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과 메가폰

아마 심훈의 『상록수』(1935)라든가 아니면 다른 몇몇 카프KAPF 문학 작품을 배우면서였을 것이다. 고등학교 문학교사거나 대학 국문과 교수였을 누군가는 등장인물이 작가의 메가폰 노릇을 하면 소설이 재미를, 혹은 가치를 잃는다고 가르쳤다. (『상록수』가 그런 소설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이따금 실제로 경험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말을 이후로도 여기저기서 종종 들으며, 자주 의심했다. 적어도 내가 접한 여러 용례에서 저 말은 ― 인물의 입을 통해서보다는 그의 행동이나 심리를 통해서 무언가가 전달되는 편이 낫다는 말이 아니라 ― 한 인간이 일상에서 사상을 논하는 장면 자체가 재미나 현실성이나 설득력을 떨어뜨린다는 말로 쓰였기 때문이다. 주장하고 토론하는 것이 일상인 삶을 살고 있으므로 수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재미 없고 비현실적일 뿐더러, 실은 활동가니 연구자니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토론은 흔히 하는 일이니까. 온갖 정치를 논하는 술판 같은 것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최근 여러 해 동안 이 말을 들을 일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떠올린 것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차영훈·강민경 연출, 임상춘 각본, KBS 2TV, 2019)을 곱씹으면서다. 즐겁게 본 드라마다. 끊임없이 가족을 호명하는 것은 끝내 못마땅했지만 적어도 ‘정상가족’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혈연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하고 희생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게 하는 장치들도 (아마도 충분히) 있었다. 고되고 외롭고 두려운 삶을 살아 온 한 여성이 하필 강한 인물, 이를테면 구원자에게 쉽게 끌림을 느끼는 데에서는 《히 러브스 미》(래티샤 콜롱바니 연출, 2002)1 같은 것이 떠올라 찝찝해 지고 말았지만 그는 또한 다정하고 곧은 사람이기도 하며 동백(공효진 분) 역시 단단한 인물이다. 스릴러로서는 낙제이고 ― 물론 사건이 설득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긴장감과 혐의를 조성하는 방식이, 일부러 이랬다고 믿을 수밖에는 없을 정도로 조악해서다 ― 저 구원자가 오롯이 혼자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는 듯한 전개 역시 성에 차지 않았지만 종국에는 충분히 멋지게, 뒤집어졌다.

두어 가지에 감탄하며 보았다. 하나는 물론 동백이라는 인물과 ,가까이는 최향미(손담비 분)를 멀리는 박찬숙(김선영 분)과 홍자영(염혜란 분)까지를 아우르는, 그를 둘러싼 여성들의 공동체. 이들의 사회적 지위나 삶의 방식 같은 것들. 이들이 자신을, (혼인과 혈연에 국한되지 않는) 가족을, 또한 모여 앉은 하나의 거리를 건사하는 방식들, 성차별과 폭력 ― 여성혐오 살인에 이르는 ― 에 대응하는 태도 같은 것들에,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 이야기가 TV 드라마로서 모자라지 않는 인기를 얻는다는 점에 감탄했다. 또 하나는 나이 든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시쳇말로 현자 캐릭터라 할 만한 인물들을 향했다. 이제 하나하나 기억나지는 않지만, 고된 삶 속에서 ― 그러나 좌절하지 않으면서 ― 쌓아 온 지혜를 말로 늘어놓았던 것 같다. 희미하게만 느끼고 있다가 어느날 조정숙(이정은 분)이 무언가 말하는 장면에서 생각했다, 저런 낯 간지러운 말을 어색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입에 올릴 수 있게 한 작가의 힘에 대해.2

메가폰, 을 생각한 것은 문득 저 ‘힘’이 다시 떠오른 어느 날이었다. 힘이 있는 이야기이자 힘을 주는 이야기이지만, 정말 그 힘만으로 저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나 하는 의문을 품었다. 말하기도 전에 받아들여지는 말이 아니라면 실은 말하지 못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말을 삼키거나, 말을 붙였다가 포기하거나, 말을 했지만 끝이 좋지 않은 쪽이 흔하다.3 장기미제 강력범죄 사건이 중요한 구심점 중 하나임에도, 따라서 경찰이라는 국가권력 또한 중요한 위치에 놓임에도, 이야기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경찰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경찰관(들)이다. 그에게 힘이 되는 것은 시스템도 시스템 속에서 쌓인 지식과 기술도 아닌 또 다른 개인들이다. 작고 작은 어느 공동체가 이야기를 이끈다. 이 공동체란 동시에 (혹은, 실은) 여성 공동체이므로, 유무형의 제도 바깥에서 이미 큰 역할을 해 온 공동체이므로 여기에 힘을 싣는 것 자체는 물론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정치적 무관심을 강화하거나 혹은 이미 강한 무관심에 호소함으로써 설득력을 얻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야 했다. 그것을 자연스레 문제시하는 이에게도, 개인들 사이를 흐르는 희망과 힘을 강조하는 말이 ― ‘착한 사람들’에게서 미래를 찾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다가갔을까.

국가보다는 작은 공동체를, 그러나 단순히 (일부) 개인들의 헌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체제로서 작동하는 어떤 공동체를 상상하며 살고 있으므로 붙잡아 볼 알리바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다. 이 이야기에 설득된 것인지 혹은 애초에 이 이야기에 깔려 있는 세계관을 나 또한 갖고 있었을 뿐인지를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의심.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영역에서 단순히 개인들 혹은 어떤 공동체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희망이 될 수는 없다. 의무를 저버린 국가를 그대로 놓아 보내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과연 이 이야기를 이만큼 즐겁게 보았을까. 혹은 이 이야기를 즐겁게 본 나는, 실은 이미 국가를 놓아 보내어 버린 것이 ― 무제한의 방종을 주어 버린 것이 아닐까.4

내가 ‘메가폰’을 미심쩍어 하지 않는 것은 단지 일상적으로 토론하는 삶을 살고 있는 때문만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애초에 나 자신이 ‘행동’보다는 ‘말’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을 모을 수 없는 말을 듣는 일이 적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대개는 동질적인 가치관을 가진 이들과, 큰 틀에서는 이미 뜻을 함께 하면서만 토론하므로.) 말이, 이야기가, 그 자체로 힘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쓸데 없는 데에로 생각이 흐른다.

  1. 영어판 제목의 일부를 한국어판 제목으로 삼은 듯하다. 영어권에서는 “그는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He Love Me… He Loves Me Not” 쯤 되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프랑스어는 모르지만 원제(“A La Folie… Pas Du Tout”)는 “미치도록…”과 “전혀”를 이어둔 형태로 되어 있다. 한편으로는 열광적인 사랑에 대한, 한편으로는 문자 그대로의 광기에 대한 ― 안젤리크(오드리 토투 분)의 연애망상erotomania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 홍보물에서는 색광증이라고 번역됐고 종종 드 클레랑보 증후군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증상은 누군가가 자신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망상이다. 흔치 않은 사례들은 대개 여성에게서, 힘 있는 남성을 대상으로 하여, 발견되었다고 주워들었다.
  2. 결말부에서의 황용식(강하늘 분)의 대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해도 좋았겠지만, 그 장면만큼은 다소 과하거나 어색하게 여겨졌다.
  3. 어제 마지막 쪽을 읽은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에 나온 대목들을 늘어놓아 본 것이다.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지만,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발화하(려 하)는 장면들이었다.
  4. 또한 이 ‘동백이’들이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가 이만큼의 힘을 가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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