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비극들, 혹은 담백한 사람들

언제였더라, ‘퀴어 페미니스트 책방’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있는 작은 서점에서 샀다. 2016년 말에 초판이 나온 책이고 주위의 몇몇 사람이 좋더라고 하는 것을 듣고 샀으니 아주 오래 전은 아닐 것이다. 아끼는 책들을 꽂아둔 칸의 바로 위칸에 꽂아둔, 먼저 읽을 책들 사이에 한참을 세워만 두었다. 이따금 책을 읽는 날에도 실은 그날의 일정과 컨디션에 따라 책의 무게와 내용을 따져 고르므로 실제로 먼저 읽지는 않는 책들이 모여 있는 칸이다. 지난해 첫날 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책장을 정리하다 커피를 쏟았다. 오른쪽 아래 모서리가 젖었다. 뚝뚝 떨어지는 커피를 털어내기 위해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펼쳐보고는 또 한 해를 내내 세워만 두었다.

결국은 계획 없이 찾은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해 읽기 시작했다. 나흘 전의 일이다. 76쪽까지, 그러니까 「송수정」부터 「문우남」까지를 그날 읽었다.1 오늘 오후 느지막이 책을 챙겨 들고 길을 나섰다. 편의점에 들르기 전까지, 한 시간 조금 못 되게 걸으며 115쪽 ― 「이호」의 절반 조금 못 되는 곳까지를 읽었다.2 편의점을 나와 마저 읽다 마주친 카페에 들어가 225쪽까지를 읽었다. 「지현」의 두 번째 쪽까지다.3 카페에 앉기 전에 아마 125쪽 정도까지를 읽은 것 같다. 걷던 중에 비가 오기 시작했는데, 「배윤나」의 중간부터 「문영린」의 중간까지에 젖은 흔적이 남아 있다.

식사거리를 파는 곳이었으므로, 배가 고파진 무렵 무언가를 주문하려 했지만 단체손님이 있어 안 된다고 했다. 오늘도 저번에도 오후 내내 다른 손님 하나 없이 주인의 친구 한 명씩만이 안락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낸 곳이었는데 하필 오늘 저녁에 그랬다. 그들의 상에 소주병이 오르는 것을 보았으므로 자리를 나섰다. 해가 진 참이었으므로 며칠 전 듣다 닫아둔 오디오북을 들으려 했지만 다운로드 기한이 만료되어 이미 삭제되고 없었다. 간판은 없고 가로등이라는 길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만큼만 띄엄띄엄 서 있는 어두운 거리를 걸으며 4 마침 들고 있던 힙색을 주머니가 가슴팍에 오도록 걸치고 휴대폰을 꽂아 그 빛에 의지했다. 느릿느릿, 다시 「지현」의 첫 쪽부터 242쪽, 「양혜련」의 첫머리까지를 읽었다. 예의 가로수가 인도를 반 넘게 막고 있는 길5이었으므로 자주 고개를 들어 앞을 확인해야 했다. 그나마도 곧 인도가 끊어지고 차도 한켠을 걸어야 했으므로 금세 덮었다. 나머지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읽었다.6 작가의 말을 챙겨 읽는 성격은 아니지만 실수로 마지막 두 장을 한 번에 넘긴 탓에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세어볼 사람들을 생각하며 작가 스스로가 미리 적어둔 것에 따르면, 제목은 『피프티 피플』(정세랑 지음, 창비, 2016.)이지만 제목에 이름이 언급된 이만 쉰하나라 한다.

그 많은 사람이 모두 주인공인, 그러니까 주인공이 따로 없는 소설이다. 이들 모두가 서로를 알거나 마주치지는 않는다. 굳이 꼽자면 어느 병원이 중심이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병원에 방문하는 사람들과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런 이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저 숫자를 채운다. 왜 병원이었을까. 죽음이 ― 그러므로 삶이 ― 문제가 되는 곳, 죽음과 삶은 모두가 겪는 일이므로 누구나가 한 번쯤 올 일이 있는 곳, 죽음이 흔하므로 차디 차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죽음이므로 모종의 열기를 띨 수밖에 없는 곳, 이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거리에 앉아서 본 것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조금 더 집중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곳.

병원을 소유한 이부터 처참하거나 비참하게 죽는 이까지가 교차하므로, 과해 보이는 행운과 과해 보이는 불행이 교차한다. 행운이나 불행은 애초에 정량이랄 것이 없으므로 과하지는 않다. 제로와 무한대 사이에 있는 사건들이 실은 더 많이 등장한다. 다만 병원을 경유해 이야기하고 병원을 경유해 읽으므로, 산업재해와 해배라기센터와 낙태와 가습기 살균제와 복지제도 같은 것들이 두드러질 뿐이다. 그런 사건들로써 직조되거나 사건들의 망을 직조하는 사랑과 미움과 희망과 절망 같은 것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이 담백하게 움직인다. (담백하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사람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므로 저들 중 누가 아팠는지, 누가 죽었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덕이기도 할 것이다.)

저런 감정들이 담백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작가가 담백하게 사랑하고 담백하게 절망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을 그렸다는 뜻이다. 담백한 사람들도 늘 담백할 수만은 없는 법이므로 이것은 단지 인물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야기의 문제기도 하다. 산재 피해자 이야기든 연인의 이야기든 어느 하나를 길고 자세하게 ― 한두 사람만이 주인공이 되도록 ― 쓰는 편이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어떤 문제를 알리거나 그에 대해 의견을 내는 데에도, 또한 소설적으로도 (그러니까, 감정을 일으키는 데에도) 말이다. 일단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만 그러할 것이므로 이 편이 좋다. 어느 하나만 떼어서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일이란 실제로는 많지 않은 탓이다.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세계는 소설 밖에서는 흔히 존재하지 않으므로 기회를 헛되이 쓰지 않는 게 좋을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담백하게 사랑하고 절망하는 사람 또한 흔치 않으므로, 그런 이들 수십 명이 가까이서 스쳐지나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책이 끝나고 퍼즐이 맞춰지면7 남는 것은 있음직한 작은 도시이기보다는 뿔뿔이 흩어져 있을 쉰 명의 사람들이거나 혹은 정세랑이라는 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애초에 이들은 대개 서로를 의식하지 않으므로, 서로를 알지 못하므로 ― 제 곁을 지나가는 이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살고 있으므로 ― 이 퍼즐이 구체적인 현실의 이야기이지는 않아도 괜찮다. 주인공이라는 이름이 걸맞는 뜨거운 사람들조차 아니므로, 훌륭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나 역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스쳐 지나는 수백 수천 혹은 수만의 사람들 사이에 결이 맞는 이가8 마흔아홉, 쉰 명쯤은 있으리라 믿어볼 수 있다면 조금 더 쉬울 것이다.

쌓은 악업 없이 이른 죽음이나 격렬한 통증을 겪는 이들이 자주 등장하므로, 어느 하나 애써 드라마틱하게 묘사하지 않지만 편히 읽히지도 않는다. 모두가 그런 가운데에서도 성실히 삶을 대하는 이들이므로, 희망으로 말하자면 무모하거나 과도하다. 이 모든 비극들은 쉽게 “가상의 소음”, “공격성이 제거된 소음”이 될 것이다.9 그러나 그것이, 단지 읽어 넘길 수 있는 ― 내 살에 발톱을 박고 매달리지는 않는 ― 이야기가 된다는 뜻만은 아니다. 공격성이 없으므로 차분히 들을 수 있는, 잊음으로써 충분히 몸을 담글 수 있는, 그럼으로써 잊지 않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기도 할 것이다. 금세 타올라 이내 사라지지 않는.

  1. 송수정, 이기윤, 권혜정, 조양선, 김성진, 최애선, 임대열, 장유라, 이환의, 유채원, 브리타 훈겐, 문우남.
  2. 한승조, 강한영, 김혁현, 배윤나, 이호.
  3. 이호, 문영린, 조희락, 김의진, 서진곤, 권나은, 홍우섭, 정지선, 오정빈, 김인지, 오수지, 박현지, 공운영, 스티브 코티앙, 김한나, 박이삭, 지현.
  4. 지현, 최대환, 양혜련.
  5. http://slowlyaspossible.net/memoranda/466/
  6. 양혜련, 남세훈, 이설아, 한규익, 윤창민, 황주리, 임찬복, 김시철, 이수경, 서연모, 이동열, 지연지, 하계범, 방승화, 정다운, 고백희, 소현재, 그리고 사람들.
  7. 작가의 말에 이런 문장들이 있다. “조각 수가 많은 퍼즐을 쏟아두고 오래오래 맞추고 싶습니다. […] 조각들을 쥐었을 때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사람 한사람은 미색밖에 띠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8. 다시 뒤져보면 찾을 수는 있겠지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므로 단번에 펼치지는 못할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정세랑은 (소설 속) 어느 유럽인 학자의 말로 “결이 맞는”이라는 표현을 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어느 작가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는 결이 맞는 것이라는 말.
  9. 날림으로 지은 아파트에서, 지은 죄 없이 겪어야 하는 층간 소음 문제로 편히 잠들지 못하는 김시철이 수면보조 앱을 써본다. “물소리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므로 “도시 백색 소음”을 택한다. “가상의 소음은 부드러웠다. 공격성이 제거된 소음이었다.” 306쪽.

2 thoughts on “담백한 비극들, 혹은 담백한 사람들

  1. 어제 자정이 조금 못 된 시각에 쓰기 시작했으므로, 여기서 “오늘”이란 실은 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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