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스크린의 이미지들

평소였다면 보지 않았을 공연이다. 보고 나서 하는 평가의 말이 아니라, 예매하면서 했던 생각이다. 서사가 없는 공연, 게다가 옷에 물감이 묻을 수도 있다는 안내(그냥 물감이 튀는 거면 상관 없지만 관객이 무대에 오르거나 배우가 객석에 들어와 말을 거는 것이라면 곤란하다), 페페 더 프로그를 비롯한 키치한 이미지들. 주로 피하는 요소들이지만 우연히 때가 맞아 보게 되었다. 한참을 쉬는 날 없이 바쁘게 지내다 한숨 돌린 시점에 포스터를 보았다는 뜻이다. 팔로하고 있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서였다. 이 공연의 홍보를 위한 계정이지만 영상 작업 프리뷰 쯤 되는 것으로 여기고 팔로했던 계정이다. 무얼 하며 쉬어볼까 생각하던 참에 포스터를 보았으므로, 보기로 했다.

〈그린스크린 글리치〉(신희정 연출, 서울: 연희예술극장, 2020.01.17-18.)는 쉽고 명료한 편이다. 여성의 신체 이미지가 사회에서 유통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의식1, 그리고 크로마키 기법을 활용한 그것 ― 그 방식과 그에 대한 문제 의식,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대안 모두 ― 의 시각화2 세 명의 퍼포머가 무대에 올라 스스로에게 혹은 서로에게 녹색 물감을 묻힌다.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촬영해 녹색을 지운 ― 그러니까 그들의 몸 일부 혹은 그들이 물감 묻은 몸으로 닿은 무대의 일부가 지워진, 대신 그 자리를 영상 편집 프로그램에서 투명한 부분을 표시하는 격자 무늬가 채운 ― 영상이 무대 배경에 투사된다.

무대 안쪽 천장에서 관객의 발치까지 길게 이어진 천이 무대의 배경과 바닥을 이룬다. 그 뒤에서 페페 복장을 한 두 퍼포머가 등장한다. 무대에 놓아둔 녹색 물감통을 들어 ― 어떤 영화들 같은 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근을 휘두르는’ 포즈로 ― 여기저기로 뿌리고 그 위를 뒹군다. 녹색 옷을 입고 있지만 모든 부위가 다 녹색은 아니므로, 또한 옷 위에 이런저런 반짝이는 것을 붙여 두었으므로, 그들의 몸도 조금씩 녹색으로 물든다. 아마 그 다음으로 배경막에 영상이 투사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분홍 유니콘과 순서를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실시간으로 생김새를 변경해 주는 스마트폰 앱 화면 같은 것들에서 변형되는, 특정 부위가 커지거나 작아지는, 혹은 수염이 덧그려지는, 몸이 비친다. 다음으로 분홍색 유니콘 복장을 한 퍼포머가 등장한다. 거울(이라고는 해도 유리가 아닌, 휘어짐으로써 상을 왜곡하는)을 껴안거나 핥거나 한다. 잠깐 암전되었었던가, 커다란 봉지에 담은 초록 물감(액체도 있고 가루도 있었던 것 같다)을 들고 다시 등장한 페페들이 유니콘의 몸에 물감을 바른다. 그 사이 언젠가 유니콘은 유니콘 옷을 벗었다. 티셔츠와 속옷을 입고 있다. 몸의 일부가 드러나 있다.

러시아어 같은 소리를 내는 목소리, 무언가를 핥거나 빠는 소리가 재생된다. 유니콘(편의상 계속 이렇게 부르기로 하자)은 도망친다. 신음소리를 낸다. 여러가지 이유로 종종 그러하듯 괴로움의 표현인지 쾌락의 표현인지는 불분명할지도 모른다. 페페는 그를 쫓아 다니며 몸에 물감을 바른다. 끌어안거나 몸 여기저기를 만진다. 다정한 손길은 아니다. 어느 페페는 카메라를 들고와 그 모습을 촬영한다. (촬영 중에도 계속 쫓고 쫓기고 있었을까?) 녹색 대신, 그러니까 녹색 옷이나 물감 대신, 투명 영역을 표시하는 격자 무늬가 보인다. 표면은 고르지 않으므로 영상은 고르지 않다. 부러 화질을 떨어뜨려 계단현상을 일으킨 듯한 부분도 보인다. 카메라와 프로젝터를 거쳐 벽에 투사된 영상이 다시 카메라 속으로 들어가므로, 벽에는 조금씩 작아지고 열화되는 화면이 무한히 반복된다. (나는 여전히 순서가 헷갈린다.) 페페 하나가 창을 시작한다. 이미지를 매개로 한 성적 폭력들에 대한 몇 마디 말들 뒤에 “어차피 죽을 거라면 죽어나게 놀아보자, 놀아나듯 죽어보자” 하는 외침.

어려워지는 것은 여기서부터다. 놀지도 죽지도 않는 탓이다. 보이거나 들리는 것에 있어, 극적인 변화는 없다. 끝은 굉장히 흔한, 여전히 키치한, 또한 의심스러운 장면이다. 티라노 사우르스 쯤 되는 공룡 등에 탄 모습을 만들어주는 옷을 입은 사람이 등장한다. 나는 무대에 오른 이들 중 그를 유일한 남성으로 본다. 페페나 유니콘과 마찬가지로 조악한 의상이므로 딱히 위압감을 주지는 않는다. 허리춤부터 솟아오르는 공룡의 머리, 그 앞으로 쥐어든 고무호스는 흔한 남근의 이미지다. 호스에서 물이 나온다. 흔한 정화의 이미지. 물줄기 아래에 선 유니콘은 샴푸 같은 것을 써 가며 몸을 씻는다. 깨끗하게 씻기지는 않는다. (적어도 “죽어나게 놀아보자, 놀아나듯 죽어보자”에 이어지는 무언가를 기대한 이에게는) 다소 의심스럽고 급작스러운 엔딩이다. 페페들과 유니콘과 공룡이 객석을 향해 인사한다.

우리의 몸, 혹은 여성의 몸이 “지울수록 더 가시적이게 되는 더럽게 빠진 크로마키”라면, “지워지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보이지도 않는” 것이라면, 이 편이 나았을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몸, 순전한 몸을 지어낼 수는 없으므로. 몸은 오염에 맥없이 죽어버리지만은 않으므로. 고통의 전적인 제거는 종종 쾌락의 전적인 제거를 수반하므로. ‘지울수록 드러나는’ 것이 그저 지워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점점 거세지는 까닭에서만은 아닐 테다. 애초에 완전히 지워지지도 지워짐 없이 드러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일 테다. 지극히 조악한 형태 속에도, 지극히 의심스러운 자리에도 무언가가 있다. 다른 곳으로 가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달라지기는 할 것이다. (언제였는지는 역시나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장면을 이런 맥락에서 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조명이 붉어진다. 초록색 물감이 검어진다.)

죽어나게 놀아보고 놀아나듯 죽어보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좋을 것이다.

  1. “현대인은 인증샷과 셀카로 자신의 아름다움과 부, 건강함을 과시하며, 블랙박스, cctv, 구글어스 등으로 자신의 삶을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보여지고 보여주는 관계가 늘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과시할 아름다움, 부, 건강함이 없는 ‘비정상적’인 사람은 스포트라이트가 부담스러울 것이며, 시선의 대상이 되는 일은 보호를 넘어 통제, 감시, 관리의 대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포트라이트의 안에서도, 밖에서도 있을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과 다음 모두 전시 홍보물에서 인용.
  2. “이러한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한다. 현대인이 크로마키로 조작되는 그린스크린 위에서 산다면, ‘비정상적’인 우리의 몸에는 초록색 낙인이 묻어있다. ‘그린스크린 글리치’에서 우리의 몸은 지울수록 더 가시적이게 되는 더럽게 빠진 크로마키이다. 이 영상 퍼포먼스는 우리 몸을 지워지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보이지도 않는 상태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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