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엽과 정세랑의 (혹은, 그리고 나타샤 케르마니의) 우주

#1

지난 일요일,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 소설집이 아닌 ― 소설을 찾다가 발견했다.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 2019). 지구를 넘어서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사랑 이야기이리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2007) 때문이었을 것이다, 딱히 비슷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첫 장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눈에 띈 것은 올리브니 릴리니 하는 이름들을 다루는 문장의 번역투였다. 다음 장인 「스펙트럼」에서 갑자기 희진이라는 이름이, 그리고 앞 장보다는 훨씬 한국어스러운 문장이 등장했고 그제야 알았다. “김초엽 소설”이라고만 적혀 있었지만 실은 각자 다른 시기, 다른 지면에 발표했던 글들을 묶은 소설집이었음을 말이다. 이어지는 「공생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감정의 물성」, 「관내분실」을 죽 읽었다. 버스가 올 시간이 되어 자리를 떠야 했으므로 마지막 단편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와 인아영의 해설, 그리고 작가의 말은 읽지 못했다. 이튿날 뜻하지 않게 도서관 근처를 지나게 되어 다시 들렀지만 닫힌 문을 흔들어 본 후에야 깨달았다. 일요일 다음 날은 월요일이고 월요일에는 도서관이 열지 않음을.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읽으면서는 플라톤을, 정확히는 그의 ‘동굴의 우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생각했다. 동굴 속에서 벽을 향해 묶인 채 횃불이 벽에 지우는 그림자만을 보며 ― 그것이 세상의 전부인줄로 알며 ― 살아오다 어느 날 동굴을 벗어나 실제의 사물들을, 무엇보다도 밝디 밝은 태양빛을 발견한 그가 진리를 즐기는 대신 동굴로 돌아갔던 것처럼,1 선조가 마련해 준 유토피아에 사는 어떤 순례자들은 차별이 만연하는 기존의 세상을 방문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곳에 남기를 택한다. 플라톤의 인물이 아마도 진리를 나누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그랬겠듯 최초의 순례자에게는 자신이 거했고 또한 건설했던 기존의 세계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그 세계에 두고 떠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후의 순례자들에게도 그랬다.

플라톤의 우화에는 언급되지 않는 사랑 ― 특정인에 대한 사랑 ― 이라는 장치가 중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을 생각한 것은 단지 더 나은 세계에 머무는 대신 어떤 제약 혹은 고통 한가운데로 돌아가는 구도의 유사성 때문은 아니다. 「순례자들…」은 다른 모든 고통을 감내하게 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역설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유토피아에 남은 이들은 돌아오지 않은 순례자들을 깎아내리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으며 또한 추켜세우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해마다 순례자들을 떠나보낸다. 단지 저 세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보고 오게 함으로써 이 세계의 아름다움을 깊이 알게 하려는 생각에서라면 이럴 수 없을 것이다. 타자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 타자들에 대한 책임감 ― 내가 벌인 일에 대한, 혹은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 다시 말해 삶에 대한 책임감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바깥 세상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이 또한 다시 한 번 바깥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일 테다.

플라톤은 오만한 사람이고 동굴을 벗어나 본 진리를 동굴 속에 있는 이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그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의무감 역시 오만한 발상이지만, 홀로 진리를 누리는 대신 동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2 것만으로도 그는 좋은 사람이었으리라고, 약하지만 좋은 사람이었으리라고 여긴다. 「순례자들…」의 릴리와 올리브, 데이지도 그랬을 것이다. 사랑하는 그 사람만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을, 어쩌면 미워할 수밖에 없을 사람들로 가득한 이 세계를 ―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으므로, 자기도 모른 채 동굴 속의 동료들을 사랑했던 플라톤을 혹은 그의 분신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사랑하는 이들을 포기할 줄 알았던, 그러나 포기하는 대신 묵묵히, 또한 끈질기에, 읽거나 기다렸던 「스펙트럼」의 희진이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안나도 그런 인물들이었다. 김초엽의 우주, 는 그런 곳인 모양이다. 함께 살기 위해 ― 보다 정확히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 요령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만지고 기다리는 이들의 세계.

#2

정세랑의 『지구에서 한아뿐』(난다, 2019)을 읽은 것은 그 이틀 뒤쯤, 그러니까 아마 어제쯤이다. 김초엽의 책을 마저 읽을까 어쩔까를 생각하며 서가를 살피다가 먼저 눈에 들어온 이 책을 집었다. 『피프티 피플』(창비, 2016)을 한두 해 전쯤 샀지만 아직 펼쳐보지 않았고 아마도 올해 초에 샀을 (산 기억이 없는데 책장에 있었다) 『덧니가 보고 싶어』(난다, 2019)를 겨우 스무 쪽 남짓 읽고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집을 나서느라 덮었다. 그래서 뽑아들었는데, 사랑 이야기이리라고는 생각했지만 또 온 우주가 배경일 줄은 몰랐지. 그러므로 제목은 ‘우주에서 한아뿐’이었어도 되었겠지만, 실은 그건 과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하나하나 특별하고 서로 다르지만 그래서 서로 너무 다르지만은 않으니까, 우주 쯤 되는 스케일에서라면 더더욱, 하나뿐이기는 어려울 테니까. 외계에서 온, 이제는 경민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이 존재는 성실했다. 지구를 꼼꼼히 살폈던 것 같다. 한아 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건 한아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 같다. (어젠지 그젠지 읽은 것이지만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으므로, ‘같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이야기 속에서는 과장 없는 말이다, ‘지구에서 한아뿐’.

어느 연인(들)의 이야기이므로, 김초엽의 이야기들에 비하면 사랑의 위대함 쯤 되는 것이 조금은 더 적극적으로 묘사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기존의 삶을 통째로 버리고 몇만 광년 거리를 여행해 왔다거나 하는 식의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 달뜬 사랑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는 인간은커녕 동물조차 아닌 광석에 가까운 생명체이며 남은 수명만도 8만 년쯤은 되므로, 지구에 와 있어도 여전히 고향 별과 교감할 수 있으므로, 실은 이런 건 그다지 극적이지 않다. 그저 제 자리에서 자신에게 다가온 존재를 받아들였을 뿐이지만 한아 쪽이 훨씬 더 극적이다. 수많은 ― 팔이 세 개이거나 날개가 있거나 광합성을 하거나 탄소대사를 하지 않는 ― 지성체들을 알고 있는 경민과는 달리 인간밖에는 알지 못하는, 알고 있던 유일한 가능성 너머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는 한아 쪽이 말이다.

한아가 탄소 배출을 줄이는 삶을 열정적으로 (이 ‘열정적으로’는 ‘호들갑스럽게’의 완곡한 표현이기보다는 ‘꾸준히’의 호들갑스런 표현이다) 추구해 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위해 남들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 온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 역시 강렬한 사랑의 산물은 아니다. 짐짓 자연스럽게, 녹색 광선을 뿜는 반은 광물이고 반은 기계인 존재에 대한 놀라움은 금세 잊고, 사랑스러운 존재를 사랑할 뿐이다. 어쩌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주변인물들이다. 한아의 절친한 친구 유리, 그의 남편(이름이 나왔던가?), 우연히 마주쳤을 뿐인 정규(정균이었을지도 모른다)나 주영. 이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잘 알지도 못하지만 한 인간이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경민을 믿기로 한다. (경민이 믿을만한, 혹은 사랑할 만한 존재임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경험을 가진 것은 유리 뿐이다.)

한아에 대한 경민의 감정, 경민에 대한 한아의 감정이 흔히들 아는 사랑으로 ― 그러니까 에로스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그려지는 것은 조금 의아하지만 그저 이상하지만은 않다.3 외계의 광물 생명체 경민이 경민이라는 인간 남성이어야 하는 이유, 이들의 관계가 결혼이라는 형태로 묶여야 하는 이유, 같은 것들을 정세랑과 경민과 한아는 분명히 제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에로스로 부를 만한 형태로 나타나는 어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에로스라 불릴 수밖에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껏 알아 온 유일한 가능성 너머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다면, 지금껏 알아 온 유일한 방식 너머의 사랑을 하는 것 역시 가능할 테다.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그려 보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정세랑의 우주는 그런 사랑을 상상하고 실험하는, 그리하여 실천할 수 있을 곳으로서의 세계, 라 해도 좋겠다. 지금 내 곁을 지나는 평범한 커플 역시 실은 어느 한 쪽에 외계인일지도 모르므로4 그것을 위해 당장 지구 바깥으로 나가거나 지구 바깥에서 온 존재를 만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

두 책을 읽은 사이의 어느 밤에, 영화 《이미테이션 걸Imitation Girl》(나타샤 케르마니 연출, 2017)을 보았다. 공교롭게도 이것 역시 이세계에서 온 존재가 등장하는 이야기다. 미국 어느 사막의 하늘에 갑자기 열린 이세계의 문에서 뚝 떨어진 검은 액체인지 무언지가 마침 앞에 놓여 있던 잡지 표지에 있던 인물로 변한다. 그렇게 인간의 외모를 얻었지만 인간의 언어나 지식은 갖지 못했다. 다만 생존에의 본능만이 약간 보일 뿐이다. 이 존재가 들개를 쫓아낸 후 버려진 음식을 먹고 토하는 동안, 혹은 어느 가게에 숨어 들어 샌드위치를 훔쳐 먹는 동안, 줄리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사진 속 인물은 에로영화를 촬영하거나5 마약에 취한다. 예의 존재가 말을 배우는 동안, 묻어 두었던 꿈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보기도 한다. 같은 외모를 하게 되었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찾아나가거나 스스로를 만들어 나간다.

단지 외양이 찍힌 평면 이미지만으로도 아마도 골격과 내장까지를 모두 갖춘 입체적인 실체로, 게다가 허벅지까지만 찍힌 이미지로도 발까지 다 갖춘 인간의 형체로 변했지만 그 인물의 기억이나 언어 같은 것은 복제하지 못했다. 언어는 금세 익히지만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영어보다 페르시아어를 먼저 익히는데, 안타깝게도 영어가 익숙한 사람이 페르시아어를 흉내내는 듯한 발음으로 시작한다. ‘이미테이션’이라는 존재, 10대거나 20대 초반쯤일 여성, 그의 성적인 노동, “선택의 여지 없이” 미국에서 살게 된 이란인들, 여성과 섹스하는 여성 등 흥미로운 소재들이 이어지지만 일관된 주제의식이 있는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이 의심의 상당 부분은 주인공의 페르시아어 발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시각적으로 장면을 구성하는 방식들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자신의 가게에 숨어 들어와 음식을 훔쳐 먹는 ‘이미테이션 걸’을 발견한 사기의 태도다. 신발조차 없이 슬립만 걸친 도둑인 그를,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지 않는 그를 경찰이든 어디든 신고하거나 내쫓는 대신, 사기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달리 (특히 성적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씻을 곳과 잘 곳을 내어 줄 뿐이다. 미국에서 만난 미국 백인스럽게 생긴 상대에게 아무렇지 않게 페르시아어를 사용한다. 이튿날 그를 발견한 사기의 어머니 또한 경찰에 데려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한 번 물을 뿐 괜찮다는 사기의 말에 그대로 집에서 돌본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한다. (여기서 이들이 경찰에 대해 갖는 불신이나 불안을 읽어도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이쯤 되어서는 그가 언어를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만, 역시 거침없는 페르시아어다.

‘신비한 아름다운 소녀’라는 설정은 여전히 의심의 여지를 남겨두지만, 이 무심한 환대 ― 의심 없는, 두려움 없는, 문턱 없는, 순전한 받아들임 ― 만큼은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많은 것을 말해주거나 혹은 생각하게 하는, 이런저런 이유로 좋은 영화라고 할 만한, 그런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동안은 남아 맴돌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이 영화 스스로는 설명할 필요 없다고 여기는 듯한 이 환대가.

  1. 몇 년 전 어느 날 문득 이 말을 떠올렸다. 정말로 그냥 떠올린 것인지, 어디선가 읽었던 것이 문득 떠오른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후자라면 십중팔구 한나 아렌트가, 혹은 그를 읽은 누군가가 쓴 문장이었을 것이다.
  2. 돌아간 후에 어떻게 되었던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3. 이것은 내가 어떤 매력이 성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길을 알지 못한다는 데에서 이어지는 생각이다.
  4. 한아가 하는 생각인데, 책은 도서관에 있고 나는 도서관에 없으므로 정확한 인용은 아니다.
  5. 대충 그래 보이는 영상을 찍는데, 티브이에 방송되는 장면이 있는 걸 보면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표지에 실렸던 잡지의 제목은 창녀의 속어 쯤 되는 브라스bras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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