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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젤리비 부인’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 『황폐한 집 Bleak House』의 주인공이다. 소설 속 젤리비 부인은 가족을 내버려두고 아프리카 부족을 돌보는 일에 몰두한다. 내 이웃이나 가까운 가족의 일보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용어는 ‘망원경 자선’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조영주는 여기에 ‘돋보기’를 덧대어 예술프로젝트의 이름으로 ‘아줌마들’과 진행한 지난 작업과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한다 작가는 예술가라는 사회적 직분, 동시에 일상에서의 다양하고 과중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예술가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되물어 왔다.1
『황폐한 집』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그래서 젤리비 부인이라는 말은 알지 못하지만, 망원경 자선이라는 말, 그 말이 가리키는 행위, 그 말에 담겨 있는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조영주가 《젤리비 부인의 돋보기 Mrs. Jellyby’s magnifying glass》(서울: 플레이스막 레이저 2019.09.18-10.06.)라는 제목을 통해 문제 삼는 것은 아마도 네 번째 것, 그러니까 그 판단이 작용하는 방식, 다시 말해 “가족을 내버려두고” 같은 말로써 가족을 돌보는 것이 1차적인 의무라는 전제를 까는 일이다. 자선이라 불리는 행위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대개는 어떤 여성을, 비난하기 위해 끌어오는 수사들이다. ‘가족을 내버려두고’ 일하는 많은 남성들이, 심지어 급료를 받아가며, 비슷한 종류의 일을 할 때에는 전혀 발화되지 않는 수사들이다. 결혼이나 출산이라는 행위에 당연하다는 듯 따라붙는 요구들 앞에서 얼마간 뒤로 밀리게 되는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망원경을 내려 놓으라는 말을 순순한 척 받앋들이고 돋보기를 들면 실은, 방기한 의무가 아니라 지고 있는 의무들, 그를 짓누르고 있는 의무들이 드러난다. 낯선 이야기들은 아니다. 출산과 육아로 보낸 ― 해오던 일, 그러니까 미술가로서의 일로부터 떨어져 보낸 ― 시간의 이야기들은 “계획에 없던 피곤함을 견뎌라”라든가 “당신은 나를 잊었는가?” 같은 말들로 전해진다 혹은 이런 말 ― “내가 말을 거의 잃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이 나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리라 믿었다. 말하지 못하는 게 어떤 건지를 배웠다.”2 물론 ― 이라는 단서를 달아야 할까 ― 이 말들은 그저 말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말로 분류하자면 이 문장들은 이야기를 갖추지 못한 메모들, 혹은 숫제 자기도 모르게 뱉는 탄식이나 한숨에 가깝다.
가장 많은 문장들을 비추는 것은 영상 작업 〈불완전한 생활〉이다. 갖가지 배경들 위로 수많은 문장들이 흐른다 (메모한 것을 잃어버려 옮길 수는 없지만) 앞의 것과 같은 말에서부터 아이를 묘사하는 듯한 문장, 혹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까지가 섞여 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육아에 전념한 시간 동안 했던 생각들 혹은 중얼거렸던 말들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주장이나 서사를 이루지는 않는다. 배경 역시 마찬가지다. 바다, 도시의 곳곳, 혹은 수족관 속 ― 실제로 방문한 곳이거나 문장들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장면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사진들. 출산이나 육아 같은 키워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쩌면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을지도 모를 이 영상은 전시장 한가운데에서 다만, 그간의 그가 일종의 파편이었음을, 생각도 경험도 질서정연하게 쌓을 수 없을 상태였음을 엿보게 한다.
당신은 나를 잊었는가 ― 스스로에게 묻는 것인지, 미술계라는 곳을 향해 일갈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관객들에게 묻는 것인지, 이 ‘나’가 작가 자신인지 혹은 읽고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이 문장은 하얀 석고 더미 위에 적혀 있다. 석고 가루를 쌓아 만든 작은 둔덕과 주물러 굳힌 듯한 몇 개의 오브제가 깔려 있는 하얀 방에서다. 벽에는 (역시 메모를 잃어버려 여기 옮기지 못하는) 몇 개의 다른 문장들도 작게 붙어 있다. 이 덩어리들은 옆방에 걸린 〈풀 타임-더블〉(혼합매체(종이 롤, 피그먼트 프린트, 나무), 50×100cm(가변크기), 2019),〈나의 몸을 쓰는 것〉(단채널 영상(9분 57초) 컬러, 사운드, 2019)과 이어져 다듬어지지 않은, 그러나 굳은, 어떤 몸이 된다.
전자는 긴 종이에 길게 그린 무보舞譜, 후자는 그것을 몸으로 옮긴 것을 촬영한 영상이다. 내게는 무보를 읽을 능력이 없고 (이 무보의 기호들이 작가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인지 기존 무보법에서 쓰이고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영상으로 보아도 아주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아이를 달래거나 옷가지를 빠는 동작인 듯해 보이는 것이 이따금 있다. 출산 이후의 육아일지를 토대로 작성한 동작과 곡이다. 작가 자신이 수행한 바를 옮겨 쓴 곡에 맞추어 작가 자신이 수행한 바를 옮겨 쓴 동작을 작가 자신이 해 보인다.3 이를테면 재조립이다.
미술가로서의 스스로에게서 자리를 찾지 못한 어떤 사건들, 혹은 반대로 안팎에서 들러붙은 사건들로 인해 스스로를 잃어버린 미술가의 재조립. 흩어진 이미지들과 문장들, 그 아래에서 반복되는 (가사노동의) 몸짓들을 질서 없이 ― 혹은 기존의 것과는 다른 어떤 질서로 ― 재조립함으로써 하나의 몸이 등장한다. 육아가 얼마나 고된 것인지, 그것의 무게도 의미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에게 전가하고는 그의 존재를 잊는 이 사회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차근차근 말하는 대신, 갑작스레 하나의 몸이 떠오른다. 망원경을 운운하던 이들 스스로 또한 망원경을 통해서만 세계를 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망원경이 풍경을 끌어당기며 형성한 광활한 사각死角에 어느새, 괴물 같은 몸이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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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가 얼마나 고된 것인지, 그것의 무게도 의미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누군가에게 전가하고는 그의 존재를 잊는 이 사회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차근차근 말하는 대신”이라고 쓴 태도에 대해 더 생각하거나 말해야 할 바가 있을 것이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모르거나 무시하는 사실이지만 이미 말해진 것이 많기 때문일 수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어떤 정조가 있기 때문일 수도, 혹은 다만 (이 작가에게) 미술이란 이런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테다. 각각이 다른 의미와 효과를 가질 테다.
실은 어차피 생각하지 않았을 것에 갖다 대는 핑계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대신’ 다른 것을 생각했다. 이 전시가 열리기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의 어느 공연이 화제가 되었다. 단화를 신고 바지 정장을 입은 여성 가수들과 하이힐을 신고 핫팬츠를 입은 남성 댄서들이 함께한, 아이돌그룹 AOA의 〈너나 해(Egoistic)〉 커버 무대.4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난 나무야’라는 가사와 함께 원곡과는 다른 분위기로 꾸민 것이었다.5 방송에서(특히나 대중가요 무대에서)는 보기 힘든 드랙drag(정확히는 보깅voguing), 아무리 적어도 성별 반전,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가사가 화제의 중심에 놓였다. (한쪽에서는 보깅 댄서들이 여성성 혹은 그 코드를 희화화하거나 강화한다고들 했고) 어떤 이들은 몸을 드러내지 않는 옷과 움직임에 불편함 없는 신발에서 주체성이나 능동성 혹은 강함 같은 것들을 읽었다.
종종 스스로도 하는 말 ― 이 경우에는 ‘○○이 성적 대상화를 차단한다’는 식의 말 ― 도 여러번 반복해 듣다 보면 낯설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전시가 끝나고 며칠 되지 않은, 그러니까 전시를 보고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에는 다른 것도 보았다. 몸을 가리는 옷을 입고 쟁반을 들고 찍은 어느 식당의 광고 사진. 20대 초반의 여성 가수인 그는 어느 술 광고에서 짧은 옷을 입고 냉장고(로 보이는 문이 있는 어떤 방)에서 나와 술을 건네는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꽤나 다른 모습으로 찍은 이번의 광고 사진을 두고 어떤 이는 “섹스어필 없이” “유니폼을 입고 활짝 웃는”, “건강하게 쓰이는” 그가 좋다고 했다.
그때까지 하고 있던 생각은, ‘대상화’ 없이는 어떤 관계맺음도 불가능하다는 생각, 특정한 양식의 ‘성적 대상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대상화 없는’ 상태를 상상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 애초에 우리에게 ‘성’ 없이 매력을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있기는 한가 하는 질문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던 중에 〈나의 몸을 쓰는 것〉의 이미지 ― 팔다리가 드러나는 치마를 입고 춤추는, 대부분의 시간동안 얼굴은 비치지 않고 목 아래의 전신 혹은 일부 부위만이 보이는 ― 를 보았으므로, “말하는 대신”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 몸을 재현하는 방식과 성적 대상화라는 개념 같은 것들을 생각했다. 출산과 육아라는 주제를 빼 놓고 본다면 이 이미지는 이제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비판 받아 오고 있는, 여성의 개성 혹은 인격 ― 얼굴 ― 을 지우는, 속수무책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어떤 깨달음과 결단 속에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상황이긴 하지만 이 역시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했다는 비판과 대결해야 한다.
물론 그는 아이돌도 모델도 아니므로, 이 영상은 성적 대상의 창출 혹은 성적 매력의 극대화를 과제로 삼은 것이 아니므로, 피부나 몸매나 동세를 짚으며 다른 점들을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름의 경계선, 미와 추의 경계선은 매우 희미하거나 혹은 애초에 선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이 몸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말하는 것은 이 몸이 얼마나 매력 없는지를 말하는 것보다 결코 어렵지 않다. “괴물 같은 몸”이라고 썼지만 이건 나쁘게 말하자면 그저 시쳇말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고 좋게 말해도 온갖 의미 부여 후에나 그렇게 되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지만) 적어도 시각적으로, 혹은 청각적으로, 상상을 더해 촉각적으로도, 그리고 아마 많은 경우 의미상으로도, 이 몸은 괴물과는 거리가 멀다. 평범하게 매력적인 평범한 몸이 흔히 그렇듯 얼굴 없이 춤추고 있다. 많은 경우 이럴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럴 것이다. 어떤 몸 뒤에 숨겨진 괴물의 형상을 읽는 법을 알지 못해서, 몸의 힘을 느끼는 법을 알지 못해서, 익숙한 독법대로만 읽고 내가 읽지 못한 것의 부재를 늘어 놓는 것 말이다.
매력이 문제가 될 때면 문제는 아마 조금은 더 복잡해진다. (당연하게도, 매력이 문제가 되는 것은 매력을 판매하는 것이 업인 경우에 그치지 않는다.) 성적 매력으로 흔히 명명되는 ― 달리 말하자면 흔히 섹스어필이라 불리는 행위들을 통해 부각되는 무언가를 다 빼거나 가린 후에는 무엇이 남을까. 당당함, 강함, 똑똑함, 활달함, 이런 것들을 읊기는 물론 어렵지 않다. 다른 쪽에 있어 보이는 우수憂愁나 어둠 같을 것들을 덧붙이는 것 역시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것들은 성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오래도록, 어쩌면 영원히, 이 목록에 더해지지 못할 갖가지 것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더더욱 그렇다.
성적인 것은 ‘만지고 싶은’, ‘안고 싶은’, 혹은 ‘범하고 싶은’ 형태로만 떠오르지는 않는다. 성적이라는 말을 붙이든 안 붙이든 매력 역시 마찬가지다. 성은 다양한 형태의 동일시나 선망의 근저에도 놓여 있다. 물론 모든 욕망 혹은 삶의 에너지 자체가 성적인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아는 한, 널리 공유되고 있는 이해와 언어의 체계 속에서 그렇다는 것, 나로서는 그 바깥에서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건강하게”든 혹은 ‘악랄하게’든 (일부러 ‘병적으로’와 같은 말은 쓰지 않았다) “쓰이는” 사람들에 대해,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대해 말할 때라면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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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 시선, 그리고 그에 기반한 성적 대상화, 나아가 상상의 여지가 남지 않을 정도의 ― 이를테면 죽여버리는 정도의6 ― 전적인 대상화를 비판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고 유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그 비판이 어떤 원형으로서의 저것(들)을 향하는 것과 그 원형을 공유한다는 혐의가 있는 개개의 실천들을 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 원형의 흔적을 제거하기 위해 ― 배운 바 없으므로 구별해내지 못하는 ― 다른 많은 것을 잃는 것 같다.
- 고윤정, 전시 서문, 전시장 배포판. 아래에 링크한 전시 정보 페이지의 글과 일치하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다. ↩
- “나를 잊어버렸는가?”는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만큼 어려운 일에 관하여〉(혼합 매체(석고, 레진, 종이), 300×400×270cm(가변 크기), 2019). 나머지는 〈불완전한 생활〉(6채널 영상(각 1-3분), 컬러, 사운드, 2019). ↩
- 안무와 음악, 촬영·편집은 각각 송주원, 김하림, 이선영. ↩
- Mnet, 《퀸덤》, 2019.09.12. 방영분. ↩
- 마마무가 부른 원곡은 김도훈·박우상 작사작곡. 이 무대에는 AOA 멤버 지민이 쓴 랩이 더해졌다. ↩
- 물리적 구속이나 경제적 구속, 심지어는 심리적 구속만으로도 상상의 여지는 쉽게 ― 또한 실제로 ― 사라지곤 한다. 그것들을 적지 않는 것은 죽이지만 않으면 괜찮아서가 아니라 거의가 사라지고도 조금은 남을 것, 혹은 내게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있을 것을 함부로 없다고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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