교환으로 포장하는 ― 에 반대하는 이들이며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갖는 “어두운 기대치”이므로 조금 의심하고 뒤를 읽었다.

친구가 이 소설의 재미를 물은 시점에 나는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답하기 전에 괜히 책을 뒤적거렸다. 뒤표지에 실린 소설가 이승우의 평이 눈에 들어왔다. “김멜라는 뒤틀리고 고부라진 몸에 발음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는 한 여성 주인공이 보여주는 의연하고 당당한 삶의 자세를 통해 우주 안의 한 존재인 인간의 위험을 증거한다. 모든 것을 다해 말하고 모든 것을 다해 웃으며, 자기 속도로 걷는 ‘체’라는 인물에게 나는 압도당했다.” 먼저 읽고 왠지 모를 마뜩잖음을 느끼지 않았다면, 혹은 저 말을 전해 받은 친구가 이런저런 화나 짜증을 표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비슷한 말을 썼을 것이다. 별 생각 없이도 종종 그러겠지만 갖가지 생각을 한 후에도 (특히 퀴어를 말할 때) 이런 식으로 쓰곤 한다. 그래도 이번엔 의연하고 당당하다고, 혹은 모든 것을 다한다고 쓰는 대신, 내가 무엇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읽는지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References
1 전하영 외, 『2021 제 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문학동네, 2021, pp. 77-110. 이하에서 인용문 뒤의 괄호 속에 적은 숫자는 모두 이 글의 쪽수이다.
2 이해에 이렇다 할 어려움이 없다, 는 뜻으로 이렇게 썼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앙헬뿐만 아니라 소설을 읽는 우리 또한 처음엔 다소 낯설었던 체의 말에 차츰 익숙해져간다”는 조대한의 말대로 독자에게도 적응에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조대한, 「낙차」, p. 117, 앞의 책, pp. 114-122.)
3 이 강아지 비유는 앞 단락에 인용한 문장들과 함께 소설에서 직접 사용된 것이다
4 조대한, 앞의 글, 121쪽. 이 대목은 조대한이 앞에서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라는 찬송가 구절, 재생산, 퀴어, 장애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한 ‘형이상학적 독해’와 체의 몸을 중심으로 한 ‘형이하학적 독해’를 각각 개관한 후 제기하는 “처음부터 이 소설이 우리의 독법 속에 내재된 관습적인 환대와 물리적 거리감 사이의 낙차를, 또는 올마른 마음의 형이상학과 너절한 삶의 형이하학 사이의 낙차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조대한, p. 119)하는 질문에의 답이 일단락 되는 지점에 해당한다. 본문에 인용한 대목의 몇 문장 후 그는 “여기까지 썻지만 사실 앞서 언급한 여러 독법들이 이 소설을 읽는데 필수적이진 않은 것 같다”며(p. 121) 이 작품이 그리는 몇 개의 이미지를 훑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5 “정중하면서도 다소 권위적인 말투로 체가 학생 대표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고 말”하는 교직원에게 체는 “얼아 저여?”하고 “짧게” 묻는다. 알아듣지 못하는 그에게 “오엘 하연, 얼아 주야고여”하고 다시 말한다. “학교 모델은 돈이 아니라 명예로 하는 일이며 봉사하는 자리”라는 그의 설명에 “체의 목소리가 커”진다. “― 옹사오 영예고 옹짜오 우여억을 행악 하이 마고 제애오 돈을 지울해어! / 체는 긴 문장을 쉬지 않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 앙헬은 가끔 체가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고 돈을 헤프게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체의 그 말을 떠올렸다” (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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