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의 잃어버린 시간

《니모를 찾아서》[(앤드루 스탠턴 연출, 2003)]에서 장애는 꽤나 주목을 끌면서도 모순적인 방식으로 활용된다.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suffer 있는 도리가 편집증적이고 심통 맞은 말린에게 훌륭한 안내자임은 분명하다. 사라진 니모의 아버지인 말린은 니모를 찾아 바다에 나선 참이다. 도리가 말린이 아슬아슬한 위험들을 헤쳐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빼어난 재치 덕인만큼이나, 임박한 위험에 지지 않는 순전한 능력 덕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직전의 과거에도 직후의 미래에도 휩쓸리지 않는 매 순간의 실존이 있다. 그런데 영화의 어느 전환점에 이르면 무언가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독해파리 떼를 지난 말린과 도리는 그들을 니모가 잡혀간 시드니항으로 데려다 줄 동호주해류를 탄다. 해파리떼 사이에서 고초를 겪은 말린과 도리는 커다란 무리를 이루어 동호주해류를 타고 가는 거북이떼의 등 위에서 깨어난다. 정신을 차린 말린은 도리가 심하게 다쳤으리라 생각하지만 늘 그렇듯 이는 완전한 오산이다. 그녀는 이미 정신을 차리고 꼬마 거북이들과 신나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말린을 발견한 그들은 금세 달려들어서는 모험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말린은 처음에는 머뭇거리지만 곧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까지 영화에서 펼쳐진, 이미 보아 익숙한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는 꼬마 거북이들과 일련의 재구연을 거쳐 구전 신화만들기의 형태로 황새치에게, 게에게, (수면 위를 오르내리는) 돌고래에게, 이윽고 새들에게 전해진다. 새들은 저 멀리 시드니항의 갈매기들에게 이야기를 전한다. 말린의 이야기는 이렇게 전설이 된다. 그는 이 시대의 신화다. 그러나 분명 구전 서사의 형태로 이 영화의 “기억”이 되어야 할 이것의 생산과정은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상당히 의미심장한 하나의 부재를 보여준다. 그가 설명할 때도 바다를 가로질러 전파되고 개작되는 길고 복잡한 과정에서도 도리가 그 모험에서 맡은 역할은 언급되지 않는다. 전혀. 달리 말하자면, 이 신화만들기는 그 자체로 일종의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기억이다. 하지만 이 기억상실증이 도리 ―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이 영화 유일의 장애 캐릭터 ― 의 기억된 지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마치 신화만들기의 과정이 그녀를 대신의 그녀의 건망증을 모방한 것이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그녀의 장애가 그녀를 주인공이 도움을 받는 그 과정의 중심에 놓기는 하지만, 바로 그 장애가 그녀가 이 사건에 대한 기억에서 담론적으로 지워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 특수한 장애의 활용에서 분기하는 효과들을 본다. 한편으로 도리[의 장애]는 분명 말린이 열의를 갖게 하고 그가 영화 시작부에 나온 아내의 죽음으로 얻게 된 극도의 편집증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매개체instrument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매체medium로 하여금 여러 캐릭터들의 관점에 다가가거나 거리를 두게 하는 보다 넓은 서사 담론은 장애가 있는 캐릭터의 활약을 주변화peripheralizing하면서 비장애 캐릭터의 활약을 기념하도록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다. 또한 비장애 캐릭터는 남성이고 장애 캐릭터는 여성이어서 저 기억의 삭제에는 젠더적 함의도 있다는 점 역시 그냥 넘길 수 없다. 이 삭제를 통해 도리는 동시에 중심적이면서도 주변적이게, 이 영화의 미묘하디 미묘한 의미들에 있어 내부자인 동시에 외부자이게 된다.[1]Ato Quayson, Aesthetic Nervousness: Disability and the Crisis of Representa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7, pp. 39-40.

니모의 아버지가 니모를 찾아나서는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모르는 영화였다. 디즈니에서 만들었으니 평범하게 잘 찾고 끝나겠지, 정도만 생각했다. (실은 니모의 모델 ― 흰동가리 ― 은 무리의 암컷이 죽으면 수컷이 정소는 퇴화하고 난소가 활성화되는 어류이자 제가 낳은 새끼를 기르는 것은 아닌 어류라는 말도 어디선가 읽었다.) 길게 인용한 저 문장들을 읽으며, 정확히 무엇이 지워지는지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어떤 기억상실이, 혹은 무엇으로서의 기억상실이 “말린이 열의를 갖게 하고 그가 영화 시작부에 나온 아내의 죽음으로 얻게 된 극도의 편집증을 극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왜 지워지는지를 말이다.[2]인용한 글의 주제인 장애와 아래에서 언급할 선형적인 시간성이 모두 내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저 글이 중점적으로 다룬 다른 작품들을 두고 이 … 각주로 이동

《메멘토》(크리스토퍼 놀런 연출, 2001)의 레너드와는 다르다.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단기 기억상실증이 있는 레너드는 끊임없이 기록한다. 저 목표부터 그간 찾은 단서까지를 제 몸에 빼곡히 써넣는다. 기억은 꾸준히 사라지지만, 이 문신으로써 그는 자신의 시간을 — 흐트러지지 않고 원인에서 목적까지, 수단을 거쳐 차곡차곡 쌓이며 나아가는 시간을 — 지킨다. 영화는 역순으로 전개되고 실은 모든 것이 어긋나 있음을 밝히며 끝났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본 것은 오래 전의 일이므로 거기서 실패하는 것이 선형적인 시간 그 자체였는지 혹은 그저 레너드라는 한 사람이었는지는, 그리고/혹은 그것이 구분가능하기는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도리의 시간

도리는 시간을 붙들려 들지 않는다. 물론 기억상실은 그에게 언제나 주어져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이며 그가 제 의지로 무언가를 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이 망각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적어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이름을 기억한다. 자신이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다”고 잊지 않고 말할 줄 안다. 이 진술은 침착하다. (그의 말투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에는 자신의 상황이 그러하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물론 종종 곤란해지고 때로 미안해지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이 순간순간 내리는 판단을 의심하거나 미리부터 움츠리고 물러나지 않는다. 자신을 믿고 — 아마도 그렇기에 — 상대를 믿는다.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도리를 묘사하면서 기억상실이 있을 뿐 아니라 상황을 잘 판단하지 못하는 걸로 나온다, 고 말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 말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래에게 말을 걸고[3]도리는 대부분의 것을 다 잊지만 인간의 문자(정확히는 영어)를 읽을 줄 알며 다른 물고기들과 (적어도 말린과는) 달리 고래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 … 각주로 이동 해파리떼에 뛰어든다. 말린만큼 걱정 많은 입장에서 따지지 않더라도 분명 위험한 일일 테지만, 그래서 저렇게 말했지만, 근거 없이 멋모르고 하는 행동만은 아니다. 계속해서 잊어 왔고 계속해서 그래 왔을 도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야말로 그래도 괜찮다는, 적어도 괜찮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도리는 망설임 없이/없으므로 즐겁다.

도리는 과거와 함께 미래를 — 특정한 방식으로 상상되고 명령되는 미래를 — 잊는다. 레너드에게 아내가 살해당했다는 과거의 사실은 복수라는 미래를 명령하며, 전자를 몸에 새겼으므로 후자를 새기는 것도 둘 사이를 잇기 위한 하루하루를 새기는 것도 불가피하다. 말린이 오직 안전만을 생각하며 집을 벗어나지 않고 니모에게도 집을 나서지 말라고 몇 번이고 다짐하는 것은 아내의 죽음이라는 과거를 잊지 못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 하리라고 — 같은 날 잃은, 니모와 동기간인 수백의 새끼와도 함께 하리라고 — 상상했던 미래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상상을 온전히 실현하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지만 조금이나마 그에 다가가려는 부질없고 부단한 노력은 언제까지고 가능하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외에는 미래를 가늠하거나 상상할 근거가 없는, 지금 이 순간 너머에서 미래를 명령할 모종의 체계나 논리가 없는 도리는 그렇기에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직선상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다.[4]역시 읽은 지 오래 되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작업과 행위를 구분하며 후자는 설계도를 따르는 것이 … 각주로 이동

저 구전 서사는 바다를 누비는 모험에서 도리가 해낸 중책을 잊을 뿐만 아니라, 도리가 또 한 번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 ― 심지어는 말린보다 더 건강히 ― 을 잊는다. 여기서 지워지는 것은 도리라는 존재나 그의 업적만이 아니라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 혹은 그런 삶이 집단의 서사에 받아들여질 가능성 자체다. 이것은 단순한 삭제가 아니라, 이를테면 저 서사의 원칙이다. 영화에 도리가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둘의 여정을 압축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일이야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도리라는 캐릭터를 그저 언급하는 것과 이야기가 구성하는 의미의 층위에 삶의 질서를 끊임없이 잊음으로써 언제나 질서 너머를 살아가는 캐릭터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요컨대 저 영웅담은, 역경에 굴하지 않고 끝끝내 목적을 이루어 냄으로써 영웅의 지위를 얻는 말린(이라는 아버지)의 이야기는, 도리의 망각을 지움으로써만 영웅담일 수 있다. 이 망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야기의 구조 자체를 무너뜨린다.[5]아토 퀘이슨이 저 책에서 시도하는 것이 바로, 장애의 부정적 묘사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 장애를 배제함으로써만 특정한 서사가 가능해지며 따라서 … 각주로 이동

영화에서는 마지막 장면에까지도 도리가 등장한다. 말린은 니모를 다시 만나고 집으로도 무사히 돌아온다. 여전히 걱정이 많지만 성격이 조금은 바뀌어서, 이제 니모를 학교에 보낼 수는 있다. 도리의 물리적 존재뿐만 아니라 그 삶의 흔적 역시도 어느 정도는 새겨지는 셈이다. 하지만 말린은 여전히 걱정이 많다. 도리의 흔적은 말린이 ‘정상적인’ 삶을 살게 하는 데까지만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 도리 자신과 같은 존재로 바꾸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도리가 감수한 위험은 어디까지나 이 모험이 성공적으로 끝났기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껏 괜찮았으므로 걱정없이 나아가지만, 그 나아감은 언제나 위험을 끌어안는 일이었다는 점은 끝내 지워진다.

도리에게 돌아오는 시간

속편인 《도리를 찾아서》(앤드루 스탠턴 연출, 2016)에서 말린과 도리의 관계, 이들과 시간의 관계는 다소간 복잡하면서도 선명해진다. 제목 그대로 이번엔 말린과 니모가 도리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제목과 달리 혹은 전편과 달리 도리는 그저 잡혀가거나 그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어릴 적 잃어버린 제 가족의 존재를 떠올리고 그들을 찾겠다는 분명한 목표 아래 이런저런 사건을 겪을 뿐이다. 셋은 여정의 초반을 함께 하지만 어느 시점에 도리는 혼자가 된다. 도리는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가고, 다만 말린과 니모가 갑자기 도리를 찾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제목은 이 두 개의 여행 중 하나만을 남긴다.

한편으로는 니모의 성화에 못 이겨, 한편으로는 도리를 애틋하게 여기므로, 말린은 망설이면서도 도리를 찾는다. 도리를 찾으면서도 망설인다. 몇 번의 위기 중에 한 번, 말린은 도리를 ― 다 해낸 도리를 ―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도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황을 분석하고 방법을 찾고… 중얼거리는 그에게 니모는 말린이나 그렇게 하는 거라고, 도리라면, 그냥 했을 거라고 ― 물론 기대를 읽어내지 않기는 힘들지만, “해 냈을 것”이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 말한다. 말린이 거북이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적어도 전설에는 남지 않았던 도리의 방식을 니모는 알고 있다. 말린도 이제 안다.

전작에서 지워졌던 도리가 드디어 제 자리를 얻는다, 고는 그러나 말할 수 없다. 기억상실증은 여전하므로 이 편에서도 계속 잊지만, 이번의 도리는 그 이상을 기억해 낸다. 어린 시절 살았던 곳의 풍경, 부모의 이름, 그들에게서 배운 노래, 그들과 헤어진 경위,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을 찾는 방법까지. 잃었던 퍼즐조각들을 되찾고 조금씩 그림을 맞추어 가면서, 도리는 과거를 되찾는다. 기억의 편린들을 제자리에 배치하고 마침내 기억 속의 인물들을 다시 만난다. 부모와의 재회라는 미래-목적이 완수됨과 동시에 과거가 회복된다. 도리의 시간에도 선형적인 질서가 부여된다.

두 번의 모험에 모두 성공함으로써 도리의 삶에 대한 사후적 정당화는 한층 더 단단해질 것이다. 성공했다는 사실이 정당화에 기여하는 방식과 무게 역시 그럴 것이다. 길을 잃고 말린, 니모와 영영 헤어지는 결말(그 길 자체를 잊을 도리에게 길 잃음은 찰나에만 타당한 설명일 것이며 망각의 순간 이후로 그는 더 이상 길 잃은 자는 아닐 것이다)을 기대하기는 어렵더라도[6]상업영화를 읽으며 이런 식으로 먼저 나서서 한계를 그을 때면 늘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저 한계가 상업영화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 각주로 이동 부모와 (적어도 살아 있는 부모와는) 만나지 못하고도 가볍게 돌아가는 도리를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말린이 여전히 성마르지만 아버지로서 가족과 함께 하는 것처럼, 도리는 여전히 많이 잊지만 딸로서 가족과 함께 한다. 제자리를 찾은, 혹은 단단해진 질서가 또 하나 있는 셈이다.

다른 삶과 시간, 혹은 의문들

A[7]이하의 A, B, C, D는 중요도나 논리에 따라 배치한 것이 아니다. 두 편 모두가 가족을 다시 만나는 이야기다. 이걸 두고 질서가 단단해졌다고 썼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아내와 어머니를 잃은 말린과 니모가 도리를 “가족”이라 부를 때, 이 관계는 무엇이 될까. 아내의 죽음을 완전히 잊은 말린을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이들에게 도리가 아내/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존재인 것은 아니다. ‘정상가족’에 속하지 않은 둘과 하나가 만나 여전히 ‘정상가족’은 아닌 가족을 이룰 때, 그리고 그 중 하나가 원가족을 되찾아 마치 다섯이 하나의 가족이 된 듯할 때, 이것은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
니모에게도 장애일 수 있을 신체적 특성이 있으며 니모는 말린보다 진취적이고 이 새로운 가족 관계에도 (표면적으로는) 더 적극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말린-니모와 도리의 관계는 이종적 결합인 동시에, 두 장애 캐릭터가 주도하고 나이나 지위를 따르지 않고 돌봄이 수행되는, 이를테면 대안적인 관계다. 이런 대안적 관계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캐릭터는 이 둘 외에도 또 있다. 극도의 근시로 줄곧 수족관 벽에 부딪히는 고래상어 데스티니와 심리적인 이유로 초음파를 쓰지 못하는 벨루가 베일리. 데스티니의 (닦달과) 응원으로 베일리는 제 힘을 되찾는다. 베일리의 네 눈이 되어주마는 말에, 그리고 바다에는 벽이 없다는 말에 힘입어 데스티니는 수족관을 떠날 결심을 한다.[8]바다가 싫어 수족관을 택하려는 문어에서부터 채식을 결심한 상어들까지도 무언가 따져볼 구석이 있을 것이다.

B 정신과의 일로 분류되는 문제가 끼어들었으므로 달라지는 점이 있겠지만, 그저 서로의 눈과 발이 되어 주었다는 ‘장님’과 ‘앉은뱅이’ 이야기의 변주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들은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도 괜찮다고, 이야기에 따라서는 실은 누구나가 서로 기대어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에게나 눈이 혹은 발이 (여기에서는 말하자면 어떤 용기가)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초음파 없이 혹은 지독한 근시안으로 제 나름의 살 길을 찾을 수 있을 가능성이 또한 있지 않으면, 후자가 되기 십상이다. (이곳은 단기 기억상실증에도 생존에 어려움을 겪지 않는 도리가 있는 바다다.)
속을 알 수 없는 눈을[9]속을 알 수 없는 것은 대사도 이렇다 할 표정 묘사도 없기 때문으로, ‘눈’의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겠다. 다만 이 눈은 다른 캐릭터들의 눈과는 … 각주로 이동 마주치고 몇 번쯤 우루우루 하는 소리를 내면 금세 시키는 대로 하는 아비새 베키, 볕 좋은 너럭바위를 좋아하지만 끊임없이 내쫓기고 따돌림 당하는 바다사자 제럴드. (물에 사는데도) 털이 부스스한, 입말을 하지 않는/못하는,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아마도 충분히는 감사 받지 못하는 이들이 등장할 때 누가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것,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기대어야만 한다는 것은 어떤 뜻이 될까.

C 도무지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이들은, 일단 아직은 살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 영웅담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 그 시간성에 일반적인 의미에서 질서가 부여되지 않은, 혹은 도무지 부여되지 않는 ― 버전의 도리일 수 있을까. 말린의 전설에서 도리가 지워진 것과 이들의 도움이 보상 받지 못하는 것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까. 계속 내쫓기면서도 계속 욕망하고 계속 시도하는 제럴드는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노릴까. 아주 잠깐 바위를 허락받은 때를 빼면 그에게서 즐거움이나 기쁨, 재미 같은 것을 읽기는 어렵다 (베키와 마찬가지로,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다시 말해 일반적인 문법으로는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묘사된다). 베키도 그렇다. 도리와 이들의 ― 혹은 도리가 묘사되는 방식과 이들이 묘사되는 방식의 ― 차이가 적어도 하나는 있는 셈이다.
즐거움, 기쁨, 재미 같은 것은 중요할까. 얼마나 중요할까. 언제 중요할까. 언제나 위험을 감수해 온, 혹은 위험을 상정하지조차 않은 도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은 또 한 번 새로운 사건에 몸을 던져도 좋(을 수도 있)다는 증거는 되지만 굳이 그럴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재미를 ― 무언가가 새롭다는 사실에서 오는 것이든 호의적인 만남에서 오는 것이든 ― 기대할 이유도 못 된다. 그러나 도리는 늘 재미와 호의를 기대하며 나아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믿으며 나아간다. 근거로 삼을 만한 기억이 없으므로 이는 경험적인 앎이 아니며 앞으로 경험이 축적되면 수정되고 조정될 예상도 아니다. 그저 바라는 것 역시 아니다. 의심 없이 그렇게 믿는다. 그의 동력은 아마도 흔들리지 않는 이 믿음일 것이다. 아마도 겁 없는 나아감은 이런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한편 이 믿음은 주저 없는 망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리라는 데가 내 상상력이 닿을 수 있는 끝이다. 실패의 기억들을 잊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믿음이다. 그러나 잊는 것은 쉽지 않다. 역으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이렇게 길을 잃는다.[10]잊는 법도 믿는 법도 모르는 (나 같은) 이에게 선형적으로 나아가지도 한 자리에 머무르지도 않는 끊임 없는 움직임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 어떤 … 각주로 이동

D 기대와 예상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그의 행위는 애초에 설계도가 없는 것이므로 성공과 실패라는 틀로는 이해될 수 없다. 기껏해야 믿음과의 우연적인 일치 여부만을 따질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치하지 않는대도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므로, 굳이 따질 필요 또한 없다. 그저 살 뿐이다. 그런데 도리는 바다에 산다. 게다가 그곳은 사냥하는 모습조차 찾기 힘든, 영화 속 바다다. 그 바다를 눈곱만큼이라도 벗어난 곳을 배경으로, 기억하지도 성공하지도 않는, 그러나 이어질 수 있는 삶을 상상하려면, 아득해진다.

References
1 Ato Quayson, Aesthetic Nervousness: Disability and the Crisis of Representation,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7, pp. 39-40.
2 인용한 글의 주제인 장애와 아래에서 언급할 선형적인 시간성이 모두 내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저 글이 중점적으로 다룬 다른 작품들을 두고 이 영화를 보기로 한 것은 최근에 “망각”에 대해서 종종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망각을 생각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니체의 사유와 그 미학적 함의」(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20)를 비롯한 오윤정의 논문들 때문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자기의식의 소멸”로서의 죽음을 다루며 “행위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자[규정된 자기 자신에 갇히지 않고자] 하는 욕망을 현실화하는 것이 삶이며, 행위하는 가운데, 한계를 자각하는 기존의 자기를 망각하는 것이 삶을 위한 죽음”이라고 쓴다 (초록에서 인용).
3 도리는 대부분의 것을 다 잊지만 인간의 문자(정확히는 영어)를 읽을 줄 알며 다른 물고기들과 (적어도 말린과는) 달리 고래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 이런 설정이 갖는 함의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4 역시 읽은 지 오래 되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작업과 행위를 구분하며 후자는 설계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기에 자유롭고 정치적이라고 쓴다. 추상적인 (아렌트는 아마도 고차적인, 같은 말을 쓰고 나 역시도 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만) 층위에서 삶은, 재료를 정해진 방식대로 가공해 정해진 용도에 맞는 도구를 만드는 일과는 달리, 애초에 설계도를 가질 수 없다 (어쩌면, 낯선 재료로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내는 일과 마찬가지로). 정적인 재료가 아닌 인간들 하나하나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므로 잠정적인 설계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곤란함을 기꺼이 살아낼 때 비로소 삶이 가능해진다. (높다, 는 말을 조금은 정당히 붙일 수 있다면 아마 이 지점에서일 것이다. 다만 나는 그 기꺼움이 정말로 가능한지는 알지 못한다.)
5 아토 퀘이슨이 저 책에서 시도하는 것이 바로, 장애의 부정적 묘사를 고발하는 것을 넘어 장애를 배제함으로써만 특정한 서사가 가능해지며 따라서 주변화된 장애를 다시 중심에 놓을 때 서사 자체의 오작동이 드러남을 밝히는 것이다.
6 상업영화를 읽으며 이런 식으로 먼저 나서서 한계를 그을 때면 늘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저 한계가 상업영화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섣불리 무시했을 뿐인지 하는 문제다. (답을 찾지 못한 채 떠올리는) 두 번째는 오래 전에 영화 《써니》 (강형철 연출, 2011)를 보고 쓴 글이다. 여기서 나는 “비록 상업 영화는 거대 서사와의 전면적인 투쟁을 보여주지 못하지만, 다행히 ‘밥상을 엎으라고’ 은근히 부추길 수는 있었다”고 썼다. 상업 영화는 이쯤이 한계니까, 하고 (또한 영화의 영향력이란 생각만큼 크진 않으니까, 하고) 선을 긋지 않는다면 나 역시도 이 영화가 “탈역사화된 공간에서 여성의 자아실현을 자기계발 및 소비문화와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지극히 신자유주의적인 텍스트”라는 점(손희정)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했을 지도 모른다.
7 이하의 A, B, C, D는 중요도나 논리에 따라 배치한 것이 아니다.
8 바다가 싫어 수족관을 택하려는 문어에서부터 채식을 결심한 상어들까지도 무언가 따져볼 구석이 있을 것이다.
9 속을 알 수 없는 것은 대사도 이렇다 할 표정 묘사도 없기 때문으로, ‘눈’의 문제라고 하기는 어렵겠다. 다만 이 눈은 다른 캐릭터들의 눈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시된다. 《도리를 찾아서》의 영상은 대개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혹은 그것과 광학적 구조가 동일한 눈에 맺힌 상으로 그려지지만 이 캐릭터의 시야는 색은 붉고 윤곽은 굽은 형태로 재현된다.
10 잊는 법도 믿는 법도 모르는 (나 같은) 이에게 선형적으로 나아가지도 한 자리에 머무르지도 않는 끊임 없는 움직임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 어떤 동력을 찾을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믿거나 잊을 수 있을까 ― 를 물을 때면 늘, 오윤정의 논문들과 함께, 「발터 벤야민의 멜랑콜리론 :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중심으로」(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을 비롯한 백수향의 논문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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